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8월18일 [(녹) 연중 제20주일]
제1독서 예레미야서 38,4-6.8-10
제2독서 히브리서 12,1-4
복음 루카 복음 12,49-53
◈ [서울] 연중 제20주일
2019년 다해 8월18일 연중 제20주일
지난주에는 중앙동 성당 설립 50주년 행사가 있었습니다.
교구장님께서 축하 미사를 집전해 주셨습니다. 역대 본당 신부님,
보좌 신부님, 본당 출신 신부님, 본당 출신 수도자가 함께하였습니다.
저는 중앙동 성당 출신이고, 마침 안식년을 중앙동 성당에서 지내고
있기에 축하 미사에 함께 했습니다. 다시 한번 은총과 감사의 50년을
축하드리고, 사랑과 나눔의 50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에는 족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이 14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14대이고 바빌론 유배부터 예수까지가
14대라고 합니다. 지난주에 50주년을 축하한 중앙동 성당도 초대
주임신부님부터 지금 주임신부임까지가 14대입니다. 중앙동 성당의
50년은 성서에 따른 의미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무는 겉모습으로
그 크기와 역사를 알 수 있지만, 나무는 나이테로 매년 나무의 삶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0년을 축하하는 외적인 행사도 의미가
있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성금을 나눠준 것이
더 좋았습니다.
악을 뜻하는 Devil과 거룩함을 뜻하는 Divine은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깃발에 설 것인가, 악의 깃발에 설 것인가를 늘
식별해야 하고, 선택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악한 것들이 화려해
보이고, 편안해 보이고, 좋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알면서도, 모르면서도 악의 깃발 아래 서 있곤 합니다. 악의 깃발에는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달콤한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참된 구원을 주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희생, 양보, 헌신이라는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스도의 깃발에 서지 못하곤 합니다.
우리의 목에는 두 개의 기관이 함께 있습니다. 음식물을 섭취하는
식도와 공기를 마시는 기도입니다. 음식을 섭취할 때는 자연스럽게
기도가 닫히게 됩니다. 만일 기도가 열리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음식물이 기도를 막게 되면 질식할 수 있고, 음식물이
폐로 가게 되면 염증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음식물이
기도로 가게 되더라도 우리는 재채기를 통해서 음식물을 밖으로
내보내게 됩니다.
식도와 기도가 아주 가까이 있는 것처럼 선과 악도 어쩌면 우리의
마음에 가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악한 것들이 들어오려고 하면 우리의
마음을 닫아야 합니다. 악한 것이 들어왔다면 그것을 내 마음에서
내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메마르게 되고,
하느님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선한 것들이 들어오려고 하면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선한 것들이 들어왔다면 우리의 삶을
통해서 꽃을 피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깨버린 불법일지 모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고,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참된 행복을 느꼈고, 신분과 계급의 벽에 막혀서 답답하던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앞에 모든 이가 한 형제요 자매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라면 몸이 아픈 병자들도, 장애인으로 태어나
멸시를 받았던 사람들도, 죄인이라 손가락질을 받던 사람들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축복임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아픈 것도, 장애인이 된 것도, 멸시를 받던 것도, 죄인처럼 살아야 했던
것도 모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기 위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삶이
파격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것 자체가 파격입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어주라는
말, 친구가 오리를 가자면 십리까지도 가주라는 말,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는 말,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은 바로 파격입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을 생각합니다.
교회는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지
생각합니다. 지금 아프고, 굶주리고,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교회와 신앙인들은 바로 예수님을 친구로,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신앙인들이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지금 가난한 이들, 굶주린 이들, 병든 이들을
외면하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무늬만 교회요,
겉모습만 신자일 뿐입니다.
불가에서는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것은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부처가 방해되면 부처마저도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나의 내면에
있는 악한 것들을 모두 태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근심, 걱정, 분노,
원망, 미움, 욕심이라는 쓰레기들을 태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령의 불 옮겨 붙이는 법
2019년 다해 8월18일 연중 제20주일
<성령의 불 옮겨 붙이는 법>
복음: 루카 12,49-53
한 사람이 7개월 동안 700명을 입교시킨 분이 계십니다. 1998년 공덕동
본당 신자인 채충석씨는 이 공로로 서울 대교구장으로부터 선교 대상을
받았습니다.
선교왕이 된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선교하여 10여 년 동안 무려
3000여명 이상을 입교시켰다고 합니다.
이분은 선교를 하다가 거절을 당하더라도 좋지 않은 기분으로
헤어져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인디언이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것처럼, 대상자가 입교할 때까지 꾸준히 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분의 말씀대로 선교하면 이런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개신교의 한
할머니의 이야기이지만 가톨릭 식으로 바꾸어보겠습니다.
한 성당의 전교 왕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분은 1년에 백 명도 선교한
적도 있습니다. 어느 지방 도시에 규모가 큰 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에서 1년에 100명을 전도한 연세 많으신 할머니의 선교
이야기입니다.
할머니는 선교를 계획하면 일단 마을을 돌아다니시면서 선교 대상자를
먼저 찾습니다.
