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전언은 너무 커서 계곡에 담을 수 없다 그저 온몸으로 맞을 뿐 홍가시나무도 황조롱이도 온몸을 맡길 뿐
나는 육신에 너무 오래 끌려다녔다 몸의 언어를 오독한 탓이다 발정 난 수캐처럼 이 술집 저 술집 떠돌아도 숙취의 다음 페이지는 읽히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시를 오래 잊었다는 생각을 한다 허공을 킁킁대며 너무 멀리 걸어왔으므로 내가 겪은 난독도 그저 주어진 것이려니 생각한다
파계사 골짜기에서 쏟아져 내리는 저 폭넓은 음역 일제히 귀 기울이는 느릅나무들 제 귀퉁이로 응답하는 집들 사람의 귀만 알 듯 말 듯 발화점 근처에서 맴돈다
카페 밖에 놓인 흔들의자가 제 이름으로 흔들린다
⸻계간 《시와 사상》 2021년 가을호 ------------------- 박현수 / 1966년 경북 봉화 출생. 199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 『위험한 독서』 『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 『사물에 말 건네기』. 평론집 『황금 책갈피』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