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완성악보 / 차주일
침묵으로 발효된 말을 품고 비로소 바라보게 되었을 때
연인은 나의 침묵에서 세레나데를 듣고 있었다
선율을 암송하는 듯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산책하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이 그리움의 회귀는
지금의 어둠과 침묵으로 발효되었던 내 말이 같은 조도인 까닭이다
빛으로 헤진 도시를 내려다보며 어둠을 기워나간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듯 간판들을 훑어본다
소리보다 밝았던 글자와 조형들이 어둠으로 돌아간다
전자기타 줄처럼 떨리던 길들이 제 구획의 어둠을 덧대고
침선에 꿰이는 산동네 쪽창들 한 땀 한 땀 어두워진다
어둠의 악보에서는 고저장단이 같은 것이므로
음표가 필요 없는 묵음의 악보를 다 펼치고 나면
우리는 태초의 세레나데를 이식할 수 있을까
세상 모두 어둠 속으로 돌아가 태아처럼 웅크린 밤
인간이 만들어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유일한, 십자가들
네온 빛으로 축조한 여백으로 도시를 파수하고 있다
신성불가침의 여백 속으로 어둠을 밀어 넣는다
영혼의 경계는 극소량의 어둠도 허락하지 않는다
나의 침선은 빛과 어둠의 소절에서 헛땀질하고 있다
『현대시』,2006, 6월
“침선(針線)의 상상력 ”, 이재훈, 계간『詩評』, 2006, 가을호
세레나데는 저녁의 음악이다. 늦은 밤 연인의 창가에서 애처롭게 부르는 노래이다. 세레나데는 단순한 선율이 대부분이지만 감동이 있는 곡조다. 세레나데는 감미롭고 달콤한 사랑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세레나데는 칭송과 정열의 언어에 바쳐진다. 이 세레나데를 침묵 속에서 듣는 이가 있다. 시인은 ‘미완성 악보’가 아니라 ‘不완성악보’라고 했다. 미완(未完)의 의미 속에는 완성되지 않은 채 종결된 운명이 느껴진다. 혹은 언젠가는 완성을 이룩하겠다는 여지를 남기는 말이 ‘미완’에 속한다. 그와 반대로 ‘不완’의 말 속에는 의도적으로 완성을 시키지 않겠다는 어떤 의지로 읽힌다. 단어의 뜻과는 다르게 느낌이 다른 이 말을 시인이 갖다 붙인 연유에는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음’이 아니라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음’을 자각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음’ 이 ‘이루지 않겠다’는 의지로 바뀌는 시인의 시적 도정을 따라가 보자.
시의 화자는 이미 침묵을 배웠다. 시인은 침묵 속에서 비로소 어떤 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침묵을 깨친 자의 연인도 만만치 않은 배움을 깨치고 있다. 침묵 속에서 세레나데를 들을 수 있는 밝은 귀를 가지게 된 것이다. 말은 침묵을 통해 만들어져 그 침묵 속에서 다시 삭이고 삭혀 한 마디의 선율이 완성되어가는 것이다. 그 선율은 이미 불완성이라는 운명을 직시하고 있지만, 점점 어둠이 들이닥치면서 “침묵으로 발효되었던 내 말”이 무엇을 그리워하게 된다.
이미 침묵을 경험한 자가, 시인의 말처럼 ‘회귀’의 감성 속으로 다시 되돌아가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시인이 도시를 바라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도시를 바라보기 위해서 회귀의 장막을 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가능한 짐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이미 도시는 폐허의 몰골이므로 그 도시를 그대로 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는 희망의 근거이다. 또 하나는 시간상으로 도시는 어둠으로 둘러싸여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의 시는 “ 빛으로 헤진 도시”를 어둠으로 기워 나가는 ‘침선(針線)의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어둠 속에서 침묵을 지켜야 할 도시가 밝은 문명의 조도에 의해 헤져나가는 모습은 가장 근원적이고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본 도시의 이미지이다.
이제 시인의 눈은 어둠의 침묵을 통해 세상을 본다. 그러나 빛에 헤진 도시는 시인의 섬세한 손으로 두드려야 하는 악보이기에는 어려운 불협화음의 악보이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듯 간판들을 훑어”보다 보면 서서히 네온이 하나 둘 꺼진다. 시간에 의해 “소리보다 밝았던 글자와 조형들”이 어둠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어둠의 실로 도시를 꿰려던 시인의 의지는 한 땀 한 땀 그 존재들을 엮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시인은 “어둠의 악보에서는 고저장단이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묵음의 악보란 시인의 말대로 음표가 필요 없는, 즉 고저장단이 필요 없는 악보다. 이러한 악보를 가진 시인은 태초의 세레나데를 연주할 꿈을 꾼다. 지금은 “세상 모두 어둠 속으로 돌아가 태아처럼 웅크린 밤”인 것이다. 침묵을 배운 자가 어둠을 맞이한 잉태의 순간이 바로 지금이다.
여기에 성스러워야 할 십자가의 조명이 도시를 악보로 삼은 시인의 눈에는 제소리를 내지 못하는 묵음의 결정적인 이유가 되고 있다. 십자가는 “인간이 만들어 인간이 통제 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더구나 십자가는 밤새 꺼지지 않는 유일한 등불이다. 십자가가 거느린“ 신성불가침의 여백 속”으로 어둠이 구겨져 들어간다.
침묵과 어둠 속에서 잠을 자야할 도시의 고뇌는 문명의 빛으로 더욱 고난하다. 어둠으로 한 땀 한 땀 도시를 꿰려던 시인의 상상력은 태초를 꿈꾼다. “태초의 세레나데를 이식 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러한 침묵 속에서 완전한 어둠이 될 때까지 기다리게 하는 힘이다.
시인은 이러한 빛과 어둠의 사이에서 스스로 ‘헛땀질’이라 말하는 ‘不완성악보’를 그리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헛땀질’은 시인의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시인의 운명은 언제나 불가능을 꿈꾸는 존재이던가. 엄밀히 말하면 침묵을 배운 자는 시의 언어가 필요 없다. 침묵이 언어보다 더 큰 구원이 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언어를 놓을 수 없다. 침묵은 저 혼자 높이 자유로울 수는 있지만, 불완성을 향한 고뇌의 흔적은 결코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를 통해 완성을 꿈꾸는 시인의 고투는 어떤 고귀한 자유보다도 값진 것이라고 시인은 또한 믿는다.
첫댓글 오랫만에 오셨군요. 더위에 고생 많으셨죠?
안녕하시죠? 정말 오랜만에 들렸어요. 덕분에 무더운 날씨에도 꿋꿋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세브란스치과 이재환 원장에게 cesura님을 아느냐고 물어보았었는데 모른다고 하더군요. 카페닉이라서 그런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