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시문화생활] 멀리 달아나기

[은이와나]

출처 : 여성시대 은이와나


좋은 글이라 같이 읽고 싶어서 가져왔어!


출처 : https://fhhhfriends.com/text

FHHH FRIENDS

멀리 달아나기 (2021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큐레이터 에세이)

카페는 구옥을 개조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건물 내장재부터 가구와 바닥까지 모두 어두운 빛깔의 합판으로 마감되어 있었는데, 샘이 날 만큼 과감하고 섬세한 디자인이었다. 회색 자갈로 가득 채워진 창밖 풍경은 눈에 거슬릴 것이 없어서 좋았다. 다가가기 쉽지 않아 보이는, 그렇지만 차갑지만은 않은 직원에게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한 주 동안 기다려온 평온의 시간이 이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얇은 책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엔 혼자 온 남자들이 많았다. 대체로 잘 갖춰 입은 남자들은 다리를 꼬고 앉아 얇은 책을 읽고 있었다. 남자들은 책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고, 커피를 마실 때에도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자세와 외모를 눈여겨보았다. 지나치게 정돈된 자세와 깔끔한 옷매무새, 절제된 시선… 그들의 모든 것이 연출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진짜로 책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딘가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염증이 밀려와 서둘러 카페를 빠져나와 버렸다.

싫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는 항상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진다. 부정적인 감정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특정한 집단을 소외시키고,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아주 쉽게 혐오의 감정으로 번지기도 한다. 그래서 싫어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긴 망설임 끝에 결국 삭제되고 만다.

우리 작업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늘 어렵다. 우리의 창작은 언제나 싫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물음을 들어왔지만 단 한 번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정말 무엇이 하고 싶은 것이냐?"라는 집요한 질문에 거짓으로라도 대답을 지어낼 수가 없었다. 실제로 하고 싶은 일은 항상 변하게 마련이며, 무엇을 하고 싶은 마음에 일관된 이유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우리는 메니페스토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거창한 목표를 지어낼 수도, 그것이 통할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일상’ 혹은 ‘평범함’처럼 무해한 단어안에 우리를 숨기는 것도 금물이다. 그런 단어들은 미디어에 의해 너무 많이 오염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싫어하는 것들을 수도 없이 나열하곤 했다.

“실제보다 부풀려진 언어를 싫어합니다. 흉내 내는 것을 싫어하고, 솔직하지 못한 것을 싫어하고요. 자본에 부역하는 건축을 싫어하고, 무력함을 소박함으로 착각하는 건축가들을 싫어합니다”

싫어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진짜 목적은 자신과 대상의 다름을 알리는 것에 있다. 싫어하는 대상은 일정 부분 자신을 닮아 있는 것들이다. 나와 조금도 닮지 않은 누군가를 미워 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내가 달아나고자 했던 곳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깔끔하게 차려 입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나는 그들과 다름을 알리기 위해서 누가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싫어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그들과 내가 다르지 않다면, 그래도 내가 무엇을 인지하고 있는지, 그래서 그들과는 어떻게 다른 지를 알리려고 한다.

싫어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진짜 문제는 싫어하는 대상을 나로부터 분리시키는 태도다. ‘혐오’ 역시도 그것의 가장 큰 문제는 ‘부정적인 감정’이 아닌 ‘분리’에 있다. 무언가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욕구를 느낄 때, 달아나고자 하는 대상은 언제나 내 안에 있는 것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미움의 대상을 타자화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것이며, 솔직하지 못한 이야기를 길게 하는 것은 아주 긴 광고를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다.

