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8월16일 [(녹)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제1독서 여호수아기 24,1-13
복음 마태오 복음 19,3-12
◈ [서울]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2019년 다해 8월16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합니다. 저도
질문을 받곤 합니다. 오늘은 질문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질문에는 3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 질문은 몰라서 묻는 것이
있습니다. 길을 묻기도 하고 문제의 해결 방법을 묻기도 합니다. 둘째,
질문은 상대방의 실력을 묻는 것이 있습니다. 영어는 어디까지 했는지,
철학은 어디까지 배웠는지, 수학의 방정식을 묻는 것이 있습니다.
면접이나 시험이 여기에 속합니다. 셋째, 질문은 깨우침을 주는 물음이
있습니다. 선불교에서 고승이 묻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냐?”
산행에서 계속 질문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저의 대답을 듣고
종교를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이 시험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질문을 제게 하였습니다. “볼트만은 구약은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고 하는데 신부님의 의견은 무엇입니까?”
저는 구약은 보물이 묻혀있는 밭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약이라는 밭에서 많은 보물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모세오경, 예언서,
시편, 잠언, 지혜서에는 인류의 지혜가 가득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좋은 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리는 어리석음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산행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유물론자라고 하였던 형제님이
저와의 대화를 좋아하였던 것입니다. 산행을 마치면서 종교를 가지면
가톨릭을 갖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게 질문하시는 것
같습니다. “가브리엘 이번 산행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아름다운 산을 보았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는 따뜻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안식년을 지내면서 아름다운
산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다른 신들을 섬기곤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 기다려 주시고 용서를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혼인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혼인은 하느님 앞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겠다고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다하겠다고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인의 약속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혈연관계보다 예수님을 더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가정을 이루는
것도, 사제나 수도자의 삶은 사는 것도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먼저
생각하고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가정을 이루는 것도, 독신으로 사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삶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무소유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포기하지 못하는데 주님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을 버릴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겸손과 교만이 주는 시각 차이
2019년 다해 8월16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겸손과 교만이 주는 시각 차이>
복음: 마태오 19,3-12
한 본당의 청년회장이 본당의 청소년 분과장님과 술자리에서 결혼에
대해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분과장이 말했습니다.
“청년회장아, 이제 장가갈 나이가 됐는데, 내가 소개시켜 줄 테니까
이상형인 어떤지 말해봐.”
“예, 뭐 얼굴은 귀여우면 좋고요, 몸매도 괜찮았으면 좋겠어요. 요리도
좀 잘 했으면 좋겠고요, 착하지만 애교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분과장이 잠시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넌 평생 결혼 못 하겠다. 그런 여자가 딱 한 명 있었는데 이미
결혼해버렸거든.”
“그게 누군데요?”
“내 아내지!”
“근데 분과장님 사모님은 뭐 그렇게 ... 아!!!”
