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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安東權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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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自由게시마당 스크랩 안동권씨 부정공파 이야기
에메랄드 추천 0 조회 35 12.06.11 14: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안동권씨 부정공파종택(安東權氏 副正公派宗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
건 축 주 :  권익창(權益昌, 1562~1645)
건축시기 :  16세기 말~17세기 초
소 유 자 :  권기승

건축 이야기
멀리에서도 보일 정도로 커다란 글씨로 붙어 있는 ‘부정공세로’라는 편액의 글씨는 가까이 갈수록 그 획 하나하나까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부정공세로’의 바깥채는 축대 위에 올라서 있었고, 동향을 하고 있는 바깥 쪽 마루 끝에는 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집 옆으로 돌아들며 사당으로 통하는 소로가 열려 있다. 사당으로 통하는 길에는 대나무가 심겨져 있었는데, 집 뒤쪽으로 경사면을 타고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부정공세로’의 지붕이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 왔다.

지붕의 망와마다에는 ‘수(水)’라는 글자가 아로새겨져 있었고, 지붕의 기와들은 파랗게 돌이끼를 덮어쓰고 있었다. 사당의 지붕들도 돌이끼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호양 선생, 늪실마을 안동권문의 입향조 권익창은 사당 우측의 산언덕에 누워 있다. 나지막한 산이었지만 그곳에 오르자 늪실마을의 모든 것이 한 눈에 들어왔다.

늪실마을의 좁직한 들은 대부분 논으로 되어 있었다. 산들 사이의 좁직한 분지는 긴 고구마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 한 끝은 마을 입구 역할을 하는 고갯마루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동쪽 방향으로 뻗어나가 다른 산굽이 끝으로 잦아들고 있었다.

좌우의 산들은 다 나지막하였지만, 산 높이에 비해서는 가파른 기슭을 가지고 있었고, 소나무들이 잘 가꾸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늪실마을에서는 아직 나무를 때는지 소나무들은 아래가지가 다 떼어져 마치 키 큰 여인네들이 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늘씬한 몸체를 자랑하는 듯하였다.

건축 구성
口자 건물이다. 앞에는 사랑채가 나와 있고, 사랑채의 동편으로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열려 있다. 중문의 동쪽에는 안채인 口자 건물의 동쪽을 막고 서 있는 건물의 끝에 붙은 1칸의 방이다. 안마당은 아주 좁다. 얼마 전에 수리를 하여 화강석으로 뜰을 단장하였다. 사당은 집 뒤쪽으로 올라서 있다.

현판
부정공세려(副正公世廬)
파조인 부정공의 종택임을 의미한다.
승국간성영침처......(勝國干城永寢處......)
종택 좌측 재사(訥谷齋)에 주련이 있다
부정공세려중수기(副正公世廬重修記)
권오훈(權五焄)이 지었다.

 

 

 

문중 이야기
- 부정공파(副正公派) 종가
“우리 ‘안동권씨’는 종가가 없어요.”
태사묘에서 만난 안동권씨 노인들 중의 한 분이 말하였다.

“종파는 있지만 종가는 없어요. 안동 인근에서 그래도 뚜렷하게 종가라고 할 수 있는 곳은 부정공파(副正公派) 종가이지요. 부정공파는 파 종손이 있어요. 종손은 부산에 있어요. 종가는 와룡에 있고, 종손만 부산에 가 있지요.”

와룡에서 도산서원 나가는 길 옆. 가야동 부정공파종택을 알리는 키 낮은 표석이 숨은 듯 서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늪실. 지금은 길이 더 뻗어 와룡에서 정산 나가는 2차선 도로와 만나게 되어 있다.

“다른 파의 경우에는 지손 집에서 큰집 행사하는 사례가 많으나 저희들은 종가는 제대로 유지를 하여 왔습니다. 그렇지만 아이구, 보잘것이 없습니다.”
늪실에서 만난 권오수가 말하였다.

“자손의 숫자는 안동권씨 15파 중에서 셋째로 많을 겁니다. 추밀공파, 복야공파가 많고, 그 다음이 우리 파지요.”
권오수는 엄숙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부정공파는 파조 이후 거의 적자로 종통을 유지하여 왔습니다. 35대에 와서 현 종손의 윗대가 백부에게로 양자를 오셨고 …… 그 윗대에서도 한 번 양자를 하신 적이 있지만 …… 거의 적자로 이어 내려온 셈이지요. 현 종손은 부산에 가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현 종손은 1948년생이고, 이름은 기승이라고 하지요.”

