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한 해' 보낸 골프 여제 박인비]
일주일 남짓 주어진 자유시간… 요즘 인기 있다는 영화 보고 싶어
-새해 맞으면… 바로 '골프 모드'로
전지훈련 떠나 쇼트게임 다듬을 것… 내년엔 브리티시 여자오픈 우승해 커리어 그랜드슬램 달성 해야죠
"제가 남 앞에 나서거나 꾸미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처음엔 어쩔 수 없이 했지만 지금은 즐거운 마음으로 해요. 색다른 경험이기도 하고요." 19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크레인'이라는 스튜디오에서 골프 다이제스트 코리아 내년 2월호 특집 화보 사진 촬영을 하는 박인비(25·KB금융)는 낯선 모습이었다. 네 시간 동안 짙은 화장을 여러 차례 고쳐가며 다양한 의상을 입고 사진작가의 요청에 따라 이런저런 얼굴 표정을 만들어 내는 일은 그녀에겐 쉬운 일이 아니었다.
US여자오픈 같은 메이저 대회 우승을 할 때도 수많은 갤러리가 모여 있는 18번홀 그린으로 걸어가며 수줍게 한 손을 들어 올리는 게 고작일 정도로 감정 표현이 적고 차분한 성격이다. 감정 표현이 서툴기로는 박인비 못지않은 약혼자 남기협(한국프로골프협회 회원)씨가 그녀가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도록 만드는 보조 역할을 했다.
-
- 박인비는 다시 태어나도 골프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4년이란 긴 슬럼프를 겪었지만 골프를 통해 결국 사랑과 행복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인비가 19일 서울 신사동의 스튜디오‘크레인’에서 골프다이제스트 코리아의 화보 촬영을 위해 화장을 하고 있다. 박인비는“평소 잘 꾸미지 않는 편이어서 짙은 화장을 하는 게 어색하지만 여러 번 해보니 재미도 있더라”고 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촬영이 끝나고 만난 박인비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시즌이 끝나면 3주 정도는 푹 쉬기만 했는데 올해는 1주일밖에 쉴 시간이 없다"고 했다. 박인비는 지난주 대만에서 끝난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시즌 개막전 '스윙잉 스커츠'를 끝내고 돌아와서 서울과 제주·부산·경주를 오가는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63년 만에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메이저 대회 3연승을 이루고 올해의 선수와 상금왕(2연패)에 오른 그녀는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 스타 가운데 한 명이다. 최근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지는 박인비를 '2013년 두각을 나타낸 여성 15인'에 선정하기도 했다.
박인비는 "친구들이 재미있다며 로맨틱 코미디 영화 '어바웃 타임(About Time)'을 추천했는데 아직도 짬을 내지 못했다"고 했다. 내년 1월 초에는 호주의 골드코스트에서 전지훈련을 할 계획이다. 그린 주변 쇼트 게임 능력 향상이 목표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서 상황을 바꿔놓고 싶으냐'고 물었다. 프로골프 사상 첫 그랜드 슬램을 놓친 브리티시 여자오픈으로 돌아가고 싶을 것이라는 대답을 예상했다. 옆에 있던 박인비의 어머니 김성자씨도 "브리티시 여자오픈 때 아닐까"라고 했다. 하지만 박인비는 "프로 골퍼 초년기로 돌아가서 오빠(남기협)를 일찍 만나 스윙을 제대로 배웠으면 정말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프로 골퍼로서 최고의 한 해를 보냈지만 그녀는 2008년 US여자오픈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뒤 4년 가까운 슬럼프 기간의 고통스러운 느낌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샷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 없이 지내는 게 너무 힘들었다"며 "당시의 괴로웠던 느낌이 지금도 너무 크고 생생하게 남아 있어 늘 두려운 마음"이라고 했다. 그래서 더 노력하게 된다고 했다.
박인비는 "샷이 어떻게 되느냐는 백스윙이나 다운스윙보다는 결국 클럽이 공을 때리면서 빠져나가는 팔로 스루(follow through)의 길(道)에서 결정되는 것"이라며 "오빠와 함께 2년간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좋아졌지만 지금도 완전히 깨달은 것은 아니다"고 했다.
-
- 지난 7월 1일 US여자오픈 우승으로 3개 메이저 대회 연속 정상에 올랐을 때의 모습. /Getty Images 멀티비츠
그녀에게 "전 세계 골퍼들이 부러워하는 '신기의 퍼팅 능력'이 있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박인비는 "남들이 버디 퍼팅을 할 때 나는 파 퍼팅을 남겨놓은 적이 많았다"며 "어떻게든 꼭 넣어야 한다는 절실함 덕분에 퍼팅 능력이 좋아진 것"이라고 했다. 요즘 퍼팅 수가 늘어난 것은 샷이 좋아진 덕분에 버디 기회를 많이 잡는데 버디 퍼팅은 실패해도 여유가 있다 보니 느슨해진 탓도 있다고 했다.
미국 골프계는 내년 LPGA 투어의 판도가 올해처럼 박인비, 수잔 페테르센(노르웨이), 스테이시 루이스(미국) 등 '빅 3' 경쟁에 상위권 선수들이 추격전을 펼치는 형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박인비는 "제가 계속 '빅 3'에 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브리티시 여자오픈 우승으로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이루는 게 내년 목표"라고 했다. 그녀는 "수잔이나 스테이시는 필드에서도 감정을 드러내는 편"이라고 했다. 박인비는 "수잔을 처음 만났을 땐 위압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었다"며 "실제로는 매너도 좋고 진지한 선수들이어서 함께 치면 플레이에 더 집중하게 된다"고 했다. 그녀는 "수잔이나 스테이시가 두 번째 샷까지는 더 좋지만 퍼팅으로 제가 먼저 버디를 잡을 때 '한 방 먹였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감이 생긴다"고도 했다.
천재 소녀 리디아 고에 대해서는 "스윙잉 스커츠 대회에서 처음 같이 라운드를 했는데 2~3년쯤 프로 생활을 한 선수처럼 노련해서 놀랐다"고 했다. 박인비는 최근 숙명여대 국제관계대학원 '국제 홍보 및 공공 외교' 전공에 합격했다. 그녀는 "처음엔 제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미국과 일본 등 해외 투어에서 뛰면서 얻은 경험은 스포츠 외교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교수님들의 격려 덕분에 용기를 냈다"고 했다. 그녀는 현역 생활을 마치면 IOC(국제올림픽위원회)나 대한체육회에서도 역할을 찾아보고 싶다고 했다. 박인비는 "프로 생활 10년째가 되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까지는 치열하게 골프를 한 뒤 제2의 인생을 모색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