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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흥아론(興亞論) 외
문대식 추천 0 조회 61 20.03.22 14: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탈아론(脫亞論) 과 흥아론(興亞論)

 

후쿠자와의 탈아론(脫亞論)이 한창일 때 이와는 다른 입장에서 한국과 아시아 문제를 주장하는 조선 침략론이 있었다. 다루키 도키치의 '흥아론(興亞論)'이 그것이다. '백인의 서양에 맞서 황인의 아시아를 크게 일으키자'는 흥아론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주장한 후쿠자와와는 분명 입론을 달리하는 것이지만 조선 침략론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다루이 도키치는 《대동합방론 大東合邦論》(1893)에서 구미 열강의 아시아 침략으로 동아시아의 위기는 실로 중대하고도 절실하다면서, 아시아 전체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세 단계를 제시했다. 첫 단계는 한국과 일본이 합동해 '대동'이라는 새로운 합방국을 세우고, 둘째 단계는 대동국이 중국과 긴밀한 동맹 관계를 수립하고, 셋째 단계로 대동국과 중국이 연합해 남양 제도를 포함한 '대아시아 연방'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이 합방론의 핵심은 한국과 일본이 합방한다는 첫 단계의 대동국 건설에 있었다. 다루이 도키치는 "일본은 화(和)로 국가를 다스리고, 조선은 인(仁)으로 백성을 다스린다. 화는 만물을 서로 조화시키고 인은 만물을 서로 화합시킨다. 그러므로 두 나라의 친밀한 정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  우리 일본과 조선 두 나라의 지형은 입술과 이(齒)와 같고, 그 세력은 수레바퀴와 같고, 그 정은 형제와 같으며, 그 의리는 벗과 같다"

 

다루이 도키치가 주장한 대동합방론은 당시 제국주의가 힘없는 나라를 식민지화하던 세계의 현상을 '서양 대 동양', '백인 대 유색인'의 구도로 파악해 동양은 단결해서 이를 막아내야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동양 3국을 지정학적 차원에서 운명 공동체로 파악하고, 그 가운데 조선과 일본에 대해서는 인종과 문화의 동질성을, 중국에 대해서는 근친성을 바탕에 깐 주장이다.

 

 

윤대원,《21세기 한중일 역사전쟁》p 67~69 

 

 

 

 

 

  大阪 1907. 11. 15

 

 

 

 

 

현양사(玄洋社)와 흑룡회(黑龍會)

 

정한론에서 비롯한 일본의 우익 사상은 1880년대를 지나면서 탈아입구론, 흥아론, 국수주의 등 다양한 흐름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주류를 차지하면서 오늘날 일본 우익의 기저에까지 연결된 것은 '아시아주의'이며, 이것을 실천에 옮긴 단체가 현양사와 흑룡회다.

 

일본은 1854년 미국의 함포 외교에 굴복해 화친조약을 맺은 뒤 미국을 비롯한 영국, 네델란드, 러시아, 프랑스 5개국과 잇따라 굴욕적인 통상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과정에서 왕의 칙서도 없이 조약을 체결한 도쿠가와 바쿠후와 이에 저항하는 존왕양이파 사이에 격렬한 정치적 대립이 일어났다.

 

존왕양이파는 하층 무사계급을 중심으로 한 세력으로 이들은 위칙 조인에 대해서는 '존왕'을, 개국정책에 대해서는 '양이'를 주장했다. 결국 존왕양이파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개국파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가 동맹을 맺고 왕정복고를 위한 쿠테타를 일으켜 메이지 신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신정권을 수립한 이들은 '내치 우선'을 주장하는 국권파와 '외치 우선'을 주장하는 정한론파로 갈렸다. 국권파는 종래의 번(藩)을 폐지하고 정부 관료를 지방에 파견하며 정부군을 조직하는 등 개혁조치를 취했다. 이것은 자연히 봉건 권력층과 하층 무사계급의 반발을 샀다. 사족층과 하층 무사계급을 기반으로 하던 존왕양이파의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에 반발하며 조선 정벌로 국력을 밖으로 팽창하자는 정한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국권파에게 권력투쟁과 내전(세이난 전쟁 西南戰爭)에서 패배하자, 이번에는 반정부운동을 벌이며 민선국회를 개설하자는 주장을 펼쳐 일부 성공을 거두웠다.  이들은 '자유'나 '민권'하고는 전연 연관이 없는 집단이었다. 어찌 되었든 1889년 헌법을 공포하고 1890년 제한된 선거를 실시해 제국의회를 출범시켰다.

제 1회 제국의회가 열리던 날, 당시의 야마가타 아리토모 총리는 "조선을 일본의 이익선으로 한다."라는 매우 의미심장한 연설을 했다.  그러자 정한론자들은 '정부의 대외 팽창 정책이 곧 자신들의 주장이었다며 이 때부터는 정부 정책에 적극 호응해 대외 침략의 첨병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제 정한론자와 국권파는 한 몸이 되어 조선과 대륙 침략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속속 조선으로, 만주로, 중국으로 몰려갔다. 이들이 이른바 일본 우익의 행동대원이자 별동대인 '낭인(浪人)'이다. 권력투쟁에서 탈락한 사족이나 하층 무사, 권력에서 소외된 청년들로, 지사(志士)임을 자처하면서 입신출세라는 야망을 위해 중구이나 조선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정보수집 등을 하며 침략의 별동대 역할을 했다.

 

현양사(玄陽社)라는 명칭은 현해탄에서, 흑룡회는 흑룡강에서 따온 것으로, 현양사는 조선에서, 흑룡회는 대륙 경영의 큰 포부를 이룬다는 뜻이다.

