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그러하셨듯이
최월성
매콤한 바람이 심술궂지만 교회 뜨락에 돋아난 봄나물이 나를 유혹한
다. 향긋한 봄냄새에 흠뻑 취하고파 뜰로 나갔다. 쑥이랑 고돌배기를 캐
며 잠깐인 듯 했으나 바구니 가득 차 올랐다. 뜰에 쏟아놓고 다듬으려니
쌀쌀한 봄바람이 몸을 움추리게 하여 따끈한 차 한잔이 생각났다. 일을
잠시 뒤로 미루고 집안으로 들어가 연두빛 향기 찻잔에 담아 들로 햇살이
잘드는 곳으로 나와 앉았다. 멀리보이는 지평선. 최남단 제주도를 향해
화폭을 펼쳐본다. 그곳에 봄은 아직도 한발 앞서 오고 있겠지! 오래전
떠나온 그곳에는 나를 반겨줄이 아무도 없지만 나의 유년과 어머니의 숨
결이 베어있기에 나는 오늘도 그리움을 태워본다.
가난의 찌들린 삶이었지만 사랑이 넘쳐나던 그곳, 지금은 어떻게 변했
을까? 이맘때쯤이면 앞마당 텃밭에 파랗게 올라온 마늘 몇 움큼을 솎아
다가 끓는 물에 대쳐내어 이웃집 할머님도 모셔오고 길가시던 아주머니도
들어오시게 하여 요것저것 양념을 챙겨넣지 않더라도 사랑이 양념되어 짠
간장에 살짝 찍어 입에 넣으면 얼마나 맛있던지 그렇게 시장기를 달래보
던 넉넉한 사람들이 살던 곳, 오늘처럼 햇살이 따사로울 때면 약속이나 한
듯 흐르는 물가로 몰려들었던 아이들. 검정고무신 벗어 배 띄워놓고 오
론도론 얘기도 나누다가 까르르르 웃어보기도 하다가 그 중에 누군가 ‘치
어'라도 한 마리 잡게 되면 갑자기 터지는 함성소리에 뚝에서 풀뜯던 송
아지도 놀랬던지 멈칫하며 커다란 눈만 껌벅거리곤 했었다.
그렇게 우리는 찬물에 발잠근채 햇살이 기울도록 놀았던 탓이었는지 한
밤중에 심한 고열이 올랐다. 십리밖에 있는 병원이나 약국에는 가볼 염
두도 못내시는 어머님께서는 차가운 물수건만 갈아 얹어주시며 밤을 새우
셨다. 다음날 아침 퀭해진 내 얼굴을 보시고 눈물만 뚝뚝 흘리시다가 서
둘러 어딘가 다녀오신 바구니엔 나스미깡 한 개와 생강 몇 알, 통나물 한
움큼에 갱엿도 몇 조각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온 동네 사람들의 인정으로 모아진 민간약제였다. 어머니께서
는 정성스레 손질하여 작은 양은솥에 담아 화롯불에 올려놓고 짜작짜작
졸이는 냄새는 얼마나 달콤하고 향기롭던지 어쩌면 고뿔에 걸린 것이 횡
재인 듯 오히려 즐겁기도 했었다. 동네사람들의 인정과 어머니의 정성은
헛되지 않았기에 나는 거뜬히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아이들 소리가 나
는 쪽으로 달려나가는 모습을 보시고 그제서야 안심인 듯 밭고랑에 나 앉
던 어머니, 그 마음 이제야 그려볼만 하건만 이미 이 세상에 없으신 그
분께 어떤말로 감사한들 들을 수 있으랴. 불혹의 나이가 지나고 지천명
에 이르려하는 이제야 철이 드는지 평생 고운 옷 한번 입어볼 수 없던 그
분의 삶이 가슴 저미게 한다.
그토록 힘든 여생을 살면서도 운명앞에 묵묵히 순종하던 당신은 물한그
릇 찬밥 한덩이에도 감사하며 길쌈매는 밭이랑에 함께 앉아 둘려주던 교
훈이 다시금 뇌리를 스친다. 미련하고 우매하면 자신도 힘들거니와 남도
괴롭게 하는 죄인이 된다시며 지혜를 얻으려면 어른과 대화하기를 게을리
말라. 더불어 사는 것이 세상이므로 이웃을 외면하지 말고 콩한쪽도 나누
어 먹는 습관을 갖되 공치사하지 말라. 혹여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내가 나누어 주었던 그가 외면할지라도 서운해 말 것을 나는 그에게 베풀
었을지라도 의롭지 못하게 했음을 깨달으라 하셨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더 젊으셨던 당신께서는 오늘의 내 운명을 아셨던
것처럼 어쩌면 그토록 내가 부딪치며 살아온 모든 문제에 합당한 이야기
만 했을까.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절망하지 말고 무엇이든 잡으려는
욕심보다 손해보는 듯 하나 계산하지 말고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바라보
며 매콤한 바람에도 솟아오르는 봄나물처럼 강하고 향기롭게 살라하신 당
신, 당신이 그러하셨듯이 나도 그렇게 살라하신 그분의 말대로 되어버린
운명인 것같아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토록 날카로운 교훈이 없었다면 질풍노도와 같은 세월을 어떻
게 감당했을까. 만약 그분의 엄격한 가르침이 없었다면 오늘 이렇게 글
을 쓰고 있지 않았으리라.
1999.
첫댓글 매콤한 바람에도 솟아오르는 봄나물처럼 강하고 향기롭게 살라하신 당
신, 당신이 그러하셨듯이 나도 그렇게 살라하신 그분의 말대로 되어버린
운명인 것같아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토록 날카로운 교훈이 없었다면 질풍노도와 같은 세월을 어떻
게 감당했을까. 만약 그분의 엄격한 가르침이 없었다면 오늘 이렇게 글
을 쓰고 있지 않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