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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리(金谷里)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에 있는 리(里).
마을이 언덕지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남쪽으로 가래골못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쇠각단, 상금곡, 중금곡, 하금곡이 있다. 쇠각단은 철을 채광하여 장인들이 쇠붙이를 다루어 무기나 농기구를 제작하고 이를 운반하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상금곡은 금곡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금곡은 금곡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금곡은 금곡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금곡리;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는 리(里).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금곡리(金谷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수동면 수산리, 서남쪽으로 연평리, 서북쪽으로 장현리와 접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오남읍 양지리·오남리·팔현리와 경계를 맞대고 있으며, 북서쪽으로 부평리, 북동쪽으로 진벌리와 이웃하고 있다.
자연환경
남쪽의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일대에서부터 동쪽의 수동면과의 접경지를 거쳐 북동쪽의 진접읍 진벌리와의 경계 지역에 이르기까지 동쪽의 철마산에서 뻗어 나온 산자락을 끼고 있으며, 진접읍 부평리와 맞닿는 서북쪽에도 벌안산이 솟아 있어 서남쪽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산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형 탓에 금곡리 동남쪽의 철마산 자락에서 발원하는 금곡천이 서쪽으로 흐르다가 서북쪽으로 진접읍 장현리와의 자연적 경계를 이루고 있는 왕숙천과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흐른다.
금곡천이 마을을 통과하여 흐르고 있으며 마을 뒤에는 산지가 위치하고 있다.
형성 및 변천
1914년 전국에 걸친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양주군 진벌면 금곡리·주곡리를 통합하여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금곡리로 개설되었다.
-1980.4.1 법률 제3169호에 의거하여 양주군에서 분리되어 남양주군이 신설됨에 따라 경기도 남양주군 진접면 금곡리가 되었다.
-1989.4.1 진접면이 진접읍으로 승격되면서 경기도 남양주군 진접읍 금곡리가 되었다.
-1995.1.1 남양주군과 미금시 통합에 따라 남양주시가 신설되어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가 되었다.
명칭 유래
‘금곡’이라는 이름은 1914년 금곡리가 개설될 당시 기존의 양주군 진벌면 금곡리(金谷里)·주곡리(周谷里)에서 각각 ‘금(金)’과 ‘곡(谷)’을 따 와서 명명된 것이다. 금곡리의 ‘금곡’은 예로부터 쇠가 많이 산출되어 ‘쇠푸니’·‘쇠파니’ 등으로도 지칭된 마을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주곡리의 ‘주곡’에 대해서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두릅이 많이 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는 설이 있고, 주리를 틀던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주리골’ 또는 유씨가 많이 살아서 붙여졌다는 ‘주유골’ 등의 이칭도 있다.
자연마을로는 쇠푸니, 주곡(주리골, 주유골) 등이 있다. 금곡리는 금곡리의 금 자와 주곡리의 곡 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쇠푸니는 예로부터 이 지역에 쇠가 많이 나서 쇠푸니, 쇠파니라고 불리게 되었다. 주곡은 삼면이 두루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어서 불리게 된 지명이라 한다. 이와는 달리, 두릅이 많기 때문에 주곡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이곳은 주리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 이곳이 주리를 틀었던 곳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한 주유골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유씨(柳氏)가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현황
1만 3216세대, 3만 6673명[남자 1만 8193명, 여자 1만 848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2021년 현재).
장현리와 접하는 서북쪽 근처에서 국도 제47호선 일부 구간이 지나간다. 다수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는 예당마을·해밀마을 등의 주거 지역 대부분은 국도 제47호선 근방과 왕숙천 유역, 그리고 2022년 3월 19일 개통된 수도권 전철 4호선 진접선의 진접역 주변 등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주거 지역 근처에 에버그린파크·해참공원 등 다수의 도시공원이 들어서 있어 지역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산업시설 용지 규모 7만 1860㎡에 달하는 금곡일반산업단지가 2015년 준공되어 다수의 제조업체가 입점해 있다. 벌안산 자락에 경복대학교 남양주캠퍼스가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경기도 유형문화재인 신재 한상경 영정과 경기도 무형문화재인 소목장, 경기도 문화재자료 양평공 한계순 묘역 등이 있다.
금곡리(金谷里)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 있는 리(里).
흑천이 마을을 따라 흐른다. 금곡리는 '쇠일'이라고도 불리는데, 예전에 큰 홍수가 났을 때 사금을 일던 곳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하북면 하광리 일부를 합쳐 금곡리라 하고 용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갈띠(갈지), 금남, 금북, 모릉이말, 벌말, 중간말, 칠정말 등이 있다. 갈띠는 칠정이 남쪽의 마을로 가지산 아래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금남은 쇠일 남쪽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금북은 쇠일 북쪽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모릉이말은 갈지 서쪽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벌말은 쇠일 남쪽 벌판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간말은 칠정말과 쇠일 중간에 있는 마을이다. 칠정말은 일곱 우물이 있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곡리(金谷里)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에 있는 리(里).
