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저녁에는 윤섭씨와의 데이트가 있는 날이었다. 출근 준비는 늘 데이트 준비를 겸하게 되어 거울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고, 그에 어디로 끌려가는 것과 같던 출근 시간은 데이트를 하기 전 은행에 들리거나 핸드폰 대리점을 잠시 들리는 듯한 가벼운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흰색과 갈색이 섞인 짧은 토끼털 자켓과 몸의 라인을 최대한 살려주는 좀 붙는 느낌의 흰색 원피스를 입었다. 아마도 복장 때문에 가벼운 기분이 더 드는 듯 했다.
“문희씨! 좋은 아침! 오늘 스타일 좋은데.”
내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일까 과장님의 인사도 더 밝게 들렸다.
“과장님도 스타일 좋으신데요. 요즘 들어 부쩍 활기차 보이세요.”
“음. 고마워.”
과장님의 인사를 받고는 조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과장님이 저기압이면 하루가 피곤해지기에. 근래 들어 늘 즐거워하시는 과장님 덕에 회사에서도 많은 여유가 생기고 있었다.
“과장님 요즘 왜 저러실까요? 계속 웃으시는 게 이상해 보이죠?”
어느새 커피 한 잔을 내 책상에 내려놓으며 혜림이가 말했다.
“뭐가 이상해보여? 웃어서?”
“그렇잖아요. 최근 들어 너무 즐거워하시니까.”
“혜림씨도 과장님이 노처녀라 뭘 해도 이상해 보이는 거야.”
“예? 그런가? 그런데 노처녀들 보면 결혼을 늦게 하는 이유가 다 있는 것 같아요.”
“그 말이 이상하다는 말이지 뭐야. 그건 안 예쁜 여자에게도 예쁘다, 예쁘다 하면 예뻐지잖아. 노처녀들에게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니 이상해질 수밖에 없다고 하던데.”
“그건 누구 말이에요? 일리가 있는 것도 같네요.”
“과장님 말.”
“과장님이 그런 말을요? 역시 이상해.”
혜림이의 말에 ‘푹’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냥 즐거워 보이면 즐겁구나 그렇게 봐죠. 우리도 노처녀 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대리님은 남자가 둘인데 설마 노처녀 될라구요. 어머, 오늘도 데이트 있으시죠? 어제는 용준씨니까 오늘은 윤섭씨랑 만나시는 거예요?”
“응.”
“좋으시겠다. 오늘은 어디에 가세요?”
“영화보기로 했어.”
“에게. 너무 평범하다. 그 사람 용준씨 견제를 안 하나봐요.”
“그러게. 그것도 심야영화야. 일이 늦게 끝난대. 그 시간까지 혜림씨가 놀아줄래?”
“그래요. 저도 데이트 있는데 제 남자친구도 늦게 끝난데요.”
“잘됐다. 우리 이따 어디 갈까?”
늘 혜림이는 데이트가 있는 날이면 늦게 퇴근을 하곤 했다. 남자 친구의 퇴근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라고 했다. 윤섭씨를 만나게 되면 나도 그렇게 될까? 늘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지루한 일일 것 같았다. 뭐 연애 초기에는 시다림을 설레임으로 대치할 수 있다지만 늘 기다리기만 하는 여자는 남자쪽에서도 우습게 볼 거야,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혜림이와 돈을 아낀다고 빵을 사서는 근처 커피숖에 한참을 앉아있다가 9시 30분쯤 혜림이마저 가버리자 너무 무료해졌다. 근처 PC방이라도 갈까하다 약속장소에 먼저 나가 표를 먼저 사는 친절을 베풀어보자 했다.
한가로운 극장에서 표를 사는 일은 시시할 정도로 간단한 일이었다. 사람 구경이라도 하려고 했건만 사람이 적어 좀 쳐다볼라치면 눈이 금세 마주쳐버려서 공연히 손톱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왜 안 오는 거야? 어휴. 아직 약속 시간이 10분이나 남았네. 괜히 일찍 나왔나봐. 공연히 화가 나잖아.’
“개울가에 올챙이 한 마리~”
핸드폰이 노래를 불렀다.
‘다 왔다는 건가?’
윤섭씨였다. 왠지 윤섭씨에게 어울리는 노래 같아 지정을 해 둔 곡이었다.
“문희씨! 죄송합니다. 20분 정도 늦을 것 같습니다.”
“네? 뭐라고요? 저 집에 가겠어요. 시간이 남아 한 시간이나 일찍 와서 기다렸다구요.”
공연한 기다림을 한 후라 20분을 기다릴 여력도 남아있질 않았다. 단 20분을 늦겠다는 말에 화가 나 소리를 치고 만 것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날라 가고 있는 중입니다. 앗! 어, 어!”
“왜요? 왜 그래요? 괜찮아요?”
“······.”
“윤섭씨!”
사고가 난 건가? 아무 말도 없는 윤섭씨를 걱정하다보니 저편에서 희미하게 욕설이 오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문희씨, 죄송해요. 앞에서 갑자기 끼어들기를 해서요.”
“사고가 난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 괜찮으니 전화 끊으시고 천천히 오세요.”
이젠 도리 없이 관대해 질 수밖에 없었다.
삼백사, 삼백오, 삼백육······.
마음속으로 세는 숫자라 소리는 나지 않는다.
천백이십육, 천백이십칠, 천백이십팔······.
