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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성 제도
신 19:1-13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여러 민족을 멸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땅을 네게 주시므로 네가 그것을 받고 그들의 성읍과 가옥에 거주할 때에
2 네 하나님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4 살인자가 그리로 도피하여 살 만한 경우는 이러하니 곧 누구든지 본래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인 일,
5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의 이웃을 맞춰 그를 죽게 함과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6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원한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하지 아니하나 두렵건대 그 피를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
7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기를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라 하노라
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
9 또 너희가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의 길로 행할 때에는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이같이 하면 그의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11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다가 일어나 상처를 입혀 죽게 하고 이 한 성읍으로 도피하면
12 그 본 성읍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거기서 잡아다가 보복자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할 것이라
13 네 눈이 그를 긍휼히 여기지 말고 무죄한 피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
신 19:1-13 / [도피성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하는 땅의 백성을 친히 멸망시키셔서 마침내 여러분이 그들을 쫓아내고 그들의 성읍과 집에 들어가 살게 되면 2)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실 그 땅의 성읍들 가운데에서 셋을 도피성으로 구별해 놓으십시오. 3)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실 땅을 세 구역으로 구분하고 누구라도 도피하기에 편리하도록 도피성들을 적당한 거리에 고루 배치해 놓으십시오. 4) 누구든지 본래 원한이 없는데도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에는 그곳으로 도피하여 살 수가 있습니다. 5)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친구와 함께 나무를 베러 숲속으로 들어가 도끼를 휘두르며 나무를 찍다가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나가 그의 친구를 쳐죽였으면 그는 가까운 도피성으로 피하여 살 수가 있습니다. 6) 그는 본래 친구에게 원한이 없었기 때문에 사형을 당할 이유가 없으나 복수하려는 사람은 홧김에 그 살인자를 뒤쫓아가서 도피성에 이르기 전에 그를 붙잡아 쳐죽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도피성을 너무 먼 곳에 두지 않아야 합니다. 7)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우선 세 성읍을 지정해 두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8) 여러분이 처음 그 땅을 차지하고 살 때에는 세 도피성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여러분의 영토를 넓혀 주셔서 주께서 주겠다고 약속하신 그 땅을 모두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9)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명한 이 모든 계명을 지켜 행하여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평생 동안 주님의 가르침대로만 살면 여러분이 그 땅을 모두 차지할 것입니다. 그때에는 본래의 세 도피성에다 셋을 더 두십시오. 10) 그리하여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시는 땅에서 죄없는 피를 흘려 여러분에게 사람을 죽인 죄가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1)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기의 이웃에게 원한을 품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그에게 달려들어 쳐죽인 다음 이런 도피성들 가운데에 한 곳으로 피신하였으면 12) 그의 고향 마을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도피성에서 붙잡아다가 복수하려는 사람에게 넘겨 주어 죽이게 하십시오. 13) 여러분이 그런 살인자를 불쌍히 여기어 살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에서 살인자를 그냥 두지 마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이스라엘 땅에서 평안히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도피성은 모세오경의 여러 부분에 나옵니다(출 21:12-14; 민 35장; 신 4:41-43; 신 19:1-13; 수 20:1-9). 본문도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지만, 본문에서는 도피성 위치와 역할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고(1-3, 9)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주신 땅에 들어가면 그 땅 전체를 세 구획으로 나누어 각기 한 가운데 있는 성읍을 따로 구별해 도피성으로 세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넓게 잘 닦여져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도망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최단거리며 도피하기에 어떤 장애물도 없도록 하실 것입니다. 후일에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여호와의 길로 행하여 이스라엘의 경계가 더욱 넓어지는 번영이 뒤따르면 도피성 3개를 더 만들라고 합니다.
도피성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4-10) 도피성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본래,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같은 실수로 살인한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말씀처럼, 동태복수법이 통용되던 시대였습니다(출 21:23). 그래서 살인을 당한 이의 친족이 그를 죽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한 사람 역시 억울한 죽음이 되므로 그가 도피성에 피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도피자는 반드시 부지중에 살인한 경위를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야 살인자는 자기 땅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도피성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11-13) 그러나 도피성에 도망한 자가 후에 고의로 죽인 것이 판명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결코 그를 긍휼히 여기지 말고 그 본 성읍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라고 하십니다. 그를 거기서 잡아다가 보복자의 손에 넘겨 죽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보복법은 여호와께서 주신 거룩한 땅에서 죄 없는 사람이 살인죄를 지고 죽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를 베풀만한 자들에게는 한없이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지만, 일단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시면 한없이 두렵고 무서우신 분이십니다.
적용: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살인한 죄인이 도피성으로 도망하여 그의 생명을 구하듯,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피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사면초가[四面楚歌]사면에서 들려오는 초나라의 노랫소리. 궁지에 몰린 상황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살다 보면 온 사방이 꽉 막힌 듯한 위기를 경험합니다. 위기는 자신의 실수로 인해 벌어지는 경우도 있고 타의에 의해 벌어지기도 합니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암담함에 불안함이 엄습하고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그럴 때일수록 더움 마음을 강하게 다잡아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죄를 범하고 있진 않습니까? 우리가 죄인 줄 알면서도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징계하심으로 바른길을 가게 하실 것입니다.
< 설 교 >
또 한 번의 기회
신 19:1-21 / 양인국 목사
1. 19장은 도피성과 지계표 그리고 증인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이 내용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한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리도록 보장해 주신 권리를 지킬 수 있도록 제정해 주신 제도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제도의 중요성과 그리고 하락된 환경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이끌어 줄 수 있는 제도들을 만드는 일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선민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삶의 이정표 또는 삶의 원칙으로서 십계명을 주셨다. 그리고 십계명에 따라 살 수 있도록 삶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들을 주셨다. 영적 삶을 영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는 제도로서 안식일과 절기들을 주셨고, 타인의 생존권을 보호해 주는 제도로서 도피성과 증인을 허락해 주셨고 또한 타인의 재산권을 보장해 주는 제도로서 지계표를 주셨다. 여기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대표적인 제도들은 결국 십계명을 생활화 하도록 주신 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삶의 이정표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이정표에 따라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제도들이 없다면 이정표에 따라서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마치 저수지에 물이 가득 차 있을지라도 그 물은 수로에 따라서만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즉 저수지의 물을 필요한 곳으로 흐르도록 하는 수로야 말로 우리의 삶 가운데 제도들이 하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도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믿음의 사람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삶의 원리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또한 그 말씀들에 따라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제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영적 기관으로서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들 가운데 하나는 믿음의 사람들이 허락된 환경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는 합당한 제도들을 만드는 일이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도피성과 지계표 그리고 증인 등에 대한 말씀들을 이와 같은 목적으로 주신 제도들 가운데 하나로 보고 읽는다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여기 언급한 제도들은 십계명의 두 번째 돌 판에 기록된 5-10계명을 생활화하도록 주신 제도들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피성과 증언은 타인의 생존권을 존중하도록 주신 계명들을 생활화할 수 있는 제도들이라고 할 수 있고, 지계표는 이웃의 소유권을 존중하도록 주신 제도들이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5-10계명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권리들을 존중하도록 주신 계명들인데 이 계명들은 모두 생존권과 재산권이라는 범주에 포함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 생존권과 재산권을 인정해 줄 때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한 사람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생존권과 재산권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요청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땅을 차지했을 때 그 땅에 도피성을 두어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19:1-13). 여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은 사람을 죽인 자 중에 고의가 아닌 사람의 생명을 지켜주라는 의미다. 실례로서 이웃과 함께 벌목하다가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이웃을 죽게 했다면 이것은 고의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도피성으로 피할 때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 그러나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경우는 도피성도 그를 보호해 줄 수 없었다. 고의로 사람을 죽인 자가 도피성에 피할지라도 그 성읍의 장로들은 사람을 도피성에 보내어 그를 잡아다가 보수자의 손에 넘겨야 했다. 무죄한 피를 흘린 자를 알고도 그를 보호해 주는 것은 그들 가운데 죄를 허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무죄한 피를 흘린 자들에 대하여 “네 눈이 그를 긍휼히 보지 말고 무죄한 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19:13)”고 말씀하신 것이다.
