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은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미셨을까
염화시중拈花示衆, 석가모니가 연꽃을 들어 보이니 가섭 존자(우)만이 |
잠시 부처님 반열반 때로 떠나보지요. 부처님께서 세상과의 인연을 다하고 훌쩍 떠나시자 교단은 잠시 마비 상태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림자처럼 부처님을 따라다니던 아난 존자는 크나큰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을 테고, 세속의 왕들이 장례식(다비식)을 치르겠다고 몰려들었을 테지요. 부처님께서 당신의 장례를 출가제자들이 아닌 재가자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런 모습은 당연할 것입니다. 재가자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이들이 많았을 테고 아직 성자가 되지 못한 제자들 중에도 이들처럼 깊은 슬픔에 잠긴 이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구경거리가 생겼으니 그걸 보겠다고 몰려든 사람들도 아주 많았을 것입니다.
그때를 상상해 봅니다.
왕 중의 왕인 전륜성왕의 장례 수준에 맞춰서 다비식이 거행되고는 있지만 부처님 유체를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보겠다는 사람들, 굳이 부처님의 관을 만져보려고 손을 뻗는 사람들, 그런 가운데 사람들을 통제하면서 화장하려고 불을 붙이지만 불은 잘 붙지 않고…. 어쩐지 몹시 어수선합니다.
그런 가운데 가섭 존자가 달려옵니다. 이 이야기는 많은 분들이 알고 있습니다. 가섭 존자가 달려왔지만 그는 부처님을 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부처님 유체는 500겹의 솜과 천으로 감싸여서 쇠로 만든 곽과 관에 넣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섭 존자는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유체를 담아 올린 화장용 장작더미를 세 번 돌면서 제자의 예를 갖추었고, 마지막으로 관의 아랫부분을 열어 세존 두 발에 머리를 조아려 절을 올렸습니다.
5백 겹이나 감싸여져 있는 부처님의 유체를 들춰냈을까요? 존경하는 스승의 마지막 모습이 흩어지는 것을 가섭 존자가 좋아할 리 없습니다. 그런 분이기에 아마 그는 5백 겹에 감싸여져 있는 부처님 두 발에 그저 공손히 머리를 대고 절을 했을 것입니다. 가섭 존자의 절이 끝나는 동시에 화장용 장작더미는 저절로 불타올랐고, 그렇게 해서 부처님의 다비는 마쳤습니다. 남쪽으로 전해진 『디가 니까야』, 그 속에 담긴 『대반열반경』이 그리는 장면은 이렇습니다.
선불교 전통에서는 이것을 조금 더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제자의 간절한 마음이 통하였는지 부처님 두 발이 관 밖으로 나왔고 가섭은 그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렸다는 것이지요. 이것으로 부처님의 가섭 존자를 향한 신임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당신의 자리를 반 나눠 앉았다거나 연꽃을 들자 가섭 존자만이 미소를 지었다거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밀어 가섭 존자로 하여금 친견케 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리하여 선불교에서는 이런 증거를 보더라도 부처님의 법(마음)은 가섭 존자가 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남쪽으로 전해진 『대반열반경』의 내용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두 발을 내밀었다는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가섭 존자가 부처님 반열반 이후에 상당히 묵직한 일을 앞장서서 처리했다는 것은 기록에 전해집니다. 사리불과 목건련마저도 이미 반열반한 당시 교단에서 스승과 정법을 향한 가섭 존자의 간절한 마음은 승가의 버팀목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불無佛시대에 행정적인 일을 처리하는 데에 좌장 노릇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무난합니다.
물론 가섭 존자가 한 일은 부처님의 말씀이 흩어지지 않도록 한데 모으는 일(결집)이었으니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경전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라한을 소집한 일, 아난 존자를 그 자리에 포함시킨 일, 결집 날짜를 정한 일, 율과 경과 논의 순서로 부처님 가르침을 모은 일 등등 실무를 처리하는 데에 가섭 존자의 존재감은 참으로 크고도 큽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불법의 후계자로 규정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 어쩌면 비구니 승가를 가장 기다렸을지도
한역 율전인 『오분율』에 따르면, 가섭 존자는 결집하는 자리에서 여섯 가지를 거론하면서 아난 존자를 꾸짖습니다.
첫째, 부처님께서 반열반하실 때 소소한 계율은 버려도 좋다고 하셨다는데, 소소한 계율이란 대체 어떤 것들인지 자세히 여쭙지 않은 일.
둘째, 부처님의 가사를 개다가 아난이 가사 자락을 밟은 일.