개금산을 마주 보고 있다. 개금산에는 금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는 전설에 따라 금곡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절터골, 새터말, 아랫말 등이 있다. 절터골은 옛날 어떤 지관이 명당을 찾으려고 돌아다니다가 연대리의 서시리 주막에서 바라보니 금곡리 뒷산 지금의 절터가 명당이라, 부랴부랴 달려와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애만 태우다 돌아갔다 전해진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새터말은 일명 새터라 하며 금곡리 서쪽에 새로 된 마을을 말한다. 아랫말은 금곡리의 새터말의 아래쪽 마을로, 마을 사람들의 공동 우물이 있으며 주위에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금곡리(金谷里)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에 있는 리(里).
마을 동쪽에 산지가 발달하였다. 남북으로 흐르는 지류를 따라 농경지가 발달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개목동, 너머말, 눈금말, 동가동, 모퉁말, 샘말, 샛말, 안개목, 응골, 큰퇴개울, 토끼울 등이 있다. 금곡리는 본래 천현내패면 지역으로, 쇠를 캤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금을 파던 굴이 7∼8군데 있었다고 한다. 쇳골이라고도 한다. 개목동은 나무가 많아 화목함을 연다 하여 붙은 이름이며, 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의 모양이 개 목같이 생겼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개무기, 개모기라고도 한다. 너머말은 산너머에 마을이 있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쇠골이라고도 한다. 눈금말은 금이 마치 눈알 모양으로 출토된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동가동은 평산 신(申)씨가 많이 살아 평말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동가동으로 불린다. 샘말은 가물어도 샘이 잘 솟아 붙은 이름이다. 응골은 웅담리 법원리와 파평면 두포리로 갈리는 삼거리에 장승이 서 있어 이름 붙여졌으며, 지금의 금곡 삼거리이다. 토끼울은 뒷산에 토끼가 많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토금을 캐내던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며, 퇴깨울, 토기골, 토기동, 토기곡이라고도 한다.
금곡리(金谷里)
경기도 평택시 안중읍에 있는 리(里).
마을 전반에 농경지가 있으며, 구릉지에 밭, 과수원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쇠누리, 관두(冠頭), 간두리, 송내동(松內洞), 솔안, 서란말, 원금곡(元金谷), 임촌(林村), 순말 등이 있다. 금곡리는 마을이 와우형(臥牛形: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 하여 쇠누리 또는 금곡이라 하였다. 관머리는 쇠누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관두머리, 관두라고도 한다. 솔안말은 쇠누리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앞에 소가 있었다. 숲말은 숲이 무성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금곡리(金谷里)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에 있는 리(里).
농촌마을이다. 쇠실이라고 한데서 금곡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금곡, 양지말, 음지말 등이 있다. 양지말은 금곡 동쪽 양지에 있는 마을이다. 음지말은 금곡 서쪽 음지에 있는 마을이다. 가곡면 대리로 가는 고개인 매나미재가 있는데 매화나무가 많았다 한다.
금곡리 (金谷里)
충청북도 보은군 회남면에 있는 리(里).
회남면의 동북쪽에 위치한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있고 골짜기가 많다. 회민천이 발원하여 금강으로 합류하며 전답이 좋은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깨박골, 느트정, 쇠실, 스승골, 양지뜸, 웃말, 음지뜸 등이 있다. 깨박골은 전에 깨를 많이 갈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느트정은 옛날에 느티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쇠실은 본래 이 지역에 쇠가 많이 났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여기서 금곡리 지명이 유래하였다. 스승골은 옛날 이 곳 절에 중이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문화유적으로 양정사가 있으며, 아미산성에는 남매의 전설이 전해온다.
금곡리(金谷里)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에 있는 리(里).
벼농사를 하며 포도를 많이 재배하는 것이 특징이다. 벼농사를 짓는 평야가 넓게 있으며 포도가 많이 재배되고 있다. 남쪽에는 낮은 산지가 있고 경부고속도로가 관통하며 서쪽에는 경부고속도로의 영동터널이 있다.
자연마을에는 사기막(사금마을), 장자발, 쇠실이 있다. 사금마을은 모래에 철이 많이 섞여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쇠실은 예부터 이 곳에서 철이 많이 났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금곡리(金谷里)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에 있는 리(里).
마차방죽이 있다.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각곡리, 점촌리, 마차리, 용소리, 내금천리, 외금천리를 병합하여 금천과 각곡의 이름을 따서 금곡리라 했다.
자연마을로는 금천, 용소, 모치올 등이 있다. 금천을 쇠우물, 쇠물, 소물이라고도 한다. 조선 숙종 때 정승(政丞)을 지낸 허적(許積)이 출생한 곳이다. 이곳에 별장(別莊)을 마련하고 우물을 만드는데 돌 대신 쇠를 녹여서 우물을 만들었다 하여 금천, 쇠물이라 했다. 소물을 외금천(外金泉), 안소물을 내금천(內金泉)이라 한다.