 

"현양사는 우구지사의 단결이고, 애국지사의 단결이고,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충신의 단결이고, 민권신장론자의 단결이고, 또한 군국주의자의 단결이다. 천금을 가볍게 여기는 의기, 천하를 짊어질 기상, 비분강개의 뜨거운 피,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모여 현양사가 태어났다."(현양사 선언문)

 

"시와 술로 벙탕하게 즐기면서 소일하는 조선 정부와 민씨 일족의 압정을 깨트려 도탄에 빠진 조선 백성을 구제하고, 민씨의 악정을 조종하는 청국을 한반도에서 ?아내고, (.....) 동아시아의 항구적인 평화를 유지하고, 이웃 나라의 존망지추를 묵과할 수 없어 조선과 '같은 조상과 같은 글'을 가진 국가인 일본은 의협인을 조선에 보내게 되었다." (천우협天佑俠 격문)

 

  

 

 

 

 1904. 3. 31. 동경일일신문 

 

 

 

 

 

미국은 '정의의 나라'

 

조선의 글깨나 읽는 식자층은 미국에 대해서 매우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조선 사람들이 미국에 관해 알게 된 것은 개항 이전 중국에서 들어온 책을 통해서였다. 1840년 제1차 아편전쟁을 겪은 중국은 세계정세, 특히 서양 여러 나라의 사정을 살피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 인문 지리서인 《해국도지海國圖地》나 《영환지략》등을 편찬해 서방 세계에 대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북경에 다녀온 사신 등이 이 책을 국내에 소개하면서 당시 정치인과 지식인 사이에서 읽혔다.

 

해국도지에 미국을 소개한 부분을 보면_,,

"미국은 영국 오랑캐의 학정에 항거하여 독립했으며, 영국 오랑캐는 아편으로 매년 수천만금을 앗아가나 미국은 무역으로 중국에 매년 백 수십만금의 이익을 주고 있으며, 부강하되 작은 나라를 능멸하거나 중국에 교만하지 않다."

 

親중국, 結일본, 聯미국을 소개한 조선책략에 보면_,,

"조선의 동해로부터 곧장 가면 아메리카가 있으니 곧 합중국이 도읍한 곳이다. 이 나라는 본래 영국에 속해 있었는데, 100년 전에 워싱턴이라는 자가 유럽 사람의 학정에 발분 자립하여 나라를 독립시켰다.  이 뒤로부터 선왕의 유훈을 지켜 예의로써 나라를 세우고, 남의 토지 를 탐내지 않고, 남의 인민을 탐내지 않고, 굳이 남의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와 중국과는 조약을 맺은 지 10여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조그마한 분쟁도 없는 나라다. 일본과의 왕래에 있어서는 통상을 권유하고 개약(改約)을 협조했으니 이는 천하 만방이 다 아는 바다."  

 

이러한 선입견이 대중적으로까지 정착하는 데는 청이나 일본과 달리 내정간섭을 하지 않는 미국의 정책이나, 교육 의료봉사를 앞세운 선교사의 활동 등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또한 서재필 등 독립협회가 발행하던 <독립신문> 역시 이런 분위기에 일조를 했는데,

당시의 독립신문에 보면_,,

"미국은 다른 나라와 같이 전쟁을 일삼지 않고 다만 백성을 편안히 하고 이롭게 할 신법을 창설하여 안락 평안함이 가히 극락세계가 되었는지라 태평양에 있는 모든 섬나라들이 자원하여 미국의 속국이 되기를 원하되, 미국 정부가 이를 허락지 않고 도리어 자주하라 권하며, 혹은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무례히 압제를 받든지 자유권을 뺏긴 나라가 있으면 자기 나라 군사를 죽이며 재물을 허비하여 그 약한 나라를 기어이 도와주니, 이는 미국 사람의 큰 도량이요."

 

조선에 온 선교사의 활동을 소개한 글을 보면_,,

" 조선에 있는 외국 사람들 중에 똑 조선 백성만을 위하여 와 있는 사람들은 교(敎)하는 이들이라, 이 더럽고 위태하고 친구도 없는 만리 타국에서 자기 돈을 들여 의복 음식 거처를 준비하고, 학교를 개설하여 조선 남녀를 공히 교육하며, 병원을 짓고, (.....) 정치에는 상관 아니한 즉,  다만 바라는 것은 불쌍한 조선의 백성들이 자기 나라 사람 같이 되어 나라 안에 법률이 생기고, 나라를 보존하고, (.....)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본받으라 함이니, 예수교같이 착하고 참사랑 하고 참 남을 불쌍히 여기는 교는 세상이 다시 없는지라."

 

 .

 .

 

루즈벨트는 1900년 8월28일 자신의 테니스 친구인 독일인 스테른부르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이 한국을 차지하는 것을 보고 싶다.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저지 세력이 될 것이며, 아직까지 일본이 해온 일로 미루어보아 그들에게는 한국을 차지할 자격이 있다."

대통령이 된 루즈벨트는 또한 도움을 요청하는 한국에 대해 "우리는 자신의 방어를 위해 적에게 일격조차 가할 능력이 없는 한국인을 돕기 위해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고도 말했다.

 

"선교사 여러분은 기독교 문명을 동양에 전파하는 개척자들입니다. (.....) 여러분은 단지 목사나 특사일 뿐만 아니라 정치가들입니다. 아니 정치가가 되어야만 합니다."

 

 

- 同書 '한반도의 자화상'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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