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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9.발간
2016.9.10 발간
[박연과 훈민정음], [박연과 용비어천가]--저자 대구 박희민은 교육학석사 및 경제학석사, 그리고 악성 박연 18세손 인데 대통령 인수위원회 국민행복제안센터에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습니다.(접수번호 257) 2012년 10월 9일 발간한‘난계 박연(朴堧, 1378~1458)이 훈민정음 창제를 하였다.’라는 진실을
알리는《박연과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훈민정음은 우리 민족 모두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위대한 한글[소리글자]를 만들어준 분이 진정 누구인지 확실하게 아는 것은 한글을 사용하는 우리 모두의 책무(責務)입니다.
따라서 국가적 차원에서 ‘박연’과 ‘훈민정음’에 대하여 새롭게 연구 검토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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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종 05년(1423) 03월 23일 :《율려신서》홍무정운 등 문헌 연구 시작.
세종 09년(1427) 06월 23일 : 훈민정음 창제 하자는 상소문 올림.
세종 21년(1439) 04월 24일 : 훈민정음 창제 완료.
세종 21년(1439) 04월 25일 : 공조참의로 주자제작 실정 파악.
세종 22년(1440) 06월 26일 : 공조참의로 훈민정음 주자제작 완료.
세종 22년(1440) 07월 02일 : 예조에 업무 복귀 한후.
세종 24년(1442) 10월 27일 : 예조참의로 훈민정음 창제 발표를 위한 환경 조성.
세종 25년(1443) 08월 22일 : 중추원 부사로 숙위(宿衛)하며 세종에게 훈민정음 교육.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 훈민정음 창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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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박희민씨! [박연과 훈민정음][박연 과 용비어천가] 책 발간 하느라 그동안 노고가 많았습니다. 2005년 쯤인가 성균관대학교 교수 현 고려대학교 교수 김세종 박사님과 이야기중에 1993년 국립국악원에서 난계유고를 권오성박사와 같이 국역하면서 [난계 박연이 훈민정음을 실제로 창제]한것 같은데 더이상 연구를 하지못하여 아쉽다며 저 박기재 보고 훈민정음 창제에 대하여 연구하여 보라한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나는 서울 도봉산 과 수락산 사이에 있는 서원 아파트 김세종 교수댁을 수차방문도 하였고 또 과천 국사 편찬 위원회와 서울대학교 내에 있는 규장각, 국립 중앙 도서관 등에 수년동안 여러번 방문하여 자료를 찾아 보았으며. 국립 국악원에 김세종교수(당시 성균관대교수)께서 난계부부 영정이 걸려있다 하여 국악원도 방문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에 엠파스블로그를 만들어 올렸는데 엠파스가 네이트에 합병되면서 블로그는 화면이 큰 이글루스를 선택하여 옮기고 네이버 http://bb112288.blog.me 다음 http://blog.daum..net/b11228877
저자 박희민은 1947년 경북 김천 아포에서 태어나 대구 경북고등학교 대구 교육대학 영남대학교를 졸업하고 계명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 및 경제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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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 배경(역학,운서,국악) / 음악 관련-2 : 음악 원리 ‘칠조’의 관련성 최종민(현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초안2006.8.31)
1.훈민정음(원본)의 관련 기록 . 훈민정음 원본의 정인지 꼬리글(서문)에는 아래 (1, 2)와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1)“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叶七調. 三極之義, 二氣之妙, 莫不該括”
(계해(1443.)동. 아전하창제정음이십팔자, 약게례의이시지, 명왈훈민정음. 상형이자방고전, 인성이음협칠조. 삼극지의, 이기지묘, 막불해괄)
(해석 : 한글학회,1998),《훈민정음》옮김과 해설, 26쪽 :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스물여덟 글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보기와 뜻을 들어 보이시고,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시니, 모양을 본떴으되 글자는 옛 전자를 닮았고,
소리를 따랐으되 음은 일곱 가락에 들어맞고, 삼극의 뜻과 이기의 묘가 다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다.”).
