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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9. 25. 큐티
누가복음 2:1 ~ 14
구유에 누이신 그리스도
관찰 :
1)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는 역사적인 배경
- 1절.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a. “그 때에”. 누가복음 1장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구약과 신약이 이어지는 중차대한 시점을 긴장감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b. 그 시점이 역사적으로 허구의 시간이 아니라 역사의 실존 인물인 “가이사 아구스도”가 온 천하에 호적을 하라고 명했던 바로 그 시점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c. “가이사 아구스도”(Καίσαρος Αὔγουστου, 카이사로스 아구스투), '카이사로스'는 하나의 인명일 수도 있고 후대적 용법에서처럼 칭호일 수도 있습니다. 아구스도는 원래 라틴어인데 헬라어로는 보통 '황제'(σεβαστός, 세바스토스, 행 25:21, 25)로 번역되며 여기서는 인명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아구스도 황제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입니다. 그는 B.C. 27 ~ A.D. 14년 까지 로마의 황제로 있었습니다.
d.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의 이름을 따라 가이우스 율리우스 시이저(Gaius Julius Caesar)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옥타비우스는 B.C. 27년에 로마 원로원으로 부터 '아우구스투스'('위대하고 고귀하며 지극히 숭배받는' 이란 뜻)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며, 그 후 그는 시이저 아우구스투스로 명명되고 최고의 권위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탁월한 통치 능력과 현명하고 훌륭한 정치 및 행정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점령지에 대한 정책의 일환으로 점령지의 지방 자치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기도 했으며, 점령지의 문화와 종교, 생활 풍습등을 인정해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나라의 법률까지도 로마법에 비추어 무리가 크게 없는 한 인정해 주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술, 문화, 건축 등을 장려하기도 했으며 그 자신이 또한 위대한 건축가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정책과 통치로 인해 전에 없이 오랜 세월동안 평화가 지속되었습니다. 그러한 공로로 옥타비아누스는 '자비로운 정치가', '로마의 대부'로까지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고 승원장(Pontifex Maximus) 또는 대제사장(Highest Priest)이란 칭호를 받아들여 모든 종교의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살해당한 자신의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를 신격화하여 그를 기념하는 사원을 건립하여 그를 신으로 받들도록 명령하기도 했습니다.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기초를 쌓으므로 옥타비아누스는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범했습니다.
e. 한편 탁월한 정치 지도자이며 행정가인 그가 자기에게 속한 나라들이 무질서하다는 것을 알고는 로마에 속한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실시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인구조사의 실시로 말미암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 5:2의 예언을 성취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 2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a. 누가는 이 기록의 진실성을 위하여 역사적인 실제 사건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b. “구레뇨”(Κυρήνιου, 쿠레니우)는 B.C. 12년에 마르마리대(Marmaridae)를 군사적으로 장악하여 집정관이 된 후, 구레뇨는 갈라디아의 남쪽 접경에 있던 산적떼의 후손인 호모나덴세스(Homonadenses)족을 정복했습니다. 그 후 그는 A.D. 3 ~ 4년 가이우스 시이저(Gaius Caesar)의 고문역을, A.D. 6 ~ 9년에는 시리아의 황제 파견관을 역임한 후 A.D. 21년에 죽었습니다.
c. “처음”(πρῶτη, 프로테)은 ‘처음’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이전에’라는 의미로도 종종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이전에’라는 의미로 번역되는 것이 더 옳습니다. 그렇기에 2절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이 되기 이전에’라고 번역되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구레뇨가 A.D. 6년에 인구조사를 한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처음’으로 번역을 할 경우 누가가 실수한 것이 되고, 당시의 사람들이 그러한 사실을 지적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으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d. 누가는 “우리에게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자세히 살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누가의 이 역사에 대한 더욱 분명하게 부연설명하고 있는 것이 착각 속에 실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 3절.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a. 인구 조사는 유대의 전통에 따라 각 사람의 고향에서 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b. 원래 로마법은 본인이 거주하는 지방에서 인구조사를 하도록 되어있었지만, 로마의 지배하에서도 유대인들이 이렇듯 불편을 감수하면서 자신들의 방식으로 인구조사를 하는 것은 민족적 자존심의 발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이러한 실제적인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을 기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2)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심
- 4절.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a. “베들레헴”은 다윗이 자라난 곳, 다윗의 고향입니다. 이곳에 영적 다윗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심은 에스겔 34:23 ~ 24절의 예언과 미가서 5:2의 예언이 모두 성취되는 것입니다.
