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의 히메유리(1987, 요나조 노부코) 45.
● 제 IV부 제 8장 연적(恋敵)
1인용참호로 돌아가 보니 선생님들이 나를 찾고 있었다고 세츠코가 말했다. "아시미네(安次嶺) 선생님에게는 변소에 갔다고 변명했었지만, 아시미네 선생님과 우치야마(内山) 선생님은 당신이 돌아오는 대로 바로 선생님에게 오라고 말했습니다." 라는 전언이었다.
그 말을 듣고 바로 아시미네 선생님에게로 갔다. 선생님은 화가 나 있었다. 교사들은 유사시에 학생들에 대한 책임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군대에만 의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여학생들은 대체로 선생님들의 명령에 순응했지만, 나는 문제학생으로 취급되었다.
나 또한 아시미네 선생님의 근엄하고 강직한 성격이 조금은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들은 너에게 지도자로서의 중요한 책임을 맡기고 있다. 선생님들의 허가 없이 지정된 장소를 떠나는 것을 금지했다. 변소에 갈 때도 마찬가지다."
선생님은 "변소"라는 말을 강조했다. "변소에 간다는 구실은 선생님에게는 수긍이 않된다. 누구에게서도 자주 듣는 변명이다.” 아시미네 선생님은 나에게 마침내 설교를 시작했다. 책임이라든가 공동 생활이라는 것에 대해 조곤조곤 나를 타일렀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나는 선생님께 사과하려고 했다. 아시미네 선생님은 학생의 안전을 신경 쓰는 한편, 병원과의 사이를 조정하는 것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창백한 얼굴의 광대뼈가 유달리 돌출되어 보였다.
그때 구미코(久美子)가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전형적인 충군애국형(忠君愛国型)의 구미코 ― 그녀의 두껍고 다부진 입술은 타고난 도덕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여기에 모습을 드러냈을까. 그녀는 아시미네 선생님의 뒤에 서서 내가 꾸중을 듣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에게 이렇게 자존심이 손상되는 일은 없었다. 설교는 괴로웠다. 경쟁자 앞에서 설교를 듣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나는 아시미네 선생님의 꾸중을 무시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나카타니는 큰 집을 찾아 내어 거처를 옮겨 혼자 살고 있었다. 나카타니는 어떤 큰 행운을 받고 태어난 사람일까. 아니면 남달리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일까. 분명 둘 다 해당되는 것 같았다.
이 어려운 시대에 ---염소 오두막 구석에서 적어도 하룻밤을 묵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난리통에 사람들로 넘쳐나는 이토스에서 나카타니는 어였하고 큰 집을 한 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그이기 때문에 불가능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카타니는 농담조로 상류층 사람들이 손님을 영접하는 예절을 흉내내어 나를 맞이했다. 그는 현관 입구에까지 나와 나를 맞이하고 공손한 인사도 하였다. 나도 그에게 장단을 맞추고 신발을 벗고 집 주인과 마주 앉았다. 마치 평화로운 시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집안은 깜짝 놀랄 정도로 정리 정돈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메고 온 짐자루 안의 물건을 꺼내 하나하나 제대로 정리하여 방 한켠에 놓아 둔 것이 보였다. 더러워져 옷깃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예의 상의가 벽의 못에 걸린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앉은 위치에서 부엌이 보였다. 나카타니의 반합이 아궁이 위에 걸려 있었다. 반합 바로 옆에 손잡이가 빠진 작은 쇠 냄비가 있었다. 어디서 냄비를 찾아왔는지 묻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나카타니는 "잠깐만"이라고 말하고 부엌으로 갔다가 조금 지나, 야채 조림을 담은 그릇을 두 개 손에 들고 돌아왔다. 아직 김이 나는 그릇 중 하나를 내 앞에, 다른 하나를 자기 앞에 놓았다. "하에바루 병원에 가기 전에 가루 된장을 조금 가져온 게 있었어."라고 말했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 먹어본 된장의 맛이었다. 야채조림은 맛있었다. 나카타니가 만든 것은 무엇이든 맛있었다. 그의 아낌없는 마음 씀씀이에 호감이 갔다. 나카타니는 상대에게 호기롭게 음식을 대접하는 성격이었다. 예의 네모난 얼굴의 나카자토가 언젠가 나카타니를 험담한 적이 있었다.
"그 녀석에게 마음을 주면 안 돼. 미소를 잃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런데 그 녀석이 어떤 인간인지 나는 잘 알고 있어. 나는 녀석이 동료의 급식 밥통을 훔쳐 먹는 것을 본 적이 있어. 밥통에 손을 넣고 밥을 훔쳐 먹는 것을 보았어. 덤불 속에 숨어서 한 손을 밥통 안에 넣어서 밥을 퍼먹고 있었어. 배터지게 먹고 있던 것을 나는 이 두눈으로 확실하게 보았어" 라고.