(2)“字韻則淸濁之能辨, 樂歌則律呂之克諧. 無所用而不備, 無所往而不達. 雖風聲鶴呂, 鷄鳴狗吠, 皆可得而書矣”
(자운칙청탁지능변, 낙가칙률려지극해. 무소용이불비, 무소왕이불달. 수풍성학려, 계명구폐, 개가득이서의)
(해석 : 한글학회,1998, 앞의책, 27쪽 :“글자의 소리로는 청탁을 잘 가릴 수 있고, 풍악의 노래로는 곡조 가락이 잘 고루어 져서,
쓰기에 갖추이지 아니함이 없으며, (어떤 경우에라도) 이르러 통하지 않는 것이 없어, 비록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소리와
닭의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라도 모두 적을 수 있다.".
(1)에 따르면, 음이 칠조(七調)에 들어맞는다(因聲而音叶七調)고 하였고,
(2)에서는 악가(樂歌)에서 율려(律呂)가 잘 고루어졌다(樂歌則律呂之克諧)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훈민정음이 음악 이론에 부합되는 이치를 가졌다는 것으로서, 음악의 이치에 맞게 창제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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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항, 1987/1999,《增補版 訓民正音硏究》, 成均館大學校出版部, 12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3)"鄭麟趾의 訓民正音解例本 序文에서는 訓民正音의 창제로 ‘因聲而音叶七調’가 되고, ‘樂歌則律呂之克諧’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訓民正音을 創制해서 단순히 表記手段만을 해결하려던 것이 아니라, 音樂과도 관련시키려 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3)에 따르면, 훈민정음 창제는 말소리의 표기수단뿐만 아니라 음악과 관련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음악과 관련시키려는 뜻이 있었다면 당연히 음악의 원리가 훈민정음 창제에 반영된 것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因聲而音叶七調’와 ‘樂歌則律呂之克諧’의 뜻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이 글에서는 ‘칠조’를 살펴보고,
다음 글 ‘음악관련-3’에서 '율려’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因聲而音叶七調’(인성이음협칠조)의 해석 문제 (1)의 ‘因聲而音叶七調’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서로 다르게 해석하였습니다.
(4)“因聲而音叶七調. 三極之義, 二氣之妙, 莫不該括”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 양상.
ㄱ. 한글학회 (1998).《訓民正音》. 해성사 (고서보존회), 26쪽의 해석 :
“소리를 따랐으되 음은 일곱 가락에 들어맞고, 삼극의 뜻과 이기의 묘가 다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다.”
ㄴ. 兪昌均 (1993). 《訓民正音譯註》. 螢雪出版社, 103쪽의 해석 :
“소리를 따라 음은 칠조(七調)에 맞으니, 삼극(三極)의 뜻과 이기(二氣)의 묘(妙)함이 모조리 포괄하지 않음이 없더라.”
ㄷ. 강신항(1987/1999).《增補版 訓民正音硏究》. 成均館大學校出版部, 141쪽의 해석 :
“소리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였으므로 음은 (음악의) 칠조(七調)에 맞고, 삼재(三才)의 뜻과 이기(二氣, 陰陽)의 묘가 다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다.”.
(4)ㄱ,ㄴ,ㄷ을 보면, 같은 원문을 놓고 해석하는 의미는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어느 해석의 잘잘못을 가리는 것보다
해석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자 합니다. 어찌되었던지 칠조나 악가, 율려 등 음악 원리가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아래 <표1>과 같이 정리합니다.
<표 1> 훈민정음 원본 정인지 꼬리글의 음악 원리
음악 원리 정인지 꼬리글 음악 개념
칠조 (七調) 因聲而音叶七調 선법(음조직)
악가 (樂歌) 가사(노랫말),
樂歌則律呂之克諧
율려 (律呂) 12음률,
음율의 음양성(역학).
<표1>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음악의 선법이나 노랫말,
12음율, 음률의 음양성 등의 음악적 개념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음악 원리 칠조의 훈민정음 관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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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훈, 1985/1988,《國樂總論》, 세광음악출판사, 74쪽에서는 다음(5)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5) 조명(Key)으로서의 조(調) “총괄 명칭으로서의 조명 : 낙시조(樂時調, 또는 평조,우조(羽調). 《악학궤범》권 7에 의하면
평조와 계면조에는 각각 7조 (key)가 있었는데, 일지(一指; 主音 姑洗),이지(二指; 仲呂),삼지(三指; 林鐘),
횡지(橫指, 四指; 南呂)의 4조는 낙시조(樂時調)라 하고, 횡지(橫指, 南呂), 우조(羽調, 五指; 主音 無射),
팔조(八調, 六指; 淸黃鐘),막조(邈調, 七 指; 淸太簇)의 4조는 우조(羽調)로 대표하였다.