찾으면 그를 위하여 오랫동안 기도를 합니다. 때로는 단식기도도
합니다. 그리고 그 가정으로 선교하러 가십니다.
한번은 선교 대상자를 결정하여 놓고 오랜 시간을 기도한 후 그 가정을
찾아갔습니다.
“계십니까? 저는 00 성당에서 왔습니다. 예수님 믿고 천국 갑시다.”
할머니의 선교 내용은 간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집주인의 대답도
간단하였습니다.
“우리는 성당에 안가요!”
그때 할머니는 아주 평온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아! 그래요. 안녕히
계십시오.”하고 돌아왔습니다.
한 주간 뒤에 그 집을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계십니까? 예수님 믿고 천국 갑시다.”
그 집주인은 첫 번째보다 약간 언성이 높았습니다.
“성당 안 간다는데 왜 왔어?”
그때도 할머니는 아주 기쁘게 “아! 그래요.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깊은
절을 하면서 물러나왔습니다. 할머니는 계속해서 열심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계십니까? 예수님 믿고 천국 갑시다."
그때 안에서 주인이 나오더니 “저 할마시(할머니의 경상도 사투리로
약간 하대해서 하는 말) 성당 안 간다는데 왜 또 왔어.” 하면서 이번에는
할머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그때 할머니는 아주 기쁜 얼굴로 “아! 그래요” 하면서 친절히 절을 하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할머니는 너무 기뻤습니다. 예수님도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계속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그 다음 주일 네 번째 그 집을 또
방문하였습니다.
“계십니까? 예수님 믿고 천국 갑시다.”
그 때 그 집주인은 침을 뱉어도 찾아오는 그 할머니에게 “지난 번 일이
죄송해서 나 오늘 한 번만 성당에 가 줄 테니 다시는 오지 마시오.”
“아 그러지요.”
할머니는 이미 기도를 많이 해 둔 상태라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날
그 사람은 신부님의 강론에 크게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또
동료들에게 선교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선교 왕들은 왜 그렇게 선교에 매달리는 것일까요? 억지로 하라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 마음 안에 어떤 열정이 타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정은 성령께서 불러일으키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그 뜨거움으로 스스로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시며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억지로
분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불이 분열이 일어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열은 사람들과 일어나기 이전에 자기 자신 안에서
일어납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성령께서 들어오셨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붙이시려는 불은 싸우지 않으면 평화로워지지 않는
마음입니다. 만약 방 안에 뱀이 들어왔다면 그것을 잡지 않고서는
평화로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우리 안을 밝히시어 자아의 실체를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아와
싸우지 않으면 절대 평화를 갖지 못하게 만드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죄에 맞서 피 흘리며 죽기까지 싸우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그 안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불은 나의 피를 통해 이웃에게 옮아 붙습니다. 위
예에서 할머니는 당신이 침을 뱉어도 기쁠 때까지 선교하였습니다.
침뱉음을 당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
죽으면 나오는 피가 선교하는 것입니다. 이웃의 가슴에도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의 불을 붙이셨듯이
그 불이 나를 죽여 흐르는 피가 이웃에게 불을 옮겨지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군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양
팔로 지팡이를 머리 위로 들고 있으면 이스라엘이 이겼고 힘이 들어
아래로 쳐지면 아말렉군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양 옆에서
아론과 후르가 양 팔을 받쳐주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양 팔을 십자가에 높이 들고 계십니다. 거기서
흘러내리는 성령이 우리에게 옵니다. 그 성령의 힘은 싸우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양 팔을 높이 들고 계신데도 싸우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 자신이고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싸우라고 십자가에 달려 계신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습니까? 그러면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내가 죽어도 상관없습니까? 그러면 성령의 불이 타는
중입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맙시다. 그러면 내가 침 뱉음을 당하여도
기쁘고 그러면 그 침 뱉은 사람에게도 성령의 불이 옮아 붙습니다.
- 수원 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연중 제20주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8월18일 연중 제20주일: 분열을 주시러 오신 주님
제1독서: 예레 38,4-6.8-10: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일생을 큰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할”(예레 1,18) 만한 용기를 가졌던 예레미야는 고통과 권세를
갖추신 그리스도의 예언적 ‘모습’이 되고 있다. 그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반대를 받는 표적으로 나타난다. 참된 예언자는 헛된 환상이나
감언이설에 동조하지 않고 그와는 정 반대로 그 상황을 새롭고 대담한
말로써 판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마침내
대립과 불화의 상징으로 된다.
예레미야는 불신과 저버림을 당하면서 느끼는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예레 15,10)
복음: 루카 12,49-53: 나는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언자들의 삶이 그러했다면 ‘예언자 중의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의
운명이 더 나을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예언적 행동을
말해주는 말씀이 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49-50절) 여기서
‘불’과 ‘세례’의 의미는 그분의 수난을 의미하고 있다.