- 5절.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a. 원래 로마법의 상황에서는 여자도 호적을 등록해야 하지만, 그 고향까지 가지는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해산이 가까운 몸을 이끌고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약 144km의 여행을 한 것은 드러나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b.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마리아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많이 퍼졌던 것을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정혼한 상황에서 임신을 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들 부부는 부정한 사람들로 여겨졌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을 등록하기 위하여 베들레헴으로 함께 가게 됨으로 그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거의 상쇄하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 6절.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a. “해산할 날”이 지금의 12월 25일 즈음 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기독교회에서는 성탄절을 전승에 따라 보통 겨울로 잡습니다. 이것이 3세기부터 문제시되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5월 20일을 제안했었습니다. 실제로 현재 별자리 등을 역으로 뒤돌려 당시의 천체를 연구하는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4월 말 ~ 5월 말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b.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킨 것은 A.D. 336년부터였습니다. 서방에서 이날을 택한 것은 로마신인 '정의의 태양'(Sol Invictus) 탄생일에 대치한 것이었습니다. 동방 교회에서는 주현제 즉 동방의 현자들이 도착했다고 하는 날(Epiphania manifestation, 1월 6일)에 예수의 수세를 기념하다가 4세기 부터는 예수의 탄생도 연결시켰습니다. 그리고 5세기 중엽부터는 동방 교회도 거의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켰으나 예루살렘 교회는 549년까지도 1월 6일을 크리스마스날로 지켰습니다.
- 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a. 누가는 분명히 “외아들”이 아닌 “첫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뒤 계속해서 자녀들을 낳았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후에 계속해서 동정을 지키며 자녀를 낳지 않았다는 주장은 근거없는 이야기며 이는 마리아에 대한 지나친 의미부여와 경외심에서 나온 잘못된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b. 예수님의 여러 형제와 여동생들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눅 8:19, 20; 마 12:46, 47; 13:55, 56; 막 3:31, 32; 요 2:12; 7:3, 5, 10; 행 1:14).
c. 당시의 팔레스틴의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예수님이 태어나셔서 뉘이신 이 구유는 나무로 되었다기보다는 돌로 된 구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무는 그곳에서 비싼 재료이고, 돌은 상대적으로 싼 재료였기 때문입니다.
d. 돈이 있었다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여관에서 머물 수 있었겠지만, 재정적으로 형편이 좋지 않았던 요셉과 마리아는 마리아가 임신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갓 태어난 아기를 말구유에 누이는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e. “구유”(φάτνη, 파트네)는 누가복음에서만 4번 나옵니다(2:7, 8, 16; 13:15). 이 말은 누가는 이 사실을 중요한 관점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유는 왕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당시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와 비교되는 가운데, 세상의 왕의 화려한 왕실이 아닌 가장 낮고 천한 곳에 태어나심을 상당히 의도적이고 원색적으로 비교하여 드러내고 있는 모티브로서 사용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구유는 이렇듯 아무데도 머리 둘 곳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자이신 예수님의 겸손과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3) 들판에서 벌어진 예수님 탄생 축하 쇼
- 8절.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a. 베들레헴 지역은 당시의 대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서 드려지는 제사 제물의 매점매석을 위하여 키우는 양들이 있던 곳입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등장하는 목자들은 자신들의 양떼를 지키는 자들이 아니라 바로 대제사장들의 부패한 종교적 탐심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들에게 하나님은 예수님의 탄생을 위한 놀라운 장면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b.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놀라운 이 복음이 가장 낮은 신분의 목자들에게, 더구나 종교적 부패가 극에 달한 상황을 복무하고 있는 이들에게 맨 먼저 보여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중의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 9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a. “주의 사자”는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목자들 곁에 문득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주님의 영광이 두루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표현할 길이 없는 황홀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b. 별빛만 반짝이는 어둠속에서 양들과 자던 이들에게 빛이 비추인 것입니다. 이들은 이 빛이 보통 빛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들은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 10절.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a. 목자들은 사실 하등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 천사가 온 것은 복음을 전하러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b.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난 말은 원문을 직역하자면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는 복음 전파를 하노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오심을 증거하는 것은 언제나 큰 기쁨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기쁨의 계절인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는 순간 본질은 전도됩니다.
- 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a. 원어 히브리 성경의 11절 앞에는 “ὅτι”(호티)라는 접속사가 붙어있습니다. 이것은 ‘왜냐하면’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는 복음이라는 것이 바로 다윗의 동네에 모두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는 것이고,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 주시라는 것입니다. 큰 기쁨의 이유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b. 예수님은 700년 전 미가서에서 예언된 대로 예언된 장소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생은 철저하게 구약의 말씀대로 시작되고 그대로 성취되는 인생이었습니다.