이 중 낙시조(樂時調)는 선조 이후로 평조(平調)로 바꾸어 썼으며 낮은 조라는 뜻이고, 우조(羽調)는 웃조의 한자 표기이다(《樂學軌範》卷7. 14a-15b).
이 밖에 황종조(黃鐘調),협종조(夾鐘調),임종조(林鐘調), 남려조(南呂調),청황종조(淸黃鐘調), 평조회상(平調會像; 낮은 조(平調)의 영산회상이라는 뜻) 등.”
(가온점은 쉼표로 바꾸어 적었음)
(5)에 따르면, 조명(key)으로서 평조와 계면조에 각각 칠조가 있었습니다.
《악학궤범》의 ‘악조총의’(樂調總義, 제 1권 24쪽) 첫머리에서는 ‘俗樂則只用七調’(속악은 다만 칠조만 쓴다)라고 하였으므로
7조는 속악 즉, 향악에 사용한 조(調)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훈민정음 해설에서 향악의 원리가 사용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악학궤범》은 성종 24년(1493)에 편찬된 것이지만, 그 내용은 세종대왕 당시의 음악 이론이 주도된 것으로 볼 때, 속악(향악) 칠조가 이미
《훈민정음》정인지 꼬리글(세종 28년)에 언급된 것을 보면, 세종대왕 시기에 향악의 조(調)에 대한 이론이 정리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3. 향악 칠조의 개념 정리와 훈민정음 관련성. 세종대왕 시기에 향악의 조(調)에 대한 이론이 정리되어 있었으므로,
향악 칠조 원리가 사용된 시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훈민정음 창제의 배경이 되는 음악적 원리로 적용된 것이라면,
훈민정음 창제를 시작하기 전에 향악 칠조 원리가 형성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종 12년 2월에 예조에서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와 함께 의논한 봉상판관(奉常判官) 박연(朴堧)의 상서(上書) 중에 향악과 관련된 내용이
아래 (6), (7), (8)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6) 國史編纂委員會(1955).《朝鮮王朝實錄》四 : 世宗實錄 (三), 220-221쪽 : 세종실록 제 47권(세종 12년 2월 庚寅)
“……堧又云. 樂書纂集一事. 臣所極慮. 今詳我朝所用三部之樂. 皆未整齊. 而雅部尤甚焉……”
(해석 : 韓國精神文化硏究院(1996),《朝鮮王朝實錄音樂記事資料集2》, 821쪽 :
“……박연이 또 말하기를, 악서(樂書)를 편집하는 한 가지 일은 신이 매우 염려하는 바이옵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쓰는 삼부(三部, 雅樂部,唐樂部,俗樂部)의
음악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정제 되지 못하였사온데, 그 중에 아악부가 더욱 심합니다……”)
(6)에 따르면, 박연은 세종 12년 2월의 상서(上書)에서, 악서를 편집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쓰는 음악 3부 즉 아악, 당악, 속악(향악)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정제되지 못하였다고 (今詳我朝所用三部之樂. 皆未整齊)고 말하였습니다.
