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719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 오성산에서 금강을 바라보다
위봉산의 북쪽 한 가지는 서쪽으로 뻗어 내려서 종남산, 서방산을 지나 천호산에 이른 뒤 용화산(현재의 미륵산)이 된 다음 함열을 지나 옥구에서 그쳤고, 탄현 너머 서북쪽에는 여산이 있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갈 때 서리와 역졸들에게 “너희들은 예서 떠나 전라도 초읍 여산읍에서 기다려라” 하고 명령하였던 여산은충청도와의 경계다. 용화산은 옛날에 고조선의 왕 기준(基準)이 도읍하였던 곳으로, 산 위에는 석성과 궁궐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이 산의 한줄기가 북쪽으로 가다가 여산 서북쪽에서 강경읍 채상동에 자리한 채운산이 되었다. 외로운 봉우리가 들 가운데 우뚝 솟은 이 산 위에 양음영천(養蔭靈泉, 좋은 그늘과 신령스러운 우물)이 있는데, 전하는 말에 따르면 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이 잔치 놀이를 하던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 산 밑으로 중봉(重峰) 조헌이 의병을 거느리고 가다 이곳에 머물렀다고 해서 둔병소(屯兵所)라고도 부른다. 채운산에서 작은 들을 건너면 황산촌 나루가 있고 돌산이 잇달아 절벽이 되었는데, 논산시 강경읍의 황산동은 배가 통하는 요지였다.
서쪽은 현재 익산시에 딸린 용안ㆍ함열이고, 금강1) 남쪽에 있는 곳이 군산이다. “바닷가 모퉁이 후미진 고을이지만, 인심은 착하고 꾸밈이 없다”라고 『여지도서』 「풍속」조에 실린 군산시 성산면의 금강을 굽어보고 있는 산이 오성산(五城山)이다. 오성산은 성산면 성덕리와 나포면 서포리 경계에 있는 해발 266미터의 산이다. 조선시대에 봉수대가 있었던 곳인데, 동쪽으로 불지산 봉수와 서쪽으로 옥구 화산 봉수에 응하였다. 오성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치러 왔다가 안개가 자욱해 더 나아가지를 못하였다. 이때 안개 속에서 다섯 노인이 나타나자 길을 몰라 당황했던 소정방이 그들에게 길을 물었는데, 그들이 대답하기를 “너희들이 우리나라를 치러 왔는데 어찌 우리들이 길을 가르쳐주겠느냐” 하며 거절하였다. 화가 난 소정방은 그 자리에서 노인들의 목을 쳐서 죽였다. 그 뒤 백제를 함락한 소정방은 그 노인들을 성인이라고 칭송한 뒤 제사를 지내주었고, 그때부터 이 산을 오성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오성산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지금까지도 다섯 노인의 무덤인 오성묘가 남아 있다”라고 실려 있다.
오성산 자락 금강변에 서시포(西施浦)에서 어느 때부턴가 서포리로 이름이 바뀐 마을이 있다. 서포리는 당시만 해도 배를 정박하는 곳으로 강경, 황산과 함께 강가의 이름난 마을로 일컬어졌다. 옛날에 서시(西施, 월나라 여자로 매우 아름다웠다고 하여 미인의 대명사가 됨)가 이곳에서 출생하였으므로 그대로 지명으로 삼았다는 말이 전해지지만 『한국지명총람』에는 서쪽 갯가여서 서포라 지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군산시에 딸린 하나의 면인 임피 서편에 있는 옥구읍은 만경강의 끝자락인 서해와 인접하였으며, 백제 때의 이름이 마서량현(馬西良縣)이다. 옥구읍 상평리 동문 밖의 옥구향교에는 자천대(自天臺)가 있다. 자천대는 최치원이 일찍이 당나라에서 학문을 닦고 돌아왔을 때 세상이 몹시 혼란하고 민심이 흉흉하자 홀로 바다를 바라보며 독서로 시름을 달랬다는 곳이다.
건평이 30평쯤 되는 이 건물은 원래는 지금의 군산 비행장 자리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말에 옥구군 유생들이 옥구읍 상평리 향교 옆으로 옮겼다. 옮기기 전의 자천대를 이곳 사람들은 원자천대라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원자천대의 최치원이 앉았던 바위 위에는 최치원의 무릎 자국과 멱을 감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중환이 『택리지』에 기록한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자천대라는 작은 산기슭이 바닷가로 쑥 나왔고, 그 위에 돌로 된 두 개의 돌 농(籠)이 있었다. 신라 때의 최고운(崔孤雲)이 이 고을의 원이 되어 와서 농 속에다 비밀 문서를 보관하였다는데, 농이란 것이 마치 큰 돌과 같았다. 산기슭에 버려져 있었지만 누구도 감히 열어보지 못하였고, 혹 이를 끌어 움직이면 바다로부터 바람과 비가 갑자기 왔다.
마을 백성은 이 농을 이롭게 여겨서, 날씨가 가물 때 수백 명이 모여 큰 밧줄로 끌어서 움직이면 바다에서 비가 갑자기 와서 밭고랑을 흡족하게 적시었다. 그런데 사객(使客, 임금의 명을 전달하거나 시행하는 사람)이 옥구현에 올 때마다 번번이 가서 구경하게 되기 때문에 고을에 폐가 될까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이를 심각하게 여겼다. 그런 까닭에 예전에는 이곳에 정자도 있었으나, 백 년 전에 정자를 허물고 돌 농도 땅에 묻어 자취를 없애 버려서 지금은 가서 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