그 청년은 그 순간 결혼관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교만해지면 상대가 아무리 완벽해도 그 사람에게서 나의 배우자가
되기에 합당하지 못한 것들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내가 겸손하면 나와
결혼해 준 것에 감사해서 배우자의 모든 단점들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부부관계의 잘못되어가는 원인을 나 자신에게서
찾아야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내가 아니라 상대에게서 찾으려고
하다 보니 상대에게 원망하고, 결국엔 ‘안 되면 바꾸지 뭐’라는 식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시각을 지닌 바리사이들이 오늘 예수님을 찾아와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안 된다고 선을 그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라고 되묻습니다. 모세가 준 율법이 곧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선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이렇게 그들의 수준에 맞게 법을 맞춰서 준 이유는 더 높은
수준의 법을 줘봐야 반발심만 생기고 실천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젖을 너무 먹고 싶지만 더 먹으면 안 될 때 부모는 공갈젖꼭지를
물려줍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젖도 안 나오는 그것을 빨면서 어느
정도의 만족을 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준이었을 때
모세가 준 법이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륜을
저지르는 것 외에는 절대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이유는 둘이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사랑의 신비를 체험하게 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부부는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을 통하여 한 몸이 되는 신비를
보여줍니다. 부부의 결합은 그만큼 신성합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상대에 대한 원망이 쌓여갑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랬습니다. 서로의 탓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상대 때문이 아니라 죄를 지었기 때문에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부부사이가 안 좋아지는 이유는 상대 때문이 아니라 죄를 지어 교만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교만으로 잃은 눈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래서 태생 소경에게 눈을 다시 만들어주시고
실로암에서 씻고 새롭게 보게 해 주셨습니다. 실로암으로 가는 동안
태생소경이 버린 것은 자존심입니다. 자기 자신의 교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 안의 교만을 없애주시고 당시의 눈으로 보게
하시면 모든 사람이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사랑하는 척이 아니라
사랑스런 눈으로 보기 때문에 자신의 아내가 세상에서 정말로 제일
사랑스러워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예쁜 연예인은 여러 명의 정말 대단한 남성들과 결혼하고 헤어진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세가 드신 이후 “나와 함께 산
사람 중에 대단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과 살았는데도 그분의 눈에는 차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자신의 눈을 먼저 바꾸려해야지 ‘내가 왜 저런 사람과
결혼했을까?’라고만 생각하면 바리사이일 수 있습니다. 나의 배우자가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는다면 더 나은 사람을 찾기 보다는 자신의
마음부터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다면 그렇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보면 주님께서 맺어주신
배우자만큼 완벽한 사람을 볼 수 없을 것 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연중 제19주간 금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8월16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 19,3-12: 남자는 제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리라.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3절)
남녀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완전하고
온전한 사랑은 상대의 결점을 느끼지 못한다. 서로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있다면 혼인을 무효로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갈라지려고 하면, 그것은 이미 둘의 관계는 멀어진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갑작스럽게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마태 5,31-32 참조). 갑자기 질문을
던져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율법에 어긋나는 말씀을 하시거나, 먼저
말씀하신 것과 다른 말씀을 하시게 하려는 술수였다.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하시면, 전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할 것이고, 그전과
같이 말씀하시면 모세의 법을 들어 따지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4-5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셨다는 사실만 말씀하시지 않고, 남자는
안내와 결합하여 한 몸이 되라고 분부하신 것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혼인으로 하나가 된 부부는 갈라져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더 큰 결합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6절)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한 몸이 되게 하심으로써 둘을
결합시키셨다. 하느님께서 결합시키신 이 결합은 사람이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하고 명령하였습니까?”(7절)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8절)라고 말씀하신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9절) 불륜이라는 것은 자기의 배우자가 아닌 자와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불륜은 하나이신 하느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것도 포함되며, 우상숭배도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불륜으로 여겼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창녀로
표현하는 부분이 성경에 많이 나타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제 발로 이교인들이나 이단으로 넘어가지 않는 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10절) 주님은 이 말에 동의를 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1절) 모든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12절) 이들은 온전한 남자가 될 수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고자가 된 사람들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12절) 즉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싸워서 승리하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갈림없는 사랑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 19, 6)|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8월16일 금.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 6)
세상의 모든 관계는 약속으로 더욱 영글어갑니다.
약속과 약속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지켜야 할 소중한 약속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잘라낼 수 없는 혼인의 관계입니다.
약속을 저버릴 수 없는 것은 약속이 하느님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약속이 사람을 만들어갑니다.
서로를 받아들이는 자기희생이 필요합니다.
서로를 살리는 혼인서약이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혼인은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제 인생철학의 핵심은 절제이며 제 정치철학의 요점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2019년 다해 8월16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제 인생철학의 핵심은 절제이며 제 정치철학의 요점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요즘 옆 나라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정말이지 백성들이 깨어
있어야겠다는 것, 그리고 리더를 잘 뽑아야겠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기본이 안된 리더, 야욕과 사심으로 가득한 리더, 품위나
양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천박한 리더가 얼마나 국격을
실추시키는지, 얼마나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지? 얼마나 주변국들을
괴롭히는지를, 지금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역사 안에 꼭 독재자나 폭군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더군요. 2015년
2월 우루과이에서는 5년 임기의 대통령이 교체되었는데, 특이하게도
세간의 이목은 신임 대통령이 아니라 퇴임하는 호세 무히카 전
대통령에게 쏠렸습니다.