죄는 땅을 황폐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지라도 그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 하면 그 땅은 황폐해 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가인이 아벨의 무죄한 피를 흘렸을 때, 그 피를 받은 땅은 저주를 받아서 갈아도 효력을 주지 않았다. 이와 같은 예는 가인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도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역사가 시작 된 이래 지금까지 인간은 자원이 없어 궁핍하거나 고통을 받기 보다는 무죄한 피흘림으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도 세계 도처에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 가운데 살고 있는데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자원의 고갈로 인한 굶주림이 아니고 내전(內戰) 등 인재(人災)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약에서 땅은 사람들에게 소산을 내주는 원천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의 땅을 오늘의 시대 언어로 해석한다면 “모든 생산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죄한 피를 받은 땅이 저주를 받아 황폐해 진다는 것은 생산 수단이 발달하여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가져다줄지라도 죄를 허용한다면 결코 복된 삶을 살 수 없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19:14)” 지계표란 하나님께서 각 지파의 계보에 따라 그리고 가족 수에 비례하여 허락해 주신 땅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시다. 그러므로 지계표를 옮긴다는 것은 탐욕에 이끌려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고 하나님께서 이웃에게 주신 권리를 침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명기는 지계표를 옮기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27:17)” 이와 같은 사실은 한 사람의 인권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허락해주신 권리들이 존중 되는 곳에서 보호 받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사람의 죄를 정죄할 때 반드시 증인들을 두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이것 역시 무고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들 가운데 하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삶의 기초를 자비와 긍휼에 두도록 하셨지만 한 가지 일에서만은 엄격하셨다. 그것은 바로 죄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범죄한 자들을 어떻게 처리 하실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19:19)”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악을 근원적으로 제거하기 원하셨다. 왜냐하면 언급한 대로 악은 복된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을 황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엄격하셨던 것이다. 위증은 악한 일들 가운데 하나다. 만일 위증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이 죄인으로 오인되어 정죄함을 받았다면 그것은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상처가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사람의 죄를 정죄하기 위해서는 두세 증인의 증언이 있을 때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19:14).
지금까지 살펴본 제도들이 하나님의 명하심에 따라 이스라엘 가운데 시행될 때 생존권과 재산권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자들이 또 한 번의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도피성이 있을 때만 부지중(不知中)에 사람을 죽인 사람이 보호받을 수 있고, 지계표에 대한 제도가 시행될 때 힘없는 자들이 기업으로 받은 땅을 지킬 수 있고, 증언에 대한 제도가 시행될 때 비로소 누명(陋名으로 인하여 고통 받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여기 또 “한 번의 기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놀라운 은혜들 가운데 하나다. 죄의 속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삶의 여정에서 언제나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위기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삶을 지속적으로 영위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또 한 번의 기회를 얻는 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에게도 복이 된다. 실제로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그리고 역사를 통하여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은 사람들이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세운 예들을 많이 보고 있다. 만일 모세가 애굽에서 축출된 후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그토록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로서 살 수 있었을까? 그가 이와 같은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자신은 실패자로서 생을 마쳤을 것이고 또한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됨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다윗과 바울에게서도 동일한 예를 찾을 수 있다. 다윗은 충성스런 신하 우리아를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하여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이로 인하여 그는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대하게 세울 수 있었다. 바울 역시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죄인으로서 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 과거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돌아보며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어서 그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고 그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
모세, 다윗, 바울은 모두 실패자 또는 죄인으로서 생을 마칠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었는데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음으로 인하여 그들 자신이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복된 삶을 살 수 있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들에 대해서도 현재의 연약한 모습을 보다는 잠재 되어 있을 가능성을 보고 또 한 번의 기회를 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처럼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며 살기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제도들을 주신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주께서 우리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놀라운 은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생애 동안 이 은혜를 누리게 해 주시고 이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 복이 되는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아멘
도피의 은혜
신 19:1-13 / 박봉수 목사
학생들을 오래 지도해 본 선생님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하나가 있습니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엉덩이로 하는 것입니다.” 공부는 얼마나 빨리 많은 것을 이해하느냐로 결판나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오래 반복하면서 철저하게 기억하고 또 내 것으로 익히느냐로 결판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는 머리싸움이 아니고, 끈기 싸움이요 습관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공부는 반복학습과 확인학습의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영어공부 할 때, 그 많은 단어를 외우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그 단어를 문장 속에서 50번을 반복하고 확인하게 되면 더 이상 잊지 않게 됩니다. 내 것이 되어 평생 내 안에 남아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기억하고 실천하려고 할 때는 꼭 반복 확인이 필요합니다.
성경에도 하나님께서 반복 확인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꼭 기억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지키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도피성 이야기가 그 중에 하나입니다. 출 21:13을 보면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도피성을 세우실 뜻을 비치셨습니다. 그리고 민 35장 9-2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보다 구체적으로 도피성을 말씀하셨습니다. 도피성을 세우는 목적과 도피성을 운영하는 기본 원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오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점을 다시 반복해서 확인하십니다. 이 때 모세는 이미 점령한 요단 동편에서 세 곳의 도피성을 세운 후입니다.(신 4:41-43) 그래서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나머지 세 곳을 꼭 세우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받은 말씀을 반복하여 도피성을 잘 운영하라 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 20장에 보면 또 다시 도피성 이야기가 반복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점령할 가나안 땅 안에 나머지 세 곳의 도피성을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도피성을 운영해야 할 원리를 다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미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을 반복 확인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세의 영도 때 요단 동편에 세 곳의 도피성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영도 때 요단 서편에 나머지 세 곳의 도피성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도피성을 운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반복 확인해 가면서 도피성을 세우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도대체 도피성이란 무엇이기에 이토록 반복 확인까지 하시면서 세우게 하셨을까요?
도피성은 실수로 살인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성읍을 말합니다. 당시는 아직 사법제도가 완비되어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살인이 일어나게 되면 가족이나 부족이 원수를 갚았습니다. 그런데 살인이 일어났을 때 피해자 측이 정당한 재판을 받기도 전에 무자비하게 보복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고의가 아닌 실수로 살인이 저질러졌을 때 감정적으로 무제한의 보복이 가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하나님께서 도피성으로 피하게 하셔서 정당한 재판 절차를 밟아 일을 처리케 하신 것입니다.
도피성은 여섯 곳에 세워졌습니다. 요단강 동편에 3곳 즉 베셀, 길르앗 라못, 골란이고, 요단강 서편에 3곳 즉 게데스, 세겜, 헤브론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도를 살펴보면 이 여섯 성들은 이스라엘 전역 어디에서든지 32km 이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피성으로 피해 가야할 경우 이스라엘 땅 어디에서든지 하룻길 이내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성을 향한 도로는 폭을 14m 이상이 되도록 넓게 잘 닦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길을 잃지 않도록 “미클라트”(도피성)라는 안내판도 곳곳에 설치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도피성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손쉽게 길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도피성의 운영 규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살인 혐의를 받은 사람이 도피성을 찾아오게 되면 우선 그 성의 지도자들이 사건의 전모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일단 보호하여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합니다. 정당한 재판 과정을 거치면서 그 사람이 고의로 살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나게 되면 도피성으로 들여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살면서 피해자 측의 복수로부터 보호를 받게 됩니다. 그러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해 대제사장이었던 사람이 죽게 되면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공소시효가 말소가 된 뒤 자유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큰 은혜가 됩니다. 이제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도피성 제도를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겠습니다.
