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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신 18:9-22
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10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12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14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19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20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21 네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22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신 18:9-22 / [우상숭배와 복술의 금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실 땅에 들어가거든 그곳 백성에게서 우상을 숭배하는 더러운 풍속을 본받지 마십시오. 10) 여러분은 아들이나 딸을 산 채로 불살라 우상의 제물로 바쳐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는 어느 누구도 점쟁이나 시대의 징조를 보고 미래를 예언하는 자나 뱀을 가지고 마술을 부리는 자나 무당이나 11) 주문을 외는 자나 혼백에게 물어 보는 자나 초혼자나 죽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12) 이런 짓을 하는 자는 누구든지 여호와께서 미워하십니다. 그 땅에 사는 백성이 바로 그런 짓들을 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여러분 앞에서 쫓아내시는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해야 합니다. 14) [예언자를 보내시는 하나님] 여러분이 쫓아낼 그 백성은 점쟁이들이나 시대의 징조를 보고 미래를 예언하는 이들의 말을 듣고 살지만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여러분이 그런 방식으로 사는 것을 받아들이시지 않습니다. 15) 여호와께서는 여러분의 동족 가운데에서 끊임없이 한 사람을 예언자로 불러 세워 내가 이제까지 해온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예언자의 말을 들으며 살아야 합니다. 16) 호렙산 기슭에 모였을 때에 여러분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다시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해주시고 우리가 다시는 그 큰불을 보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죽을 것만 같습니다.' 하고 내게 호소하지 않았습니까? 17) 그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렇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들의 말이 옳다. 18) 내가 그들의 동족 가운데에서 너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세우고 그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내가 그들에게 말을 하겠다. 곧 내가 예언자들에게 명령하면 그들이 내 백성에게 그대로 전할 것이다. 19) 그러나 예언자가 나를 대신해서 하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직접 그에게 책임 추궁을 하겠다. 20) 또 어떤 예언자든 내가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내 이름을 내세우며 교만하게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을 내세우며 말한다면 예언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21) 또 한편 여러분에게는 `그 말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22) 여호와의 이름을 내세우며 말하는 예언자가 있다해도 그의 말이 맞지도 않고 이루어지지도 않으면 그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시키지 않은 말입니다. 그 예언자가 제멋대로 교만하게 말한 것이니 여러분은 그런 예언자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원주민의 가증한 행위들을 본받지 말라는 것과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기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 받지 말 것이니(9-14)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가나안 토속 종교들 곧 자식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여 화형시키는 종교의식, 점쟁이,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 무당이나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등을 절대 용납하지 말고 그런 행위들을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들을 따르는 행위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행위 따른 가나안 민족들을 그 땅에서 멸하시고 남은 자들을 쫓아내셨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민족의 행위를 본받아 죄에 빠지게 되면 그들 역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그 땅에서 쫓겨나며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15-19) 먼저 참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일으키셔서 그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 참 선지자 모델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당대 가장 강력한 나라의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며 그들과 함께 고난을 겪으며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지자의 본질적 역할은 하나님께서 “내 말을 선지자의 입에 두겠다”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입입니다. 누구든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벌을 받는 말씀의 권위도 자연스럽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백성은 그의 말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20-22) 거짓 선지자란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말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빙자하여 말하는 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그의 말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아닌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느냐는 의문이 들 때, 그가 말한대로의 성취 곧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한편 생각해볼 것은 우리는 그 말이 성취되었는가의 분별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눈을 흐리는 부분적인 가짜 성취도 있고 참 선지자의 말이라도 매우 더디게 이루어지면 오해받고 핍박도 받을 수 있습니다.
적용: 당신 안에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세속적 가치관을 제거하며 하나님 말씀을 더욱 채워가기 위해 오늘도 어떠한 결단과 행동을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들을 대할 때 어떠한 마음으로 대하며, 그 메시지를 어떻게 분별하시겠습니까?
장애물은 나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모든 장애물은 단호한 결단력을 낳는다. 별에 시선을 고정한 사람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레오나르도 다 빈치. 인생이라는 마라톤의 코스는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가 세운 목표로 향해 가는 길도 일직선으로 뻗어있지요. 주변에서 들려오는 잡음에 신경 쓰지 말고 결승선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고 그것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 거짓을 증거 하는 자들이 많아졌습니다. 거짓에 쉽게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분별하여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을 바로 세워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설 교 >
선지자의 운명
신 18:15~20
오늘 설교 본문인 신 18:15~20에는 우리말 성경으로 “선지자를 일으키실 약속”이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성경의 다른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선지자 운운하는 이 본문에도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떠나서 40년 광야 생활을 거치고 이제 가나안이 건너다보이는 요단강 동편의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언처럼 마지막 연설을 하는 중입니다. 이 연설이 끝나면 모세는 평생소원이었던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죽어 모압 땅 어느 골짜기에 묻힙니다. 그의 마지막 연설 모음집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신명기가 다루는 주제의 하나가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선지자 문제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대체할 수 없는 모세의 역할은 하나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한 유일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모세 일대기에는 그런 이야기가 수없이 나옵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던 호렙산 이야기부터 그의 하나님 경험은 시작됩니다. 출 3, 4장이 이를 자세하게 전합니다. “나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낸 분의 이름을 그들이 물을 때 무엇이라 대답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모세는 묻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시내산 전승에는 모세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인 십계명과 율법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들입니다. 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후광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그를 쳐다볼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모세를 필적할만한 인물은 없습니다. 이제 모세가 죽으면 누가 모세와 같은 권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요? 모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걱정이었습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를 세워주신다고 말했습니다. 그 선지자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선택받습니다. 이런 말씀이 15절과 18절에서 반복됩니다. 이 중에 15절만 읽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선지자를 세우신다는 말은 단순히 모세의 뒤를 이을 정치 지도자를 뽑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진술에는 정치적인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그 정체성이 확보된다는 신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 4:4)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런 전통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신 8:3절을 인용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런 신앙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에게 선지자들이 없다고 해서 그들이 당장 굶어 죽는다거나 민족이 말살되는 건 아닙니다. 먹고 마시며 아이를 낳으면 민족은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주변의 다른 민족은 이런 일에만, 조금 더 나아가서 과학과 문명을 일으키는 일에만 주력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일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교양과 인격을 쌓으면 됩니다. 모두 이런 차원에서 삽니다. 이걸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주변 여러 민족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했기에 선지자가 필요했습니다.
여러분은 ‘선지자’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우선 구약의 선지자들을 손에 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등, 이스라엘 역사에서 쟁쟁한 선지자들은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선지자 민족이라고 해도 됩니다. 선지자를 점쟁이쯤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런 위험이 신명기가 선포되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 구절인 신 18:14절에서 모세는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는 가나안 원주민들을 따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선지자는 복술가나 점쟁이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직접 말씀을 들어서 백성에게 전하는 자입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자만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가리켜서 신탁(神託) 담지자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을 얻는다고 믿었다는 말은 거꾸로 그 말씀에서 떠나면 생명을 잃는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생명 심판대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는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19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이런 구절은 오용되기 쉽습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국물도 없어!” 하는 식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의 엄중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한 생명의 깊이를 이해할 때만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허한 말이 됩니다. <서편제>라는 영화를 보셨는지요. 소리꾼 아버지가 아들과 딸에게 소리를 가르칩니다. 아들은 견디지 못하고 도망갑니다. 딸은 혹독한 소리 훈련을 받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소리에 더 전념하게 하려고 약초를 이용하여 딸의 눈을 멀게 합니다. 딸은 결국 득음의 세계에 들어갔습니다. 도망간 아들에게 아버지가 한 말이 있습니다. 소리는 네가 원하는 밥이나 떡보다 더 좋은 거야. 소리의 세계를 몰랐던 아들은 소리의 예술 세계로부터 벌을 받은 겁니다. 소리의 세계를 외면하면 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벌을 중병에 걸린다거나 사업이 망하는 일로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어떤 사태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생명 창조주이시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생명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없는 삶을 오히려 편하게 여깁니다. 그걸 행복이라는 말로 포장합니다. 착하고 인격적인 사람이 술에 취해서 별과 꽃과 비와 눈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상태와 비슷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낸 이유는 더 잘 먹고 더 좋은 옷 입고, 더 재미있게 살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살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없으면 애굽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살아도 실제로는 살아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멋도 모르고 모세를 따라 나왔던 이들 중에서 고난이 닥쳤을 때 실망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간 사람도 많았습니다.