금곡리(琴谷里)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에 있는 리(里).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한과 이곡의 이름을 따서 금곡리라 했다.
자연마을로는 금한이(琴閑이), 대바위, 북고개, 삼거리, 새말, 서원말, 쓰레골(이곡), 큰말 등이 있다. 금한이는 마을의 지형이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태라 하여 금한이라 했다. 절벽 꼭대기에 작은 암자가 있는데, 그 주위 경치가 수려하여 신선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노닐었다 하여 강선암(降仙庵)이라 한다.
금곡리(金谷里)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에 있는 리(里).
국귀봉 아래에 자리잡은 농촌마을로 장고개터널이 지난다.
자연마을로는 봉화뚝, 쇠기정이 등이 있다. 봉화뚝은 봉화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쇠기정이는 옛날에 사기점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특산물로는 사과순대가 있다.
금곡리(金谷里)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에 있는 이(里).
평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남쪽으로 신양천의 지류가 흐르기 시작한다. 금곡사우(金谷祠宇)의 이름을 따서 금곡리라 하였다. 행정구역은 금곡 1,2,3,4리로 되어 있다.
자연마을은 동촌, 모청이, 무데기, 서촌, 신촌, 화석 등이 있다. 모청이는 모퉁이라 하던 것인데 충신 김수남이 강당을 짓고 후진들을 교육하여 글 읽는 소리가 밤 늦도록 들리므로 모청이라 한다. 무데기는 마을에 돌무데기가 있었고 이곳에 무사가 많이 생긴다는 전설이 있다. 화석은 동촌 동쪽에 있는 마을로 화석이 많다고 한다. 닭다릿들은 육군 제 2훈련소 연무대가 있는 들로 이 곳에서 옛적 말방울, 말급쇠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도지정 문화재 제 26호 견훤왕 묘가 있다.
금곡리(金谷里)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에 있는 리(里).
평지가 대부분의 지대를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남동쪽에 전대 저수지가 자리하고 있으며, 남서쪽에 옥녀봉이 솟아 있다.
자연마을로는 아구내, 원저울 마을 등이 있다. 아구내 마을은 전에 벙어리가 많이 살았으며 지금도 불구자가 많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며, 원저울 마을은 아구내 동쪽에 있는 마을로 절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명명되었다. 문화재로 문화재자료 298호인 한음선생영정 (漢陰先生影幀)이 있다.
금곡리(金谷里)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에 있는 리(里).
논이 넓게 펼쳐진 농촌마을이며 세울천과 탄방천이 마을 앞으로 흐른다. 금이 많이 나므로 금곡이라 칭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금곡, 해남재, 행지마을 등이 있다. 금곡마을은 금곡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는 금곡리의 그것과 같다. 해남재마을은 해남재 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행지마을은 은행나무가 무성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금곡리(琴谷里)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에 있는 리(里).
은하면의 내남과 경계를 이루며 금리천이 흐르고 있다. 양질의 토질을 바탕으로 활발한 농사활동과, 한우 및 젖소 등의 축산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구성안, 원천, 해창, 금곡, 동살미, 분티 등이 있으며, 검은개가 있으므로 검은갯골 또는 금곡이라 한데서 금곡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원천은 머내라는 고지명을 갖고 있는데, 마을 앞에 먼내가 있으므로 냇물의 이름을 따서 머내, 원천이라고 불렀다.
금곡리(金谷里)
전라북도 순창군 풍산면에 있는 리(里).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풍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자연 환경
금곡리는 동쪽으로 죽전리, 서쪽으로 유정리와 삼촌리, 북쪽으로 반월리와 접하고 있다. 남쪽은 산지가 있어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주산리와 경계를 이룬다. 서쪽 유정리와는 사천이 경계를 이룬다. 특히 남쪽은 261.8m 높이의 호미봉에서부터 북쪽의 사천에 이르기까지 완만한 능선이 이어지면서 하천 유역의 평지와 만나는 산록 완사면에 안곡 마을과 호성 마을이 위치하여 있다. 호미봉에서 이어지는 능선이 안곡 마을과 금곡제[덕산제] 사이로 이어져 두 지역을 구분하고 있다. 사천을 따라 지나가는 지방도 730호선인 금풍로는 유정리와의 자연적인 경계를 이룬다.
남쪽의 산지가 전라남도 곡성군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은 사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 충적지를 형성하고 있다.
형성 및 변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금곡리를 형성하여 전라북도 순창군 풍산면에 속하였다.