피할 길을 예비해 주시는 은혜
하나님께서 제일 처음 도피성 계획을 언급하신 것은 저 시내 광야에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이제 시내광야에 자리 잡고 있을 때입니다.(출 21장) 보다 자세하게 도피성 제도를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광야의 힘겨운 여정을 밟고 있을 때입니다.(민 35장)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도피성 제도에 대해 다시 말씀하신 것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 저 요단 동편에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때 도피성을 세우라고 미리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선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겪게 될 곤경에 대해 이미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겪게 될 곤경을 피할 길을 예비해 놓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곤경을 미리 아십니다. 우리가 겪게 될 인생의 위기를 미리 아시고 계십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곤경을 피할 수 있도록 길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피할 길을 미리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삼상 23:19절 이하를 보면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는 다급한 이야기기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은 십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십 사람들이 이 사실을 사울 왕에게 밀고했습니다. 사울 왕은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다윗을 추격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추격 정보를 듣고 일단 마온 황무지로 피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여기까지 추격해왔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그 일행이 숨어있는 곳을 포위하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다윗에게는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블레셋이 침공해 왔다는 전령의 다급한 전갈이 당도했습니다. 사울 왕은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다 잡은 다윗을 그대로 두고 블레셋과의 전쟁을 위해 돌아서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한 다윗은 그곳의 이름을 “셀라하마느곳”(Sela-Hammahlekoth)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바위’라는 뜻의 “셀라”라는 말과 ‘분리’, ‘분할’이라는 뜻의 “마하느곳”이라는 말이 합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울 왕의 추격으로부터 분리시켜 자기를 도피하게 해 준 바위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위해 “셀라하마느곳”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포위하여 이제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다윗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대로 모든 것이 끝이나 버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 상황을 알고 계셨습니다. 블레셋을 움직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셔서 사울 왕으로 하여금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령을 출발시키셨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침공하기 직전 현장에 도착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의 출동을 막으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셀라하마느곳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피할 길을 예비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에게 셀라하마느곳을 준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우리의 셀라하마느곳을 준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피성을 예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우리의 도피성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이점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보호해 주시는 은혜
오늘 본문 19:3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 모두를 일단 이 성으로 도피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재판을 받기 전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 무자비한 보복이나 감정적인 복수로부터 살인자들을 보호하려 하신 것입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원한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하지 아니하나 두렵건대 그 피를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따뜻한 배려의 마음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도피성은 살인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입니다. 비록 그가 살인을 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십니다. 비록 죄가 있고 허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십니다.
창 4:15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아벨을 죽인 가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은 가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셨고, 구체적인 표를 주셨습니다. 비록 죄를 범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가인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생을 죽인 가인과 같은 사람도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저주의 형벌을 받고 있던 가인과 같은 사람도 그 생명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를 버려두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눈동자처럼 저와 여러분을 보호하십니다.
1996년 개봉된 “이레이저”(Eraser)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근육질의 배우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주인공 존 크루거로 나옵니다. 이 영화에서 존 크루거는 미 연방수사관입니다. 특히 정의를 위해 증언한 증인들을 범죄 집단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수사관입니다. 소위 증인보호 프로그램(Witness Protection Program)을 담당하는 전문가입니다.
이 영화에서 리 커린이라는 여 주인공을 철저하게 지켜줍니다. 크루거는 함께 있으면서 범죄 집단의 공격으로부터 커린을 보호합니다. 그리고 범죄 집단이 추적하지 못하도록 아예 커린이라는 사람을 모든 기록에서 지워버립니다. 그래서 제목이 “이레이저”(지우개)입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용기 있게 증언한 사람들을 국가가 나서서 보호해 줍니다. 근자에 우리나라에서도 이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용기 있게 증언한 사람들을 국가 공권력이 보호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특별 보호프로그램(Special protection program)을 가동시키고 계십니다. 악한 원수 마귀가 공격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영적으로 보호하십니다. 이 세상의 거센 풍파가 해치지 못하도록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일찍이 살면서 이 점을 체험했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노래했습니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시 17:8)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께서 오늘도 우리를 지키십니다. 이점을 믿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은혜
도피성에 피해있던 사람들은 언제까지 그곳에 머물러있어야 할까요? 민 35:25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피를 보복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거기 거주할 것이니라” 그리고 28절을 보면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 소유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죽게 되면 도피성에 피해있던 사람들에게 사면령이 내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피해자 측에서 도피성에 피해있던 살인자에게 보복할 수 없도록 법적으로 장치가 마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피성에 피해있던 사람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새롭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죄를 범했던 사람들, 실수를 저질렀던 사람들, 그리고 실패를 맛보았던 사람들 그들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다시 시작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 전광훈 선생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근자에 노숙자 생활을 끝내고 힘차게 재기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원래 이분은 90년대 초반에 동아일보에서 실시한 신춘문예의 당선이 되어 등단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본격적인 시인의 길을 가지 않고 부산에서 의류 수출사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후반에 IMF를 맞으면서 부도가 나서 사업이 망하게 됐습니다. 이 일로 함께 살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내마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이분은 크게 충격을 받고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어쩔 수 없이 노숙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2006년도 영등포에서 노숙을 하다가 사람들을 따라 우리교회로 노숙인 사역 즉 소망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소망반에서 성경공부를 하는 동안 심령의 뜨거움을 체험하게 됐습니다. 세례교육을 받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정식으로 교회 등록하여 교인이 되었고 성수주일을 철저하게 잘 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일반시가 아니라 복음시를 쓰기로 했습니다. 최근 어느 기독교 단체에서 실시한 공모전에 응모를 했고 거기서 은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쓴 시를 모아 시집까지 내게 되었습니다. 주님 만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실수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쌓아놓았던 것들을 다 일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절망 가운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런 자리에 그대로 오래 두지 않으십니다. 다시 일어나게 하십니다.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도피성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세상에서 실수한 사람들, 큰 실패를 맛본 사람들 그래서 절망하는 사람들 그들을 위해 준비해 놓으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피할 길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비록 실수했을 찌라도 보호해 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이런 도피성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지경이 넓혀지는 교회
신 19:7-10 / 김광일 목사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2011년 화두로 일기가성(一氣呵成)을 선정했습니다. 16세기 명나라 시인이며 문예비평가 호응린(胡應麟)이 평론집 시수(詩藪)에서 두보의 작품인 등고(登高)를 평하며 표현한 문장입니다. 문장의 처음과 끝이 일관되고 빈틈없이 순리에 따라 짜여 있다는 의미로서, 일을 단숨에 매끄럽게 해 낸다 혹은 좋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미루지 않고 이뤄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국운융성의 절호의 기회를 맞아 국민이 단합해 안팎의 도전을 극복하고 선진국의 문턱을 막힘없이 넘어 가자는 염원으로 대통령은 국가의 지경이 넓혀지기를 선포했습니다. 일기가성의 역사가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후손에게 좋은 것을 물려주기 위해 현재의 고비를 긍정적인 기회로 여겨 더 나은 것을 이루어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레이건(R. Reagan) 대통령이 1987년 6월 12일 베를린 장벽의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소련 서기장 고르바초프를 향하여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고르바초프, 이 문을 여십시오!” 이 메시지를 전한 지 2년 후 1989년 헝가리와 프라하에서 시작된 동독 개방의 물결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수 십 년간 굳게 닫히고 철조망으로 둘러싸이고 콘크리트로 세워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당시 동독 서기장 호네커는 베를린 장벽이 100년 정도 존속될 것이라며 장벽이 열리지 않으리라 장담하였지만, 소련을 포함한 동구 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철의 장막을 걷고 개방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가 막을 내리는 엄청난 역사적인 순간을 목도하게 된 것입니다. 베를린 지역에 가면, 동 베를린에 세워진 송신탑이 높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탑은 분단 시대에 서독 교회 헌금으로 지어진 동독 군사용 송신탑이었습니다. 서독 교회들은 무의미하게 보였던 이 투자에 대하여 아주 실망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비추일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탑의 높은 곳에 십자가 형태가 나타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십자가를 어느 방향에서나 선명하게 보게 한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교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거룩한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경을 넓혀가는 증거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본문의 ‘지경’ 이라는 단어는 ‘땅의 경계’ 혹은 ‘생활 터전의 범위와 한계선’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언약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석가들은 지경이라는 말을 단지 땅의 한계라는 의미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의 법령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지경의 확장은 하나님의 선하신 영향력의 확장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지경이 넓혀지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그것은 순종의 사람에게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지경 확장의 역사는 반드시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입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지경이 더욱 넓혀지기를 소원합니다. 과연 새해에 어떤 지경이 넓혀지기를 기도해야 합니까?
