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궁이불 때다 8만4천 번뇌 ‘전소’
세속과 탈속의 경계일까. 맨몸을 드러낸 산천이 강원도 평창 오대산에 접어들자 설경으로 바뀐다. 온통 하얗다. 하늘은 안과 밖이 없지만 오대산 안팎의 산천은 경계가 엄연하다.
오대산 본찰인 월정사에서 차로 30분가량을 오르니 상원사다. 조계종의 초대 종정인 한암 선사(1876~1951)가 1926년 당시 깊은 산골이던 이곳에 들어가 열반할 때까지 머문 곳이다.
서울 강남 봉은사 조실이던 한암은 일본 불교와 통합을 꾀하던 친일 승려가 도움을 요구하자 “차라리 천년 동안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백년 동안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에 들어갔다. 한암은 그 뒤 열반 때까지 26년 동안 한번도 산문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21살 때 금강산에서 출가한 한암은 대도인 경허 선사의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 헤맨 끝에 23살 때 경북 금릉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를 친견한다. 경허는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는 〈금강경〉 한 구절로 아직 외형만을 향하던 청년 한암의 심안을 열어주었다.
친일 승려 도움 구하자
“앵무새는 되지 않겠다”
오대산 깊숙한 곳으로
전쟁 총알 날아들어도
꼿꼿한 좌선
26년간 산문밖 안 나가
보름간 곡기끊고 좌탈열반
한암은 근대 한국 불교에서 가장 승려다운 승려로 첫손에 꼽힌다.
그만큼 일상사에서 그의 삶은 털끝만큼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런 삶의 자세는 스승 경허에 대한 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경허는 바람이었다. 한곳에 머무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한암도 4개월이나 그의 뒤를 좇아 이 절 저 절을 다닌 끝에야 경허를 만날 수 있었다. 경허는 누구에게도 집착하는 법이 없었다. 말년에 홀연히 함경도 삼수갑산에 머리를 기르고 숨어든 그를 애제자 수월이 찾아왔을 때도 방문을 열지 않은 채 “나는 그런 사람 모른다”는 말 한마디로 돌려보낸 경허가 아니던가.
그런 경허가 한암에게만 예외적인 모습을 보였다. 수도암과 해인사에서 1년을 함께한 뒤 경허는 한암과 헤어짐을 너무나 아쉬워했다.
“그의 성행은 진실하고 곧았으며 학문은 고명했다. 함께 추운 겨울을 서로 세상 만난 듯 지냈는데 오늘 서로 이별을 하게 되니, 보내는 회포를 뒤흔들지 않는 것이 없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진실로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랴’ 하지 않았던가. 슬프다. 그윽한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이 되랴!”
그러나 한암은 오히려 ‘만고에 빛나는 마음의 달 있는데, 뜬구름 같은 뒷날의 기약은 부질없어라’라는 시로 화답한 채 스승을 좇지 않았다. 경허와 한암은 그 뒤 다시 만나지 못했다.
한암은 경허의 천거로 불과 29살의 나이에 통도사 내원선원 조실로 추대됐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을 자각하던 그는 평양 맹산 우두암에 들어가 정진하던 중 아궁이에 불을 붙이다가 8만4천 번뇌 망상을 찰나에 연소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36살. 그러나 이 깨달음조차 인증해줄 스승 경허가 이미 없음을 슬퍼하고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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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앉은 채로 열반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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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은 훗날 사형 만공이 주도한 〈선사 경허 화상 행장〉을 쓰면서 “오호라! 슬프도다. 대선지식이 세상에 출현함은 실로 만겁에 만나기 어렵다”고 한탄하면서도 “당신의 본분사는 허물이 없으나 뒷사람이 (행동을) 배울까 두렵다”고 염려했다.
한암의 행장과 일화를 정리 중인 월정사 주지 정렴 스님은 “눈을 뜨지 못한 사람들이 잘못 판단해 (경허의) 겉모습만을 따름으로써 한국 불교에 폐단이 생길 것을 우려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한암은 법랍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세랍으로도 여섯 살 연상이던 사형 만공 선사가 1946년 입적했을 때 문상하지 않았다. 너와 나, 아름답고 추악함의 경계를 넘은 그들의 견처를 의심하지 않았으나 후학들이 술과 고기를 먹고 기생집에 드나드는 행실을 미화하고 본받는 것을 차단해 청정 승가의 전통을 세우기 위한 결단이었다.
