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6월 중앙정보부가 창설된 이래 현재까지 국가정보 수장(首長. 중앙정보부장, 국가안전기획부장, 국가정보원장. ‘서리’ 포함)을 지낸 사람은 33명이다. 현 서훈 원장은 34번째 국정원장이다. 전직 국정원장 33명 중 16명이 이런 저런 이유로 감옥살이를 하거나 비명(非命)에 갔다.
1963년 7월 ~ 1969년 10월 6년 3개월 동안 재임한 김형욱(제4대) 부장은 3선 개헌에 앞장서는 등 정치사찰로 악명을 떨쳤다. 때문에 1969년 3선 개헌 후 팽(烹)당하자 1973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김형욱회고록>을 내고, 미 의회 프레이저위원회에 출두해 증언하는 등 반(反)박정희 활동을 벌이다가 1979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됐다. 중앙정보부가 고용한 청부살인업자들에 의해 살해됐다는 설이 있다.
1963년 7월 ~ 1969년 10월 6년 3개월 동안 재임한 김형욱(제4대) 부장은 3선 개헌에 앞장서는 등 정치사찰로 악명을 떨쳤다. 때문에 1969년 3선 개헌 후 팽(烹)당하자 1973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김형욱회고록>을 내고, 미 의회 프레이저위원회에 출두해 증언하는 등 반(反)박정희 활동을 벌이다가 1979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됐다. 중앙정보부가 고용한 청부살인업자들에 의해 살해됐다는 설이 있다.
중앙정보부장 시절의 김형욱. 정치개입, 사찰로 악명을 떨쳤던 그는 1979년 10월 파리에서 실종됐다. |
제8대 김재규 부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사 동기(2기)로 육군보안사령관,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 등으로 중용됐으나,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다. 군사재판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 5월 24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동안 이른바 민주화운동가들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명예회복 움직임이 있어왔다. 문재인 정부 들어 그가 재직했던 부대에 사진이 다시 걸리는 등 재평가 움직임에 탄력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육군참모총장과 제5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도 10.26 현장에 있었다가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죄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하다가 1982년 5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10.26 사태 현장 검증을 하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과 김계원 전 비서실잘. 김 전 실장도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
10.26 직후 현역 군인 신분으로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지낸 이희성 전 부장(제9대)은 40여일간 부장으로 있다가 12.12사태 후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됐다. 이 때문에 1997년 12.12 및 5.17사건 재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그해 12월 사면, 석방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0년 봄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있으면서 제10대 중앙정보부장(서리)을 겸직했다. 이는 권력장악으로 가기 위한 정지 작업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여져진다. 그는 1997년 4월 12.12 및 5.17사건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같은 해 12월 사면, 석방됐다. 작년에 2017년 4월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 주장을 한 고(故)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으나,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이유로 재판정에 출석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을 바꾼 후 첫 부장(통산 11대)을 지낸 유학성 전 부장은 12.12 당시 국방부 군수차관보로 신군부에 가담했다. 이 때문에 1996년 12·12 및 5·18 사건 재판정에 섰으나, 대법원 상고심 재판 중이던 1997년 4월 사망했다.
제13대 안기부장을 지낸 장세동 전 부장은 경호실장을 지내다가 1985년 2.12 총선 직후 안기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87년 4월 신한민주당 창당 방해사건(용팔이 사건)에 안기부가 개입한 혐의로 1994년 4월 유죄 판결을 받고 1년 6개월 간 복역했다. 출옥한 후 연희동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을 찾아가 "휴가 다녀왔습니다!"라며 거수경례를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12.12사태 당시 제30경비단장으로 가담한 혐의로 12.12 및 5.17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97년 12월 사면됐다.
1996년 12.12 및 5.17 재판정에 선 전두환(앞줄 오른쪽), 유학성(앞줄 왼쪽), 장세동(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피고. 이들은 중앙정보부장 및 안기부장을 지냈다. |
전두환 정권 시절 국세청장을 지냈고, 1987년 6.29선언 후 1년여 동안 안기부장으로 재직했던 안무혁 전 부장(제14대)은 청렴 강직한 공직자로 유명했다. 하지만 안기부장 시절,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대기업들을 상대로 대선 자금을 거둔 혐의로 후일 ‘전두환 비자금 사건’ 재판에서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았다.
노태우 정권 시절 경호실장을 지낸 후 정권 말기에 4개월 간 안기부장을 지낸 이현우 전 부장(제19대)도 경호실장 시절 노태우 비자금 조성에 간여한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김영삼 정권 시절 국방부 장관과 안기부장을 지낸 제21대 권영해 전 부장은 3년 2개월간 장수했다. 하지만 퇴임 후 ‘북풍’사건으로 선거법-안기부법 위반혐의로 징역 5년, 이른바 ‘세풍’사건으로 징역 8개월, 2004년에는 횡령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후 국가안전기획부는 잘못된 과거로부터 탈피하겠다면서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많은 국정원장들은 말로가 편치 못했다.