명칭 유래
금곡리(金谷里)에는 덕산 마을, 호성(虎城) 마을, 안곡(安谷) 마을이 있다. 금곡리는 본래 쇠실이라 부르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안곡 마을, 호성 마을, 덕산 마을을 통폐합하면서 쇠실의 ‘금’ 자와 안곡의 ‘곡’ 자를 합하여 금곡리로 표기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안곡 마을은 약 180여 년 전 옥천 조씨(玉川趙氏)가 여생을 편안히 살기 위해 마을에 정착하였다. 호성 마을은 처음에 해주 오씨(海州吳氏)가 터를 잡아 취락이 형성되었으며 마을 뒷산이 범의 꼬리 형상을 하고 있어 마을 이름을 호성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덕산 마을은 조선 시대 권경중의 할아버지가 안득산에 살다가 광인(狂人)이 발생하자 터가 좋지 않다고 바같득산으로 옮겼으며, 산이 덕이 있게 생겼다고 마을 이름을 덕산이라 칭하였다고 전해 온다.
안곡(安谷), 호성(虎城), 덕산(德山)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안곡은 풍산면 가덕마을 사이에 솟아있는 매봉(219.9m) 아래 골짜기 급경사진 곳에 마을이 이루어져 있다. 불교가 전성기였던 고려조에 대가람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옥천 조씨 입향조의 호(號)를 따서 안곡(安谷)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주변에 매봉·파학굴 등 새와 연관된 지명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 마을의 지형상 기러기 골짜기이므로 안곡(雁谷)이던 것이 고쳐진 것으로 보인다.
현황
2021년 12월 31일 현재 금곡리의 면적은 2.6㎢이며, 인구는 71가구, 134명으로 남자가 66명, 여자가 68명이다. 사천과 호미봉 산지 사이에 위치하여 하천변의 충적지는 논농사가, 산지의 급경사가 완만해지는 산록 완사면에는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진다. 국도 27호선인 풍산로가 금곡리 우측을 남북으로 관통하여 우치 고개를 넘어 곡성군 옥과면으로 이어지는데, 2014년을 전후하여 이 고개에 지하 차도가 건설되었다. 또한 금풍로에서 분기한 호성길이 안곡 마을과 호성 마을을 연결하여 준다. 국도 27호선이 죽전리로부터 이어져 남북 방향으로 관통하며, 서쪽으로 지방도 730호선이 사천과 함께 경계를 만들고 있다.
금곡리(金谷里)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에 있는 리(里).
깃대봉 아래에 자리잡은 중산간마을로 계내명덕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금곡, 가매바우, 갈모배미, 단지정, 덜매기, 월계가 있다. 금곡은 쇠가 많이 났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가매바우는 마을에 있는 바위가 옛 가마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단지정은 마을에 단지와 같이 오목한 골짜기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금곡리(今谷里)
전라남도 나주시 공산면에 있는 리(里).
농업이 주로 이루어지는 지역이며, 최근에는 축산농가도 증가하는 추세이다.
자연마을로는 원금곡, 장승백이마을 등이 있다. 원금곡은 마을 지형이 궁형으로 뒷산에 월봉이 있고 앞에는 큰 호수가 있어 밑으로 폭포가 있었고, 서편에는 석벽(石壁)이 가로놓여 아름다운 풍치를 이루었다. 당시 용곡-강씨가 살고 있다 하여 원금곡이라 불리던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승백이는 장승이 서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일제 시대에 토속신을 뽑아 없애고 가까운 곳(지금의 유아원자리)에 신사단을 만들어 천황에게 예배하도록 하여 장승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 마을은 면의 중심지이자 교통의 요지이다. 또 생활필수품의 유통센터로, 1일과 6일에 5일 장이 서고 많은 사람이 모여 교육과 행정의 중추역할을 하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금곡리(金谷里)
전라남도 완도군 생일면에 있는 리(里).
생일도에 있는 섬마을로, 백운산 앞의 평지에 자리하였다. 옛날에 이곳에서 금을 팠었다 하여 금곡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쇠그미, 당샘, 평풍바웃골, 계란바웃골 마을 등이 있다. 쇠그미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금곡리의 그것과 같다. 당샘마을은 제사지낼 때 길어 썼던 우물이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평풍바웃골마을은 병풍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계란바웃골마을은 계란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금곡리(金谷里)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에 있는 리(里).
구릉성 평지로 이루어진 해안지역으로, 작은 하천이 흘러 논농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마을 명칭은 1596년 임진왜란 당시 영광김씨 김여중(金汝重)이 마을에서 곡식을 모아 군량미 300석을 이순신 장군에게 바치자 조선의 제14대 왕이었던 선조가 금곡(金谷)이라는 이름을 마을에 하사하였던 데서 유래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행정구역 개편을 구실로 마을 명칭을 하금(下金)이라 변경하였던 것을 현대에 들어와서도 사용하다가 2007년 1월 장흥군으로부터 조례변경 승인을 얻어 다시 금곡이라는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아리쇠끄미, 독시암골, 용바웃골, 밤나뭇골 마을 등이 있다. 아리쇠끄미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쇠끄미 아래쪽이 되어 이러한 지명이 생겨났다. 독시암골마을은 돌틈에서 물이 나오는 샘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용바웃골마을은 용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밤나뭇골마을은 밤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금곡리(金谷里)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에 속한 리(里).