한암은 온종일 좌선하면서도 다리를 펴는 법조차 없었다. 그는 어떤 경계에서도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한국전쟁으로 오대산 상공에서 수없이 총탄이 날아들어 대중들이 혼비백산해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도 어느 날 두 승려가 술의 절집 은어인 ‘반야탕’을 마시고 돌아오자 직접 회초리를 들어 무섭게 내리쳤다.
당시 월정사 주지인 지암 이종욱은 조계종 행정수반인 종무원장이었다. 그가 출타했다가 돌아오면 오대산의 승려들이 산문 밖까지 나가 고을 원님처럼 가마에 태워 모셔오곤 했다. 어느 날 노승 한암이 주지를 마중하는 대중들과 함께 산문 밖으로 나왔다. 주지가 황송해 “큰스님께서 어인 일이냐”고 묻자 “이 늙은이도 대중의 일원이니 함께 마중 나온 것”이라고 답했다. 주지가 그 뒤 다시 가마에 오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꾸중하지 않고도 자신의 행실을 돌아보게 한 것이다.
한암은 15일 동안 곡기를 끊으며 좌선하다 그대로 열반에 들었다. 열반을 미화하기 위해 일부러 좌탈열반을 조작하는 일까지 생기는 세태 속에서도 그의 삶을 지켜본 선승들은 그의 좌탈열반에 대해서만은 의심하지 않는다.
흐트러지는 삶의 자세를 곧추세우는 한암의 서릿발이 매섭지 않은가. 적멸보궁에서 몰아치는 칼바람이 서릿발처럼 살을 에며 미망을 베고 지난다.
오대산/글·사진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한암 스님의 선문답 21조 1
조계종 초대 종정 방한암(方漢岩 1876~1951) 대종사의 문집(제명: 마음달)이 새롭게 꾸며져 발간되었다. 새 문집은 기존의 한암집(명정스님刊)과는 달리 월정사(주지 : 현해) 문도들이 총동원 되다시피해 1년 여에 걸쳐 흩어진 자료를 모아 엮은 것으로 한암집에서 미처 발굴치 못했던 자료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한암 대종사는 생전에 허명(虛名)과 난설(亂舌)을 특히 경계하여 가급적 저술을 삼가했고 그 흔한 법어집조차 남기지 않았으며 27년 동안 山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분이라서 이번 문집의 간행은 더욱 의의가 크다. 특히 새 문집의 백미(白眉)라 할 「선문답21조」는 간화(看話)와 반조(返照)의 필요성, 구경의 경지등을 간명직절하게 규명한 것으로 수행에 힘쓰는 후학들에게 더 없는 보감(寶鑑)이 아닐 수 없다.
선문답21조의 원문은 한자로 되어있으나 독자의 편의를 위해 금강선원원장 혜거스님의 번역문을 싣는다.
제1문 참선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떠한 관계가 있습니까? 또한 참선을 하지 않아도 무방한 것입니까? 아니면, 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답 달마1)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도요. 도가 곧 선(禪)이다.”고 하시니, 선(禪)이란 곧 중생의 마음임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중생심에는 두 가지의 구별이 있으니, 하나는 청정한 마음이요, 둘째는 물든 마음이다. 물든 마음은 무명삼독(無明三毒)의 마음이요, 청정한 마음은 무루진여(無漏眞如)의 본성이다. 무루진여를 염하고 불이(不二)를 수순(隨順)하는 것은 제불(諸佛)과 같아서 동요가 없는 해탈이요. 무명삼독을 쫓아서 많은 악업을 지은 자는 육취(六趣)2)에 빠져 영겁에 윤회하는 것이니, 청정한 마음은 사람의 바른 길이요 편안한 집이며, 물든 마음은 사람의 험한 길이요 불구덩이이다.
어찌하여 지혜로운 자가 바른 길을 버리고 편안한 집을 비워둔 채 험한 길로 나아가며 불구덩이에 빠져 만겁의 괴로움을 받으려고 하는가. 그대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참선이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참(參)이란 합(合)함이니, 자성에 합하여 청정한 마음을 보양(保養)하고 바깥으로 치달려 구하지 않음이다. 오직 바라건대 일체 중생이 다 함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여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달아서 다시는 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속히 불과(佛果)를 증득하기를 바라고 바라는 바이다.