선지자의 역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백성들이 벌을 받기도 하고 생명을 얻기도 하기에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되려는 사람은 모세처럼 애굽에서 하나님 말씀 없이 사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이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위험하고 두려운 일입니다. 두려운 일이나 삶과 죽음의 원초적인 경계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선지자의 운명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설교자로 활동하는 목사는 선지자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입니다. 목사는 당연히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고, 신학 공부도 게을리하지 말고, 인문학 서적도 탐독하면서 구도 정진의 길을 가야만 제대로 된 설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만 키우면, 또는 신자들이 은혜를 받기만 하면 좋은 설교자가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밖으로 표시는 나지 않으나 하나님 말씀을 종말론적 생명 사건으로 알아듣지 못하면 그 설교자는 말씀으로부터 벌을 받습니다. 말씀에서 점점 더 소외됩니다. 사람의 기분을 맞추기에 바쁩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설교자의 겉모습을 취해도 실제로는 설교자의 영혼이 병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 사건으로 알아듣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선지자라는 타이틀이 있었으나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설교자들이 있었습니다. 렘 28장에서 보듯이 선지자 하나냐는 예레미야와 정반대로 설교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와 다투다가 같은 해에 죽었다고 합니다. 선지자의 신탁 행위는 잘못 듣는 백성을 죽이기도 하지만 자신도 죽입니다. 그래서 위험한 일입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본문 20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가장 궁극적인 진술로 들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19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벌이 내린다고 했고, 여기 20절에서는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죽임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은 말을 전할 때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못 전하는 일이 두 가지로 언급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대고 자기 마음대로 전하는 것이며, 둘째는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첫째는 위선적인 선지자를 가리키고, 둘째는 무식한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위선과 무지를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그럴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인격적이고 심성이 착해도 위선과 무지에서 간단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정치인들도 그럴 수 있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이나 법조인과 의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점에서 그 책임은 그 어떤 이들의 책임보다 더 무겁습니다. 그걸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위선과 무지를 제가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코로나19 사태와 연관해서는 간단하게나마 짚어야겠습니다. 요즘 교회가 욕을 많이 먹고 있습니다. 교회 중심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많이 나왔으니 욕을 먹을만합니다. 더구나 확진자가 조금씩 줄어드는 때에 맞춰서 펑펑 터지곤 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확진자가 많이 나왔다는 그 사실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코로나19라는 국가 재난에 대한 교회 지도자들의 태도입니다. 몇 달 전인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이들이 국무총리를 찾아가서 예배를 자유롭게 드리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일반 시민들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요. 교회도 역시 유흥업소나 헬스장과 다를 게 없다고 보았겠지요. 가톨릭이나 불교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교회로서도 할 말은 있습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전염될 수는 있습니다. 전국 교회 숫자와 비교하면 확진자가 나온 교회는 극히 일부입니다. 그리고 정부의 방역 대책이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닙니다. 방역과 내수경제의 역학관계를 아무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문가들의 말을 따르는 게 그래도 최선입니다. 정부의 방역 대책을 교회에 대한 박해로 오해하는 교회 지도자들도 있을 정도이니 위선과 무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지자로서의 교회 정체성
한국교회의 위선과 무지에는 일반 신자들의 책임도 적지 않습니다. 설교자를 신의 대리자쯤으로 여깁니다. 무슨 말을 들어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겠거니, 그리고 신자와 교회를 위한 말씀이라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목사도 위선과 무지에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목사의 설교나 가르침을 냉소적으로 대하는 기독교인들이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은 것을 제멋대로 외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있어야겠지요. 오늘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21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선지자의) 그 말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신학을 전공한 이들의 설교를 분간하기는 쉽지 않긴 합니다. 대형 교회의 목사라는 권위에 편승해 있으면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최소한이나마 합리적으로 사유할 줄 알면 웬만한 내용은 구분이 됩니다. 당장은 안 된다고 하더라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어딘가 왜곡되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요? 교회 조직에 너무 깊이 들어갔기에 좋은 게 좋다는 식의 교회 생활에 길든 결과이겠지요. 아니면 위선적이며 무지한 선지자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신 18:22b 말씀과는 반대로 사이비 이단 교주를 추종하는 교도들처럼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이 고대 이스라엘의 선지자만이 아니라, 그리고 오늘날의 설교자만이 아니라 일반 기독교인과 교회 공동체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고 살아야 할 오늘날의 선지자입니다. 교회와 기독교인 개개인의 운명은 그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거기서 생명을 얻을 수도 있으나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으나 소외당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각각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말씀을 우리에게 실제로 주시는지, 그 말씀을 우리가 제대로 알아듣는지, 그리고 그 말씀을 세상에 제대로 전하는지, 아니면 거꾸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허망한 것에 매달려 있는지를 깨어 있는 영성으로 끊임없이 자
마지막 질문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선지자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생명의 근원을 우리가 붙들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코로나19라는 대재난의 시절에 교회가 한국 사회에서 민폐 집단으로 욕을 먹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세상에서 욕먹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건 아닙니다. 마녀사냥당하는 동성애자 편에 서고, 외국인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가난한 북한을 포용하고, 반전 운동과 생태 운동에 앞장서는 일로 욕을 먹는다면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거꾸로 갑니다. 생업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유형무형의 실질적인 피해를 줬습니다. <이윤 창출을 위해서 오염물질을 배출하다가 들킨 기업체와 다를 게 없는 형국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은 말을 전하는 선지자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벌을 받고, 죽임을 당할 운명입니다. 이미 죽임을 당했는지도 모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신 18:15-20, 고전 8:1-13, 막 1:21-28 / 정수환 목사(학운교회)
제가 자주 인용하는 한자 숙어가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교인들도 달달 외우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흥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흥하게 할 수도 있고 망하게 할 수도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숙어를 달달 외우고 있으면서도, 이 숙어가 일러주는 교훈대로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산다고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순종하려고 애쓰는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가 많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행복하게 잘 살기를 원한다면,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만 우리가 원하는 일들을 은혜롭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 인간의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기게 되는 것이고, 그 말씀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하건만,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분이 적지 않을 것 같아서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 1장 2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마귀가 주님의 말씀에 복종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과 그 일행이 ‘가버나움’이라는 곳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안식일 아침이 되자, 예수께서는 유대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회당에 가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설교 말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 그야말로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강력한 힘을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서 기자는 ‘예수님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곳에는 더러운 귀신들린 자 하나가 와 있었습니다. 그 귀신들린 자가 갑자기 소리치기를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우리를 없애려고 하십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면서 “조용히 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더러운 귀신은 소리를 지르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발작을 일으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고는 그 귀신은 떠나갔습니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흥분한 목소리로 서로 이야기하기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악한 귀신들도 그 명령에 복종하는구나!”하면서 경탄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마귀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봤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고, 예수님의 한 마디 명령에 귀신이 꼼짝못하고 복종했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알렉산더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은 그의 군사력과 지혜와 외교로 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을 정복했습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는 소규모 군단의 병력을 이끌고, 강력한 방어벽을 쌓고서 저항하고 있는 한 성(城)을 정복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성벽 밖에 서서 큰소리로 성주를 만나겠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성주가 나타났습니다. 이에, 알렉산더는 성주에게 “당장 항복하시오.”하고 항복을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성주는 비웃으면서 “내가 왜 당신에게 항복해야 하지요? 우리 군대가 훨씬 더 많기 때문에, 당신들은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않습니다.”라고 응수했습니다. 이때, 알렉산더는 “당신들이 왜 항복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보여주겠소!”라고 말한 다음, 군사들을 한 줄로 서게 했습니다. 그리고 30m가 넘는 절벽을 향하여 곧바로 행진시켰습니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알렉산더의 군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씩 주저하지 않고 행진하여 절벽 밑에 있는 바위로 떨어졌던 겁니다. 그야말로, 오금이 저리는 충격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차례로 떨어져 죽은 뒤, 알렉산더는 나머지 군인들을 멈추게 한 다음, 자기에게 돌아오도록 지시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그 성주와 군인들은 즉시 그 자리에서 알렉산더 대왕에게 항복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를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치는 사람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려면,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이 필요합니다. 알렉산더대왕의 부하들이 그 명령에 복종하여 절벽 아래로 직진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귀신조차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서 그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참으로 기분이 안 좋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가르침에 따라 성실하게 순종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1. 여호와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면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수없이 강조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도 되고 불순종해도 상관이 없는, 그런 선택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잘 알고 받아들여서 그 말씀을 제대로 잘 지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8장 15절 이하에는, 모세가 이스라엘백성에게 전한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동족 중에서 한 사람을 예언자로 세워서, 내가 이제까지 해온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예언자의 말씀을 들으며 살아야 한다(18:15)”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는데, “예언자가 나 여호와를 대신해서 하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나 여호와가 직접 그에게 책임 추궁을 하겠다(19)”고 했습니다. 요컨대, 예언자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경우, 하나님께서 직접 그 불순종한 사람을 책임추궁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에 대해서도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어떤 예언자든지, 나 여호와가 명령하지 않았는데도 제멋대로 내 이름을 내세우면서 교만하게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한다면, 그 예언자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20)”라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도 주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잘 전해야 하고, 백성들도 그 말씀을 잘 받아들여서 열심히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백성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잘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축복을 누리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 불순종할 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할 때쯤에는, 대부분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수없이 많은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에게 경고도 하고 달래보기도 하셨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에게 ‘재수 없는 소리를 한다.’고 하면서 예언자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 결과, 북쪽 이스라엘이 먼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고,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바벨론 사람들의 종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교훈을 받고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합니다. 너무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흥하고, 거역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비록 공자가 한 말이지만,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참된 진리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2. 두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잘 듣고,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신다(8:3)’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잘못했을 때에 무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만 받아들일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잘하면 그걸 빌미삼아서 엄청 많은 것을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여호와, 여호와이다. 불쌍한 이들을 한없이 측은히 여기며, 가난한 자식을 바라보면 가슴 아파 견디지 못하는 하나님이다. 어지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사랑하고, 진실이 흘러넘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마음을 다 쏟고 정성을 다 기울이고 힘을 다 바쳐서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고 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도 “온몸을 다하고 온 정신을 다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해야 한다(23:11)”고 했습니다. 시편 89편 기자도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한결같이 따스하게 대해 주시는 여호와의 사랑을 영원히 노래하리라. 믿음직스러운 주님의 진실을 오고 오는 세대마다 알게 하리라(1)’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높은 것이나 깊은 것이나, 그밖에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롬8:39)’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은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매우 준엄하실지라도, 꾸준히 자신만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큰 자비를 베푸신다(롬 11:22)’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일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질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인내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꾸만 하나님을 떠나거나 그 말씀에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일이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 사랑이 이루어질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멕시코 인디언 부족 중에는, ‘믿는다.’는 말에 ‘순종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부족이 있다고 합니다. 초기 이 지역에 파송되었던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는 도중에 이 사실을 알고서 무척 의아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아직 문명이 발달되지 않아서 언어도 세분화가 되지 않은 것 같다’고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인디언들을 가까이 할수록, 잘못된 것은 오히려 자신들의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믿음과 순종을 나누어 가르치려는 선교사들에게, 인디언들은 “도대체 두 단어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믿으면 순종하게 되지 않는가요? 또한, 순종한다는 것은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까? 믿으면서 순종하지 않을 수 있고, 순종하면서 믿지 않을 수도 있던가요?”라고 하면서, 오히려 반문하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항상 함께 있습니다. 믿으면서 순종하지 않거나, 순종하면서 믿지 않는 경우란 거의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올 일 년,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지켜 살도록 합시다. 우선, 주일성수하는 것부터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 생활은 신앙생활의 기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도시에 있는 정유공장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 도시의 소방대원들은 신고를 받자마자 아주 재빠르게 출동했습니다. 하지만, 불길과 매연이 워낙 거세기 때문에 그 건물 근처에도 접근하기가 심히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결국 공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불길을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건물 안에는 아직도 갇혀있는 노동자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섣불리 들어갔다가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모두 망설이고 있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길 위쪽으로부터 소방차 한 대가 뒤늦게 내려오더니, 곧바로 공장으로 돌진해서 문을 부수고 들어갔습니다. 다른 대원들이 놀라워하고 있는 사이, 그 소방차에 타고 있던 대원들은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출해서 나왔습니다. 이에, 그들의 용기에 힘을 얻은 다른 대원들도 열심히 노력해서 겨우 화재를 진압할 수가 있었습니다.