마을 북서쪽에 철성산이 위치한다. 과거에 금이 많이 나는 마을이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동막동, 나막(羅幕), 금곡(金谷) 등이 있다. 동막동은 철성산성의 동쪽 막사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나막은 과거 철성산성의 막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금곡리(金谷里)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에 있는 리(里).
평지가 대부분의 지역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마을 남쪽에 신방산이 자리하고 있으며, 북쪽에 오동지가 위치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금곡, 아리뜸, 우뜸 마을 등이 있다. 금곡 마을은 쇠가 났다 해서 쇳골 또는 숫골이라 불리다가 후에 금곡 마을이라 개칭되었다. 아리뜸 마을은 금곡의 아래쪽에 위치한다는 의미에서 명명되었으며, 우뜸 마을은 금곡 위쪽에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금곡리(金谷里)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에 있는 리(里).
마을 뒤로 백운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으며 앞으로는 개천이 흐른다. 성북지, 배실지 등 크고 작은 못이 매우 많은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가마실(부곡), 노래(적하), 배실(이곡) 등이 있다. 가마실은 예전에 그릇 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노래는 옛날에 윤씨가 집단 거주하였으므로 윤씨의 호를 따서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배실은 배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금곡리(金谷里)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에 있는 리(里).
동과 서는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리의 가운데에 목통천이 북으로 흐르며, 그 냇가에 좁은 들이 형성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위량면에 속한 적하리였고, 1914년에 부곡, 비실(배실), 비곡 등을 합하여 금곡동이라 하였다. 1934년 신설된 감문면에 예속되었으며 1971년 적하를 금곡1동으로 나누었다. 1988년에 동(洞)을 리(里)로 바꾸었다.
자연마을로는 구금곡(舊金谷), 안터, 거물리(巨勿里), 주막뜸, 개정지 등이 있다. 구금곡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당시 안동 권씨가 이곳에 피란을 와서 이룬 마을이다. 금곡이란 지명은 옛날 이 고을에 사금이 많이 나와서 금광이 매우 성하였으므로 금을 캐는 사람들이 붙여준 것이라 한다. 안터는 내기(內基)라고도 한다. 병자년 대홍수 때 금곡이 물바다가 되어 전답과 가옥이 모두 떠내려가고 사람이 7명이나 죽어 안터밭에 새로 집을 짓고 살게 된 후부터 밭 이름인 안터가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거물리는 옛날 이 마을 앞에 거무리(거머리)가 많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거무리라 한 것이 한자음으로 거물리가 되었다 한다. 또 거머리의 원의미는 거북이며 거물리는 거북을 농경지대의 토템으로 섬기던 신앙에서 비롯한 지명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주막뜸은 옛날 김천에서 합천 해인사나 거창으로 가는 통로였던 이곳에 주막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개정지는 마을 입구에 크고 작은 아름다운 정자나무가 있었다 하여 개정지, 가정지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금곡리(金谷里)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에 있는 리(里).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북쪽에 낙동강이 흐른다. 금이 많이 났으므로 금곡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쇠실, 봉황대, 비석골, 새마, 양지마, 살개방웃골마을 등이 있다. 쇠실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 또한 금곡리의 그것과 같다. 봉황대마을은 봉황대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솟아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비석골마을은 유씨의 묘비가 있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새마마을은 쇠실 서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양지마마을은 볕이 잘 드는 양지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며, 살개방웃골마을은 쌀개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금곡리(金谷里)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에 있는 리(里).
임봉산 자락에 위치하여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고도가 높은 편이다. 길안천이 발원하여 흘러가는 전형적인 산촌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쇠일(소일,금곡,금곡동), 갈고개(깔현), 고마실(꾸마곡), 망골(망고지), 미내(미천), 새떰(신기), 솔메기, 아릇갈고내(하갈현), 아릇미내(하미천), 웃갈고개(상갈현), 웃미내(상미천), 중갈현 등이 있다. 금곡은 쇠가 많이 나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갈고개는 갈화락지형의 명당이 있다는 갈고개 재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고마실은 예전에 곰이 살았다고 한다. 미내는 길안천이 휘돌아서 흐르는 금곡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금곡리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에 있는 리(里).
금곡리는 동으로는 동해, 서는 칠보산, 남은 백석리, 북은 삼읍리가 있다.
자연마을로는 망곡, 지경, 유금(有金), 음지모치, 종지뱅이 등이 있다. 망곡은 어선이 어망을 실은 형국이라 하여 망곡(網谷, 그무실)이라 칭하였으며, 유금천(有金川)이 마을을 지나는데 이 개울에서 사금이 난다 하여 금곡이라 했다는 말도 있다. 지경(地境)마을은 영해와 평해의 경계가 된다 해서 지경이라 하였다. 유금(有金)마을은 6세기경 금(金)이 발견되었다 하여 유금이라 칭했다 하며, 그 뒤 18세기에 이곳에 꿩이 많다 하여 아치곡(雅雉谷)이라 했다고도 한다.