첫째로 믿음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
1979년 미스 아메리카 선발 대회에서 1등으로 당선된 세릴 프레위트(Cheryl Prewitt)의 간증입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로 왼쪽다리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봉합수술을 받았지만 휠체어를 타는 장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세포가 죽었기에 발육이 정지되고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보다 2인치나 짧은 장애자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그녀의 뛰어난 용모를 아까와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어려울 때일수록 믿음으로 성장했습니다. 1974년 미시시피주 잭슨에서 열린 부흥집회에 참석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다리가 낫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녀는 기도하면서 왼쪽 다리가 쭉 늘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믿음으로 사모한 자에게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일어나 걸어 보았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2인치나 짧던 왼쪽 다리가 오른쪽과 똑같아졌습니다. 그 후 미스 아메리카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녀는 간증하였습니다. “주님 외에 누가 고쳤겠습니까?” 믿음으로 고백하며 그녀는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고 절망합니다. 질병을 바라보며 그 병에 삼키어질 것이라 생각하며 낙담합니다. 환경을 바라보다 불우한 환경의 나락에 떨어지리라 절망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바라보며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단정합니다. 모두 자신의 믿음대로 불행해집니다. 자신의 믿음대로 실패합니다. 자신의 믿음대로 망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문제만을 바라보거나, 자신의 환경만을 바라보거나, 자신의 연약함을 바라보는 사람은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능력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이란 나만 바라보던 시선을 바꾸어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실패할 때 예수를 바라보면 역전의 사람이 됩니다. 두려울 때 예수를 바라보면 희망을 갖게 됩니다.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지경이 넓혀지기 바랍니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불안해도 예수의 능력을 보는 믿음의 지경이 넓혀지기 바랍니다. 나의 방법을 의지하지 말고 예수를 기대하는 믿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절망 속에서도 능력을 행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디 믿음의 지경이 넓혀져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사명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
2010년 2월의 마지막 날, 아프리카 한복판 수단의 남쪽 작은 마을. 남 수단에 하나밖에 없는 브라스 밴드가 마을을 행진했습니다. 선두에 선 흑인 소년들은 한 남자의 사진을 들고 있었는데 영정 사진이라고 했습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주인공은 바로 한국인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사진 속 주인공이 자신들의 아버지라며 눈물로 그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전 세계에서 키가 가장 큰 종족, 딩카족입니다. 유목민인 그들은 가족과 소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용맹함의 상징으로 아랫니 세 개를 뽑고 이마에는 칼로 브이(V)자 모양의 상처를 냅니다. 눈물을 보이는 것은 딩카족에게 가장 큰 수치입니다. 바로 그들이 운 것입니다. 검은 눈물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 마지막 길을 떠난 사람, 마흔 여덟 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 고(故) 이태석 신부입니다. 인제 의대를 졸업한 그는 광주 카톨릭대를 거쳐 살레시오회에 입회했으며, 2001년 사제품을 받자마자 수단으로 파견되어 2008년 11월까지 8년간 봉사활동을 벌였습니다. 40도가 넘는 더위 속에서 병원을 짓고 홍역과 결핵, 한센병으로 고통 받는 톤즈의 사람들을 위해 진료활동을 했습니다. 전쟁과 가난으로 얼룩진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한센병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극진한 치료와 관심을 보였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짓고, 브라스 음악밴드를 수단에서 최초로 창단하였습니다. 발가락이 망가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서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그들만의 신발을 만들어 주고 친구이자, 부모이자, 선생님이자 그렇게 수단에서 생활하였습니다. 이태석 신부가 처음 수단에 갔을 때 이렇게 말했답니다. “저는 수단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 살러 왔습니다.” 사명적 삶으로 희생과 사랑을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장암 판정을 받고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하나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였습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던 이태석 신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온 몸 다해 살았던 사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사명적 삶은 ‘울지마 톤즈’ 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감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명자라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부르심’ 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에 따라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세상에 그냥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목적 없는 인생이 없습니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 목적을 위하여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요한 웨슬리(J. Wesley)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알고 있습니까?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올 한해는 어떤 일이 되었든지 섬김과 헌신을 통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명의 지경이 더욱 넓혀지는 삶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셋째로 축복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
월드컵 축구스타 가운데 신실한 그리스도인 최태욱(崔兌旭) 선수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축구를 시작한 그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믿음으로 극복하며 성장했습니다. 고교 졸업 후 안양 LG에 입단하면서 계약금으로 1억 8천만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돈을 부모님 통장에 넣어드렸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젊었을 때 예수 믿는 사람으로부터 사기를 당하여 교회라면 고개를 흔들 정도로 부정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이 좋은 최 선수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를 놓고 고민을 하였습니다. 수심이 가득한 아들의 얼굴을 보며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그는 돈이 필요해서 그렇다고 말하니 아버지는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 면서 필요한대로 꺼내 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2천만원을 인출하여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 후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고 화를 내시며 교회에 찾아가 돈을 내놓으라고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으로부터 “이 돈은 최태욱 선수가 하나님께 드린 것이므로 내 마음대로 내줄 수가 없습니다. 혹 헌금을 바친 아들이 직접 찾아오면 몰라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더욱 화가 난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호되게 야단을 쳤습니다. 이때 최 선수가 아버지를 바라보며 “아버지, 제가 방황했을 때 마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해요. 제가 왜 헌금을 했는지 앞으로 지켜보시면 아실 거예요” 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어머니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아버지도 최선수가 가져다주는 수입의 십일조를 떼어 놓았다가 아들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분명한 신앙으로 부모를 감동시킴으로 축복의 지경을 넓혀가는 은혜를 입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지경을 넓혀주실 때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발견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복에 복을 더하시는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지경이 넓혀지는 일을 가로막는 부정적인 영들이 역사할 때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힘으로만 사탄의 권세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사람은 영적 지경을 확장해 나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축복의 지경이 넓혀지도록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며 축복의 지경을 넓혀주십니다.