뒤 늦게 화재소식을 접한 그 도시의 시장은, 그 용감한 소방대원들의 이야기도 전해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장은 그들에게 포상을 하기로 하고, 그들을 찾아가서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방차대장이 다른 대원들과 함께 곰곰이 생각한 후에 “시장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희들은 소방차의 브레이크만 새것으로 교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요컨대, 불 속의 시민을 구하는 것은 소방대원의 임무였지만,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돌진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요나처럼, 자기가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회피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을 구하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위급할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려면,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늘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행복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는 바입니다. 아멘. ♡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
신 18:!5-20 / 성흥모 목사
우리는 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인간들은 하나님이 어떠한 존재인지 알고 싶어 하지만 그 분이 보여주시고 알려주시는 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깊은 심연(深淵) 속에 계시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으며, 알고 있지만 피조물이요 인간이기에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것을 불가능한 일입니다. 조직신학자 루이스 벌콥은 "인간이 하나님을 완전히 알려고 하면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위대하져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욥기11:7에서는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완전히 알겠느냐?”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간에게 몇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당신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셨으며,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이 계시라는 말을 헬라어로 “아포칼륍시스”-apocalupsis 라고 합니다. "계시"라고 할 때 영어로는 "Revelation"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removing the veil"이라고 하여 "베일을 벗긴다"는 뜻입니다. 선물 보자기를 펴는 것이나, 동상이나 조각품 제막식을 할 때 가려진 막을 벗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일을 벗긴다는 말은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바로 계시라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지식을 가지신 하나님, 말씀을 가지신 하나님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당신을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시에는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가 있습니다. 이런 구별은 하나님의 계시의 모양, 양식에 따라 구별하는 것입니다. 자연계시라고 함은 인간의 구조와 자연 현상을 통하여 전달된 계시입니다. 영이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자연은 하나님께서 대소문자를 가지고 쓰신 한 권의 방대한 책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사용하는 말 중에 교리적으로 아주 잘못된 말이 있는데, 자연이라는 말입니다. 자연이라고 하니, 스스로 생긴 것이 아니라, 적당한 말이 없다 보니 자연이라고 쓰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만물이라고 하면 좋지만, 자연이라고 사용하였으니 그냥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은 하나님이 당신을 만천하에 드러내신 장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지구라는 별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물을 마시고, 이 땅의 소산을 먹고 살면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일년을 4계절로 나누어 철따라 변하는 이 자연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시편19:1-2에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1:19-20에서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 속에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런 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런 자연 계시를 일반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계시, 자연 계시만으로는 하나님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셨습니다. 종교의 역사에 따르면 전적으로 자연계시만 기초하는 종교가 없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이런 계시는 완전하지 못하며, 하나님께로 인도해주는 확실한 안내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일반계시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의 지식과 권능을 다소나마 인식할 수 있으나. 구원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인식할 수는 없었습니다. 더욱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면서 이런 자연계시, 일반계시는 흐려지고 부패하여졌습니다.
초자연계시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든지, 꿈이라든지 환상을 통하여 당신을 보여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것을 초자연적인 계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당신과 교제하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초자연계시, 이것을 특별계시라고 합니다. 특별계시는 곧 성경이며, 특별 계시의 절정은 우리 주님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보여주시고 알려주신 계시의 말씀들이 성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아들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히1:1에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면서 또한 우리와 가까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영물인 그룹들 사이에 계시면서 그 분은 불과 연기와 구름 속에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자로서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자는 분명히 창조된 사자는 아니었는데, 하나님과 구별되면서도 하나님과 동일시되기도 하였습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에게, 사라와 하갈과 이삭에게 야곱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나타나셨는데, 처음 나타나실 때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사자라고 하였는데, 그 분과 대화하는 중에 하나님의 사자라는 말은 사라지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면서 하나님으로 나타나시는 사자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제2위이신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고 당신을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현현(顯現)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는 자기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지으신 분이시며, 우리의 심판주가 되시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계시라는 것 하나만을 가지고도 몇 시간 열띤 토론을 벌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온 인류를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아들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며, 어떤 구체적인 역할을 하실 분인지를 알려줄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데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언어나 하나님의 상징을 가지고는 인간이 알아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로, 그분의 지혜가 인간의 논리로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자가 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바로 전달하려고 하면 비슷하지만 역사 속에서 그런 역할을 감당하신 어떤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대비하여 하나님의 아들은 그 사람처럼 역할을 하신다고 해야만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자 역할을 하는 한 사람을 선정했으니 그가 바로 모세입니다. 바로 그 모세의 유형을 빌려서 우리 주님의 사역을 설명하시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모세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예표로 활동하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간 사람이요,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나누신 분입니다. 세상에서 이 사람 모세처럼 훌륭하신 분은 없습니다. 그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들었고, 하나님이 직접 쓰신 십계명의 돌판을 받아 가지고 내려오신 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충분히 드러내실 수 있는 분이라고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회가 시내산 아래에 모였습니다. 그 날 백성들은 그들의 몸을 성결하게 하였고 옷을 깨끗하게 빨아 입었고, 산 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산 아래에 모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만일 산에 오르거나 산을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손 대지말고 돌로 쳐죽이거나, 화살로 쏘아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짐승도 얼씬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날 시내산은 연기가 자욱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불 가운데서 강림하는데, 그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은 크게 진동하는 가운데 모세가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모세를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보았습니다. 백성들이 그러한 광경, 하나님이 강림하시는 것을 보면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리고는 모세에게 나아와 말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때 모세는 백성들을 안심시키면서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와서 증거하면 다 순종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모세를 세우셨으며, 백성들은 모세를 통하여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앞으로 계속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 중에 선지자를 세우시고 일으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장차 하나님은 계속하여 선지자들을 세우신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약속하시기를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신다"고 하셨습니다.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라는 말은 여자의 후손, 다윗의 자손, 여호와의 종이라는 그런 말처럼 집합적인 의미와 개인적인 의미가 들어있는 말입니다. 집합적인 의미로는 유대교 안에 계속하여 선지자를 일으키고 선지자 제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을 계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선지자들은 계속하여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나타나시다가 한 400년 정도 끊어졌다가 선지가 세례요한이 나타났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자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백성들에게 알리시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선택하시고 사용하셨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선지자들을 사용하시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늘에 들어간 사람을 다시 살려 이 세상에 보내지 않고 이미 이 세상에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옥에 들어간 부자가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16:27-28)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입술을 사용하셔서 말씀하는 하나님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은 목사들을 사용하여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모세가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킨다"고 하신 것은 개인적인 의미로 미래에 오시는 완전하신 선지자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모세를 보내셔서 모세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주시고 대면하여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중보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모세만큼 중보의 기도를 많이 드린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행3:22에 사도 베드로는 외쳤습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요5:46-47에서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네게 대하여 기록하였으되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여주시고 나타내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죄인입니다. 죄지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 나타나실 때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본문 16절 말씀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왜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보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입니까? 바로 죄의식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날에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이렇게 더럽고 추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한다는 것이 두렵고 무서운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중보적인 위치에 서 있었다고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유일하신 중보자로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제자 빌립이 주님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시옵소서"라고 하실 때에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14:9-10상)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계시 중에 가장 특별한 계시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증하시고 보여주신 분입니다.