금곡리(金谷里)
경상북도 예천군 은풍면에 있는 리(里).
마을이 소백산맥 아랫자락에 자리잡았고 동쪽으로 한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덕거리, 쇠실, 처용이 있다. 덕거리는 마을 주변 계곡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넷이라 하여 넉거리로 불리다가 후에 훌륭한 사람들이 살아서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고쳐부르게 되었다. 쇠실은 마을 뒤편 산세가 좋아 훌륭한 인물이 배출될 곳이라 했는데 임진왜란때 이요송이 이 마을의 명을 끊기 위해 쇠말둑을 박은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처용은 고려때 처용사란 절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금곡리(金谷里)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에 있는 리(里).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에 속하는 법정리.
자연 환경
북서쪽으로는 국사봉, 북쪽으로는 노동령, 남동쪽으로는 응봉산, 서쪽으로는 골두봉, 남서쪽으로는 해망산으로 둘러싸인 산간 마을로서 바람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 계곡에서 발원한 소하천들이 금당천으로 합류되어 북서에서 남동으로 흐르는 가운데 소하천의 중상류에는 금당지를 비롯한 크고 작은 많은 저수지가 산재해 있다. 지형적인 관계로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광대 바위와 태자암과 같은 바위가 있다.
국사봉 자락의 산지로 둘러싸인 마을로서 바람의 영향을 적게 받는 산촌 마을이다. 작은 하천인 금당천의 발원지가 있고, 크고 작은 저수지들도 많이 있다.
형성 및 변천
본래 비안군 외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금당동과 누곡동을 병합하여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금곡동이 되었다.
-그 후 1916년에 안평면에 편입되어 의성군 안평면 금곡동이 되었고,
-1988.5.1 군 조례 제1225호에 의거하여 금곡리로 개칭되었다.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경상북도 비안군 외북면의 금당동과 누곡동을 병합하면서 두 지명의 일부를 따서 금곡동이라 칭하였다. 금당동은 김씨와 백씨가 이주해서 살던 곳에 김상숙이라는 선비가 영천에서 이주하여 지세와 지형의 조화를 맞추어 성(姓)인 ‘김(金)’자와 집 ‘당(堂)’자를 합하여 금당동이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금당동은 금당댕이라고도 부른다. 누곡(累谷)은 1400년경 영천 이씨가 처음 이주해 왔으나 후손이 잘 생존치 못해서 더러울 누(陋)자를 써서 누곡(陋谷)이라고 칭하였다. 최근 더러울 ‘누(陋)’자가 나쁘다고 하여 ‘누(累)’자로 바꿔 누곡(累谷)이라고 개칭하였다.
자연마을에는 금댕, 누곡이 있다. 금댕은 과거에 김씨와 백씨가 이주해서 살다가 김상숙이란 선비가 지세와 지형의 조화를 맞추어 성인 김(金)자와 집 당(堂)자를 합쳐 지은 이름이다.
현황
금곡리는 안평면의 북서부에 자라 잡고 있다. 면적은 13.57㎢이며, 총 79가구에 139명[남 77명, 여 62명] [외국인 제외]의 주민이 살고 있다(2011.12.31 현재). 동쪽으로 삼춘리와 하령리, 서쪽으로 의성군 안사면 중하리, 남쪽으로 의성군 비안면, 북쪽으로 의성군 신평면 검곡리와 인접하고 있다.
지방도 912호선이 통과하고 있다. 주곡·엽연초·고추 등을 주로 생산하고 있다. 주민 편익 시설로는 금곡 1리 마을 회관, 금곡 2리 노인 회관이 있어 마을 주민들의 휴식과 모임의 장이 되고 있다.
금곡리(金谷里)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에 있는 리(里).
통내산 자락에 있는 산촌 마을이다. 옛날부터 금과 철광이 나왔다고 쇠실, 쇠골이라 불리워져 한자로 표기를 '金谷(금곡)'이라 하였다. 20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
자연마을에는 담안, 버귀, 윗마을, 아랫마을, 사목정마을이 있다. 담안은 돌이 많아 돌담을 쌓아 담 안에서 산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버귀는 마을이 외부와의 접촉이 뜸한 지역이므로 마을 안산에 지봉수태가 설치되어 그 기능을 발휘할 때에만 비로소 소식을 들을 수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윗마을과 아랫마을은 각각 통내산의 암벽 아래 경사면에 자리잡은 마을의 위, 아래쪽을 지징하는 것이다. 사목정마을은 4그로가 정자를 이루고 있어 지은 이름이다.
금곡리(金谷里)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에 있는 리(里).