제24대 임동원 원장, 제25대 신건 원장은 국정원 불법 도-감청 사건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2005년 11월 DJ정부시절 불법도감청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된 후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법원으로 향하는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 두 사람은 실형을 선고 받았다. |
이명박 정권 시절 제30대 원세훈 원장 이후 4명의 전직 원장, 남재준 (제31대), 이병기 (제32대), 이병호 (제33대) 전 원장은 현재 모두 감옥에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시작된 이른바 ‘적폐’청산 작업 때문이다.
원세훈 전 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부시장을 지낸 인연으로 이명박 정권 시절 행정안전부 장관, 국정원장으로 승승장구했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후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선거법-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4년여 동안 재판을 받은 끝에 2018년 4월 대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2014년 1월에는 뇌물수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 후 만기 출소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 출범 후 원세훈 전 원장은 다시 국정원 댓글팀을 운영하면서 국정원 예산 65억원을 썼다하여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국고 등 손실) 혐의, ‘MBC 정상화 추진’을 위해 MBC프로그램 제작에 간섭했다는 이유로 국가정보원법위반(직권남용) 및 업무방해 혐의, 박승춘 예비역 육군중장(전 보훈처장)이 만든 우파 단체인 국가발전미래협의회에 국정원 자금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국정원법-특가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
육군참모총장 출신인 남재준 제31대 원장은 국정원장 재직 시절 적극적으로 북한 레짐 체인지를 추구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박근혜 정부 당시 국가정보원 댓글 공작사건 수사와 재판을 방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2018년 5월 1심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18년 6월에는 재임 중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박근혜 전 대통령 등에게 지원했다는 이유로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국고손실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박근혜 정권 시절 대통령비서실장과 국정원장을 지낸 이병기 전 원장, 이병호 전 원장도 같은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형사처벌까지 가지는 않았어도 이런 저런 이유로 고초를 겪거나 낙마하거나 구설에 오른 전직 원장들도 적지 않다.
5.16 혁명 주체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초대 김종필 부장은 국무총리를 두 차례, 국회의원을 9번 지내면서 한때 ‘3김 시대’를 이끌었다. 그는 형사 처벌을 받은 적은 없지만, 박정희 정권 내내 ‘잠재적 대권 도전자’로 간주되어 자신이 창설한 정보부의 감시, 가택수색 등을 받았다. 1980년 5.17조치 이후 부정축재혐의로 보안사에 연행되어 한 달여 동안 구금됐다가 재산헌납을 강요당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고,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해 7.4공동성명을 성사시키면서 이름을 날렸던 제6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퇴임한 후, 처벌을 우려해 한동안 해외를 떠돌았다. 그도 1980년 5.17 조치 후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보안사에 연행되어, 재산 헌납을 강요당했다.
정치학 교수 출신으로 김영삼 정권의 첫 안기부장을 지낸 제20대 김덕 부장은 재직 중 지방선거 연기 공작을 했다는 이유로 후일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군 출신으로 김대중 정권 시절 국정원장을 지낸 제23대 천용택 원장은 임동원, 신건 전 원장처럼 국정원 불법 도-감청 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으나,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기소를 모면했다.
노무현 정권 시절 국정원장을 지낸 김만복 전 원장(제28대)은 중앙정보부 공채 출신. 중정 공채 출신으로 국정원장에 오른 건 그가 처음이었다. 유신 시절 학원 사찰 경력 등에도 불구하고 그가 국정원장이 된 것은 부산출신 정권 실세들의 지원 덕분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는 재임 기간 중 아프가니스탄 인질 석방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홍보하는 등 총선 출마를 의식한 듯한 행보를 벌였다고 해서 자주 구설에 올랐다. 그는 2010년 10월 《다시, 한반도의 길을 묻다》라는 책에서 10.4 남북정상회담 당시 있었던 일을 공개한 것이 국정원법 상 직무상 비밀 누설에 해당한다고 해서 2011년 1월 친정인 국정원으로부터 고발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역대 국정원장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비명에 죽거나 재판정에 섰던 셈이다. 형사처벌까지 받지는 않았어도 이런 저런 고초를 겪거나 구설에 올랐던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그 비율은 더 올라간다. 차장 출신으로 형(刑)을 살거나 자살한 사람들도 여럿 있다.