우리는 주님에게 접붙임을 받은 가지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받으시고 가지고 오신 분이십니다.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에게 일러준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신 생명이요, 진리 그 자체가 되십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으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땅에 마지막 중보자가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떠나 인간이 되셨습니다. 사람들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니까 사람의 모습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제2의 창조와 같은 위대한 사건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실 수 없어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보내어주신 것입니다.
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작품 속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젊은 왕자가 말을 타고 빈민촌을 지나가다가 아름다운 한 여성을 보았습니다. 그 후로 왕자는 항상 그 여인을 생각하고 그 빈민촌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여인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고민하였습니다. 만일 왕자의 신분으로 나타난다면 여인은 도망칠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왕자는 "그녀도 나를 사랑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그녀에게 환심을 살 수 있을까? 과연 그녀는 장차 임금이 될 나와 결혼하기를 원할까?" 왕자는 농부로 가장하고 그녀 앞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왕자는 궁전에서 입는 옷을 벗어버리고 그녀가 사는 이웃 가까이로 이사를 하고 거기서 목수의 직업을 가졌습니다. 왕자는 일을 마치면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생활 풍습을 배워 익히면서 그들과 친해졌습니다. 그렇게 그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는 동안 자연히 그 여인과 만나게 되었고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얼마 후 그 여인이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생각되었을 때에 비로소 그는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고 받아 가지고 오신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는 옛날 모세에게 나타났으며, 이제는 우리 주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완성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진리이십니다. 예수님만이 하늘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외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중에 하늘의 열쇠를 가지신 우리 주님이 우리의 마음 문을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셨고, 우리들을 친절히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면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우리의 구원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우리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신실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신 18:15-22 / 피영민 목사
우리 한국 사람들은 점에 약합니다. 노스트라다무스나 정감록의 예언들은 모두 비과학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들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자기에게 문제가 닥치면 점을 치거나 예언을 받기 위해서 돈을 아낌없이 씁니다. 그래서 요즘 대한민국에서 제일 사업을 활발하게 하는 사람들은 점쟁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각종 일간지를 보면 오늘의 운세가 빠짐없이 자리를 잡고 있고, 별을 보고 점을 치는 점성술(horoscope)도 대유행입니다. 기독교 안에도 소위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카리스마틱 지도자들이 전 세계를 다니면서 자기 스스로를 사도라고 지칭하고 이런 저런 예언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기독교 안팎으로 이렇게 갖가지 예언이 난무하고 있는 이 시대에 무엇이 참된 예언이고 누가 참된 예언자인지에 대한 문제를 우리가 분명히 정의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언자를 ‘선지자(prophet)’라고 부릅니다. 선지자는 히브리어로 ‘나비’라고 하는데 ‘나비’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서 현재에 관한 일, 혹은 장래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인간에게 전달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선지자, 혹은 예언자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언자는 반드시 미래의 일만을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현재의 일을 말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사람은 예언자, 혹은 선지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종류의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거짓선지자요, 또 다른 하나는 참된 선지자입니다. 거짓선지자를 명확하게 분별하는 기준은 두 가지입니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찌니라”(22절) 거짓 예언자를 분별하는 첫 번째 기준은 그 사람이 말한 것에 증험이나 성취함이 있느냐 입니다. 예언을 했는데 아무런 증험과 성취함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 예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참된 선지자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요즘 베스트셀러에 가운데 부산 수산대학을 졸업하고 해군 장교를 지낸 신유승이라고 하는 분이 저술한 ‘점쟁이 죽이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남의 운명을 예언하는 점은 대가가 하든, 혹은 초보자가 하든간에 적중할 확률은 1/5, 틀릴 확률은 4/5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백OO이라고 하는 유명한 점성가가 예언을 해도, 완전 초보자가 간판을 걸고 점집을 개업해서 점을 쳐도 똑같이 1/5은 맞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1/5의 확률에 따라 혹시 점이 맞았다고 해도 그것이 참된 선지자의 보증이 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참된 선지자냐 거짓 선지자냐를 구별하는 두 번째 기준이 중요합니다.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20절)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않고 다른 신들의 이름을 사용한다면 그는 두말 할 것도 없이 거짓 선지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나는 예언을 하는 사람은 증험여부를 볼 것도 없이 거짓선지자입니다.
정리하자면 예언에 증험이 없고,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나게 예언하는 사람이 거짓 선지자요, 거짓 예언자입니다.
예언은 성경과 일치할 때만이 진실이요, 성경에 어긋나면 반드시 거짓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2차적인 예언을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언의 원본인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존하는 신앙인으로서 이 시대를 휩쓸고 있는 거짓 영과 점술에 미혹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중에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면서도 여기저기 점치러 다니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이 시간에 회개하고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1. 참된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안심하고 들을 수 있는, 또 안심하고 그 말씀을 들어야 하는 참된 선지자는 누구일까요? 모세는 본문 15절과 18절을 통해 그 해답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15절)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18절) 15절은 모세의 말이고 18절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온다면 그 분이 참된 선지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세 같은 선지자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어떤 사람은 이 선지자를 여호수아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칼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이지 예언자는 아닙니다. 유명한 청교도 주석가인 매튜 헨리는 “이 말씀은 우선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요, 모세의 율법 가운데서 이처럼 명확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된 메시야라고 증거하는 구절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약을 보면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해집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사람들은 요한복음 6장 14절을 통해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또한 사도 베드로도 명확한 언어로 이 사실을 증거 했습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행 3:22-23)고 기록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그 선지자도 바로 하나님께서 예정하사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또 첫 순교자인 스데반도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행 7:37-52) 선포하였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와 스데반이 증거 한 것처럼 모세가 예언한 ‘나와 같은 선지자’는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는 추호의 의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참된 예언자를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예언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참된 선지자의 세 가지 특징
참된 예언자는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된 예언자는 첫째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중보자(mediator)가 되어야 합니다. 중보자는 ‘사이에 가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기 19장 16절 이하에 기록된 내용처럼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시내산은 그 자체로 무서운 광경이었습니다.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컸으며, 진중 모든 백성이 이 광경을 보며 떨었습니다.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 거기 강림하셨습니다.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시내산에 나타난 그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영광이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극히 일부만 드러나고, 사실은 더 숨겨져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박국서 3장 4절을 통해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무리 외적인 환경이 두려워 보여도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은 다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밖에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영광을 통해서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우리가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두렵습니다. 모세여! 당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우리에게 그 말씀을 전해주십시오”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모세를 중보자로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구를 기뻐하시고 모세를 중보자로 세웠습니다. 이처럼 참된 예언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에게 전해줘야 합니다. 모세는 중보자로서 시내산 꼭대기에서 40주 40야를 금식하며 십계명과 갖가지 제사 의식에 관한 의식법과 성막 제작법과 창세기의 내용을 계시 받아서 백성들에게 증거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도 시내산 기슭에 서있던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나을 바가 없습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 앞에서 죄인이 되어 두려워 떨 뿐입니다. 제가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는 동안 십계명 가운데 몇 가지를 어기셨습니까? 하나입니까? 두 개입니까? 혹은 모두 어겼습니까? 아마 십계명을 한 개만 어긴 분은 ‘나는 십계명을 모두 어긴 사람보다 낫지. 나는 도적질만 했지 살인은 안했거든. 그러니 내가 살인자보다는 더 의로운 사람이지’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말씀합니다. 십계명 가운데 하나만 어겨도 모두 범한 자나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십계명 가운데 하나만 범해도 모두 범한 자로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조차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죄인 된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서서 중보하실 분이 필요합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며 변호하시겠습니까? 그 분이 바로 모세와 같은 선지자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피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갚아 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인으로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예언자가 많아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될 수 있는 참된 예언자요, 참된 선지자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 분의 말씀을 들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참된 예언자는 모세와 같이 유대인들 가운데서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셨기 때문에 참된 예언자가 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은 참된 예언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대한민국 사람은 참된 예언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참된 예언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세와 유사성이 있는 사람만이 참된 예언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예수님은 어떤 유사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스펄젼 목사님은 모세와 예수님의 유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첫째로 모세는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예언자도 하나님과 항상 연결된 사람은 없었습니다. 계시는 한 번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언제나 계시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모세 앞에 열어두셨습니다. 이와 동일하게 예수님께서도 조금도 끊긴 바가 없이 하나님과 100% 교제를 지속하셨습니다.
둘째로 모세와 예수님은 모두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들 중에는 일에는 능하지만 말에는 부족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많은 기적을 일으켰지만 글을 남기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어떤 선지자들은 글은 많이 남겼지만 기적은 하나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선지자는 말에는 능할지라도 일에는 능하지 못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예수님은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중 글로바라 하는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눅 24:19).