- 12절.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a. 천사는 목자들에게 다윗의 동네에 예언대로 태어나신 구주요, 그리스도요, 주이신 분에게 가서 경배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 큰 기쁨에 동참하는 초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이들이 가장 낮은 자리에 오신 가장 높으신 분을 경배하도록 가장 높으신 분의 심부름을 하는 천사들을 통해서 주어지는 초청이 되는 것입니다.
b. 겔 16:1 ~ 5에는 예루살렘이 이방의 부모에게서 태어나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불쌍한 아기로 묘사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가련한 상태에 놓인 이스라엘과 나아가 온 인류를 구원하고 돌보시기 위해 스스로 비천한 자리인 구유에 누이신 것입니다.
- 13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a. “홀연히”(ἐξαίφνης, 엑싸이프네스)는 천사가 일하는 사역의 속성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천사는 군더더기 없이 하나님의 명령만을 수행하기 위하여 갑자기 나타나서, 그 명령을 완수한 뒤에는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자신의 어떤 명예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b. 수많은 천군이 자신들이 거느리는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천군은 천사들 중의 우두머리인데, 천군이 ‘수가 매우 많다’는 것은 천사의 숫자가 매우 많고, 이 때 하나님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수의 천사가 동원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 14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a.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의 곡을 천사들이 합창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우리 역시 하나님 나라에서 천사들이 이 때 부른 찬양을 듣게 될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하고, 놀랍고, 아름다운 찬양이었을까요? 하나님이 친히 하신 일에 대한 송축이요,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최상의 영광에 대한 송축입니다.
b.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피조물의 모든 관계가 회복되는 평화, 진정한 평화가 임하게 됨을 천사는 이렇듯이 미리 송축을 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루실 이 놀라운 일들이 바로 복음이 되는 것이고, 모든 인류가 기뻐해야 하는 큰 기쁨의 소식인 것입니다.
c. 하나님은 이렇듯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을 관객으로 하는 쇼를 벌여주셨습니다. 나라를 잃고 소망이 없이 살고 있는 가장 낮은 위치의 목자들에게 하나님은 커다란 이벤트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가르침 :
1) “구유”는 2장에서만 3번 쓰이고 있습니다. 누가가 부연설명하면서(7절), 천사가 목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면서(12절), 목자들이 경배하러 가서의 정황을 설명할 때(16절). 이 구유라는 모티브는 그야말로 예수님의 겸손과 성육신의 낮아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왕이 태어나자마자 구유에 누였습니까? 그것도 이 분은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태어나서 구유에 놓인 아이가 온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스케일의 역설입니다.
2) 천사들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하나님은 기쁘시고 기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함께 기뻐하고 의미를 알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당시에 율법학자들이 있었고,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이 있었고, 레위지파 사람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천사들을 동원해서 축하 공연을 벌일 때 그들을 초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무지렁이 같은 목자들을 초청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 광경과 의미를 구유에 놓인 아기의 부모에게 전달했습니다.
3) 누가는 동방박사의 방문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이사 아구스도 때 호적 정리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 사건이 역사가운데 실제로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때 언급한 목자들은 동방박사들을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적용 :
1) 주님이 말씀대로 아기로 오신 것이 역사가운데 실재했던 사건이라면 예수님이 다시 오실 일도 분명히 역사가운데 실재하게 될 사건임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기대를 더욱 북돋게 되는 말씀입니다. 처음 역사 가운데 실재로 오신 주님은 약속하신 말씀과 같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그것을 기대합니다. 진정 주님이 오늘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오실 것이고, 그 사실을 믿음을 통해 알고 있기에, 이미 그것 자체가 큰 기쁨의 복된 소식임을 믿습니다.
2)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의 겸손을 기억하겠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심으로 그 높으신 주님이 이 낮고 천한 땅에 마리아의 태에서 잉태되셔서 자신의 집이 아닌 베들레헴의 한 구유에 태어나 누이신 예수님의 겸손을 잊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나는 과연 이 세상을 향해서 어떤 겸손으로 겸손하신 예수님의 종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를 묵상하겠습니다. 나는 잘되어야 하고, 나만은 성공해야 하고, 내 자식만큼은 잘되고 성공해야 한다는 독선 속에 스스로를 속이고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들어서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라면, 그 주님의 오심을 위하여 오늘 내가 겸손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3) 내가 구주로 모신 그 분은 태어나서 말구유에 놓이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믿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럴 믿음, 그럴 자신이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옷을 포기하고 구유에 놓이신 그 분을, 이 땅에서 낮고 낮은 삶을 사신 그분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내가 가야할 삶입니다.
4) 하루의 삶 속에서 나의 부족을 여전히 살피고 겸손할 수밖에 없는 나 스스로의 존재를 알고 겸손한 척이 아니라 진짜로 겸손한 태도를 놓치지 말고 지내는 내가 되도록 교만에게 빈틈을 보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