수봉산자락에 위치한 산간지역 마을이다.
자연마을에는 쇠골, 모퉁이가 있다. 쇠골은 마을 주변의 산과 들 중에서 동기의 주산이 오행중 김생에 해당한다고 쇠골이라 불러온 것이라 한다. 모퉁이는 동네 입구로서 창녕으로 가는 길목에 숲이 있고 행인들이 많아 주막이 있던 곳이며 마을의 한 모퉁이에 위치하였다 하여 모퉁이라 불렀다.
금곡리(金谷里)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에 있는 리(里).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청도군에서 제일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을 제외한 세 방향은 산으로 에워싸여 있으며, 서쪽으로는 창녕으로 접하는 길이 트여 있다. 6·25 전쟁 때 이 길이 인민군의 지도에 그려져 있지 않아서 인민군이 창녕까지 점령하고도 청도 비티재는 넘지 못했다고 전한다.
자연 환경
비슬산 조화봉 앞쪽에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마을 뒷산이 마랑재[마령치(馬嶺峙)]를 지나서 화악산을 이루며 동네를 둘러싸고 있다. 마을 앞은 화산(花山)이 앞을 막고 있고 동쪽만 트여 있다. 청도천의 발원지이다.
금곡리는 마을 뒤쪽으로는 밭이, 마을 앞 개울 건너와 도로 쪽으로는 논으로 형성되었으며, 아직 경지 정리가 되지 않은 계단식 논이 많다.
형성 및 변천
금곡리는 1709년 이전에는 밀양군에 속해 있다가,
-1709년 이후로는 대구진(大邱鎭)으로 이속되었으며,
-1895년에 청도군 현내면으로 이관된 지역이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금곡동이라 하여 풍각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에 금곡동에서 금곡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풍각 서부 국민학교의 전신인 풍각 서부 간이 학교가 이 마을에서 시작되었다가 현재의 풍각면 안산리[구산]로 옮겨와 많은 졸업생을 배출하고 농촌 지역의 인구가 대도시로 옮겨가면서 폐교하게 되었다.
1600년 초 평택 임씨 임계량이 정착한 후 형성된 마을로서 지금도 평택 임씨 집성촌이다.
명칭 유래
쇠골, 즉 금동 또는 금곡동이라고 하는 마을은 마을 뒤에 쇠를 캤던 굴이 있다. 예전에 이 골짜기에서 쇠를 채취했다고 하여 금곡이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주막은 모퉁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마을 입구 금곡리 마을 숲 내에 주막이 있어 주막걸이라 부르며, 마을 모퉁이에 위치한다고 하여 모퉁이라 부르기도 한다. 예전의 주막집이 이제는 작은 가게로 운영되고 있어 마을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현황
2012년 6월 현재 면적은 6.13㎢이고, 총 118가구에 217명[남자 98명, 여자 11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은 풍각면 안산리, 서쪽은 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 연당리·대산리, 남쪽은 성산면 방리, 북쪽은 풍각면 화산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느티나무 숲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져 있고, 이곳을 금곡리 마을 숲이라 부른다. 금곡리 마을 숲은 인근 금리, 화산리의 지기 유실을 막기 위해 조성했다고 전하지만, 사실 역원제를 실시할 당시 역과 원의 이정 표시로 30리마다 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마을 숲 맞은편에는 재실이 위치한다.
마을 남쪽에는 남서∼동북 방향으로 국도 20호선이 지나고 있나며, 마을 입구에 금곡 보건 진료소가 위치한다. 창녕군과의 경계 지역에 경상남도에서 대구광역시로 이어지는 송전선로의 변전소가 만들어지고 있다.
금곡리 마을 끝에는 금곡 돌다리라 불리는 곳이 있다. 청도천 발원지 중 하나인 청도천의 지류가 마을의 서쪽을 지나가는데, 과거 이곳은 그냥 건너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크고 평평한 돌로 돌다리를 만들어서 이곳을 건너다녔는데, 비가 오거나 홍수가 질 경우 이 다리를 건너지 못해 건너편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도로를 복개한 뒤에도 이 다리 중 일부는 버리지 않고 마을 할매당 맞은편 개천 변에 위치한다. 과거 마을의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하였던 다리에 대한 고마움으로 마을 주민들은 동제를 올릴 때 함께 이곳에 금줄을 두르고 보호한다.
금곡리에는 임계량을 향사하는 기룡재와 임화서를 향사하는 용암재, 임광협의 묘재인 유연재가 있으며, 김재정의 묘재인 모효재와 박응의 묘재인 화산재가 있다.
금곡리(金谷里)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에 있는 리(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작은 하천이 흘러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곳이다. 금이 나던 곳이라 하여 금곡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금곡, 초막골, 밤나무골, 당평마을 등이 있다. 금곡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 또한 금곡리의 그것과 같다. 초막골마을은 조선 명종 때 윤씨 효자가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밤나무골마을은 초막골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밤나무가 많았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당평마을은 당제를 지내는 당나무가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금곡리(琴谷里)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있는 리(里).