임기 내내 지속된 섬김과 봉사의 리더십, 청빈하고 서민적인 삶에
국민들은 크게 환호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그를 가리켜
우리 시대 참 지도자요 현자(賢者)라며 크게 칭송하셨습니다.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그는 웅장하고 화려한 대통령궁을 노숙자
쉼터로 내놓았습니다. 자신은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작고 허름한
부인 소유의 농장에서 기거했습니다.
대통령 사저 밖에는 언제나 손수 세탁한 빨래가 내걸려있었고 필요한
식수는 본인이 직접 잡초가 무성한 마당 한 가운데 있는 우물에서
퍼오곤 했답니다. 폐차 직전의 털털거리는 고물 자동차를 손수 몰고
출근했으며 병원을 이용할 때도 일반 시민들과 똑같이 순서를
기다렸답니다. 대통령 사저를 지키는 사람들은 일개 중대의 무장
병력이 아니라 언제나 한가해 보이는 두 명의 경찰과 다리 하나를 잃은
그의 개 마누엘라가 전부였습니다.
나라로부터 받은 급여는 대부분 기부에 썼습니다. 임기 내내 월급의
90%를 절대빈곤층과 소상공인을 돕는 자선단체에 건넸습니다. 그의
손에 남는 월 소득은 우루과이 노동자의 월평균 소득 정도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는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우리에게
큰 경종으로 다가옵니다.
“제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저는 결코 가난하지 않습니다.
단순하게 살 뿐입니다. 사람이 사는데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제 인생철학의 핵심은 절제이며 제 정치철학의 요점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을 버리고 낮춤으로써 국민들에게 신뢰와 권위를
얻었습니다. 부적격한 지도자들, 언행일치가 안 되는 지도자들,
자기관리 등 기본도 안 되는 지도자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끔찍한 고통을 겪었습니까?
한 자리 차지하면 갑자기 신(神)이라도 된 듯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아랫사람들을 억압하는 지도자들, 이제는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리더, 백성들을 아끼고 섬기는 지도자,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봉사를 위해서 사용하는 지도자의 시대가 왔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멋진 국왕이 한 분 있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975∼1038)입니다.
그는 다른 무엇에 앞서 무척이나 청빈했습니다. 왕으로서 화려한
복장을 피하고 아주 소박하고 단출한 옷을 즐겨 입었습니다. 백성의
필요성에 언제나 활짝 열려있었기에 굶주리던 백성들을 위해 왕실의
곳간을 활짝 열어 아낌없이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자신의 왕관을
하느님께 봉헌했으며 자신의 손에 맡겨진 헝가리 왕국 안에 하느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또한 세상과 하느님 나라를 자신의 생애 안에 잘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더불어 신앙과 삶, 기도와 활동 사이에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는 현대 성인의 선구자요 리더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테파노의 성모님을 향한 사랑은 각별했습니다. 그는 헝가리 왕국이
성모님의 푸른 망토 안에 머물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더불어 헝가리
모든 백성들이 성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도록 적극 장려했습니다.
