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의 히메유리(1987, 요나조 노부코), 44.
● 제 IV부 제7장 나카타니, 이토스로 옮기다.
6월 초, 몇 개의 1인용 참호가 이토스 마을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깊이가 1미터 반, 폭 1미터인 1인용 참호는 일본군이 한두 달 전에 판 것인데, 오키나와전의 상황 악화로 군대는 어딘가로 이동해 버린 것 같다.
선생님들은 이 1인용 참호가 벙커의 혼잡함을 해결하는 데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참호는 학생들의 멋진 은신처가 되었고, 휴식 장소가 되기도 했다. 1인용 참호에 두 사람이 한조로 들어가는데 상대를 서로 선택해도 좋다고 했다. 나와 세츠코(節子)는 서로를 선택했다.
우리 둘은 시끄러운 벙커를 나와 조용한 별천지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뻐했다. 그날 참호에 틀고 10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우치야마(内山) 선생님의 얼굴이 참호 위에 나타났다. 선생님은 참호를 순찰하고 있던 중이었다.
"너희들, 괜찮아?"라고 선생님이 물었다. "괜찮아요, 선생님. 재미있어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명령 없이는 여기를 떠나서는 안 돼"라고 말한 후 선생님의 얼굴이 사라졌다. 한동안 세츠코와 나는 이 새로운 참호를 즐겼다. 그러다 지루해지고 심심해 지기도 했다.
그러한 날들이 지나갔다. 함포와 폭탄이 떨어져 작렬했다. 매일 참호 속에 숨어 대피하기를 반복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한 군인이 겪은 참호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군인이 말하기를, 무서웠던 것은 위에서 직격탄으로 당하는 것도 아니었고, 부근에 폭탄이 떨어져 생매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직격이나 생매장은 죽음을 의미했지만, 정말 무서운 것은 외톨이가 되는 것이라고 들었다. 개인참호 안의 고립 상태는 말할 수 없는 고독감에 사로잡힌다는 것이었다. 나는 세츠코와 함께 있었으니 외로울 리가 없었지만, 지루함만은 어쩔 수 없었다. 정오 무렵이 되면 세츠코도 나도 서로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나카타니(中谷)를 생각했다. 나는 그가 내게 자신의 겉옷을 덮어준 것을 떠올렸다. 어떻게든 그를 만나러 갈 방법은 없을까? 우치야마 선생이 명령 없이 아무 데도 가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다음 명령이란 해질무렵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해질녘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24시간 훈련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리고 또 육군 병원의 종군 간호사로서 매사에 참을성 있게 기다릴 수 있을 것이고, 사사로운 감정에 좌우될 리는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카타니를 꼭 만나고 싶었다. 나는 세츠코의 얼굴을 보았다.
내 여동생처럼 귀엽고 사랑하는 세츠코, 나는 그녀를 믿었다. 세츠코를 혼자 남겨두고 나는 참호를 나왔다. 대낮의 적기는 대담하게 저공으로 땅을 핥듯이 날면서 사정없이 총알을 내뿜으면서 날아가는 것이었다.
비행기 소리가 다가올 때마다 숨을 곳을 찾아 나는 나무 그늘로 들어가 몸을 숙이고 머리를 감쌌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땅 위에 웅크리고 앉아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기만 했다. 머리만 지키면 어떻게든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날은 마에다(前田)까지 가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
마에다는 어느 때보다 조용했다. 나카타니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향하여 걸었다. 그곳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설레였다. 적의 비행기가 나타나자 가슴의 두근거림이 가라앉았다. "아가씨 조심해요" 고요함을 깨고 목소리가 울렸다. "오늘은 비행기가 많아요.방금 전까지 하늘 가득 날고 있었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빨리 어딘가에 숨어 있어요”
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가축우리 구석에 숨어 있는 군인이 보였다. 사방이 두꺼운 돌담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었다. 마을에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는 숨을 곳을 찾아 마을을 떠난 것이었다.
나는 나카타니가 아직 집에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집에 도착했을 때 안에 남자가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일어나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바닥마루에 누워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나카타니였다. 나는 툇마루 돌계단에 뒤로 돌아 앉았다. 바닥마루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카타니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가능한 한 못본 채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 잘 왔네. 올라와요. 신발을 벗고.” 나카타니가 밝은목소리로 말했다. 뒤를 돌아보니 조금 전의 군인은 모습을 감추고 없었다. 나와 나카타니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일까.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가 나카타니가 권하기도 전에 마루 위에 누워버렸다. 나카타니도 내 옆에 누웠다. 우리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적의 비행기가 날아가고 함포가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나는 나카타니에게 친밀감을 느꼈고, 매우 행복해 했다.
"모두들, 어디로 갔어요?" 내가 입을 열었다. "벙커에 숨기라도 했겠지"라고 나카타니는 대답했다. 두 사람은 또 입을 다물고 있다가 "정말 이토스로 갈 생각입니까?"라고 내가 묻자 "이토스로 옮기고 싶어"라고 나카타니가 답했다. 적의 비행기가 총을 쏘아대며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가고 있었다.
