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왕 조용필이 노래했다. ‘꽃피는 동백섬’이라고. 지금 부산 해운대 옆 동백섬의 동백공원에는 절정기를 살짝 넘긴 동백꽃이 산책로를 뒤덮고 있다. 최치원 동상이 세워진 동백섬 정상도 꽃대궐이다. 동백공원은 순환도로변 가로수가 하나같이 동백나무이다. 강렬한 붉은빛을 발하는 꽃송이에서 정열적인 삶의 자세를 배운다. 그러나 태평양을 건너 불어오는 봄바람에 동백이 머뭇거림 없이 송두리째 떨어진다. 봄날은 그렇게도 안타깝게 재빨리 흘러가고 있다.
하트 모양의 동백 낙화와 비둘기
우리나라의 동백꽃 감상 명소로 제주도에 카멜리아힐, 거제도에 지심도, 여수에 오동도, 서천에 마량리 동백숲, 광양에 옥룡사지 동백림이 있다면 부산의 동백 명소로는 해운대구 동백섬이 손가락 안에 든다. 부산 지하철 2호선 동백역이나 해운대역에 내리면 얼마 안 가서 동백꽃이 꽃방석을 이뤘다는 동백섬에 닿는다. 해운대나 수영강 일대에 치솟은 고층 빌딩들을 휘감았던 봄바람이 뒤에서 살짝 불어주기라도 한다면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생김새가 다리미를 닮아 일명 ‘다리미섬’이라고도 한다는데 동백섬의 격에 영 어울리지 않는 별칭이다. 동백섬은 이름에서도 짐작되듯이 애초에는 섬이었다. 오랜 세월 퇴적작용 탓에 섬은 육지와 이어졌다. 이런 섬을 ‘육계도’라고 한다.
동백섬 일주 걷기 나들이의 출발지는 웨스틴조선부산호텔 앞이다. 입구에 동백공원 안내도와 해운대 동백섬의 유래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어 초행자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된다. 어느 쪽에서 걷기를 시작하건 발길 가는 대로 방향을 정하면 되는데, 대부분 누리마루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하우스가 가까운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렇게 하면 섬을 한 바퀴 도는 내내 바다가 오른쪽에 자리하게 된다.
여러 가지 빛깔과 모양을 가진 동백꽃
동백섬 순환로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유유자적’이다. 부산의 공기를 매일 마시고 사는 시민이건, KTX나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온 여행자건, 동남아에서 한국을 찾은 단체 관광객이건, 서두르지 않고 저마다의 속도와 보폭으로 산책로를 걷는다. 자동차가 다니지 않으니 유모차를 밀고 가는 부부도 자주 눈에 띈다. 홑동백, 겹동백, 백동백 등 다양한 종류의 동백꽃이 사과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 아래를 지나갈 때에는 어김없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는다. 저마다의 가슴에 너무 짧아서 아쉽기만 한 봄날을 담는다.
동백섬 산책로에선 길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을 찾아볼 수가 없다. 고개를 돌려 울타리 안을 들여다보니 모두 거기에 모여 있다. 산책로를 청소하는 분들이 땅에 떨어진 동백꽃이 사람들의 운동화나 구둣발에 밟혀 비명이라도 지를까봐 보이는 족족 빗자루로 쓸어 울타리 뒤로 넘겨버리기 때문이다. 가히 동백꽃의 찬란한 무덤이 거기에 있다. 그렇게 동백은 두 번 핀다. 한 번은 나무에 매달린 채 활짝 피었다가, 죽을 때는 한 잎 두 잎 쩨쩨하게 흩날리지 않고 송두리째 떨어져 땅에서 한 번 더 꽃을 피워낸다. 이처럼 선이 굵은 모습을 보이기에, 삶의 연장을 위해 비굴하게 굴지 않기에 사람들은 동백꽃을 사랑한다. 이쯤에서 조선 세종 때 집현전 학사였던 성삼문이 동백꽃을 소재로 지은 한시 한 수를 떠올린다.
한겨울의 자태를 사랑하는데
반쯤 필 때가 가장 좋은 때네
피지 않았을 땐 피지 않을까 두렵고
활짝 피면 도리어 시들어버리려 하네
-기태완, 《꽃, 들여다보다》에서
[왼쪽/오른쪽]동백섬 서편 산책로 / 동백섬 산책로변 낙화
발걸음은 어느새 누리마루 APEC 하우스에 닿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반기는 것은 김규장 명장의 작품 <십이장생도>이다. 십장생에 두 가지를 더한 나전칠기 그림으로 매우 크고(6m×2.2m) 화려하다. 등장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해, 구름, 산, 바위, 물, 학, 사슴, 거북, 소나무, 불로초에 대나무와 천도복숭아를 더해 십이장생이 됐다. 전에 방문했을 때는 그냥 지나쳐버렸는데 올 봄에는 하나하나 뜯어보게 되니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정자 개념을 도입한 누리마루는 작은 등대가 세워진 전망 데크에서 보는 구도가 좋다. 오른편에는 둥근 지붕의 누리마루, 왼편에는 바다 그리고 뒤편으로 광안대교와 이기대공원이 한눈에 보인다. 동백섬 입구에서 여기까지가 500m 거리라고 도로 바닥에 흰 페인트로 굵게 표시되어 있다. 전망 데크에서는 카메라를 미처 가져오지 못한 여행자들의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사 한 사람이 영업 중이다.