제2문 이미 참선을 하고자 한다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까? 답 참선을 하는 사람이 일단대사(一段大事)의 인연을 밝히고자 한다면, 맨 처음 자신의 마음이 부처이며 자신의 마음이 법이며 구경(究竟)에 다름이 없음을 믿어서 철저하게 의심이 없어야 한다. 만일 이와 같이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면, 비록 만겁동안 수행을 한다 할지라도 마침내 진정한 대도(大道)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보조선사3)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이 있다고 말하여 이러한 마음을 굳건히 고집하면서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비록 진겁(塵劫 :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소신연비(燒身然臂)하며,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고, 피를 내어 경전을 베끼며, 장좌불와(長坐不臥)하고, 묘시(09~11시)에 일종식(一種食)을 하며, 그리고 일대장경(一大藏經)을 모두 읽으며, 갖가지 고행을 한다 할지라도,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격이기에 스스로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 라고 하셨으니, 이는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닦아서 스스로 불도를 이루는 것이 제일의 요체(要諦)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부처는 곧 외불(外佛)이니, 나에게 어찌 부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제불(諸佛)이 나의 도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제3문 이미 초심(初心)을 지녔다면, 어떻게 공부를 하여야 진실한 참구가 됩니까?
답 상근기(上根機)의 큰 지혜를 가진 이는 하나의 기연과 경계에서 이를 잡아 곧바로 사용하므로 굳이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지만, 만일 참구를 논한다면 마땅히 조주(趙州)4)의 '무자(無字)'5)와,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6)와, 동산(洞山)7)의 '마삼근(麻三斤)'8)과, 운문(雲門)9)의 '마른 똥 막대기'<乾00*>10) 등 맛이 없는 말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이 화두를 끊임없이 들어 마치 모기가 무쇠 소에 앉아 주둥이를 박지 못할 곳에까지 몰입하듯 하여야 한다.
만일 조그마한 차별의 생각과 터럭 끝만한 계교와 헤아림이 그 사이에 동하면, 옛 사람이 말한 “잡독이 마음에 침투하여 지혜를 손상한다.”함이니 학인이 가장 먼저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나옹11)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생각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멸(滅)하는 것을 생사(生死)라 하니, 생사의 즈음에 당하여 힘을 다해서 화두(話頭)를 들면 생사가 곧바로 다할 것이니, 생사가 곧바로 다한 것을 적(寂)이라 한다. 적(寂) 가운데 화두가 없는 것을 무기(無記)라 하고 적(寂) 가운데 화두가 어둡지 않는 것을 영(靈)이라 말하나니, 공적영지(空寂靈知)가 부서짐이 없고 혼잡됨이 없으면 곧 바로 이루어진다.”고 하니, 학인은 이 말을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제4문 이미 여실(如實)히 참구하였다면, 어떠한 것이 여실하게 힘을 얻은 것입니까?
답 옛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힘이 안 드는 곳이 곧 힘을 얻는 곳이다.”고 하니, 화두가 의심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의심이 되고, 화두를 들지 않아도 스스로 들어짐에 이르러서야 육근(六根)의 문이 자연히 툭 열리어, 홀로 드높고 드높으며, 평탄하고 평탄하게 되어, 마치 달빛이 시내 물결 속에 투사되어 부딪쳐도 흩어지지 아니하고 흔들려도 잃지 않음과 같은 때에 이르러야 대오(大悟)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터럭 끝만큼이라도 지각의 마음을 내면 순일(純一)한 오묘함이 끊어져서 대오(大悟)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니, 간절히 이 점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제5문 이미 여실하게 힘을 얻었다면, 반드시 깨달음이 철저<大悟徹底>할 것이니, 어떠한 것이 여실하게 깨달음이 철저한 경지입니까?
답 옛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분명하고 분명하게 깨달은 법이 없을지언정 깨달은 법이 있으면 곧 미혹한 사람이다.”하였고, 또 다시 “깨달으면 도리어 깨닫지 못했을 때와 같다”고 하니, 만일 깨달음이 철저한 경지가 있다면 곧 이것은 깨달음이 철저한 경지가 아니다. 그렇다면 영운(靈雲)12) 선사가 복사꽃을 보고 깨우친 것과, 향엄(香엄)13) 선사가 위산(*山)에게 절을 올린 것과, 현사(玄沙)14) 스님이 손가락을 접질린 것과, 장경(長慶)15) 스님이 주렴을 걷어 올렸던 것 등의 많은 큰 스님들이 깨쳤던 일은 모두 거짓으로 전해온 것일까?
앙산(仰山)16) 이 말하기를.