요약하자면, 나는 주말 오후 두 시에 카페에 앉아 남들을 의식하며 책을 읽는 사람이다. 우리는 실제보다 부풀려진 언어를 사용하고, 때로 흉내 내기도 하며, 솔직하지 못할 때도 있다. 자본에 부역하며, 때로 무력함을 소박함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다행히도 우리는 스스로가 그것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그것으로부터 멀리 달아날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말 오후 카페에서 느낀 감정은 너무나도 평면적인 것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 풍경이 되어버린 것 같았고, 카페의 분위기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협력자들로만 보였다. ‘욜로’, ‘딩크족’,’XX 충”과 비슷한, 나를 포함한 이곳의 모든 남자들을 정의 내리는 단어가 트위터 어딘가에 이미 있을 것만 같았다. 그들의 일상을 보는 것이 괴로운 것은 그들을 통해 나의 일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을 통해 바라본 나의 하루는 이미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풍경이었고 나의 여유는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는 여유였다. 나는 나를 정의하는 그 단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동지들을 버리고 재빨리 도망 쳐버린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무엇인가로부터 달아나려는 시도는 거의 모든 순간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폰으로부터, 일과 스트레스로부터,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광고로부터… 나는 특히 버릇처럼 들여다보는 인스타그램에서 극심한 권태를 느낀다. 비슷한 포즈와 비슷한 표정의 사진들을 넘기고 또 넘기다 보면 풀어헤쳐진 두루마리 휴지 같은 것으로 머리속이 가득 차버리는 기분을 느낀다. 피드에 반복해 등장하는 심플한 가구들과 비슷한 장소들, 관조하는 듯 무기력한 코멘트를 보면서 모든 사람의 삶이 하나로 수렴하는 현상을 목격한다. 모든 것이 뻔해지고 예측 가능해지는 것. 그것은 권태의 징조다. 나는 자꾸만 그것을 들여다보며,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달아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매일 아침 현관에 서면 다정한 기계음이 나의 권태를 깨운다. 반 년 전부터 대형 시공사가 만든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다. 이곳의 주민 대부분은 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고, 이곳의 모든 편의는 가족의 삶에 맞춰져 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학교와 학원이 밀집되어 있고, 그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작지 않은 마트가 있다. 아파트 관리인은 매일 아침 일곱 시 반부터 여덟 시 반까지 관리실 문 앞에 서서 출근하는 차량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이곳은 모든 위험요소가 제거된 곳이다. 차량은 모두 지하로 다니도록 계획되어 있고, 언제 위협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외부인은 비밀번호와 CCTV의 통제를 받는다. 행여 부딪히더라도 긁히지 않도록 난간엔 둥근 플라스틱 캡이 씌워져 있다.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존재인 흡연자들은 가장 엄격한 통제를 받는다. 그들은 집 밖으로 걸어 나와 아파트 단지 끄트머리에 있는 흡연장소에까지 와서 담배를 피워야 한다. 그들은 서있는 자세에까지 통제를 받아서, 흡연하는 동안 구부정한 자세를 유지해야만 한다. 이곳은 편의 시설로 도배되어 있다. 매일 아침 나의 권태를 깨우는 기계음은 현관 벽에 붙은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 목소리는 매일 아침 나에게 인사를 건네고 날씨를 알려준다. 화장실과 부엌과 거실 등 집안 곳곳에 화면이 설치되어 있고, 스위치에선 똑딱거리는 소리 대신 삐-빅 하는 전자음이 발생한다. 아파트는 공간을 벗어나 시간의 위험요소까지도 제거한다. 아파트 단지의 가격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주민들은 안정적인 주거를 기반으로 학군과 사교육의 끈을 붙잡고 다음 세대의 안정을 기약한다. 몇 달 뒤에도 몇 년 뒤에도 이 곳은 크게 바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믿고 있다. 그 믿음이 아파트 문화의 핵심이다. 매일 아침 현관에서 울리는 기계음이 반복해서 상기시켜주는 것은 내가 가장 망각하고 싶어 하는 그 사실이다. 내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다는 사실,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이곳에서 순응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잊기 위해 산다. 오직 단 하나의 진실인 죽음을 잊기 위해 산다. 우리는 죽음을 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린다. 죽음을 잊기 위해 바쁘게 일하고, 여가를 즐기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자식을 낳고 또 그 자식이 자식을 낳는 것을 보며 죽음도 갈라 놓을 수 없는 영생의 고리를 상상한다. 글과 그림과 건물을 남기며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삶을 상상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죽음이라는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너무도 똑똑해서 죽음을 잊지 못한다. 죽음 앞에선 돈도 희망도 노력도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죽음을 잊지 못하는 이들은 우울에 빠져버린다. 내 앞에 켜켜이 쌓인 수많은 날들이 두꺼운 지방처럼 느껴질 뿐이다.

‘건축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느냐?’라는 질문은 ‘무엇을 위해 사느냐?’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삶의 모든 행위는 잊기 위한 발버둥이다.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것. 그것만이 행위의 유일한 동기가 될 수 있다. 이대로 반복하다 결국은 끝나버릴 것이 자명한 생의 뻔한 패턴으로부터, 머리부터 발끝까지 간단한 단어로 정의 내려지는 인간 군상으로부터, 달아나고 달아나고 또 달아나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설명이다.

집의 한가운데에 거실이 있는 것. 거실 벽면에 커다란 텔레비전이 있고 그 반대편에 커다란 소파가 있는 것. 텔레비전 화면이 잠시 검은색으로 변하는 찰나, 화면을 통해 무표정한 얼굴이 반사되는 것.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그리고 집 안에서까지 조증에 걸린 기계의 목소리를 듣는 것. 모든 위험을 거세시킨 안전한 난간, 평평한 땅, 밤에도 대낮처럼 밝은 조명, 좋은 것으로 둔갑한 무해한 것들. 모든 남자가 남자답게 행동하고, 모든 여자가 여자답게 행동하고, 모든 아이가 아이답게 행동하는 것. 이런 ‘당연한’ 것 들로부터 벗어나 무궁무진한 세계로 향하는 것. 그것이 권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정말 ‘당연한’ 것들일까? 당연한 것을 덮어두고 사는 것이 당연해진 것은 아닐까?