나카자토가 나카타니의 험구를 헜을 때, 나는 흥미도 있었고, 또 재미있기도 했다. 덤불 속에 숨어 적기의 공습 속에서도 배불리 밥을 먹고 있는 그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면서 우습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츠코와 나도 함께 비슷한 일을 두세번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카타니를 탓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쨌든 얼마 안 되는 자신의 음식을 손님에게 내놓는 나카타니는 결코 욕심이 많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나카타니와 내가 기분 좋게 맛있는 저녁을 먹고 있는데, 떠들썩한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떠들썩한 말소리, 큰 웃음 소리, 냄비 솥의 부딪히는 소리, 젖먹이가 우는 소리, 양동이 물 소리 등 마을은 벙커에서 돌아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나는 그날의 아시미네 선생님의 설교를 떠올렸다. 이제 돌아가야 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나의 의무였다. 푸른 파가 집 뒤에 자라고 있다고 나카타니가 가르쳐 주었다. 나는 가능한 한 많은 파를 뽑아 근처의 진흙탕이 된 빗물 웅덩이에서 파를 씻으면서 급우들에게 파를 먹여 줄 수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나는 벙커로 돌아가기 전,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나카타니의 집에 들렀더니 기분 나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구미코 씨가 아까 노부코 씨를 찾으러 왔었어"라고 나카타니가 말했다. "구미코가 왔었어요?"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되물었다.
'구미코는 나카타니 씨가 이토스에 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여기에 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구미코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나카타니와 연결시켜 그녀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쿠미코 씨에게 물어보세요" 라는 나카타니의 의미 있는 웃음이 나를 불쾌하게 했다.
운이 나쁘게도 저녁이 되면 학생들이 항상 모여드는 히가 이장집 마당에서 나는 구미코와 마주쳤다. 그녀는 국물이 담긴 냄비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저녁 식사는 나 없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었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내 도움이 필요 없다면 왜 나를 찾아 다녔다는 것일까?
구미코와 나는 평소부터 서로 피하고 있었지만, 오늘의 구미코는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와 냄비를 양손에 든 채 불평하기 시작했다. "노부코 씨, 당신은 자신이 지도자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라고 나를 꾸짖기 시작했다.
"당신은 어른처럼 야무지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도자로 뽑혔겠죠. 그래서 당신에게는 모두에 대해 의무가 있는 거야.” 라는 아시미네 선생님과 똑 같은 말을 하다니 알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가 나카타니를 찾아간 일을 떠올렸다. 구미코가 나보다 오래 전부터 나카타니와 알고 있었다는 것이 불쾌했고 그 기분을 떨처 버릴 수가 없었다. 작심하고 침착하게 말하는 그녀의 그런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그녀는 생각하고 생각해서 천천히 입을 여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사용한 '의무'라든가 '책임'이라는 말은 현재의 상황에서는 더 이상 별 의미 없는 말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런 단어가 그녀의 두꺼운 입술에서 나오자 다시금 무의미하게 들렸다. 나는 그녀의 긴 속눈썹과 크게 부릅뜬 검은 눈동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눈은 두툼한 입술과 마찬가지로 나를 짜증나게 했다. 그녀가 나를 온 마을로 찾아다녔다는 말을 듣고 나는 그녀의 말을 도중에 막았다. "알고 있어. 당신이 나를 찾고 있었던 것도 알고, 당신이 나카타니 씨에게 간 것도 알고 있어."
구미코는 놀란 얼굴로 말대꾸하지 않았다. 국물 냄비를 양손에 든 채 서 있는 구미코를 마당 한가운데에 내버려두고 나는 그 자리를 떠났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서 그녀에게로 갔다. 그녀의 날카로움 눈길은 조금 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은 나카타니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나카타니는 좋은 사람이었고, 그를 만나기 전까지 이 세상에 ‘사랑’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나는 나카타니를 깊이 사랑하고 있으며, 이 사실을 전 세계 누구에게 알려도 상관없다고도 말했다.
나는 이야기하면서 구미코의 눈빛이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처음에는 나의 진실하고 솔직한 말이 그녀를 감동시켰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전보다 더 날카로위져 있었다.
"당신이 지금 한 말은 책임이나 의무와 어떤 관계가 있어." 그녀는 가시돋친 말을 내뱉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 상관도없어. 그냥..."
"그 사람과의 관계가 당신의 책임에 방해가 된다고 말하고 싶은 거군." 나는 대꾸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논리 정연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 감정은 없는 것일까. 구미코에게는 울고 싶을 때 울거나 웃고 싶을 때 함께 어울려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라는 것이 있을까.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약간의 침묵이 있은 후, "그럼" 이라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만약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없다면 아시미네 선생님에게 가서 말하라." 그리고 구미코는 그 자리를 떠났다가, 뭔가 할 말이 남은듯이 발길을 되돌렸다.
"나카타니 씨에 대해 한마디 충고해 두지만, 그는 당신에게 어떤 말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라면 그 사람을 믿지 않을 거야. 그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야. 나는 잘~알고 있으니까."
그녀는 나에게 얼굴을 외면한 채로 말했다.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를 떠났다. 나는 인적이 없는 마당에 혼자 남겨진 채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34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