안동 권문은 우리나라에서 진행되어 나온 가문의 역사 속에서는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가문이라고 하겠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족보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이 가문에서 발행한 것이라는 점을 통해서 우리는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성화보(成化譜)』라고 불리어지는 이것은 우리 민족의 중요한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권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는 『성화보(成化譜)』의 「서문」에서는 안동권씨의 초기 역사가 다음과 같이 말하여진다.

“행(幸)이 인행(仁行)을 생하였으니 벼슬이 낭중(郞中)에 이르렀고, 인행이 책(冊)을 생하였으니, 책이 스스로 구하여 본읍의 향리가 되었다. 권씨가 책이 향리로 된 후로부터 칠세를 미미부진(微微不振)하다가 수평(守平:樞密公)에 이르러 부흥하고 자손이 미덕을 계승하여 문정공(文正公:菊齋)에 이르러서 비로소 크게 현달하였으며, 수홍(守洪:僕射公)의 후손 문탄공(文坦公:一齋)이 또다시 현달하여서 권씨가 드디어 2대족으로 나누어져 …….”

이 구절을 통하여 보면 3대 권책의 시기로부터 10대 때까지 ‘안동 권문’은 안동에 세거하며 대대로 향리직을 세습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부정공파 세보』는 권책의 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적어두고 있다.

“호장정조(戶長正朝)이다. 고려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의 향리직을 설치하였다. 당대(堂大)를 호장(戶長)이라고 칭하였고, 등대(等大)를 부호장(副戶長)이라고 칭하였고, 낭중(郎中)을 호장동정(戶長同正)이라고 칭하였고, 원외랑(院外郞)을 부정(副正)이라고 칭하였다. 공은 스스로 호장 되기를 바래서 풍속을 규찰하고 바로잡았으니, 이에 그것을 세습하게 되었다.”

이렇게 향리로 정착한 안동권문은 10대에 이르면 15파로 나누어지며 향리직에서 벗어나 중앙 관직에 진출하는 사람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안동권씨 15개 파는 복잡한 양상을 띠므로 명확하게 정리하여 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보감』에 보이는 「안동권씨 10세 15파 세계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9대 권백시(權伯時)의 장자 권수중(權守中)이 종파(宗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차자 권시중(權時中)이 부호장공파(副戶長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아우인 권중시(權仲時)의 장자 권수평(權守平)이 추밀공파(樞密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아우인 권중시(仲時)의 차자 권수홍(權守洪)이 복야공파(僕射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둘째 아우인 권취의(權就宜)의 아들 권태달(權?達)이 동정공파(同正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셋째 아우인 권통(權通)의 장자 권지정(權至正)이 좌윤공파(佐尹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넷째 아우인 권통의 차자 권영정(權英正)이 별장공파(別將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다섯째 아우인 권취정(權就正)의 아들 권통의(權通義)가 부정공파(副正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여섯째 아우 권융(權融)의 아들 권인가(權仁可)가 시중공파(侍中公派)를 형성한다.

3대 권책(權冊)의 둘째 아들인 권광한(權光漢)의 장자 권굉옥(權宏玉)의 후손이 10대 권숙원(權叔元)에 이르러 중윤공파(中允公派)를 형성한다.

3대 권책의 둘째 아들인 권광한의 차자 권굉진(權宏眞)의 후손이 10대 권사발(權思拔)에 이르러 군기감공파(軍器監公派)를 형성한다.

3대 권책의 셋째 아들인 권겸한(權謙漢)의 후손이 10대 권대의(權大宜)에 이르러 정조공파를 형성한다.

3대 권책의 셋째 아들인 권겸한의 후손이며, 8대 권입평(權立平)의 둘째 아들 권의정(權宜正)의 아들 권추(權樞)가 호장공파(戶長公派)를 형성한다.

2대 권인행(權仁幸)의 둘째 아들 권륜(權綸)의 후손이 10대 권척(權倜)에 이르러 검교공파(檢校公派)를 형성한다.

7대 권렴(權廉)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아들의 후손이 10대 권형윤(權衡允)에 이르러 급사중공파(給事中公派)를 형성한다.

이 15개 파 중에서 안동권씨를 권문세족으로 등장시키는데 혁혁한 공적을 세운 것은 ‘추밀공파’라고 하겠다.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이 ‘추밀공파’의 파조는 ‘수평’이다. 그는 ‘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상장군’을 지낸 사람이다. 추밀공파에서는 추밀공의 3대 후에 권부(權溥)가 나서 이 가문을 단숨에 최고 명문으로 끌어올렸다. 권부는 몽암(夢庵) 단(?)의 아들로써, 호가 국재(菊齋)이니, 바로 서거정이 앞에 인용하였던 『성화보』의 서문에서 언급하였던 바가 있는 사람이다.