양규와 한진은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이며, 내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건축가들이다. 2013년부터 지금까지 9년 동안 거의 매일을 함께 보내며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거의 모든 것을 헐뜯고 지내왔다. 우리가 헐뜯어 온 것들은 너무도 따분한 것 들이라서 그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은 지겨움에 휩싸여버린다. 가짜 돌로 치장한 타일 건물, 창문과 창문이 맞닿아 항상 커튼을 치고 살아야 하는 공동주거, 번쩍이는 재료로 치장했을 뿐 조금의 노력도 들이지 않은 고급 주거 등… 이것은 ‘꾹 참고 작성한 헐뜯는 것들의 리스트’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햇빛과 바람, 커뮤니티와 사생활과 같은 정말 당연한 것들을 외면해버린 결과물들이다. 아주 당연한 것조차 결여된 아파트 외벽에 새겨진 웅장한 문장과 신성한 이름을 보자면 그것을 키치라 불러야 할 지 모욕이라 불러야 할 지 헛갈릴 지경이다. 우리는 곧 염증을 느껴 차라리 말하기를 그만두곤 한다. 그냥 빨리 달아나버려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달아나려고 하는가? 이 글은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우리는 어디로 달아나야 한다는 명확한 목적지를 제시하지 못한다. 비판만 있을 뿐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진보의 한계라고들 한다.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무능함’, 혹은 ‘우유부단함’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사용한다면 나는 흔쾌히 동의할 수 있겠지만, ‘한계’라고 말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정확한 목표와 확고한 진리 아래 모든 것이 명확해진 세상이 오면, 그래서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일만 일어난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이름이 붙게 된다면, 그래서 더 이상 불필요한 것들, 정해지지 않은 것들이 남아 있지 않게 되는 세상이 온다면, 모든 ‘개인’은 한계에 부딪혀 버릴 것이다. 정해진 것들을 피해가며, 객관적인 진리보다는 개인적인 이야기에 집중해가며, 전략과 전술보다는 감각과 기억에 의존해 사는 것은 무궁무진함이다. 그것은 한계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이해 받지 못하는 이야기를 꺼내길 주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이해해버리면 그 다음부턴 모든 것이 뻔해져 버린다. 개요가 잘 정리된 글을 컴퓨터에 옮기는 것과, 이미 완결된 형태를 도면으로 옮기는 일은 더없이 지루하다. 명확하지 않은 것과 지극히 개인적인 것, 판단할 수 없는 것, 그리고 어느 면에서 보아도 다른 사건이 열어주는 혼란의 세계에 몸을 빠뜨려야만 한다. 그 안에서 나 조차도 이해하지 못할 실오라기 같은 감각을 붙잡고, 그것이 나를 어딘가로 이끌어 주길 기대해야 한다. 나는 마지막을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헐뜯을 순 있지만 공동작업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달아나고자 하는 곳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무엇 때문일까? 양규는 복수를 다짐하는 사람처럼 힘주어 설계한다. 양규는 아직 건축을 믿는다. 땅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치수와 도형의 함수관계를 탐구해가면서 진리를 찾듯이 건축을 한다. 그리고 가장 먼저 출근한 사람에게 밤새워 찾아낸 건축의 원리를 기쁘게 설명한다. 양규의 설명은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양규에겐 모든 부분이 중요하기 때문에 밤새워 생각한 모든 것에 대해 최대한 길고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그래서 양규는 늘 이해 받지 못하는 채로 남겨져 있다. 양규의 설명은 지루하지만 권태롭지는 않다. 권태는 누구나 편히 접할 수 있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에 깃들어 있다.

한진이가 최근에 설계한 단독 주택 공사현장을 방문했다. 동그랗게 뚫린 창문과 내부에서 바라본 둥근 하늘이 인상적이었는데, 건물 전체를 아우르는 유기적인 곡선이 아니었고, 부분 부분이 돋보이는 다분히 장식적인 곡선들이었다. 한진은 이 집의 이름을 ‘고안된 장식들’이라고 지었다. 너무 장식적인 거 아니냐는 놀림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고안된’이라는 설명을 덧붙였을 것이다. 한진은 장식을 통해 집안 곳곳에 기억될 만한 그림자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심스러운 제목과는 다르게 가벼운 의도를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누군가의 작업을 통해 그것을 만든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그것은 어느 정도 나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고안한 장식을 통해 인생은 연극이며 건축은 연극의 무대라는 사실이 자명해 보였다.

[크캐]

재밌다. 싫은 것들이 왜 이렇게 싫은지 정말 꼼꼼하게 뜯어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데에 항상 놀라곤 했는데 그게 어쩌면 핵심일 수도 있겠네. 잘 읽었어.

[요조]

재밌게 읽었어! 좋은 글 공유해줘서 고마워

[럭키쿵야]

고마워 북마크 해두고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