그래서 성모승천대축일을 국경일로 정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모님을 사랑했던지 그는 가급적 성모님 축일에
임종하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마침내 그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1038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선종했습니다. 임종의 고통
속에서도 그는 신생 헝가리 왕국을 성모님께 맡기고 성모님의 보호를
청하는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숨이 멈추는 순간까지
성모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렇게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권의 상징이었던 왕관과 홀, 그리고 검까지도 하느님과 성모님께
봉헌했던 참 신앙인 스테파노였습니다. 성모님께 자신의 왕관을 봉헌한
스테파노의 오른 손은 아직도 잘 보존되어 매년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
대축일 때 마다 부다페스트 거리를 순회하며 헝가리 백성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성모님을 사랑한 성인들’, 생활성서)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헤어진다는 것|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8월16일 연중19주간 금요일 (마태19,3-12)
헤어진다는 것
남성은 결혼을 통해 정신적 안정을, 여성은 경제적 안정을 얻으려
한다고 합니다. 한 결혼정보업체가 미혼 남녀 56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결혼을 통해 보완하고 싶은 것으로 남성의
54.6%가‘정신적 안정 및 풍요’를 꼽았고, 12.1%는‘가사에 도움’이라고
답했습니다. 반면에 여성들은 47.2%가‘경제적 안정’을 꼽았고, 정신적
안정 및 풍요가 25%, 사회적 지위가8.3%로 나타났습니다.
남성의 지향과 여성의 지향이 다르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살겠다며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초호화 결혼식을 올린 부부도, 잉꼬부부로 알려진 부부도 쉽게
헤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많은 경우‘성격 차’'경제적 이유' 때문에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며 각자의 길을 갑니다.
성격이야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상대의 성장 과정이나
환경이 다를진대 어찌 성격이 똑같겠습니까? 쌍둥이로 태어난 사람도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서로를 인정하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운데
더 깊은 사랑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너무도 쉽게 너와
내가 다른 것을 ‘네가 틀렸어'로 몰아 부치고 맙니다. 그래서 마침내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등을 돌립니다. '너 아니면 안 된다.'고
하던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19,6). 혼인을 하느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헤어질 수 없지만 단순히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혼을 쉽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하느님과 일가친척 앞에서 서약을 하였습니다. 남녀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존재이지,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서로는
동반자이면서 서로 사랑 받고 존경 받아야 할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입니다(예레31,3).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관계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롭고 의롭고 착한 사람을
소크라테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불행하게도 결혼만은 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의 아내 크산디페는 세기의 악처로 이름이 나 있습니다.
물론 집안 살림에는 관심도 없는 남편을 좋아할 아내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남편에게 바가지는 예사이고 심지어는 때리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태산 같은 인내심으로 이겨
나갔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마구 욕을 해 대다가 아무 대꾸를 하지 않는
소크라테스로 인해 화가 풀리지 아니하자 걸레를 빤 물을 남편의
머리에 끼얹었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뇌성벽력이
대단하더니 종래는 비가 오고야 마는군”하였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부부간에 크고 작은
고민거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참고 견디면 성공하는 것이요,
인내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남편 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 같이 사랑하고,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에페5,33). “결혼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인데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됩니다.
만일 헤어졌거든 결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남편과 다시 화해해야 합니다. 또 남편은 자기 아내를 버리면 안됩니다”
(1고린7,10-11).
서로간의 관계 안에서도 신의를 지키고 부족함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던히 참아주고 변화를 기다려주는
넉넉함이 우리를 풍요케 할 것입니다. 헤어지자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로 항해를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며, 결혼할 때에는 세 번
기도한다”(러시아 속담).고 했습니다. 결혼해서 일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나 풍랑이 몰아치는 험한
바다보다도 더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 순간 기도하며
애쓰지 않으면 서로의 다른 점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으로 엮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이기는 성도
오늘은 ‘이기는 성도’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1절 말씀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소아시아 7개 교회의 경고와 칭찬의 말씀을 하시면서
한결같이 ‘이기는 자’에 대한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공부하기 싫은 자신과 싸워
이겨야 하고 약해진 자신의 건강과 싸워 이겨야 하고 부정적인 생각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세상으로
향하는 자신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문제만 생기면
남의 탓을 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그 일의 시작과 과정과 끝을 보면 문제는 자신에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좀 더 참고 자신이 좀 더 물러나고
자신이 좀 더 상대방을 이해하면 됩니다.
결국 자기 자신의 육신적인 생각하는 겉사람과 싸워 이기는 성도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가장 원하시는 승리의 행위, 바로 나 자신을
이기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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