이처럼 모세와 예수님은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라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셋째로 모세와 예수님은 언약의 창시자였습니다. 모세는 시내산 언약이라고 불리는 옛 언약의 창시자이며, 예수님은 은혜언약으로 불리는 새 언약의 창시자입니다. 이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를 마시고 살을 먹는 자마다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다는 약속입니다.
넷째로 모세와 예수님은 모두 하나님께 충성하였습니다. 히브리서 3장 5-6절에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다섯째로 모세와 예수님은 모두 온유하셨습니다. 참된 선지자는 온유합니다. 반면에 점쟁이들은 온유하지 못합니다. 온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점치러 온 사람이 누구든지간에 반말로 시작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참된 선지자이신 예수님과 모세는 온유함이 지상의 어떤 사람보다 뛰어난 분들이었습니다.
여섯째로 예수님과 모세는 모두 유대인이라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예언자를 찾기 원한다면 이와 같은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선지자의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분이 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참된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그 입에 있는 사람입니다. 본문 18절을 보면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언을 원하신다면 참된 예언자는 그리스도 예수이시며, 예수님의 말씀만이 참된 예언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총각 개구리가 장가를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점쟁이를 찾아가 “선생님. 제가 아름다운 여인에게 장가가고 싶습니다. 제 점을 좀 봐주십시오”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총각 개구리의 말을 들은 점쟁이는 수정구슬을 들여다보다가 외쳤습니다. “흰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너한테 오고 있다. 그 여인이 이렇게 말한다. 너의 안과 밖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고. 너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점쟁이의 말을 들은 총각 개구리는 신이 나서 “그 곳이 어디입니까? 클럽입니까? 아니면 카페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수정구슬을 한참 들여다보던 점쟁이는 “자세히 보니 해부학 교실이다. 그 여인의 손에 칼이 들렸구나. 네 배를 째려고 준비중이다”라고 대답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점쟁이들은 미혹하는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점쟁이들이 대통령이 당선될 때마다 자기가 예언해서 맞혔다는 둥 소문내기를 좋아합니까? 또 자기가 가르쳐줘서 로또복권에 당첨됐다고 자랑하는 점쟁이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잘 맞추면 자기가 로또 복권 사서 좋은 일에 쓰지 자기 로또 복권 번호는 왜 맞추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거짓된 예언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점쟁이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중보자이며, 모세와 같은 선지자요, 진리를 증거하는 참된 예언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신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인간의 의무
예수님을 향한 인간의 의무는 무엇일까요? 15절 후반부를 보면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마가복음 9장 7절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변화산에서도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참된 예언자가 예언을 하므로 저의 말을 들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예언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너희는 죄인이니 회개하고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예언을 하겠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살아서도 마귀의 종이며, 죽어서도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불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될 것이고, 이 땅에서 살 때에 하나님과 동행할 것이며,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원히 천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젠가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하늘과 땅과 이 세상의 모든 나라는 불로 망하고 녹아지며, 우리는 하나님의 완성된 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부활한 몸으로 영생하면서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확실한 예언입니다.
그러나 참된 선지자이신 예수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19절을 보면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참된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입니다. 영어성경은 이 구절을 “I will require it of Him”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는지 그 책임을 묻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이 심판대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는 “왜 너는 회개하지 않았는가?”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할 변명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빠서 믿지 못했다고 대답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즐기다 보니 못 믿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이 신앙생활 하니까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무슨 대답이든 하나님께서 납득할만한 대답을 준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변명에 납득하지 않으신다면 그 사람은 그냥 지옥불로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대답으로도 하나님을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결 론
일전에 어떤 점쟁이가 낸 광고에서 ‘집사, 장로, 목사도 환영’이라는 카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광고를 보면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점을 보러 가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점쟁이들이 사주카페라는 것을 만들어서 커피도 마셔가며 친근한 언어로 예언을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예언들은 모두 거짓된 것입니다. 맞아도 거짓이요, 틀려도 거짓입니다. 점쟁이들은 모두 거짓 선지자입니다. 참된 예언자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만이 참된 예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고,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며, 그 입술에 진리를 담고 있는 예수님만이 오직 참된 예언자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 분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만을 참 예언자로 삼아 그분의 참된 예언을 들으며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삯군 목자 구별법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찌니라.”(신18:22)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인지 참 선지자인지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목회자가 참 목자인가 삯군 목자인가를 따지는 기준입니다. 그 기준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한 말의 증험과 성취함의 유무(有無) 여부입니다. 쉽게 말해 선지자가 말한 그대로 되는지 안 되는지 판단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럼 예컨대 목사가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면서 어떤 예언을 했는데 그대로 이뤄지는지, 어떤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주었는데 그대로 응답이 되는지, 또는 성도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물었을 때에 상담해준 내용대로 하여 그 결과가 유익하게 나와야만, 참 목사라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선지자라는 성경적 의미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선지자(先知者)라는 우리말 표현 때문에 마치 장래 일을 미리 알아서 예언(fore-telling)하는 자로 오해합니다. 나쁘게 말해 점쟁이, 좋게 말해 예언자가 선지자인양 생각합니다. 성경의 선지자는 세상을 향한, 특별히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 메시지의 초점은 항상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극히 일부분이지만 장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당신 백성의 순종과 불순종 여부에 따라오는 구원과 심판을 말하려니까 결과적으로 장래 일을 미리 말하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 점쟁이 식으로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예언은 성경 전체를 통 털어 사실은 아주 드뭅니다.
간단하게 이렇게 생각해보면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녀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대언하는 자가 선지자입니다. 그럼 부모가 자식에게 항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공부 잘해라, 나쁜 짓 하지 말아라. 다 네 장래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래야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을 얻게 된다. 지금 식으로 놀기만 하면 두 달 후에 있을 수능고사 점수가 형편없어 지방 캠퍼스에도 못갈 것이야.” 분명히 장래 일에 대한 예언이 포함되어 있지만 점쟁이 식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뜻, 그것도 자녀에게 자나 깨나 바라는 소원을 말한 것이지 않습니까?
물론 오늘날의 목사에게도 예언자적 사명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세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 가운데 드러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모든 세대 모든 인종을 초월해 그 사명은 동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에서 돌아오라! 그렇지 않으면 임박한 징벌을 피할 길이 없고 자꾸 그런 일이 쌓이면 마지막 심판을 앞당기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목사가 구체적인 예언을 말하고 성도들의 장래 일을 위해 현실적인 대책을 말해주고 또 기도해준 그대로 되어야 한다면 죄송한 말로 목사가 아니라 점쟁이입니다. 성도들도 목사에게 그런 것을 기대해선 안 됩니다.
물론 목사가 어떤 문제를 성경 말씀에 비추어 판단하거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를 위해서 함께 기도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현실적으로 상세하게 단정지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함부로 말해선 안 됩니다. 그런 구체적 인도는 항상 성도 개인이 하나님과 직접 일대일로 교통하여 받아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도록 하나님은 성령을 모든 성도에게 내주토록 했지 않습니까?
선지자의 증험은 다른 것입니다. 자기가 선포한 메시지에 대한 선지자 자신의 확신을 말합니다. 이 문제를 밝히는 성경의 아주 좋은 예는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잡혀갈 것이라고 예언하여 시드기야 왕의 미움을 사서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심판만 아니라 70 년간의 포로 생활을 거친 후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것이라는 것도 벌써 그 이전에 예언했습니다.(렘25:11)
이처럼 그의 선포에도 장래 일을 미리 구체적으로 예언한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전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일부로 포함된 것입니다. 단순히 선지자 개인의 신령한 능력으로 미래를 점쟁이 식으로 알아맞힌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다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가는 상황은 몰라도 70년 후의 귀환은 예레미야 사후(死後)의 일이라 그의 당대에 과연 참 선지자인지 아닌지 판단할 길이 없습니다. 그럼 예컨대 목사가 짧게는 수십 년에서 수백 년 후의 일을 하나님에게 계시 받았다고 마음대로 선포하고 다녀도 그를 검증해볼 재간이 없고 자칫 거짓 추종 내지 맹종하는 자들만 생기지 않겠습니까? 이런 측면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종에게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예언을 절대 주시지 않습니다. 이런 부분에 신자들의 엄정한 분별력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한 말에 대해 자신의 증험과 성취를 보인 것은 따로 있습니다. 친족에게서 기업 무를 자의 신분으로 땅을 사고 그 문서를 모든 유다 사람들에게 보여준 후에 인봉하여 토기에 담아 여러 날 동안 보존케 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이 같이 말하노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렘32:15)는 예언을 실제 솔선수범해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이 죽고 난 한참 후에 일어날 포로 귀환에 대한 예언이 정말로 하나님에게 직접 받은 계시임을 증명하려 한 것입니다. 자기 재산을 동원해 망해져 가는 나라의 땅을 사서 그 땅문서를 여러 날 동안 보존케 했습니다. 자기가 죽고 난 후라도 정말 그 말씀대로 성취가 되면 그 문서를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정미한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온전히 되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목사 말의 증험도 예언이나 상담한 대로 이뤄지느냐를 보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말한 대로 사는지를 보라는 뜻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설교 했으면 정말로 교회 안에 목사를 미워하는 자마저 더 사랑하는지 보라는 뜻입니다. 부부 간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라고 권면했으면 목사 부부부터 그렇게 하는지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목사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신자들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구역장이 기도하고 설교한대로 구역원들에게 하는지 또 교인 부모가 아들더러 공부 열심히 하고 나쁜 짓 하지 말라고 타일렀으면 부모들부터 집에 들어오면 책을 읽고 밖에서는 절대 부정하거나 법을 어기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자기가 죽고 한참 후에 일어날 일, 즉 자기가 책임질 필요가 전혀 없는 말에 대해서도 자기 재산을 아낌없이 투자해선 근 백년을 그대로 묵혀 두었습니다. 한 때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던 한국의 모 목사는 그 종말년도 훨씬 후에 만기가 되는 채권에다 자기 재산 증식을 위해 투자해 놓은 것이 들켰지 않습니까? 주위 사람들이 정말 목사가 자신이 예언한 년도에 목숨을 걸고 있는지만 살펴보았어도 그런 난리를 벌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사가 자신의 말에 대한 증험과 성취함은 오직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해 보이는 길 말고는 없습니다. 어떤 세상적 핍박과 현실적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가 한 말이 진리임을 확신하기에 그 진리를 실제로 실천해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길은 이 세대와 전혀 다른 길로 가야 함을 모든 사람이 보아서 알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본문에서 정작 깨달아야 할 부분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약 그런 증험이 없으면 거짓 선지자이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거짓 선지자는 자기들 말을 여호와의 말인 양 그럴싸하게 포장을 해서 사람들로 두렵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꾸 두려워지는 말만 하면 일단 그 선지자를 의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로 두렵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려워지면 누구라도 자연적으로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집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런 일을 막을 수 있습니까라고 다시 선지자에게 묻게 되고 그럼 선지자는 뭔가 열심과 정성을 바치라고 준비된 다음 수순을 밟아 간다는 뜻입니다.
