늦깎이 대학생…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그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나는 인도로.. 아니 어디로든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2004년 3월… 나는 아무런 절실함도 미련도 남지 않는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단 며칠 만에 인도와 네팔로 혼자 3개월간에 배낭여행을 떠났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삶을 한번 살아보자..!!! 진정한 나를 찾아 떠난 여행…
아는 사람, 연락할 곳 하나 없는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어 나 자신을 찾고 싶었다.
인도배낭여행 중에 다른 프랑스 배낭여행자로부터 인도서부 캘커타에 있는,
마더 테레사수녀님의 “마더하우스”에서 단 하루만 자원봉사를 해도, 준다는
“기적의 메달”에 관한 얘기를 듣고, 나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신 어머니께
마더하우스에 기적의 메달을 드리고 싶은 마음에 내가 처음 도착한 인도의
수도 델리에서 수백킬로미터 떨어진 캘커타로 기차를 타고 마더하우스를
찾아갔다.
침대칸 기차를 타고, 꼬박 하루하고도, 기차가 연착되어 반나절이 더 걸려서
도착한 캘커타 하우라역에서 프리페이드(선불제) 택시를 타고, 마더하우스
수도원 본부로 가서 봉사자 등록을 하고, 자원봉사를 할 일터를 배정 받았다.
내가 테레사 수녀님의 마더하우스에서 처음으로 자원봉사를 하게 된 곳은
"임종을 기다리는 사람들에 집 – 칼리가트"였다…
칼리가트는 마더하우스의 여러 자원봉사 시설들 중에서도 가장 상태가 좋지않은
나이가 아주 많은 노인들이나 회복이 불가능한 병에 걸린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동조차 하지 못하는 중환자들만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죽음이란 것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칼리가트에는 나 이외에도 여러명의 한국인 자원봉사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나처럼
일주일에서 보름정도에 단기간에 자원봉사자들부터 비자가 만료되면 출국을 했다가
다시 재입국해서 비자기간을 연장하여, 봉사를 계속하는 사람. 아예 근처에 집을 얻어서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장기봉사자들 대부분은 오전과
오후를 모두 자원봉사를 하는데 보냈다.
나는 기껏해야 열흘이었지만, 그들을 보면서 봉사를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자원봉사나 중환자 수발에 별다른 사전지식이 없었던 나는 다른 자원봉사자를 따라다니며,
보조를 하거나 청소 등.. 내 나름대로 일을 찾아서 하다가, 독일에서 온 다른 전문봉사자의
권유로 마사지 오일로 굳어있는 환자들의 몸을 마사지해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쉬고 있는 환자들에게 다가가 직접 환자들에 몸을 어루만지며, 그들의 몸을 구석구석
마사지 해주었다. 의외로 환자들이 내가 해주는 마사지를 좋아하게 되었고, 많은 환자들이
원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내가 돌봐주던 환자 중에 한 명이 눈 앞에서 세상을 떠났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마사지 해주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움직이거나
의사표현은 할 수 없어도, 살아있는 사람이었기에 몸에서는 따듯한 체온이
느껴졌었는데, 이젠 더 이상 그의 온기를 느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의 죽음을 지켜보고 나서, 자원봉사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하고 있는 봉사방법이 맞는가?? 내가 도움이 되고 있는가..?? 내가 오히려,
이들을 귀찮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들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중환자들에 대소변 수발이나 청소, 엄청난 양의 빨래.. 등에 힘든 일들보다,
내가 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줘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이 몇 배로 더
힘들게 느껴졌다.
그렇게 자원봉사와 배낭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어머니께 마더하우스에
“기적의 메달”을 전해드리고,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왔지만,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꼭 필요한 도움을 줄 수가 있을까..??”
하는 마더하우스에서 갖게 되었던 의문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결국, 나는 오랜 망설임 끝에 뒤늦은(?)나이에 대구 카톨릭 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학사편입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다…
처음에는 과연, 내가 나보다 어린(?)학생들 속에서 학교공부를 따라갈 수가 있을까..??
지금 시작하면, 벌써 늦어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수없이 많은 걱정들을 했었는데,
막상 공부를 시작하고 보니, 사회복지라는 학문자체가 생활에 일부였다. 오히려,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불합리한 점이나 개선되었으면 했던 경험들이 내겐 도움이
되고 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라”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장 원하고 있는 것, 가장 하고 싶은 것을 시작하라는 “인생수업”의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말처럼,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은 바로 지금 하지 않으면,
내 생애에서는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나름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살아왔다면 내가 일을
할 수 있는 남은 30년 정도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고 싶다…
대구 카톨릭 대학교 사회복지학과 - 채 수헌
첫댓글 대구 대안학교 수강생 채 수헌입니다. 저는 섬활이나 광활, 농활, 순례단 출신도 아니고, 요즘 다른 선생님들께서도 정보원 카페에 글을 올리기가 상당히 조심스럽고, 어렵다고들 하시더군요... 저도 이 글을 얼마전에 올렸다가 삭제했었습니다. 저는 사진과 글쓰기가 취미인데, 다시 용기(?)내어 올려봅니다... 앞으로도 일상적인 얘기들부터 제 생각까지 자주 올릴께요~
그렇군요. 글을 읽으면서 이전에 읽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편집을 하셨는지 처음보다 더 쉽게 읽혀지는 것 같아요. 저도 글을 올린 후엔, 볼 때마다 수정하게 되어 나중엔 전혀 다른 글이 될 때도 있더라구요. 그래서 카페에 올리는 순간, 후회하고 자책하고, "아~ 왜 쓸데없이 글을 써서 신경쓰는거야~ 소리칠 때도 있고... 우습지요?'
공감합니다~ㅎㅎㅎ
이렇게 자기의 글을 올리면 그것을 보고 그 사람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것 같아 참 좋습니다. 전에 읽었다가 없어져 아쉬웠는데...다시 올리니 다른 분들도 보고 좋을것 같네요. 지지와 격려...어제 모임 장소 고마웠습니다.^&^
'글 삭제'의 원조는 아마 찾기 힘들 것 같아요. 글쓰는 사람 대부분이 써놓고 후회하고, 다른 사람들이 어찌 생각할까 부끄럽고, 결국 무참히 깨진 심정으로 삭제를 하기도 하지요. 이 과정이 바로 언어 훈련이 아닐런지요. 글은 완성된 '글'자체가 있기까지, 글을 쓰는 과정도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도전하시는 모습이 참 보기좋아요. 지지하고 격려해요.
감사합니다~
용기와 그 마음이 부럽습니다.
그 용기와 마음을 나눌 수 있어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