그분의 수난은 완전히 살라버리고, 정화시키는,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로 설명되기도 하고, 고통과 죽음의 물속에 잠기는 행위로써
설명되기도 하기 때문이다.(시편 124,4-5 참조) 그러므로 이 두 단어는
비록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구원을 성취시켜 마치
성령에 의해 타오르는 거대한 불길처럼 그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강한 바람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인지 반대편에 설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 선택 때문에 가족들 간에도 충돌이 일어난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51절) 이제 그분의 말씀을 선과
악, 진리와 허위를 가려내는 척도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른 종류의
가치와 판단의 척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대립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믿음과 믿음을 통해 그분과의 생활한 일치를
통하여 내적인 평화를 가지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체로 우리 마음 안에 커다란 ‘전쟁’ 즉 갈등을 일으키게 한다. 이 내적
전쟁을 통하여 모든 것을 극복하는 가운데 우리 안에 진정한 평화 즉
구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내적 전쟁은 전쟁이며 갈등이지만
범죄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무이다.
이 갈등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
갈등을 계속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 갈등을 이겨내고 극복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 우리의 참 평화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이끌어 주실 것이다.
제2독서: 히브 12,1-4: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립시다.
히브리 서간에서도 비록 희생을 통해서이지만 충실성과 사랑으로
찬란히 빛나는 표징에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신”(2절) 그리스도의 모범을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4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가면서 언제나 부딪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 했기 때문에 세상이라는 가치기준을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선택한 하느님의 뜻은 평화와 구원을 받게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다면 그분의 형제자매인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올바른 선택을 해 나가는 삶을
결심하도록 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그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 49)|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8월18일 연중 제20주일.
그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 49)
뜨거운 불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은 타오르시는 불이신 예수님께로 가야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가장 빛나는 불이십니다.
우리또한 타오르는 불이 되길 바라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사랑이 이제는 뜨겁게
뜨겁게 타오르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우리의 모순을 우리의 거짓을 불태워 우리
어둠을 이제는 밝히길 원하십니다.
타오르는 불이 길을 안내합니다.
타오르는 불이 신앙공동체를 환히 밝힙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 삶을 가득 기쁜소식으로
불타오르게 하십니다.
시작도 마침도 불이십니다.
뜨거운 불이 타오르는 불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복음의 불길이 뜨겁게 타오르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게으름과 나태함을 떨치고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2019년 다해 8월18일 연중 제20주일
게으름과 나태함을 떨치고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세상과 인류 구원을 위해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백성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분히 복합적이었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 자리에서
회개하는 사람들은 대견스럽게 바라보셨습니다. 오랜 세월 폭군들의
압제에 시달리던 식민지 백성들의 고통 앞에서는 저절로 연민과
측은지심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쳐도 하느님께 돌아서지 못하고 과거의 악습에 푹
빠져 도무지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가장 중요한 자신의 영혼과
영원한 생명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오늘 하루 희희낙락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아무런 준비도, 변화를 위한 노력도 없이, 흐리멍텅한 눈동자로,
영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시선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했고,
강력한 경고 말씀이 뒤따랐습니다.
오늘 엄청 강력하고 섬뜩한 경고 말씀은 이런 분위기를 배경삼아 나온
것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복음 12장 49절, 51절)
‘세상에 불’ ‘평화가 아니라 분열’ 등의 강력한 표현은 묵시 문학을
배경으로 하신 말씀이라, 조금 난해하기에, 잘 새겨들어야만 합니다.
묵시 문학에서는 종말이 다가오면 가정에서 부터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붕괴 현상이 초래될 것을 예언합니다. 따라서 가정의
분열은 종말이 임박했음을 의미하는 전조라는 것입니다.
한 가족 안에서, 다섯 식구 중 3:2로 갈라져 맞설 것이라는 말씀,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이 맞설 것이라는 말씀, 참으로 듣기에
거북하고 난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종말이 다가오면 하느님을 최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즈카리야서에는 더 끔찍한
말씀이 적혀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온 땅에서 삼분의 이가 잘려
죽고 삼분의 일만 살아남으리라. 나는 그 삼분의 일을 불 속에 집어넣어
은을 정제하듯 그들을 정제하고 금을 제련하듯 그들을 제련하리라.”
(즈카르야서 13장 8~9절)
우리 역시 더 이상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결단을 내려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지르신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밤은 낮처럼 밝아졌고 그분께서 드신 횃불이 온 세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무관심과 타성은 쫒겨나야 하고, 예수님의 불은 세상
방방곡곡으로 번져나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장 경계하시는 백성들의 삶은 열정없는 삶입니다.
살아있어도 이미 죽어버린 삶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뜨뜨미지근한 삶입니다. 열정이 없는 신앙, 불꽃이 없는 설교, 영혼이
없는 얼굴, 뜨거운 사랑 없는 삶! 이제는 떨쳐버려야 할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짧은 지상 생활은 그야말로 불꽃같은 삶이었습니다. 매일
활활 타올랐습니다. 하루를 천년처럼 그렇게 알차게, 역동적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인생인데, 금쪽같은 순간들이었는데, 아무런 영양가
없이, 빈둥빈둥 허송세월한 지난 삶이 참으로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우리네 일상이 비록 구차스럽고 초라해보일지라도,
불꽃처럼 타오르는 삶을 추구해야겠습니다.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 대상, 존재라 할지라도 지극정성으로 대하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게으름, 나태함, 무기력한 삶을 떨치고
일분 일초라도 의미있게 보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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