종교 개혁의 직접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연옥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한껏 고취 시킨 후에 그곳에서 탈출하려면 면죄부를 사야한다고 유도한 것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이단들은 항상 종말이 곧 닥치는데 재산을 갖고 있을 필요가 없고 오히려 교회에 바쳐 천국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라고 꼬드기지 않습니까? 전형적인 삯군 목자들의 수법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삯군 목자만 탓할 수도 없습니다. 종교계에서도 경제학적으로 따져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통합니다. 종교를 가지는 목적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현실의 두려움만 없애거나 복을 더 많이 받으려고 덤비는 교인들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삯군 목자가 생기는 법입니다. 다른 말로 두려움만 없애려 들거나 현실의 복을 받으려는 교인은 삯군 목자와 참 목자를 절대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이런 맥락에서 순진하고 무지한 평신도들을 고의로 역이용하는 목자는 정말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 선지자도 신자들을 두렵게 만듭니다. 예레미야가 유다의 멸망을 예언할 때에 누가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오죽하면 시드기야 왕이 그를 옥에 가두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사람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다가오는 재앙이 아니라 이미 지은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만 풀어 설명했습니다.
나아가 사람들로 인해 자신이 유익을 보는 방향으로는 단 한치도 유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부터 환난을 먼저 당했고 심지어 자신의 예언을 몸으로 드러내 보였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종말론을 이야기하려면 그 본인부터 당장 재산을 전부 처분해서 교회가 아닌 가난한 사람에게 다 나눠줘야 합니다. 이제 곧 종말이 오니까 그들이 평소 때 꼭 먹고 입고 구경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못했던 일을 한 번이라도 해보게 말입니다.
따라서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의 아주 간단한 구별법이 있습니다. 그 목자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 나가고 그래서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괜히 하나님의 심판만 두렵고 목사 개인과 교회라는 조직체에 대한 부담과 책임감이 자꾸 생기는지 따져 보면 됩니다.
신자라면 하나님의 심판은 당연히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남은 자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더 키우고 이미 구원 받은 신자 된 신분이 얼마나 귀한지 확신하게 해서 하나님과 함께 승리하도록 이끌어야 참 목자입니다. 참 목사는 반드시 당신이 설교한대로 살든지 최소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설교 내용이 좋아도 사실은 교회를 옮기는 문제를 심각히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모세가 말한 선지자
신명기 18:11-22
[창세기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는 늘 우리의 집 문지방에 엎드려 언제든지 우리를 넘어뜨리려 틈을 보며 기회를 노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죄를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 [15절]에 나오는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는 모세 자신과 같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동일한 수준의 선지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모세와 같은 예언하는 선지자, 이적을 행하는 능력의 자질 외에도 자신의 백성을 이교도의 영적인 세력으로부터 구원할 중보자를 말합니다.
○ ‘나와 같은' 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대변자, 중보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선지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선지자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예언이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 좀더 상세히 본문을 살펴보면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 라는 말이 ’한 사람 그 선지자‘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문제는 정관사를 사용하여 구체적인 대상의 ’그 한 선지자‘를 말하지 않고 ’a 나비‘ 즉, 부정사를 사용하여 ’어떤 한 선지자‘라 기록한 것입니다. 왜 모세는 구체적인 대상으로의 ’the 나비’라 말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럼에도 이스라엘 역사상 모든 선지자와 백성들은 이 본문을 인용하며 모세가 말한 ‘그 선지자’를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말한 ‘선지자 하나’가 어떻게 예수님을 가리키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 근거의 하나는 ① 이스라엘에는 모세의 사후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다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어떤 선지자 였습니까. 참으로 대단한 선지자였습니다.
[민수기 12:6-8]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신명기 34: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두 번재 근거는 ② 모세 이후의 율법과 모든 선지자가 그 나사렛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 이후로 모든 선지자는 오실 메시야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말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는 바로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 말합니다. 나다나엘은 당대의 율법선생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제자 베드로도 공회에서 담대하게 증거한 말씀이
[사도행전 3:22-24]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23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24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 주의하여 읽어 보세요. 빌립은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이라 말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사무엘 때부터 말한 모든 선지자도'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단어의 사용에 매우 주의하고 있음을 보입니다.
○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러 시내산 위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였습니다. 이때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 첫 명령은 이틀 동안 백성들을 성결케 하여 웃을 빨고 제 삼일에는 여호와의 강림을 기다리되 정하여진 그 산 지경을 범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모세와 아론을 제외하고는 어떤 백성이든 산을 범접할 경우에는 하나님이 돌격하시리라 경고하셨습니다(출 19장).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는 것 조차도 죽음의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을 자아 내는 일이었음을 말합니다. ○ 그래서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 빌립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청하였지만 이는 거룩한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순간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모르고 한 말입니다. ○ 그리고 또 놀라운 것은 지금의 사람들은 천국에 대하여 시큰둥합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일, 남의 일로 여깁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세상의 쾌락과 안녕입니다. 온갖 눈과 입과 귀를 즐겁게 하는 데 집중하고, 또 여유가 생기면 세계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먹고 마시는 일입니다.
[민 11: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 이것이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에서 자신이 속박되어 살고 있음에도 그냥 만족하여 살아가는 노예근성의 삶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운명과 장래의 일을 알고 싶어하고, 신의 도움을 받아 안위와 나갈 길을 알고 싶어합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사탄 마귀에 속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 오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말씀을 전할 때 오실 하나님의 나라를 빼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8: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누구의 말을 듣는지 그 얼굴을 향하는 지를 보십니다.
[신명기 18: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14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
○ 이런 일 행하는 자를 가증히 여기신다 하셨고 이런 자를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쫓아내신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구하고 찾아야 될 분은 오직 한 분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15절]에 하나님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 주님은 모세가 백성들 앞에서 많은 능력을 행한 것처럼 실로 수없이 많은 표적을 보이셨을 뿐만 아니라 진리의 복음을 전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죄를 대속하시려 마지막에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알려 주셨습니다. 오늘날 자신이 구원자 되는 듯이 자신을 드러내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은 예언과 약속을 따라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참 하나님을 분별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언의 성취입니다.
[신명기 18:22]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질문: 점과 성경에 나오는 예언은 어떻게 다른지 말씀해 주세요!
인터넷 자료를 찾아보니 이미 김정우 교수(총신대 구약신학 교수)가 점과 예언에 관해쓴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점과 예언에 대한 성경적인 입장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빛과 소금"(1998.11월호)에서 인용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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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에 나타난 점과 예언
김정우 / 총신대 구약학 교수
그 동안 냉대를 받아오던 점술이 새로운 예언으로 부각되고 있으며, 사회의 변두리에서 맴돌고 있던 점쟁이들이 이제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른 바 점술을 통한 예언서들까지 쏟아져 나와, 민심을 흔들고 있다.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점술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그것들과 함께 휩쓸려 가고 있는 현상을 보면서, 점술에 대한 성경적 입장과 대안을 찾아보려고 한다.