셋째, 부처님께 세 번이나 여인들의 출가를 청하여서 그 허락을 받아낸 일.
넷째, 부처님께 반열반하지 마시고 더 머물러달라고 청하지 않은 일.
다섯째, 부처님께서 물을 가져다 달라고 청하셨지만 물이 혼탁하다는 이유로 세 번이나 거절한 일.
여섯째, 부처님 다비식 이후 여인들에게 사리를 먼저 친견케 한 일.
가섭은 아난에게 이 여섯 가지를 조목조목 들면서 이유를 묻습니다. 아난은 각 항목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대면서도 가섭 존자를 존중해서 참회합니다. 참회한다는 것은 어찌 되었거나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여섯 가지를 힐난하는 가섭을 보자면 스승을 향한 존자의 지극한 존경심을 느낍니다. 부처님을 오로지 믿고 부처님의 마음을 그대로 충실하게 따라가는 제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세 번째 조항의 경우는 조금 의아합니다.
여인이 출가하여 교단에 들어오면 정법의 수명이 줄어든다는 이유를 들어 부처님께서 여성 출가를 거절하셨는데 아난이 굳이 부처님을 설득해서 여성 출가 허락을 받아냈다는 것입니다. 팔경법이라는 조항을 내어 그것을 따르겠다는 조건 아래 여성들은 스님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 불교계의 통설입니다. 물론 이 팔경법에 관해서는 학자들이 이견을 보이니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어찌 되었거나 위의 『오분율』에 따르면 가섭은 여성 출가와 비구니 승가의 탄생에 부정적인 생각을 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섭 존자가 정말 여성 출가를 이렇게 비판적으로 보았을까요? 왜냐하면 가섭에게는 출가하기 전 스승을 찾아 함께 집을 떠난 아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옛 아내 밧다의 구도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가섭 존자입니다. 그녀와는 이렇게 약속을 하고 헤어졌지요.
“누구든 먼저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반드시 찾아와서 함께 그 스승 앞으로 나아가자.”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고행에 가까울 만치 엄격한 가섭 존자가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런 만큼 가섭은 누구보다 비구니 승가의 탄생을 기다렸고, 또 반가워했을 것입니다.
『불본행집경』에 따르면, 가섭의 옛 아내 밧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단이 아닌 다른 종교집단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도 밧다의 수행은 빛을 발해서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지요.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마하파자파티의 간청과 아난의 설득으로 여성 출가를 허락하시고, 비구니 승가가 출범하자 가섭 존자는 신통력으로 자신의 옛 아내가 어디 있는지 찾았다고 합니다. 오래전 약속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오래전 밧다에게 약속했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반드시 알려주겠다고. 그래서 그 스승 아래에서 출가하여 도를 닦게 해주겠다고. 이제 밧다를 찾아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
아라한이 된 가섭은 선정에 들어 세상을 두루두루 살피다가 갠지스 강가에서 수행하고 있는 밧다를 찾아냅니다. 즉시 다른 비구니에게 부탁을 하지요.
“착한 누이여, 어서 갠지스 강가로 가셔서 밧다 여인을 만나주십시오. 그녀에게 ‘당신의 남편이었던 가섭은 나와 같은 스승 아래에서 출가하여 수행하고 있으니 어서 나와 함께 가십시다’라고 청해서 데려와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가섭은 출가 전 옛 아내를 부처님의 교단으로 부를 수 있었고, 부처님은 기꺼이 밧다를 출가시킵니다. 밧다는 비구니가 된 후에 열심히 수행해서 아라한이 되고, 부처님은 그녀를 가리켜서 “비구니 가운데 숙명통을 얻은 이로서 밧다가 으뜸”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다소 윤색되어 전해지는 일화일 수도 있겠지만 여러 정황을 따져보자면, 비구니 승가를 바라보는 가섭 존자의 마음은 『오분율』에서보다 한결 유연합니다. 꽃을 들어 올린 부처님의 마음을 갈파하여 미소를 지은 구도자, 옛 아내를 찾아내 도반의 인연으로 새롭게 꽃피운 남자, 어쩌면 가섭 존자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이미령
불광불교대학 전임교수이며 불교칼럼리스트이다. 동국대 역경위원을 지냈다. 현재 YTN라디오 ‘지식카페 라디오 북클럽’과 BBS 불교방송에서 ‘경전의 숲을 거닐다’를 진행하고 있다. 또 불교서적읽기 모임인 ‘붓다와 떠나는 책 여행’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는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 『간경 수행 입문』, 『붓다 한 말씀』, 『사랑의 마음을 들여다보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