전망 데크에는 망원경도 설치되어 있다. 오륙도(밀물일 때는 6개, 썰물일 때는 5개가 되는 섬)야 코앞에 떠 있지만 과연 여기서 일본 대마도가 보일까? 전망 데크 안내판에 씌어 있는 글을 들여다보자.
부산에서 대마도가 보이는 날은 연중 평균 60일 정도로 추정된다. “부산에서 보이는 대마도는 지역 간의 기온 차에 따라 생기는 빛의 굴절현상이 빚은 일종의 신기루일 가능성이 높다”는 학설이 있다.
과연 어떤 설이 정확할까? 바로 그 옆에 또 하나의 안내판이 서 있다. 제목은 ‘보일락 말락 대마도 비밀’이다. 허투루 보지 말고 한 줄 한 줄 잘 읽어보면 재미있다. “부산과 대마도 간의 거리가 65km인데 해안선 전부가 다 보인다는 것은 아무리 날씨가 맑다 해도 인간 시력의 한계를 넘는 것이며 신기루일 가능성이 높다”라는 『부산일보』의 기사를 담았다.
[왼쪽/오른쪽]전망 데크에서 본 누리마루 / 누리마루의 십이장생도 [왼쪽/오른쪽]망원경이 설치된 전망 데크 / 동백꽃과 해운대
전망 데크는 동백섬 일주의 반환점에 해당하는 위치에 자리했다. 바로 옆 해운대를 조망하기 좋은 해안 절벽 위에 설치된 데크로 자리를 옮기면 ‘해운대’라는 석각을 찾아볼 수 있다.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5호로 지정된 이 석각은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고운 최치원(857∼?)의 글씨라고 전해온다. 고운 선생이 만년에 가야산으로 입산할 때 이곳을 지나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절벽 아래 큰 바위에 ‘해운대’라는 글자를 남겼는데, 그 지명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온다. 동백나무 사이로 보이는 석각은 오랜 세월 풍상을 겪어내느라 ‘운’ 자가 다소 마모된 상태이다.
고려시대 정포(1309∼1345)라는 문신도 해운대를 찾아와서 시 한 수를 남겼다. “대는 황폐하여 흔적도 없고 오직 해운의 이름만 남았구나.” 700년 전에도 이곳이 해운대로 불렸음을 알려주는 증표이다.
반환점을 돌았어도 동백꽃의 향연은 계속 이어진다. “부산의 봄을 온몸으로 느끼려거든 동백섬을 산책하라”고 권하던 지인의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동백 숲을 오른편에 두고 출발점을 향해 걷는데 하수구 같은 기분 나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어떤 이는 계분 냄새 비슷하다고도 말한다. 동백 숲 사이사이에 조팝나무 꽃처럼 하얗게 핀 사스레피나무 꽃이 퍼뜨리는 냄새이다. 사스레피나무는 동백섬 해안가에 자생하며 3~4월에 꽃을 피운다. 냄새는 역해도 살균과 진정작용을 한다니 굳이 코를 막고 지나갈 일만은 아니다. 산책로 아래 해안을 따라 조성된 수변 산책 데크를 따라가면 인어상을 만날 수 있다.
[왼쪽/가운데/오른쪽]동백섬 동편의 산책로 / 낙화한 동백의 자태 / 사스레피나무에 핀 꽃 [왼쪽/오른쪽]수변 산책 데크 / 인어상
동백섬을 한 바퀴 돌아 출발지였던 웨스틴조선부산호텔 앞까지 불과 900m밖에 되지 않는다. 권투선수라면 이제 겨우 몸을 풀었다고나 할까? 최치원 선생 유적이 있는 동백섬 정상으로 올라간다. 완만한 언덕길 좌우로 동백 숲이 울창하고, 키 큰 소나무들이 따사로운 봄 햇살을 막아준다. 정상에 닿으면 동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해운정이라고 하는 팔각정과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동상 주변에도 동백꽃이 만발하여 도심의 소음과 파도 소리를 차단해준다. 구구대는 비둘기 소리와 동박새의 지저귐만 들릴 뿐이다. 공원을 빙 둘러 가장자리에 벤치가 놓여 있다. 그늘진 벤치에 앉아 동백꽃이 떨어지는 소리, 봄날이 흘러가는 소리를 듣는다. 고운 최치원이 이 소리를 먼저 듣고 <봄 새벽>이라는 한 편의 시를 후세 여행자들에게 남겨놓았다.
흘러가는 저 물은 돌아 못 오고
봄빛만 사람을 괴롭히누나
애틋한 아침비 부슬거리고
꽃들은 피고 맺고 저리 곱구나
[왼쪽/가운데/오른쪽]해운정 / 고운 최치원 동상 / 부산시티투어버스
첫댓글 동백섬두 많이 변해있더라구요
몇번가봐는데
우리님두 탐방하세유
아름답고,소중한 인연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