새해에는 지경이 넓혀지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부디 믿음의 지경이 넓혀지시기 바랍니다. 영적 사명이 더욱 넓혀지시기 바랍니다. 축복의 지경이 넓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지경이 더욱 넓혀지는 복된 성도의 삶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도피성
신 19:1-13
교회가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은 '하나님 나라 확장'입니다. 기도를 할 때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합시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 확장'이란 세력 확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인간의 몸속에서 암덩어리가 확장되어서 온 몸을 점령해 버리는 것 같이, 이 세상을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차근차근 점령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마을, 농촌 구석까지 십자가가 세워진 예배당을 세움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겠다고 나섭니다. 이것이 소위 교회가 감당해야 할 최대의 임무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교회의 현실을 두고 생각할 때마다 저의 머리에 맴도는 것은 '현대 교회는 성경을 포기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성경을 말한다고 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과 뜻이 실려 있는 말씀 그대로의 성경이 아니라 온통 인간의 탐욕으로 가득차 있는 '인간의 말'일 뿐입니다. 천국이나 부활 등은 교회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의 소원이며 관심입니까? 목사가 교회를 찾아온 교인에게 '예수님이 관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관심인 사람은 이 교회에서 나가주세요'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여러분이 듣기에는 아주 귀에 거슬리는 말이고 '목사로서 어떻게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들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 대해서 많은 안타까움을 가집니다. 듣기에는 극단적인 말이 될 수 있는 이런 말까지 해서라도 교회가 무엇이며 우리의 구주이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여러분에게 알려주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소위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사람으로서 관심을 두어야 할 부분은 교회가 아니고, 자기 자신도 아니며, 하나님 나라 확장이 아니라 바로 주님입니다. 십자가 지시고 피흘리시며 죽으신 주님에만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이 신자로서 당연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종교적인 일들이 마치 주님의 뜻인 양 오해된 채 난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탐욕 속에서 벌어지는 종교적인 일들이기 때문에 보여지는 것도 모두가 인간의 탐욕으로 나타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세력 확장이란 인간의 탐욕입니다. 탐욕이란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보면서 더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명목을 내세워서 내 교회를 확장시키고자하는 탐욕이고, 내 교단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탐욕이며 나아가서는 내가 믿고 있는 종교의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입니다. 그 탐욕인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옷을 입은 채 사람들을 착각으로 빠지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세력의 확장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하나님 나라 확장은 전혀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이미 하나님 나라가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된 것인데 교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야 한다니 그것이 무슨 말이냐라고 따져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교회가 세워지는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늘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기독교라는 단체의 세력확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마피아의 대부입니까? 예수님이 폭력 조직의 우두머리입니까? 마피아나 폭력조직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다른 조직과 죽고 죽이는 싸움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복음이라는 것이 과연 이런 식으로 확장되어지는 것입니까? 이 지구상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늘어가고 교회 숫자가 늘어가는 것이 과연 '하나님 나라 확장'일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실 확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껏 교회가 확장이라는 말을 사용해 왔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생각할 때 어떤 의미를 가지고 확장이란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확장이란 세력이 넓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하나하나 찾으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지 결코 인간에게 맡겨진 사명도 아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우린 단지 주님께 부름을 입은 사람으로서 주님을 나의 왕으로 섬기며 주님의 마음에 복종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신자가 여기저기서 발견되어지는 것,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저는 은석교회가 주님께만 관심을 가지고 주님을 왕으로 섬기는 신자가 늘어가기를 원하는 것이지 결코 교인 수가 늘어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마음도 아니고 주님의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인수가 많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주님만을 왕으로 섬기며 주님을 따르고 있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님의 마음이 퍼져있는 나라입니다. 신자가 주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깨닫게 되고 그 마음으로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나라, 즉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고, 우리는 과연 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선지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장차 선지자 하나를 세우실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장차 세우실 선지자가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실 선지자가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실 선지자, 그분이 행동하는 하나하나가 앞으로 그분에 의해서 인도함 받을 이스라엘이 지향하고 나타내야 할 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모습에 대해서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장차 세우실 선지자에 의해서 인도함 받는 나라는 바로 이런 나라다'라는 것을 여러 정황들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도피성'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됨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피성은 오늘 본문에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부터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도피성을 세우라는 것은 백성의 편리를 위해서 마련한 하나의 제도가 아닙니다. 도피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도피성'을 통해서 신자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야 하며, 신자가 모이는 그 모임에서는 어떤 모습이 보여져야 하는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도피성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우연히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마련한 장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사람을 죽였는데 그것 때문에 사형을 당하면 억울하니까 억울함을 없게 하기 위해서 도피성을 만든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피성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위한 성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도피성이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것이라면 애당초부터 하나님께서 실수로 살인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셔야 당연합니다.
본문에서도 실수로 사람을 죽인 예를 말합니다.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산에 갔는데 도끼질을 하다가 도끼가 빠져서 옆 사람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일어난 일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면 무엇 때문에 실수로 사람을 죽이도록 하시고, 또 다시 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도피성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으셨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은 도피성을 만들게 하시고 또 이스라엘 안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있게 하셔서 그 사람을 도피성으로 피하도록 하심으로서 이스라엘 전체에 뭔가를 가르치시고 배우게 하려는 의도가 있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도피성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함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마음에 담고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회에는 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단체를 결성할 때면 필연코 등장하는 것은 법과 규칙입니다. 법과 규칙은 단체 보호를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단체를 보호함으로서 단체 안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게는 국가에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국가의 법은 국가의 존속을 위하고 국가의 유익을 위한 법입니다. 국가에 유익 되고 국가가 발전함으로서 국가에 소속된 백성들에게 유익이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국가 보호가 법과 규칙의 목적이며 기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법과 규칙을 잘 지키는 나라일수록 선진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국가라는 것은 법과 규칙을 통해서 백성들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국가와 다수의 유익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법과 규칙이라는 울타리 안에 매어 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도 법이 있습니까?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도 분명히 기준이 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없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은 법이 신자를 통제하는 것도 아니고 신자의 자유가 법에 의해서 얽매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기준 되는 것은 있지만, 그 기준에 통제 받는 것이 아니고 기준을 지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법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기준은 있지만 기준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지켜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삶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도피성이란 제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기준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임을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은 자와 실수로 죽이게 된 자를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가 보수자의 손으로부터 목숨을 지킬 수 있는 곳은 오직 도피성 한 곳 뿐입니다. 