어느새 입으로 세지 않으면 숫자가 헷갈릴 지경이 되어 입으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윤섭씨가 도착했을 때 내 입이 비쭉 나와 있었다. 어찌나 화가 나는지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화 나셨어요?”
“아니에요.”
“아니긴요. 화나신 것 같은데.”
“지금 놀리시는 거예요? 예! 저 화났어요. 아주 많이 났어요.”
“화가 나면 입이 나오시는 군요. 앞으로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사진을 찍어 두고 싶을 정도로 귀여워요.”
올해 들어서부터 귀엽다는 말에 약해진 나는 조금 기분이 풀리는 듯했으나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무슨 영화를 볼까요?”
“여기요.”
이미 사 놓은 표를 윤섭씨에게 내밀었다.
“에이구, 이런. 이미 본 영화인데.”
“그럼, 말아요. 저 혼자 보겠어요. 윤섭씨는 다른 것을 보세요.”
“하하하. 표야 바꾸면 되지요.”
“아니요. 바꾸지 않을 거예요. 전 이 영화를 보겠어요.”
마치 어린애처럼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나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늦었다는 것에 제대로 보상을 받고 싶은 건지 이 남자를 만나면 응석을 부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예. 예. 좋은 영화죠. 저도 보겠습니다.”
“윤섭씨는 다른 영화를 보세요.”
“표 주세요.”
“싫어요.”
“그럼 할 수 없죠. 같은 영화 표를 사오겠습니다. 그럼 좌석이 떨어지겠군요. 그 점이 아쉽네요.”
이 남자 진짜 표를 사려는지 성큼성큼 매표소로 향했다.
‘어쭈, 고집 있다 이거야?’
가는 모습을 두고 보고 있는데 정말 표를 사는 윤섭씨.
“샀어요?”
이젠 내 눈빛이 고울 리가 없었다.
“예. 샀습니다. 이제 들어갈까요?”
“그래요.”
“잠시만요. 전 콜라를 사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그리고는 또 혼자 음료를 사러 갔다. 나에게는 무얼 마시겠냐고 묻지도 않는다. 설마 했는데 콜라는 한잔뿐이었다.
“아직 안 들어가셨어요? 같이 갈까요?”
“아니요. 저도 음료를 마시겠어요.”
이젠 물러설 수 없는 지경이었다. 나는 분해 죽겠는데 뭐가 그리 우스운지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를 보자니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서 빈 좌석들이 많았다. 내가 먼저 자리에 앉았는데 윤섭씨는 은근슬쩍 내 옆자리에 앉았다.
“본인 자리로 가셔야죠.”
“여기 빈 자리 아닌가요?”
“아니에요. 엄연히 자리가 있다구요.”
“에이. 빈자리 맞는 것 같은데요.”
윤섭씨는 일어설 생각이 없는지 능청스럽게 몸을 길게 펴고 앉았다. 내가 있는 힘껏 밀어낸다고 해도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을 것 같았다.
‘극장에서 볼 상 사납게 몸싸움을 할 수는 없지.’
체념을 하고 예고편을 보고 있는데 이 남자 팝콘은 안 사왔냐고 물었다.
“안 사왔어요. 안 샀다고요! 먹고 싶으면 사서 드세요.”
“문희씨 팝콘 드실래요? 나가서 사올게요.”
“아니요. 늦은 밤이라 먹지 않겠어요.”
“그럼 제 것만 사옵니다. 화내시기 없기에요.”
“누가 화를 냈다고 그래요?”
“화 냈다는 게 아니구요. 화 내지 마시라구요.”
“화 안내요! 제가 어린애에요? 이랬다 저랬다 하게.”
“하하하.”
윤섭씨는 괴팍스럽게 소리를 치를 나를 보고 웃으며 나가 버렸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막상 데이트라는 것을 하고 보니 딴 사람 같은 걸. 왜 이리 능글맞게 웃는 거야? 사람이 매너도 없는 것 같고. 자상함 빵점! 매너 빵점이다!’
드디어 영화가 시작이 되었다. 옆에서 팝콘을 열심히 먹던 윤섭씨는 이내 조용해 졌다.
‘이제 살 만하군. 옆에서 쩝쩝대는 통에 영화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잖아.’
이만하면 조용히 영화를 볼 수 있겠지 싶었다. 잔잔한 멜로 영화는 중반 이후부터는 두 주인공을 비극으로 몰아넣고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짓게 만들고 있었다.
‘울면 안 되겠지? 오늘은 만만하게 보이고 싶지가 않단 말이야.’
바닥을 보는 것처럼 고개를 숙여 눈가를 몰래 훔쳐냈다.
‘너무 슬프다. 가슴 아픈 사랑은 싫어.’
애써 눈물을 닦는 내 뒤통수 뒤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크엉, 푸우, 크크크.”
윤섭씨가, 세상에 나랑 데이트를 하려고 나온 남자가 나를 옆에 두고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었다.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 좋아한다며? 사귀고 싶다며? 그러면서 이건 뭐람?’
정말 어이가 없었다. 우아해야 할 내 삶을, 낭만적이어야 할 내 사랑을 지금 코미디로 만들 셈인거야? 안돼! 절대로 안 된다고!
첫댓글 아무래도.......윤섭의 작전인거같어.... 말려드는 희!!!
글게..작전이겟지??? 작전이길 바래야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