다른 나라의 예를 보아도 '한 나라 정보기관 수장의 말로가 이렇게 험악한 경우가 또 있나' 싶을 정도다. 소련의 경우 스탈린 밑에서 대숙청을 지휘했던 겐리흐 야고다, 니콜라이 예조프, 라브렌티 베리야 등이 자리에서 축출된 후 처형당하긴 했지만, 이후의 국가정보 수장들은 대체로 무사했다. 그러고 보니 북한의 경우에도 역대 국가보위부장이나 사실상 부장 역할을 했던 제1부부장들이 숙청, 처형되거나 자살하는 등 말로가 그리 좋지 못했다.
한국의 국가정보 수장들이 험한 말로를 겪은 것은 전(前) 정권에 대한 정치보복이라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국내 정치 개입, 정치사찰, 대통령 비자금 조성 등 외도(外道)를 했기 때문이었다.
5.16 혁명 주체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초대 김종필 부장은 국무총리를 두 차례, 국회의원을 9번 지내면서 한때 ‘3김 시대’를 이끌었다. 그는 형사 처벌을 받은 적은 없지만, 박정희 정권 내내 ‘잠재적 대권 도전자’로 간주되어 자신이 창설한 정보부의 감시, 가택수색 등을 받았다. 1980년 5.17조치 이후 부정축재혐의로 보안사에 연행되어 한 달여 동안 구금됐다가 재산헌납을 강요당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고,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해 7.4공동성명을 성사시키면서 이름을 날렸던 제6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퇴임한 후, 처벌을 우려해 한동안 해외를 떠돌았다. 그도 1980년 5.17 조치 후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보안사에 연행되어, 재산 헌납을 강요당했다.
정치학 교수 출신으로 김영삼 정권의 첫 안기부장을 지낸 제20대 김덕 부장은 재직 중 지방선거 연기 공작을 했다는 이유로 후일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군 출신으로 김대중 정권 시절 국정원장을 지낸 제23대 천용택 원장은 임동원, 신건 전 원장처럼 국정원 불법 도-감청 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으나,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기소를 모면했다.
노무현 정권 시절 국정원장을 지낸 김만복 전 원장(제28대)은 중앙정보부 공채 출신. 중정 공채 출신으로 국정원장에 오른 건 그가 처음이었다. 유신 시절 학원 사찰 경력 등에도 불구하고 그가 국정원장이 된 것은 부산출신 정권 실세들의 지원 덕분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는 재임 기간 중 아프가니스탄 인질 석방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홍보하는 등 총선 출마를 의식한 듯한 행보를 벌였다고 해서 자주 구설에 올랐다. 그는 2010년 10월 《다시, 한반도의 길을 묻다》라는 책에서 10.4 남북정상회담 당시 있었던 일을 공개한 것이 국정원법 상 직무상 비밀 누설에 해당한다고 해서 2011년 1월 친정인 국정원으로부터 고발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역대 국정원장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비명에 죽거나 재판정에 섰던 셈이다. 형사처벌까지 받지는 않았어도 이런 저런 고초를 겪거나 구설에 올랐던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그 비율은 더 올라간다. 차장 출신으로 형(刑)을 살거나 자살한 사람들도 여럿 있다.
다른 나라의 예를 보아도 '한 나라 정보기관 수장의 말로가 이렇게 험악한 경우가 또 있나' 싶을 정도다. 소련의 경우 스탈린 밑에서 대숙청을 지휘했던 겐리흐 야고다, 니콜라이 예조프, 라브렌티 베리야 등이 자리에서 축출된 후 처형당하긴 했지만, 이후의 국가정보 수장들은 대체로 무사했다. 그러고 보니 북한의 경우에도 역대 국가보위부장이나 사실상 부장 역할을 했던 제1부부장들이 숙청, 처형되거나 자살하는 등 말로가 그리 좋지 못했다.
한국의 국가정보 수장들이 험한 말로를 겪은 것은 전(前) 정권에 대한 정치보복이라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국내 정치 개입, 정치사찰, 대통령 비자금 조성 등 외도(外道)를 했기 때문이었다.
최근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과 회동했다 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두 사람이 만나 내년 총선 대책을 논의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서훈 원장 본인은 물론 정부-여당은 한 목소리로 그런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설사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국정원의 '흑역사(黑歷史)'를 기억하는 국민들은 그런 의혹 제기를 ‘합리적 의심’ 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참외밭에서 신발 끈 매지 말라’고 했다. 국정원장과 여당 싱크탱크 수장의 만남은 아무리 변명해도 ‘부적절한 만남’이었다. 서훈 현 국정원장은 공채 출신으로는 두 번째로 국정원 수장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아마 누구보다도 ‘국정원장 잔혹사’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국정원장 잔혹사’에 이름을 올리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또 한 명의 불행한 국정원장이 나오는 것은 본인이나 국정원, 그리고 국가에 비극이기 때문이다.
서훈 국정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