마에다 마을은 내일이면 초토화 될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가주마루 나무잎의 그늘이 감긴 눈 위에서 흔들거렸다. 갑자기 나카타니가 일어났다. "이봐, 그기 뭐 하고 있는 거야"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도 눈을 뜨고 일어났다. 그가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을 처음 들었다.
그는 부엌의 덧문을 떼어내려는 농부를 향해 소리치고 있는 것이었다. "이, 똥거지야, 덧문을 떼지 마라"고 나카타니는 말했다. "부탁합니다" 라고 농부는 말을 더듬거렸다. "벙커 입구를 막을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는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도둑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 알고 있겠지." 라며 나카타니는 농부의 얼굴 앞에 주먹을 내밀었다. "용서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하고 농부는 부엌 뒤의 대나무 덤불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나카타니가 돌아와서 내 옆에 다시 누웠다.
나는 얼굴을 돌려 쌀쌀맞은 태도를 취했다. "왜 그래?" 하고 나카타니는 내 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아무것도 아니예요"라고 나는 쌀쌀맞은 대답을 했다. 나는 그에게 얼굴을 돌린 채로 있었다. 속담이 생각났다. "저 목소리로-도마뱀을 먹다니- 두견새(외모와 달리 거칠다는 비유)"
잘생긴 얼굴로 신사적인 외모의 나카타니가 왜 난폭한 행동을 했을까. 저런 험한 말을 나카타니로부터 아직 들은 적이 없었다. 어느 쪽이 진짜 나카타니일까, 겁에 질린 노인 농부의 얼굴에 주먹을 들이대는 나카타니가 진짜 그인가.
아니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이는 나카타니가 진짜 그인지. 내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에 걸린 것은 나카타니가 난폭한 태도에서 갑자기 상냥한 태도로 바뀐 것이었다.
그가 불성실한 인간인 것처럼 보였다. 늙은 농부를 향해 도둑이라고 말할 권리가 그에게 있는 것일까. 그 자신이 이 집을 훔치고 있는데... 만약 농부가 도둑이라면 그 또한 도둑일 터였다.
"그렇구나, 노부코 씨는 졸리지 않구나." 나카타니는 혼자 중얼거렸다. 내 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인가. 그는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게 할 기회도 기다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졸리지 않아. 맞아, 좋은 생각이 있어. 노부코 씨와 지금부터 함께 이토스로 가는 것은 어떨까."
그는 일어나서 상의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나에게 덮어 준 그 상의였다. "길 안내를 부탁할게요" 라고 그는 말했다. 눈을 뜨고 그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 내 마음은 스르르 풀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석양의 시골길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남자와 함께 걷고 있었다. 발에 닿는 부드럽고 따뜻한 시골길이 기분 좋았다. 나는 일본 여성들이 그러듯이 남성의 뒤에서 두세 걸음 떨어져 걸어갔다. 앞을 걷는 나카타니의 어깨에 매고가는 큰 등짐자루가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흔들리는 것을 보고 내 마음도 두근거렸다.
그의 아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노부코 씨" 라고 그가 나를 부르며 내 심중을 짐작이라도 한 듯이 "전쟁이 끝나면 당신을 내 아내로 만들고 싶어." 물론 농담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귀까지 붉어지며 기뻤다.
이토스에 도착했다. 그러나 나는 세츠코가 아직 혼자 기다리고 있는 1인참호로 바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좀더 나카타니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래서 인적이 드문 곳을 골라 걸었다. 우리는 머물 수 있을 것 같은 집을 찾아다녔다. 집이라는 집은 대부분 타버렸지만, 집 옆에 있는 별채 오두막을 발견했다.
오두막은 비어 있는 것 같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어깨에서 짐 자루를 내려놓으며 나카타니가 내 얼굴을 보았다. 그 눈빛을 보고 부끄러워져서 나는 얼굴을 붉혔다. 우리 둘은 퍼질고 앉아 지친 다리를 주물렀다.
한 노파가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 너희 부부인가"라고 물었다. "아니오" 라고 나는 즉시 대답했다. "당신은, 이 오두막의 주인인가요" 라고 나카타니는 되물었다.
"그래요. 물건을 가지러 돌아왔어. 이집 사람들은 아직 벙커에 있어요. 군인, 그리고 아가씨, 여기에 오래 있으면 곤란해. 이집 사람이 곧 돌아올 거요. 우리, 이 오두막에 아직 살고 있으니까."
오래된 그을음 투성이의 쇠 냄비가 오두막 구석의 작은 아궁이에 걸려 있었다. 아궁이 옆에 땔감으로 쓰는 사탕 수수대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할머니, 잠시 여기에 쉬게 해주세요. 쉴 수 있는 곳을 찾을 때까지만요. 이 아가씨는 벙커가 있기 때문에 아직 괜찮지만, 나는 아파서 쉴 곳이 필요해요."
"이 사람을 쫓아내지 마세요. 2~3일만이라도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라고 나도 호소했다. "꼭 2~3일이야" 라고 말하며 노파는 떠났다. 33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