점쟁이나 무당은 주술적이고 신화적인 세계관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점술이나 주술은 단순한 심리적 기술이 아니라, 그 배후에 어떤 신념과 신앙을 깔고 있다. 점술과 주술이 가장 발달했던 고대 근동아시아의 세계를 보면 점술과 주술은 그들의 세계관, 신화, 현실정치와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방인들의 정신세계에 있어서, 점술과 주술의 위치를 알아보자. 점술은 단지 한 개인의 미래를 미리 알아보거나, 액땜을 할 수 있는 독립적인 기술로 존재하지 않는다. 점술이 현실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예언으로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주술적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다. 즉, 점술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밑바닥 속에는 공통적인 세계관이 있다. 이 세계관이란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현재의 질서로 만들어졌으며, 현세가 초자연적인 세계와 어떻게 이어졌는지에 대해 설명해준다. 이방인들의 세계관은 그들의 신화에 담겨있다. 즉, 신화를 통하여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을 설명해준다. 이 신화 속에는 어떤 신이 가장 힘센 신이며, 신들의 목적과 의도가 어디에 있으며, 그의 주술적인 능력 안에서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기본적인 설명이 담겨져 있다. 점술과 주술은 초자연적인 세계와 현실 세계를 구체적으로 이어주며, 신들의 세계의 힘을 빌려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준다.
구약 성경의 배경을 이루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세계관과 신화와 주술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성경의 선지자들은 이런 종교적 배경 속에서 이방인들의 점술과 주술을 비판하고 있으며, 이것들이 어떻게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 교묘하게 선민 사회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지 경고한다. 먼저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세계관을 살펴보면, 두 가지 점이 두드러진다. 첫째로 인생의 모든 일들과 국면들은 독자적으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영계와 현세를 포함한 이 세상 전체와 철저히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거대한 인과관계로 이어져 있고, 또한 인생사의 일들은 운명론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볼 때에는 자연스러운 현상도 그들에게는 총체적인 세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로 비쳤다. 둘째로,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자연과 초자연 세계가 맞물려 있기 때문에, 신들은 인생사에 직접 개입할 뿐 아니라, 아주 밀접하게 개입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모든 역사적인 사건이나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건 배후에는 신들의 뜻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신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결정들을 파악하기 위해 아주 전문적인 술사들과 점쟁이들을 궁궐에서 지원하며 돌보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운명론적인 세계관과 주술론적인 세계관은 그들의 창조신화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바벨론의 창조 신화를 보면, 신들은 주로 마술과 주술로써 상대방을 묶고 죽이며, 권력다툼을 하고, 이 세상을 만들며 유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벨론 사람들은 이런 세계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점술기술을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점술과 주술에 대한 성경의 태도를 살필 때, 고대 근동아시아의 전체적인 세계관과 신화와 점술의 배경 속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성경 저자들은 그들의 점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던 시대에 어떤 유형의 점쟁이들과 술법들이 있었는지 가장 종합적으로 명쾌하게 말해주는 본문은 신명기 18장이다. 이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 모압 동편에서 마지막으로 율법을 강해하면서, 앞으로 가나안 당에서 부딪힐 영적인 혼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넓은 문맥을 보면, 주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그들이 새로운 환경 속에서 바르게 살도록 그들에게 '왕의 규례'(신17:14)와 '제사장의 규례'(신18:1-8)와 '선지자의 규례'(신18:9-22)를 주신다. 마지막 규례에는 가나안 토착 점쟁이들과 그 점술의 유형 및 특징이 제시되고 있다(신18:9-14). 이방예언의 유형과 그 영성을 다루는 이 단락은 "네가 그 당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라"(14절)로 마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이미 그 땅에 토착화 된 가나안 종교와 그 영매들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이 본문은 미리 경고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먼저 이들이 행위는 '가증한 것'(to' abot)으로 묘사된다. 신명기 7장 26절에서는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 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당할 것임이니라"고 말한다.
'극히 꺼리다'는 '가증한 것으로 여기다'의 뜻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은 곧 진멸당할 것이다. 가나안 백성들이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진멸되고 쫓겨 나가는 이유는 그들의 가증한 종교적 행위 때문이었다.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도 후에 바로 가나안의 이 가증한 행위를 따랐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앗시리아의 포로로 잡혀간다(왕하17장). 이후에 남쪽 유다도 열국의 가증한 행위를 따랐다는 이유 때문에 약속의 땅을 잃고 바벨론으로 붙들려 간다(왕하 21장). 이어 모세는 가나안 종교의 가증한 종교행위들과 그 전문 종교 기술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모세를 통해 직접적으로 받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죄성과 부패성 때문에, 거짓 신을 따르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실 참된 말씀과 인간이 만들어 낼 말을 비교하며 대조한다. 여기에 가나안 종교를 비롯한 이방종교는 그 영성을 기본적으로 점술과 마술과 강령술에 두고 있다. 이 세 가지 형태의 술법이 아홉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이들을 소개한 후, 모세는 신학적인 정리를 해 준다(12-14절).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 내시느니라"고 말한다(12절). 이스라엘이 장차 포로로 잡혀 간다면, 바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데 있어서 이교적인 방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가나안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은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는 말씀을 따라 살아야 했다(13절). 이 '온전함'은 도덕적·윤리적·종교적 차원을 다 포함하고 있다(시 19:7-14).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족속들과는 달리,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높은 윤리적 수준을 추구하며 살도록 부름 받았다. 주님은 명백히 말씀하신다.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14절)
이방 세계의 주술사들과 점쟁이들의 영향력은 너무나 넓고 깊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회에는 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하였다. 사실 참선지자들은 주로 재앙과 경고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평안과 형통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 중 그 첫 번째는 발람이다(민 22-24). 발람은 고대의 유명한 술사였다. 그가 축복하고 저주하는 데 따라 한 나라가 복을 받기도 하며 저주를 받기도 하는 강력한 주술사였다. 그는 한때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이방의 주술사요 점쟁이다. 발람은 이방 술사들과 같이 계시를 얻기 위해 점술을 사용한다(24:1 ; 23:3,5). 그는 이러한 점술 형태를 주로 사용했으나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함으로써, 비록 참선지자는 아니지만 참예언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물론 여호와 하나님을 알았고 그의 뜻을 구했으며 따랐고, 하나님이 허락하기 전에는 발람의 요청에 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신은 그에게 임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을 알고, 그는 더 이상 점술을 사용하지 않았다(24:1). 그렇지만 그의 본색은 변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하나님의 감동을 체험하였지만,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었고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았다"(벧후 2:14-15).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옛 본색을 드러낸다. 그는 이스라엘로 방탕한 바알브올을 숭배하게 한다(민 31:15). 결국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민 31:8).
두 번째는 시드기야와 400여명의 선지자들이다(왕상 22장).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끼리 싸우는 장명 중에서 가장 치열한 장면 중 하나인, 미가야와 기드기야의 대결에서, 아합과 밀착된 선지자 400여명과 시드기야는 높은 사회적 위치를 누리면서, 왕이 기뻐하는 긴탁의 말씀을 '예' 혹은 '아니요'의 형태로 주고 있다. 이들은 신탁을 전달할 때 전통적인 선지자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바벨론이나 가나안의 선지자처럼 쉽게 '예' 혹은 '아니요' 만으로 결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왕에게 늘 길한 것만 예언하였다. 이들은 이미 사회 개혁자로서의 선지자의 본분은 상실하고, 왕과 귀족이라는 특정 계층과 연관되어 예언을 하고 있다. 시드기야와 거짓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였고, 그들은 상징적인 행동까지 취했으며, 나아가 시드기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신'으로 예언하고 있음을 확신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이 모두 미혹의 영에 속은 자들이었다(22절). 미혹의 영은 속이며, 그들은 속았다. 그러나 그들이 속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기 때문에 확신에 차서 거짓예언을 하였다. 시드기야의 예언은 속이는 영으로부터 충동질을 받은 것이었다.
세 번째는 평화에 대해 거짓 예언을 했던 하나냐이다. 유다의 마지막 왕들 중 시드기야가 즉위한 후 4년 5개월(주전 593/4)에 기브온 출신, 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는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구원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2절). 또한 그는 바벨론으로 옮겨간 주님 집의 모든 기구들이 '두 해가 차기 전에'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며, 나아가 '유다왕 여고니야와 모든 포로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하나냐의 예언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 동안 예언한 것과 정반대였다. 하나냐의 예언은 선례에 비추어 볼 때, 참된 예언이 아니었다. 이전 선지자들은 심판을 예언하였다. 결코 구원의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 물론 이사야와 호세아는 구원을 전하기도 했으나(사 7:4-9 : 호 14:2-9), 정경 선지자들은 대부분 심판을 전해따. 그들은 '값싼 낙관주의'를 팔아먹지 않았다. 이 때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 있던 멍에를 취하여 꺾어 버린다(10절). 그리고 자신의 상징적 행동에 대해, 주님께서 "두 해가 차기 전에 열반의 목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같이 꺽어 버리라"고 해석해 준다(11절).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냐에게 심판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다. "네가 나무멍에를 꺾었으나 그 대신 쇠멍에를 만들었느니라"(13절). 끝으로 방자히 말한 선지자는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16절). 이 대결은 "선지자 하나냔가 그 해 칠 월에 죽었더라"고 끝낸다(17절).