“깨달음이란 없지 않으나 제 2의 경지가 됨을 어찌하리오”라고 말하니, 절반 쯤 깨달음을 말한 것이다.
현사(玄沙)스님이 말하기를.
“감히 노형을 보니 아직은 철저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니, 실로 노파심이 간절한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깨달음이 철저한 경지가 있다는 것이 옳은 것일까. 깨달음이 철저한 경지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어떻게 하면 이를 알 수 있을까? 말없이 한참 동안 있다가 게송을 읊었다.
해천(海天)에 밝은 달이 처음 솟아난 곳에 암벽의 원숭이 울음 그칠 때.
제11문 온 누리의 사람들이 색을 보고 색을 초월하지 못하고 소리를 듣고 소리를 초월하지 못하니, 어떠한 것이 소리와 색을 초월한 것입니까?
(※ 이 아래의 열 가지 물음은 나옹조사의 물음을 그대로 인용한 것임)
답 성색(聲色)을 초월하여 무얼할까.
(※이 아래의 열 가지 물음은 나옹조사가 공부의 절목(節目)을 물은 것이기 때문에 착어(着語)를 붙이는 데 그칠 뿐이다.)
제12문 이미 소리와 색을 초월하였다면 반드시 공부를 하여야 할 것이니, 어떻게 바른 공부를 해야 합니까?
답 벌써 삿됨이로다.
제13문 이미 공부를 하였다면 반드시 공부가 익숙해야 할 것이니, 공부가 익숙할 때에는 어떠합니까?
답 밥이 익는 것은 그럴싸 하지만, 공부가 익는 것은 아니다.
제14문 이미 공부가 익숙하였다면 다시 더욱 콧구멍을 잃어야 할 것이니, 콧구멍을 잃어버릴 때는 어떠합니까?
답 익숙된 공부 이전에도 또한 콧구멍이 있는가, 없는가.
제15문 콧구멍을 잃어버리면 냉랭하고 담담하여 전혀 맛이 없고 힘이 없어 의식이 미치지 못하고, 마음이 행하지 않는 이러한 때에도 또한 환신(幻身)이 사람에게 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하니, 여기에 이르러서는 어떠한 시절입니까?
답 환화공신(幻化空身)이 곧 법신(法身)이요, 무명실성(無明實性)이 곧 불성(佛性)이다.
제16문 공부가 이미 동정(動靜)에 사이가 없고 자나깨나 항상 한결같아서, 부딪쳐도 부서지지 아니하고 방탕하여도 잃지 아니하여, 마치 개가 뜨거운 기름 솥을 넘보는 것처럼 핥으려고 해도 핥을 수 없고, 버리려 해도 버리지 못할 때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 절대 자만하지 말라.
제17문 갑자기 120근의 짐을 부려버리는 것처럼 졸지에 꺾이고 갑자기 끊어진 때에 이르러서는, 어떠한 것이 자성(自性)입니까?
답 장한(張翰)이 강동으로 떠나가니, 바로 가을 바람이 불어온 때이다.
제18문 이미 자성을 깨쳤다면 반드시 본용(本用)과 응용(應用)을 알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것이 본용과 응용입니까?
답 몸을 감춘 곳에 자취가 없고, 자취가 없는 곳에 몸을 감추지 말라.
제19문 이미 본성의 작용을 알았다면 생사를 초탈해야 하니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죽음을 말함)에는 어떻게 초탈해야 합니까?
답 잠꼬대 하지 말라.
제20문 이미 생사를 초탈하였다면 갈 곳을 알아야 할 것이니, 사대(四大)가 각기 나누어짐에 어느 곳을 향하여 가야 합니까?
답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니라.
제21문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 온다면, 어떻게 제접하시렵니까?
답 너에게 대도(大道)를 체득하도록 하여줄 것이다.
또 물었다.
“이미 이러한 사람인데, 어떻게 대도를 가르쳐 줄 수 있을까?”
답하였다.
“다만 이 하나의 봉합(縫合)을 오히려 어찌 할 수 없다.”
다시 물었다.
“위에서 말한 스물 한 가지의 대답은 철저하고 철저하지만 이후의 한 방망이는 어떻게 상량하시렵니까?”
답하였다.
양화병(養化柄)을 치면서 말하기를,
“무슨 견해를 일으키는가.”
또 물었다.
“나를 잘못 치지 마소서.”
답하였다.
“그만 두어라. 그만 두어… . 말하지 말라. 나의 법은 오묘하여 생각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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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님! 감사드립니다..._()()()_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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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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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