(7) 國史編纂委員會(1955).《朝鮮王朝實錄》四 : 世宗實錄 (三), 220-221쪽 : 세종실록 제 47권(세종 12년 2월 庚寅)
“……至於我朝之樂. 其器物制度. 歌詞曲折. 亦甚繁密. 雖舊有譜法. 書本相傳. 承誤失眞. 舊時之樂. 殆盡亡失……
此等遺亡諸篇. 不可悉記. 然譜法尙存. 其歌詞舊本. 意必有傳寫私藏者焉. 願今中外. 悉永我朝舊時歌典……”
(해석 : 韓國精神文化硏究院(1996),《朝鮮王朝實錄音樂記事資料集2》, 822-823쪽 :
“……우리나라의 악에 이르러서는 그 기물(器物)의 제도와 가사(歌詞)의 곡절(曲折)이 또한 매우 복잡하고 세밀하여, 비록 예전의 보법(譜法)이 있더라도 사본(寫本)이
전하여 내려오다가 잘 못 적은 글자를 거듭 이어받아 진(眞)을 잃게 되어…… 이러한 잃어버린 여러 편(篇)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나,
보법(譜法)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은 그 가사(歌詞)의 구본(舊本)이 전사(傳寫)되어 사사로이 간직한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니, 중외(中外)에 영(令)을 내려
우리나라의 옛날 노래와 악전 (樂典)을 널리 구하여……”)
(7)에 따르면, 향악의 가사는 (한문의 가사와 달리) 곡절이 복잡하고 세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보법이 남아 있었던 것도 있으며,
사사로이 간직된 악보를 널리 조사하였을 것이므로, 세종 12년 음악정리 사업 당시에 당악이나 아악과 더불어 향악도 널리 조사하고
악보와 이론을 잘 정리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8)國史編纂委員會(1955).《朝鮮王朝實錄》四 : 世宗實錄 (三), 220-221쪽 : 세종실록 제 47권(세종 12년 2월 庚寅)
“……其稱宮調者. 實非宮也. 其稱羽調者. 亦非羽也. 臣今常校其聲. 改以律名. 其指法肉調. 亦明之以一宮所屬之五音. 使不相紊.
此小臣今日纂錄之大槪也. 但鄕樂所用之律. 則樂始調. 互用仲呂林鐘二律之宮. 仲呂宮則大琴二指聲也. 林鐘宮則大琴三指聲也.
仲呂宮. 古人多忌用之. 以其所用之聲. 皆非正律也. 林鐘則元是天地本然之徵聲. 又所用之聲, 君臣之際. 各得正聲.
具坤方土律. 涵養萬物. 寄旺四時. 常有沖和之氣. 用此爲宮可也. 願自今宴享鄕樂. 主用林鐘爲調樂名. 世稱鄕樂. 亦甚鄙俚. 願殿下改之……”
(해석 : 韓國精神文化硏究院(1996),《朝鮮王朝實錄音樂記事資料集2》,
823-824쪽 : “(……그 율조를 고르는 법과 소리의 높낮이는 본래 대금(大?)으로 근거를 삼았사온데, 율려(律呂)에 소속되는 바를 알지 못하고)
그저 궁조(宮調)라고 일컬은 것은 실상은 궁(宮)이 아니며, 우조(羽調)라고 일컬은 것도 역시 우(羽)가 아니었습니다.
신이 이제 그 소리를 자세히 살펴 교정(校正)하여 율려의 이름으로 고치고. 지법(指法)과 육조(肉調)도 또한 어느 한 궁(宮)에 소속된 오음(五音)으로 밝히어
서로 문란하지 않게 하였사오니, 이것이 소신(小臣)이 오늘날에 편찬 기록한 대개 (大槪)입니다.
다만 향악(鄕樂)에 소용되는 음률은 음악이 처음 시작하여 날 적에, 중려(仲呂)와 임종(林鐘) 두 음률의 궁(宮)을 섞어 번갈아 사용하였사오니,
중려궁(仲呂宮)은 대금(大琴)의 둘째 손가락 소리이고, 임종궁(林鐘宮)은 대금(大琴)의 셋째 손가락 소리이온데.
중려궁(仲呂宮)은 옛날 사람들이 흔히 쓰기를 꺼리었사오니. 이는 그 소용되는 소리가 모두 정률(正律)이 아닌 때문이었습니다.
임종(林鐘)은 원래 천지 본연(本然)의 치성(徵聲)이요, 또 소용되는 소리는 군신(君臣)에 관계되는 것으로 각각 정성(正聲)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곤방(坤方)의 토율(土律)로써 만물(萬物)을 함양(涵養)하고 사시(四時)에 붙여 왕성하여 항상 충화(沖和)한 기운(氣運)이 있으니,
이로써 궁(宮)을 삼는 것이 옳겠습니다. 이제로부터 연향(宴享)할 때에 향악(鄕樂)은 주로 임종(林鐘)을 맞추어 가사를 부르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음악의 이름을 세상에서 향악(鄕樂)이라고 일컫는 것도 또한 매우 상스러우니, 전하께서는 이를 고치시옵소서……”.