마지막으로 에스겔 시대의 사이비 여자 예언자들이다(겔 13:17-23). 여선지자들은 공식적인 위치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에스겔 13장에 등장하는 예언하는 여자들은 참선지자로 활약한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먼저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는 자'로 소개된다(17절). 그들은 의인을 근심하게 하며, 악인의 손을 굳게 하여 그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못하게 하였다(13:21-23). 이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방석'을 모든 팔뚝에 꿰어 매고 수건을 사람들의 머리 위에 두기 위해 만든다(18절). 게다가 이들은 돈을 바라고 예언한다. "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 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낸다"(13:19). 여기의 보리와 떡은 주술에 사용되는 재료였던 것 같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거짓 예언을 하는 자들로 여겨진다(삼상 9:7).
<성서적인 대안>
하나님께서 보내실 선지자와 예언
1)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 (신 18:18)
가나안의 점쟁이요, 마술사와 주술사와 신들린 자와 '본 것도 없이 방자히 예언하는' 거짓 선지자 대신, 주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자신의 말씀을 주실 것이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신 18:18). 여기에 있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는 일차적으로 선지자 직분을 말한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새로운 선지자를 보내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선지자 제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약속은 궁극적으로 '모세보다 더 큰 선지자'를 바라보고 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대, 사람들은 '이는 참으로 오실 그 선지자라'(요 6:14).
2) 우리에게 선지자가 필요한 이유 (신 18:16-17)
우리에게 선지자가 필요한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와 주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신 18:16). 하나님께서 호렙산에 강립하시고, 말씀을 주셨을 때, 그들은 감당할 수 없어서,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중보자가 필요하다. 주님은 선지자를 중보자로 세우시고, 자신의 말씀을 주실 것이다. 모세가 죽은 이후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선지자를 통하여 계속 될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주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자신의 말씀을 받은 자는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암 3:7-8)
3) 천상의 총회에 참석한 선지자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예언은 천상의 총회에 선지자들이 들어가서 직접 본 것이라고 소개한다. 미가야는 하나님의 총회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어전에서 이루어지는 회의에 참석하며, 하나님의 뜻을 파악한다(왕하 20:17). 거짓 선지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은 적도 없이 '자기 마음으로 나오는 거짓 묵시'를 전하지만(렘 14:14),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총회에 선 자이다(23:18,22).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23:18,22). 거짓 선지자들이 자기 마음에서 지어낸 말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참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보았기 때문에 진실된 예언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백성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마술사와 주술사와는 근본적으로 달리, 참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또한 왕의 뜻을 늘 '예' 혹은 '아니오'로 대답하는 거짓 선지자들과는 달리, 참된 왕이신 하나님의 대사와 전령과 대변자로 파송받고 일한다.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관심이 없는 주술사와 마술사와는 달리 참선지자들은 사회 개혁자로서, 주님과 맺은 언약에 근거하여 사회의 불의를 책망하고 공평과 정의가 선민사회에서 이루어지도록 노력한다. 끝으로 성경적 선지자들은 도덕적 기준에 호소하여 그들의 대적들의 말이 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님을 증거한다 (렘 14:1 ; 23:10-14 ; 29:21-23 ; 겔 13:21-22 ; 미 2:11 ; 마 7:15:20 ; 딤전 3:13-18 ; 딤후 3:6 ; 딛 1:6-9 ; 약 3:13-18).
결국은 열매로 그 나무를 분간할 수 있을 뿐이다. 점, 참된 계시 없이 형성된 세계관. 우리는 위에서 이방의 점술과 주술과 강신술이 성경의 신앙과 양립할 수 없음을 보았다. 그들의 점술과 주술은 하나님의 참된 계시 없이 형성된 세계관과 신화에 근거하며, 궁극적으로는 위정자들의 현실 정책을 뒷받침하며, 백성들에게는 일시적인 평안과 성공과 번영을 달콤하게 약속하는 조작임을 보았다. 또한 이들의 점술 배후에는 주술적이며 운명론적인 세계관이 깊이 깔려 있음도 보았다. 이방의 점쟁이들과 마술사들은 참된 영계와의 교통을 차단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독점하기 때문에, 결국 이 세상에 더욱 큰 어두움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경기자들은 종교적인 영역에서 가장 경계할 사항으로 이방의 점술과 주술과 상신술을 꼽고 있다(신 18). 주님은 이런 일들을 가증한 일로 여기시며, 우리로 하여금 극히 꺼리도록 당부하신다. 겉으로 볼 때에는 점술과 주술은 자체적인 논리와 통계가 있고, 뭔가를 맞추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은 헛된 것이며 우리를 미혹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점술과 성경의 예언을 볼 때, 거짓과 진실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주신 진리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그 안에서 자유함을 얻어야 한다.
선지자의 말을 들으라
신 18:15-22 / 김영태 목사
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작품 속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젊은 왕자가 말을 타고 빈민촌을 지나가다가 아름다운 한 여성을 보았습니다. 그 후로 왕자는 항상 그 여인을 생각하고 그 빈민촌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여인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고민하였습니다. 만일 왕자의 신분으로 나타난다면 여인은 도망칠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왕자는 "그녀도 나를 사랑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그녀에게 환심을 살 수 있을까? 과연 그녀는 장차 임금이 될 나와 결혼하기를 원할까?" 왕자는 농부로 가장하고 그녀 앞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왕자는 궁전에서 입는 옷을 벗어버리고 그녀가 사는 이웃 가까이로 이사를 하고 거기서 목수의 직업을 가졌습니다. 왕자는 일을 마치면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생활 풍습을 배워 익히면서 그들과 친해졌습니다. 그렇게 그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는 동안 자연히 그 여인과 만나게 되었고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얼마 후 그 여인이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생각되었을 때에 비로소 그는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직접만나면 사람들은 다 죽습니다. 너무나 거룩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는 옛날 모세에게 나타났으며, 또한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하여 졌으며 우리 주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오늘 또 계속하여 주의 종들을 통하여 전하여 지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모든 자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고 주의 말씀을 들은 모든 자들을 영원한 가나안 땅 천국에 살도록 인도 하실 것입니다.
15절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너희 가운데 선지자를 일으켜 세우시겠다고 말씀 합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누구의 말을 듣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스승의 말도 들어야 합니다. 친구의 말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우리 삶의 표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우리는 직접 들을 수가 없습니다.
16절에 보면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라고 말씀합니다.
출 20:18-19절에 보면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시내 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가까이 부릅니다. 백성들은 경계 넘어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시고 십계명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봅니다. 그것을 본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떨면서 20절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으면 죽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 줄 선지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 합니다. 선지자의입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18절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하는 것을 그 백성에게 다 말하는 자입니다. 자기의 말을 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전하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복을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벌을 받게 됩니다. 19절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벌을 받아요. 하나님이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에 벌이 임하는 것입니다.
제주도에 저를 사랑하는 목사님이 계셔서 제주도에 가게 되면 들리는데 이분이 낚시를 좋아합니다. 제가 가면 같이 낚시를 가게 되지요. 고기 가운데 가시 돔인지 까치 돔인지 하는 고기가 있어요. 이놈이 등가시가 대단한 놈인데 목사님이 몇 번이고 저더러 조심해라 장갑을 껴라 수건으로 덮어서 낚시를 빼라 하고 주의를 주는데 하다보면 귀찮아요. 그래서 한번은 그런다고 하면서 맨손으로 고기를 잡다가 손톱 밑이 찔렸는데 아 하고 입이 다물어지질 않아요. 얼마나 아픈지 눈물이 핑 도는데 나이 먹은 놈이 울 수도 없고 목사님이 눈치 채면 한마디 들을 것 같고 참느라 생 똥을 다 쌀 번했어요. 말 안 듣다 벌 받았지요. 이런 걸 보고 벌 받아 싸다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상 받습니다. 안 들으면 벌 받는다는 이야기는 들으면 상 받는다. 복 받는다는 것이지요. 하나님 말씀에 잘못 된 것이 있습니까? 잘못된 것이 없어요. 잘 못된 것이 없다면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 기뻐하라, 사랑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 섬기라, 나누어 주라, 화평케 하라, 부모를 공경하라, 참아라, 어느 것 하나 복이 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말씀대로 살아 복 받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선지자들의 책임이 있습니다. 20절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선지자들은 자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려면 하나님 앞에 매일 무릎을 꿇어야합니다. 하나님과의 대면 없이 말을 하다보니까? 자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말을 하는 선지자는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선지자의구별이 필요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지 자기 말을 하는지 빨리 구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 선지자에게서는 빨리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살길입니다. 참선지자를 구별하는 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하는지 제 이름으로 전하는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말씀 속에 하나님이 나타나는지 아니면 제가 나타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말씀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지 자기 영광이 나타나는지를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으면 경계해야 합니다.
다음은 제 맘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말을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서 하나님의 말씀인양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말속에는 폭력이 들어 있습니다. 저주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가짜는 진짜가 오면 다 들통이 납니다.
다음은 말한 일에 증험이나 성취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가짜입니다. 22절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 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하지말지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입니다. 마리아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할 때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사랑의 확증입니다.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는 증거가 있고 성취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증거가 없는 말은 들을 필요도 없고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지자라고 한대서 선지자가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셔야 선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끝을 맺습니다. 우리의 참선지자는 누구입니까?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선지자는 예표일 뿐입니다. 참 선지자는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든 사랑을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가장 잘 전한 선지자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전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의 말을 듣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들으세요. 오늘도 주시는 말씀을 듣고 축복의 자리에 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