“부정공 묘소는 알 수 없습니다. 파조 이후 6대가 다 알 수 없지요.”라고 권오수는 말하였다.

부정공파는 파조로부터 6세인 권자형(權子衡) 이후로 조금 현달한 인사들을 배출하여 내기 시작하였다.

권자형은 원나라 지정(至正) 20년인 경자년(庚子年:1360년)에 사마(司馬)가 되고, 신축년(辛丑年:1361년)에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공민왕을 상주로 호종하며, 임인년(任寅年:1362년)에는 어가를 따라 청주에 이른다. 그 공으로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삼사부사(判三司副使)가 되며, 홍무(洪武:명 태조의 연호) 임신년(壬申年:1392년)에 안동부 북쪽의 감마촌(甘麻村) 등지의 땅을 하사받았다. 그의 벼슬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른다.

권자형의 4촌인 권전(權專)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이다. 그의 딸이 문종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이다. 현덕왕후는 단종(端宗)의 생모이다. 권전의 아들 권자신(權自愼)은 예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사육신과 같이 화를 입어서 삭탈관직 당하였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복직된다. 어쩌면 부정공파의 영화를 보장하여 줄 수도 있었을 왕비 배출은 오히려 그들의 불행으로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이다.

권자형으로부터 3대 후에 안동권씨 부정공파에서는 권징(權徵)이라는 인물이 배출된다. 권징은 호가 등암(藤岩)이며, 1426년(세종 8)에 태어났다. 그는 1450년(세종 32)에 문과에 급제하여 통례문(通禮門) 봉례랑(奉禮郞)을 역임하였다. 그의 이력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죽음과 관계된 기록이다. 역설적으로 그는 부정공파에 불행을 가져다 준 장본인이었던 세조를 위하여 죽는다. 1467년(세조 13)에 이시애(李施愛)는 함경도에서 난을 일으켰다. 권징은 병마평사(兵馬評事)로 이시애 난을 평정하러 갔다가 순절하고, 혈서 한 장만이 집으로 돌아왔다.

“남아의 일과 장부의 운명은 예로부터 이와 같은 것이니 절대로 심려하지 말라!”
혈서에는 이런 글씨가 써 있었다고 한다.
권오수가 말하였다.

“이 분을 불천위로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천위가 한 분 뿐입니다. 묘지는 청석동(淸石洞), 그러니까 막곡에 있는데, 지금 안동전문대학 맞은편입니다.”

부정공파 종손들은 아마도 상당 기간 동안은 영주 근방에서 살았던 모양이다.
“파조로부터 6대까지는 묘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7대와 8대의 묘는 영주에 있지요. 그러니 아마 그때는 영주 근방에 세거하였던 모양입니다. 여기 늪실의 입향조는 파조로부터 14대, 그러니까 시조로부터 24대 때의 일이지요.”라고 권오수는 말하였다.


관련문집
- 임장세고(林庄世稿)
이 책은 안동권씨 부정공파종택에 소장되었던 임장세고(林庄世稿)이다. 총 6권 2책으로 고종 연간에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 낙금헌선생문집(樂琴軒先生文集)
이 책은 안동권씨 부정공파종택에 소장되어 있던 『낙금헌선생문집(樂琴軒先生文集)』이다. 이정백(李庭柏, 1553~1600)의 시문들을 총 1책으로 엮어 1855년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 선고유적(先考遺蹟)
이 책은 안동권씨 부정공파 종택에 소장되어 있던 『선고유적(先考遺蹟)』이다.


관련문서
- 능동재사중건상량문(陵洞齋舍重建上樑文)
이 문서는 안동권씨 부정공파종택에 소장되어 있던 능동재사중건상량문(陵洞齋舍重建上樑文)이다.


관련유물
- 호양선생문집(湖陽先生文集)
권익창(權益昌, 1562~1645)의 시문집으로 4권 2책의 목판본이다.

관련인물
- 권익창(權益昌)
부정공파의 가산을 늪실로 옮긴 사람은 권익창(權益昌)이다. 그의 선대 2대의 묘소가 남선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직계 선대들은 안동 동쪽에 살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그의 부친 권선(權宣)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를 역임하였으며, 퇴계의 문인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권익창은 자가 무경(茂卿)이고, 호가 호양(湖陽)으로 1562년(명종 17)에 탄생하여 1645년(인조 23)에 타계하니, 향년 84세였다. 그에게는 장락원(掌樂院) 정(正)의 벼슬이 주어졌고, 학암서원(鶴巖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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