그곳에서만큼은 자기의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자의 가족도 살인자가 도피성으로 피했을 경우에만큼은 복수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수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보수자가 자기 가족의 복수를 앞세워서 말씀도 무시해 버린다면 도피성으로 쳐들어가서 살인자를 죽여서 복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가 도피성으로 피해서 목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는 제사장이 거하고 있는 도피성에서 제사장의 은혜와 보호로 자신의 생명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아야 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자의 가족은 도피성으로 피해서 제사장의 은혜 아래 있는 자에 대한 복수를 포기함으로서 모두가 제사장의 은혜라는 방식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도피성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라는 원칙과 기준 아래 살아가야 할 나라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이란 바로 이 도피성의 정신 아래 굴복하는 자가 늘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 19:8-10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열조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 또 네가 나의 오늘날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 길로 행할 때에는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림이 없게 하라 이같이 하면 그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주신 땅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항상 그 길로만 행할 때에 도피성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무죄한 피를 흘림이 없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명령대로 행할 때, 즉 도피성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도피성의 정신이 세상으로 확장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전도, 또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신 그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로만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로 인해서 도피성의 정신이 드러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도피성의 실체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영원한 도피성이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주안에서 산다는 것은 도피성 안에 거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도피성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피성에 피한 자는 제사장이 죽으면 자유를 얻어서 세상에 나올 수가 있습니다. 죄없는 자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피성 되신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죄없는 자로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마음대로 산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의 은혜와 긍휼이 삶의 기준이 되어서 그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하지 못한 미움과 복수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긍휼하심에 사로잡혀서 용서라는 자유 속에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용서하라'는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 되신 주님 안에서 배우게 된 긍휼과 은혜에 의해서 이끌려 갈 뿐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되는 일이 발생하고 억울하게 죽는 일이 발생하게 하심으로서 용서하고 용서받는 가운데 그리스도로 인해서 살아난 긍휼과 은혜를 잊지 말아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실수 없이 살 수 없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린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하시고 있는 일임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은 열심히 노력하고 일해서 부강한 나라로 만들라고 주신 땅이 아닙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온 땅은 죄에서 용서받은 자만 살 수 있게 하신 용서의 땅입니다. 은혜와 긍휼이 살아있는 땅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항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용서를 잊지 말라고 애매하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을 발생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주신 땅은 성령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에 의해서 다스림 받고 살아가는 신자의 사회는 은혜와 긍휼이 기준이 되어서 용서함과 용서받음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석교회는 과연 은혜와 긍휼이 기준 되어서 용서함과 용서받음이 나타나는 교회입니까? 주님의 긍휼과 은혜가 나타나는 일이라면 내 개인의 유익쯤은 포기할 마음이 있습니까? 이 마음으로 사는 자가 바로 믿는 자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신명기 강해 43
신 19:1-13 / 푸른교회
도피성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셔서 가나안에 입성할 이스라엘 백성에게 교육하고 당부한 중요한 인권보호장치인 도피성입니다. 2절을 보면 세 성읍을 구별하라고 합니다. 이미 신명기 4장에 도피성이 나옵니다. 거기에 세 성읍이 나옵니다. 그래서 도피성은 총 6개인데, 요단강 동편에 3개, 서편에 3개입니다. 4장은 요단강 동편의 세 성읍을 말하고, 오늘 본문은 요단강 서편의 3개입니다. 동편은 이미 강 건너기 전에 모세가 지정을 했고, 서편은 여호수아가 지정할 것입니다. 게셋, 길르앗 라못, 바산 골란이 동편의 세 성읍입니다.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 여호수아가 지정한 서편의 3곳은 게데스, 세겜, 헤브론입니다. 가나안 전체 성읍이 48개인데, 그 가운데 6곳을 지정하여 도피성을 만든 겁니다. 아주 절묘한 위치에 지정했습니다. 요단강 건너기 전 동편에는 왜 도피성 3곳을 지정했을까요?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는 요단강 동편 땅을 배분 받은 세 지파가 있습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파입니다. 팔레스틴 지도에서 도피성을 보시면, 팔레스틴 어디서든 하룻 길이면 도착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본문 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 억울한 죽음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도피성은 히브리어로 미클라트입니다.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촘촘하게 도피성이라는 표식이 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쉽게 도피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길도 폭이 14미터 이상의 길입니다. 도피성 제도의 목적은 개인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특별히 과실치사자를 보호하려는 제도입니다. 4절 하반절 이하입니다. “곧 누구든지 본래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인 일, [5]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의 이웃을 맞춰 그를 죽게 함과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이런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장치입니다. 결과는 살인인데, 그 동기는 살의가 아니라 실수입니다. 이런 사람을 보호하려는 것이 도피성입니다. 사람이 범하는 가장 큰 죄는 역시 살인죄입니다. 그래서 살인죄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엄한 벌로 다스립니다. 살인죄를 엄격하게 다루지 않으면 그 사회가 제대로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살인죄에 관한 한 억울한 사람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누명이나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경우는 살인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겁니다. 정상참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인 누명을 쓰고 살인 처벌을 받거나, 고의성 없이 실수로 사람을 해친 사람을 구분하고 계신 것입니다. 도피성은 중한 살인죄를 지었지만 그게 고의성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장치입니다. 자기 소명, 변명, 제대로 된 재판도 못 받아보고 피의 보복을 통해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피해자를 막기 위한 제도가 도피성 제도입니다. 지금의 사법적 개념으로 봐도 매우 진보적입니다. 누명을 쓰고 살인죄의 처벌을 받는다거나 전혀 살의가 없었는데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살인죄의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면, 당시의 동태복수법에 따라 자기도 죽어야 합니다. 억울한 죽음입니다. 살인죄를 묻되 억울한 피해자를 막기 위한 장치가 도피성 제도입니다.
도피성 제도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살인자가 도피성으로 피한다고 해도 무조건 죄를 면하는 게 아닙니다. 일단 도피성에 피해 있으면서 성실하게 재판에 임해야 합니다. 충분히 소명해야 합니다. 재판을 통해 과실치사라는 게 밝혀져야 그에 해당하는 벌이나 보호를 받습니다. 살의로 형제를 고의로 해쳤으면 그 사람은 살인죄에 해당하는 벌을 받습니다. 실제로 적대감을 갖고서 사람을 죽이고도 도피성으로 피했지만, 고의 살인이 밝혀져 처형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도피성으로 피한 사람은 성실히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도피성으로 피한 사람은 아무리 억울한 누명을 썼다 하더라도 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도피성 안에 있어야 합니다. 도피성을 이탈하면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도피성에 머물러 있는 동안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 시간부로 무조건 특별사면을 받습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입니다. 중보자인 대제사장이 죽었다는 것은 백성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죽었다고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항의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도피성 제도의 복음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인간의 한계, 나약함, 죄성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본의 아니더라도 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중심을 보십니다.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을 보십니다. 비록 사람이 죽었다는 결과가 나타났을지라도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에 대한 그 과정을 추적하십니다. 그래서 과실치사의 경우라면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억울하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도피성은 이 시대로 말하면 교회입니다. 교회는 마지막 시대의 방주이자 도피성입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자신이 도피성 되심을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수고와 무거운 죄의 짐을 진 자라도 도피성 되신 주님께 나오면 안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툭하면 ‘주님은 나의 산성, 바위, 요새, 피난처’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도피성입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가 도피성입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대제사장이신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 순간 모든 도피성에 피한 죄인들이 사면 받습니다. 중보자 대제사장이 그들의 죄를 다 짊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의 죽음은 죄인을 위한 주님의 대속의 죽음을 예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4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대제사장이신 주님의 죽음이 어떤 죄를 지었든 사면을 가져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면하십니다.
도피성 제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거기에 담긴 복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도피성이 되어
신명기 19:1-13
초등학교 시절 산과 들에 여름 과일들이 풍성해 지기 시작하면 친구들과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서리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들통이 나면 아버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셔서 회초리를 들곤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사정없는 회초리 세례가 과하다 싶으면 할머니께서는 자신의 치마폭으로 저를 감싸주시곤 하셨습니다. 할머니께서 나서시면 아버지께서는 못이기는 척 하시며 화를 가라앉히셨습니다. 그 시절 할머니의 치마폭은 철없는 어린아이의 잘못을 덮어주는 용서의 공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철없는 손자를 감싸 안았던 할머니의 치마폭보다 더 관용과 용서가 있는 도피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도피성은 제국 애굽에서 탈출한 노예들이 광야생활을 하다 새로운 땅 가나안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그들 삶을 최선으로 이끌어 주는 중요한 제도 중 하나였습니다.