수양산 남쪽 골짜기를 따라 기밀[今日]들을 이룬다. 동으로 영암리, 서로 마현리에 접하며, 남으로 장기천(용암천)이 닿는다.
기밀은 조선 명종 때 허진수(許進壽)라는 선비가 이 곳에 기거하면서 동해 일출을 보며 거문고를 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용암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금곡리에는 허진수를 제향하는 금산서원과 삼효각, 죽와정 등이 있다.
금곡리(金谷里)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에 있는 리(里).
마을 중심부를 포함한 대부분의 지대가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마을 서쪽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하천이 굽이쳐 흐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마느실, 창암, 배나뭇골 마을 등이 있다. 마느실 마을은 뒷산이 마늘쪽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창암 마을은 강가에 큰 바위가 있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배나뭇골 마을은 배나무가 많다 하여 불리워진 이름이다.
금곡리(金谷里)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에 있는 리(里).
삼면(三面)으로 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들 건너편에는 단장천이 흐르고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조건을 갖춘 마을이다. 또 마을 내에는 주변의 산골짜기에서 내려온 물이 모여 곡내천(谷內川)을 이루면서 단장천으로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본촌, 골안 마을이 있다. 본촌 마을은 일제 말기에 단산(丹山)이 분리되면서부터 본동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골안 마을은 중산의 아래쪽 골짜기에 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금곡리(琴谷里)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에 있는 리(里).
천태산, 채봉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어 골짜기가 많으며, 마을 앞으로는 개천이 흐른다. 금곡소류지, 목곡소류지 등 소류지가 많은 농촌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거무실(금곡), 새땀(신기) 등이 있다. 새땀은 금곡 북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는 뜻이다. 천태산에는 마고선녀가 돌을 가지고 왔다는 전설이 내려오며, 금곡 서남쪽에 있는 세인골은 성인이 계시던 곳이라고 한다.
금곡리(金谷里)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에 있는 리(里).
서쪽으로 남강이 흐르며 대부분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신당저수지, 북마성소류지 등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구계, 금평, 뇌동, 신당동, 필동 등이 있다. 구계는 괴밋골이라고도 하며 둥둥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산의 모양이 거북같이 생겼다 하여 구계라고 부른다. 금평은 평갱이 들이라고도 부르며 곡식이 돈이라고 하여 금평이라 이름 붙였다. 뇌동은 신당동 동남쪽에 있는 자연마을이며 마을 앞산이 북처럼 생겼다 해서 둥둥골이라고도 부른다. 신당동은 계밋골 동북쪽에 있는 자연마을이다. 필동은 동리 옆 뒷산의 형상이 붓처럼 생겼다 하여 필동이라고 부른다.
옛지명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금곡리는 지금의 성남시 분당구 금곡동이다.
-경기도 남양주군 미금읍 금곡리는 지금의 남양주시 금곡동이다.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금곡리는 지금의 수원시 권선구 금곡동이다.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금곡리는 지금의 화성시 금곡동이다.
-전라남도 광산군 석곡면 금곡리는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이다.
-경상남도 동래군 구포읍 금곡리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이다.
북한지역에도 금곡리가 많이 있다.
금곡리(金谷里)
황해남도 배천군 남동부, 예성강(례성강) 하류에 있는 리.
북쪽은 방현리(方峴里)와 강호리(江湖里), 남쪽은 문산리(文山里), 서쪽은 유천리(柳川里:류천리)와 접하며, 동쪽은 예성강(례성강)을 사이에 두고 개성직할시 개풍군 신서리와 접한다. 지명은 예로부터 금이 많이 나는 지역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연백군 유곡면(류곡면) 금곡리·용현리(룡현리)·계화리 지역이었다가, 그후 남연백군에 속하였다. 1952년 12월 면이 폐지됨에 따라 배천군 금곡리로 통합되었고, 1954년 10월 황해도가 황해남도·황해북도로 분리될 때 황해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중앙에는 봉화산·망재산·건병산 등의 야산이 있으나 대부분의 지역이 연백평야에 속하는 넓은 평야지대를 이룬다. 붉은고개·장승백고개 등 낮은 고개들이 있으며, 예성강과 그 지류인 한교천·월교천 등이 동쪽과 북쪽으로 흐른다. 한교천에는 배수갑문이 건설되어 수량 조절과 해일 피해를 막고 있다.
전체 면적의 20%가 산림이며, 경지면적 중에서 논이 56%, 밭이 36%, 과수원이 5%를 차지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옥수수·콩이다. 이 지역에는 예로부터 고품질의 금이 많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망재산과 봉수대, 벽란도 등이 있다. 고등중학교 2개소가 있으며, 인민학교와 병원도 있다. 군 소재지인 배천읍까지의 거리는 10k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