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양 사람 김기덕
1
나는 또 다시 삼례 내려가는 기차 칸에 앉아있다. 지금은 월요일 밤. (자정이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월요일이다.) 성경재 회관에서는 간단한 김밥과 떡, 빵 등으로 시장기를 달래면서 공부하는데, 그것들이 남으면 먼 길 가는 사람들에게 싸주곤 한다. 나는 용산역 지하에 있는 E-마트에 가서 2500원짜리 고구마 맛탕을 사가지고 나와 푸드 코트라고 불리는 너르디너른 식당의 한 구석에 앉아 성경재 회관에서 가지고 온 김밥과 더불어 간소한 식탁을 차렸다. 그 때 나보다도 더 간소하게 식탁을 차리는 꼭 우리 또래의 남자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이 남자는 슬리퍼를 질질 끌고 음용수 기계로 가더니 컵라면에 물을 받아와서는 무엇인가 묵직한 것을 컵라면 위에 올려놓았다. 두꺼운 잠바는 벗어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그러더니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이 남자는 상당히 길게 시간을 끌었는데(4, 5분 정도),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음용수 기계에서는 물론 뜨거운 물이 나오지만 그 물이 컵라면을 익힐 만큼 충분히 뜨겁지는 않은 것이다. (나도 해 봐서 안다.)
나는 생각하였다. 김 밥을 한 개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생각하였다. 또 한 개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생각하였다. 별 생각을 다 하였다. 심지어 언젠가 진섭이가 나에게 한 말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큰 일이야.”라는 말이 생각나 그것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나는 생각을 마치고 김밥을 담았던 종이 상자에 김밥 몇 조각과 고구마 맛탕 몇 조각을 담아, 세 테이블 건너 편에 있는 그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그 남자는 의외로 겸손하고 순진하게 나를 응대하였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사람 앞에 서서 내가 잠깐 동안 머뭇거렸는데, 그 남자는 아주 잠깐이지만 겁 먹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깊숙이 고개까지 숙이면서 고맙다는 말을 반복하였던 것이다. 말할 때 보니, 앞 이가 여러 대 빠져있었다.
2.
나는 지난 주에 김기덕 감독의 그 영화를 찾아서 보았다. 그 영화는 <파란 대문>(1998)이었다. 영어 제목은 Birdcage Inn (새장 여인숙)인데, 그런 제목이 붙은 것은, 이 영화의 배경이 바로 ‘새장 여인숙’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여인숙이기 때문이다. (그 여인숙의 대문 색깔은 파란색이다.) 이 여인숙에 스물 세 살짜리 여자(이지은 粉)가 일을 하러 온다. 험한 일이다. 이 여인숙은 손님들에게 숙박 써비스만 제공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 험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주인 내외는 아이들까지 데리고 그냥 그 여인숙에서 생활하고 있다. (남편 역에 장항선, 아내 역 맡은 배우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고등학생 아들 역에 안재모, 대학생 딸 역에 이혜은)
가족들이 일어나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한다. 이 때 바로 이들 코 앞에 있는 15호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온다. ‘긴 밤’ 잔 손님이 아침에 ‘한번 더 해 달라’고 요구하였던 것이다. ‘한번 더 해 준’ 이지은이, 잠시 뒤에, 수돗가로 나와 주인집 가족들 사이에 끼여 양치질을 한다. 그리고 아침 밥상이 마련되면 지은이는 그 가족들과 같은 상에 둘러앉아 아침 식사를 한다. 물론 동갑내기 주인집 딸 이혜은은 노골적으로 이지은을 멸시한다. 자기들이 쓰는 세숫대야와 치약마저 이지은에게 내 주지 않으려고 한다. 불결하다는 것이겠지.
“나는 너와 신분이 다르단 말이야. 알겠어?”
이 영화는 그런 주인집 딸이 어찌 어찌하여 변화되는 과정, 즉 ‘신분이 다른 자’를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3
알고 보았더니 김기덕 이 친구, 나와 출생지가 같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리’ 단위까지 같다. 서벽에는 다 합쳐보았자 30 혹은 40호 정도나 있을까? 김기덕은 우리보다 2, 3년 아래인 듯하니 잠깐 동안은 -- 우리 집은 내가 태어난 뒤 곧바로 춘양 5일장이 서는 춘양면 중심으로 나왔다 -- 그와 내가 같은 시기에 그 마을에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내 출생지가 봉화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아, 그 오지?”라고 말한다.
그나마 봉화 읍내도 아니고 춘양면의 면사무소가 있는 마을도 아닌, 리 단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면, 사람들은 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서벽은 아름다운 곳이다. 마을 뒤로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앞으로는 제법 넓은 계천을 안고 있으며 동구에서 조금 들어가면 범상치 않은 큰 나무도 한 그루 모시고 있는, 누가 보아도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곳이다. 봉화 유지 주원이 말에 의하면, 그 인근에 동양 최대 규모의 휴양림이 들어설 계획이라고 한다. 그것만 보아도 그 고장 풍광이 얼마나 수려한지 충분히 알 수 있겠지? 게다가 김기덕 같은 유명 영화감독, 아니 작가주의 감독도 배출하지 않았는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면 후반에 주인공의 장년 모습이 나오는데, 그 역할을 맡아 연기한 사람은 감독 자신이라고 한다. 웃통을 벗고 무술 수련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몸이 아주 단단하고 얼굴은 더 단단하게(?) 보이더라. 짧게 말하자면, 진짜 서벽 촌놈처럼 보이더라. 길게 말하면, 우리 할아버지 조영감 -- 조영감은 서벽 뒷산 산판에서 요즈음으로 치면 노무과장에 해당하는 일을 하셨다 -- 밑에 들어가서 목도질하기 딱 좋은 몸과 얼굴을 가졌더라.
작가주의 감독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조금 이상하게 붙여진 이름이지만, ‘작가주의’라는 말은, “그 감독은 마치 작가(소설가)와 같다”는 점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영화를 찍지만, 황석영이나 박범신 같은 작가처럼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작가주의 감독의 영화는, 예컨대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거나 선악 이분법을 거부한다거나 하는, 겉으로 쉽게 드러나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파란 대문>에는 당연히 정사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그 장면을 보고 성욕을 느끼는 관객은 없을 것이다. 불편하고 심지어 불쾌하여 성욕이 부추겨지기는커녕 도리어 억제된다. 여인숙 주인 남자와 고등학생 아들은 각각 강제로, 또 사정사정하여 -- “누나, 우리 반에서 아직 못해 본 건 저 하나밖에 없거든요.” -- 이지은과 정사를 가지지만, 그리고 그 아들은 자기가 찍은 이지은의 누드를 10만원 받고 잡지사에 팔아넘기지만, 그들은 악인이 아니다. 심지어 이지은의 뼈골을 빼먹는 기둥서방마저 순정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계속)
첫댓글 일단, 여기까지만 올릴께
흥미진진..일단,여기까지만 볼께
KBS의 독립영화관을 통해 그 영화와 김기덕 감독의 설명을 직접 들은 것이 기억난다. 이곳 미국 도서관에 "봄, 여름, 가을, 겨울" DVD가 있어서 보았는데, 아주 특이한 감독이라 생각된다. 영태 교수의 후일담이 기다려진다.
김기덕이가 자기 영화에 대하여 뭐라고 말했을지가 정말로 궁금하네. 내가 제대로 본 것인지도 궁금하고. 이 후배(?)의 영화 중 내가 제일 재미있게 본 것은 <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