고대 근동에는 비록 실수로 살인을 했을지라도 피해자의 가족들이 살해자에게 보복할 수 있는 인과응보의 처벌이 일반적인 관습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습은 피의 역사를 되풀이하게 될 뿐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는 멀리 떨어진 삶이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인과응보는 자신을 폭력의 악순환에 몰아넣는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신명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하신 이유를 분명하게 설정합니다. 1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시기로 한 그 땅, 거기에 살고 있는 원주민을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멸망시키시고, 당신들이 그들을 쫓아내어, 그 성읍과 집에서 살게 될 때’라고 말하면서 3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신 땅을 세 영역으로 구분하여 길을 닦아, 모든 살인자가 그 곳으로 피신할 수 있게 하십시오.’라고 명합니다.
도피성 제도는 가나안에 새롭게 정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생활방식을 위한 하나님의 요구였습니다. 도피성의 의미와 목적은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인과응보의 관습을 떠나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함께 실현할 수 있는 사회를 향한 첫 걸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도피성은 요단강을 사이로 동편 지역에 셋(게데스, 세겜, 헤브론), 서편 지역에 셋(골란, 길르앗 라못, 베셀), 모두 여섯 개의 성읍이 지정되었습니다. 여섯 개의 도피성은 이스라엘 전 지역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유대 랍비들의 구전에 따르면 도피성으로 향하는 길은 넓고 반듯하게 닦여 있었으며, ‘도피성’을 가리키는 큰 표지판이 요소요소에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 성읍들은 종교의례를 집례 하던 레위인들에게 준 성읍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는 한 사람에 대한 사법적 보호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종교적인 이해와 보호, 갈등해결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피성과 비슷한 제도는 고대 헬라나 로마 사회에도 있었습니다. 헬라나 로마에서는 누구든지 신전으로 피하면 사법권이 미칠 수 없는 절대 안전 지역이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자, 정치적 망명자, 도망한 노예, 채무자, 범법자이든 신전 안에만 들어오면 그를 체포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도피성과 차이가 있다면 도피성으로 피한 사람은 공정한 재판 결과 고의적인 살인이 판명되면 그를 끌어내어 반드시 그 죄 값을 받아야 했습니다.
도피성은 연약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일어나는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살인까지 저지른 상황이 된다면 그처럼 당혹스럽고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는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특히 피해자에게는 말 할 수 없는 상처와 분노를 주게 됩니다.
도피성은 살인을 저지른 사람뿐 아니라 피해자를 위한 공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피해를 준 사람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마음과 만남의 자리에서 멀리하기란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도피성’은 ‘아리 미클라트’라는 말인데 ‘받아들이는 성읍’이란 뜻이 있습니다. 도피성은 ‘받아들이는 성읍’으로 상처받는 사람이 분노하는 자신과 가해자와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의 여유를 주었습니다.
또한 가해자에게도 정당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을 주었고, 자신의 행위로 인해 생긴 피해자의 상처와 아픔, 분노를 받아들여 피해자와 그 가족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도피성은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성경 로마서에는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누구하나를 정죄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서로의 잘못과 허물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함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지금 여러모로 감추어진 폭력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종종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건강, 종교 삶의 전 분야에서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의 희생을 딛고 서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의든 타의든 지금 우리는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더 큰 폭력의 시대를 만들어 갈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나 지금이나 해당되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폭력, 살인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5:21-22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24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25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 얼른 그와 화해하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재판관은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어서, 그가 너를 감옥에 집어넣을 것이다. 26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살인을 물리적인 살인 이상으로 규정하셨습니다. 곧 형제자매에 대해 ‘성내는 사람’, ‘얼간이’ ‘바보’라고 말하는 것은 심판을 받을 죄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과 책임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과 책임이 같은 것이라 말씀합니다. 도피성이 책임 없는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듯, 예수님을 믿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갈등과 오해에 대해 자신 스스로 모든 면죄부를 부여 할 수 없습니다. 2007년에 상영된 영화 ‘밀양’에서 이를 잘 보여줍니다. 자신의 아이를 유괴하고 살해 한 살인자를 용서하기 위해 감옥에 찾아간 어머니는 이미 자신을 용서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는 살인자의 말을 듣습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예수를 믿고 용서를 구했다는 살인자의 말에 자신이 그토록 힘겹게 찾은 용서의 가치를 상실해 버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만을 위한 도피성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깊이 있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도피성이 되시는 예수 안에서 우리의 존재와 삶의 방향, 구원을 찾습니다. 불안한 우리의 존재와 현재, 미래를 예수라는 도피성 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얻습니다. 이 도피성에서 하나님의 사랑, 용서와 자비, 무한한 삶의 긍정은 빼 놓을 수 없는 권리이자 기쁨입니다.
그러나 예수라는 도피성은 우리 안에서 멈추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이 도피성은 형제자매와의 화해를 요구하고 책임 있는 삶에 자신의 말과 행동을 기꺼이 내어 놓으라 합니다. 실수하면 용서를 구하고 잘못하면 그에 따른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김기덕 감독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다시 봄’이라는 영화에서 인간의 되풀이 되는 실수와 욕망을 책임 있게 받아내고 가야함을 불교 철학으로 잘 풀어냈습니다. 자신이 어릴적 철모르고 저지른 실수와 허물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또 다른 어린 아이의 실수와 허물이 이어지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도 모르게 여린 생명을 무지와 욕망으로 미워하고 억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연약한 우리 인간의 삶에는 타인에 대한 무한한 자비와 이해, 합일과 공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에서 우리를 받아주고 보호하며 성숙시키는 예수님과 같은 도피성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모두가 싫다하고 정죄하는 지체가 있다면 잠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도피성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고 돌아보게 하시듯 서로를 돌아 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되어주는 마음과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서로의 실수와 잘못, 허물과 죄를 받아주고 화해를 위해 서로에게 시간과 공간을 내어 줄 때 우리의 삶은 예수께서 바라시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갈 것입니다.