(8)에 따르면, 박연은 율려에 소속된 바를 알지 못하고 일컬은 그 소리(향악의 소리)를 자세히 살펴 교정하여
율려의 이름으로 고치고 지법과 육조도 어느 한 궁에 소속된 오음으로 밝히어 문란하지 않게 하였는데,
이것이 그 때 편찬 기록한 대개(大槪)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세종 12년 당시의 음악정리 사업의 편찬 기록에 향악의 내용이
포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칠조는 세종 12년 음악 정리 당시에 이미 정리된 음악적 개념으로 추정되고,
이 향악 칠조 개념이 훈민정음 창제의 배경 원리 가운데 하나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국인이 3만개가 넘는 한자를 컴퓨터 자판으로 치는 모습을 보면! 한자를 자판에 나열하기가 불가능해 중국어 발음을 먼저 영어로 묘사(한어병음)해 알파벳으로
입력한 다음에 단어 마다 입력 키를 눌러야 화면에서 한자로 바뀐다. 불편한 게 더 있다. 같은 병음을 가진 글자가 20개 정도는 보통이다. 그 중에서 맞는 한자를 선택해야 한다. 한국의 인터넷 문화가 중국을 앞선 이유 하나가 여기에 있다. 타이핑을 많이 하는 전문직 중국인들은 한자의 획과 부수를 나열한 또 다른 자판을 이용한다.
자판을 최대 다섯번 눌러 글자 하나가 구성 되므로 오필자형(五筆字型)이라고 한다.속도가 빠르지만 익히기 어려워 일반인은 못한다.
일본인의 컴퓨터 자판도 역시 알파벳이다.일본인들은 '世'를 영어식 발음인 'se'로 컴퓨터에 입력하는 방법을 쓴다.
각 단어가 영어 발음 표기에 맞게 입력돼야 화면에서 가다가나로 바뀐다.거기다가 문장마다 한자가 있어 쉼없이 한자 변환을 해줘야 하므로 속도가 더디다.
나아가 '추'로 발음되는 한자만 해도 '中'을 비롯해 20개 이상이니 골라줘야 한다. 일본어는 102개의 가다가나를 자판에 올려 가다가나로 입력하는 방법도 있지만
익숙해지기 어려워 인터넷 이용도 친화도가 한국보다 낮을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
말레이시아 처럼 언어가 여러 가지인 국가들은 컴퓨터 입력방식 개발부터 골칫덩어리다. 24개의 자음· 모음만으로 자판 내에서 모든 문자 입력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한글은 하늘의 축복이자 과학이다.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낼 때 한글로 5초 면 되는 문장을 중국, 일본 문자는 35초 걸려 비교가 안된다. 한글의 입력 속도가 일곱배 정도 빠르다.정보통신(IT)시대에 한국인의 부지런하고 급한 성격과 승부근성에, 한글이 '디지털 문자'로서 세계 정상의 경쟁력이 있는 덕에 우리가 인터넷 강국이 됐다고 할 수 있다. 한글로 된 인터넷 문자 정보의 양은 세계 몇 번째가 된다.
10월9일은 한글날. 세종(박연)이 수백년 뒤를 내다본 정보통신 대왕이 아니었나 하는 감탄이 나온다.26개인 알파벳은 한글과 같은 소리 문자이고 조합도 쉽지만 'a'라도 위치에 따라 발음이 다르고 나라별로 독음이 다른 단점이 있다. 그러나 한글은 하나의 글자가 하나의 소리만 갖는다. 어휘 조합능력도 가장 다양하다. 소리 표현만도 8800 여개 여서 중국어의 400여개,일본어의 300여개와 비교가 안 된다. 세계적 언어 학자들은 한글이 가장 배우기 쉽고 과학적이어서 세계 문자 중 으뜸이라고 말한다. '알파벳의 꿈'이라고 표현 한다. 그래서 거의 0%인 세계 최저의 문맹률이 가능했고 이것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한글은 발음기관의 모양까지 반영한 음성 공학적 문자여서 세계의 언어를 다 표현 해낸다. 맥도널드를 중국은 '마이딩로우' 일본은 '마쿠도나르도' 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이것이 네팔 등의 문자가 없는 민족 에게 한글로 문자를 만들어 주는 운동이 추진되는 이유다. 외국인 에게 5분만 설명하면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쓰게 할 수 있다. 한글은 기계적 친화력도 가장 좋아 정보통신 시대의 준비된 문자다. 세계화의 잠재력이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