한 주 동안 마음에서부터 미움을 없애고 화해의 장이 되는 도피성의 풍성함을 예수 안에서 찾으시고 그 삶으로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도피성
신 19:1-13
교회가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은 '하나님 나라 확장'입니다. 기도를 할 때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합시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 확장'이란 세력 확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인간의 몸속에서 암덩어리가 확장되어서 온 몸을 점령해 버리는 것 같이, 이 세상을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차근차근 점령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마을, 농촌 구석까지 십자가가 세워진 예배당을 세움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겠다고 나섭니다. 이것이 소위 교회가 감당해야 할 최대의 임무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교회의 현실을 두고 생각할 때마다 저의 머리에 맴도는 것은 '현대 교회는 성경을 포기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성경을 말한다고 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과 뜻이 실려 있는 말씀 그대로의 성경이 아니라 온통 인간의 탐욕으로 가득차 있는 '인간의 말'일 뿐입니다. 천국이나 부활 등은 교회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의 소원이며 관심입니까? 목사가 교회를 찾아온 교인에게 '예수님이 관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관심인 사람은 이 교회에서 나가주세요'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여러분이 듣기에는 아주 귀에 거슬리는 말이고 '목사로서 어떻게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들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 대해서 많은 안타까움을 가집니다. 듣기에는 극단적인 말이 될 수 있는 이런 말까지 해서라도 교회가 무엇이며 우리의 구주이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여러분에게 알려주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소위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사람으로서 관심을 두어야 할 부분은 교회가 아니고, 자기 자신도 아니며, 하나님 나라 확장이 아니라 바로 주님입니다. 십자가 지시고 피흘리시며 죽으신 주님에만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이 신자로서 당연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종교적인 일들이 마치 주님의 뜻인 양 오해된 채 난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탐욕 속에서 벌어지는 종교적인 일들이기 때문에 보여지는 것도 모두가 인간의 탐욕으로 나타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세력 확장이란 인간의 탐욕입니다. 탐욕이란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보면서 더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명목을 내세워서 내 교회를 확장시키고자하는 탐욕이고, 내 교단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탐욕이며 나아가서는 내가 믿고 있는 종교의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입니다. 그 탐욕인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옷을 입은 채 사람들을 착각으로 빠지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세력의 확장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하나님 나라 확장은 전혀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이미 하나님 나라가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된 것인데 교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야 한다니 그것이 무슨 말이냐라고 따져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교회가 세워지는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늘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기독교라는 단체의 세력확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마피아의 대부입니까? 예수님이 폭력 조직의 우두머리입니까? 마피아나 폭력조직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다른 조직과 죽고 죽이는 싸움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복음이라는 것이 과연 이런 식으로 확장되어지는 것입니까? 이 지구상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늘어가고 교회 숫자가 늘어가는 것이 과연 '하나님 나라 확장'일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실 확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껏 교회가 확장이라는 말을 사용해 왔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생각할 때 어떤 의미를 가지고 확장이란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확장이란 세력이 넓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하나하나 찾으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지 결코 인간에게 맡겨진 사명도 아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우린 단지 주님께 부름을 입은 사람으로서 주님을 나의 왕으로 섬기며 주님의 마음에 복종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신자가 여기저기서 발견되어지는 것,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저는 은석교회가 주님께만 관심을 가지고 주님을 왕으로 섬기는 신자가 늘어가기를 원하는 것이지 결코 교인 수가 늘어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마음도 아니고 주님의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인수가 많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주님만을 왕으로 섬기며 주님을 따르고 있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님의 마음이 퍼져있는 나라입니다. 신자가 주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깨닫게 되고 그 마음으로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나라, 즉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고, 우리는 과연 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선지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장차 선지자 하나를 세우실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장차 세우실 선지자가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실 선지자가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실 선지자, 그분이 행동하는 하나하나가 앞으로 그분에 의해서 인도함 받을 이스라엘이 지향하고 나타내야 할 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모습에 대해서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장차 세우실 선지자에 의해서 인도함 받는 나라는 바로 이런 나라다'라는 것을 여러 정황들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도피성'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됨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피성은 오늘 본문에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부터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도피성을 세우라는 것은 백성의 편리를 위해서 마련한 하나의 제도가 아닙니다. 도피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도피성'을 통해서 신자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야 하며, 신자가 모이는 그 모임에서는 어떤 모습이 보여져야 하는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도피성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우연히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마련한 장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사람을 죽였는데 그것 때문에 사형을 당하면 억울하니까 억울함을 없게 하기 위해서 도피성을 만든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피성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위한 성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도피성이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것이라면 애당초부터 하나님께서 실수로 살인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셔야 당연합니다.
본문에서도 실수로 사람을 죽인 예를 말합니다.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산에 갔는데 도끼질을 하다가 도끼가 빠져서 옆 사람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일어난 일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면 무엇 때문에 실수로 사람을 죽이도록 하시고, 또 다시 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도피성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으셨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은 도피성을 만들게 하시고 또 이스라엘 안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있게 하셔서 그 사람을 도피성으로 피하도록 하심으로서 이스라엘 전체에 뭔가를 가르치시고 배우게 하려는 의도가 있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도피성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함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마음에 담고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회에는 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단체를 결성할 때면 필연코 등장하는 것은 법과 규칙입니다. 법과 규칙은 단체 보호를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단체를 보호함으로서 단체 안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게는 국가에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국가의 법은 국가의 존속을 위하고 국가의 유익을 위한 법입니다. 국가에 유익 되고 국가가 발전함으로서 국가에 소속된 백성들에게 유익이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국가 보호가 법과 규칙의 목적이며 기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법과 규칙을 잘 지키는 나라일수록 선진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국가라는 것은 법과 규칙을 통해서 백성들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국가와 다수의 유익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법과 규칙이라는 울타리 안에 매어 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도 법이 있습니까?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도 분명히 기준이 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없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은 법이 신자를 통제하는 것도 아니고 신자의 자유가 법에 의해서 얽매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기준 되는 것은 있지만, 그 기준에 통제 받는 것이 아니고 기준을 지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법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기준은 있지만 기준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지켜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삶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도피성이란 제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기준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임을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은 자와 실수로 죽이게 된 자를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가 보수자의 손으로부터 목숨을 지킬 수 있는 곳은 오직 도피성 한 곳 뿐입니다. 그곳에서만큼은 자기의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자의 가족도 살인자가 도피성으로 피했을 경우에만큼은 복수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수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보수자가 자기 가족의 복수를 앞세워서 말씀도 무시해 버린다면 도피성으로 쳐들어가서 살인자를 죽여서 복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가 도피성으로 피해서 목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는 제사장이 거하고 있는 도피성에서 제사장의 은혜와 보호로 자신의 생명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아야 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자의 가족은 도피성으로 피해서 제사장의 은혜 아래 있는 자에 대한 복수를 포기함으로서 모두가 제사장의 은혜라는 방식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도피성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라는 원칙과 기준 아래 살아가야 할 나라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이란 바로 이 도피성의 정신 아래 굴복하는 자가 늘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 19:8-10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열조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 또 네가 나의 오늘날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 길로 행할 때에는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림이 없게 하라 이같이 하면 그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주신 땅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항상 그 길로만 행할 때에 도피성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무죄한 피를 흘림이 없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명령대로 행할 때, 즉 도피성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도피성의 정신이 세상으로 확장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전도, 또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신 그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로만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로 인해서 도피성의 정신이 드러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도피성의 실체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영원한 도피성이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주안에서 산다는 것은 도피성 안에 거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도피성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피성에 피한 자는 제사장이 죽으면 자유를 얻어서 세상에 나올 수가 있습니다. 죄없는 자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피성 되신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죄없는 자로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마음대로 산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의 은혜와 긍휼이 삶의 기준이 되어서 그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하지 못한 미움과 복수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긍휼하심에 사로잡혀서 용서라는 자유 속에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용서하라'는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 되신 주님 안에서 배우게 된 긍휼과 은혜에 의해서 이끌려 갈 뿐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되는 일이 발생하고 억울하게 죽는 일이 발생하게 하심으로서 용서하고 용서받는 가운데 그리스도로 인해서 살아난 긍휼과 은혜를 잊지 말아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실수 없이 살 수 없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린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하시고 있는 일임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은 열심히 노력하고 일해서 부강한 나라로 만들라고 주신 땅이 아닙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온 땅은 죄에서 용서받은 자만 살 수 있게 하신 용서의 땅입니다. 은혜와 긍휼이 살아있는 땅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항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용서를 잊지 말라고 애매하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을 발생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주신 땅은 성령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에 의해서 다스림 받고 살아가는 신자의 사회는 은혜와 긍휼이 기준이 되어서 용서함과 용서받음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석교회는 과연 은혜와 긍휼이 기준 되어서 용서함과 용서받음이 나타나는 교회입니까? 주님의 긍휼과 은혜가 나타나는 일이라면 내 개인의 유익쯤은 포기할 마음이 있습니까? 이 마음으로 사는 자가 바로 믿는 자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서로 미워하고 원한을 가지는 것은 모두가 긍휼과 용서의 정신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되신 그리스도의 피로서 용서받았음을 잊지 마시고,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게 된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긍휼과 용서의 모습이 마음껏 나타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