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주변에는 수많은 시계가 있다.
시간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루에 시계를 보는 횟수는 많지 않다.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는 증거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시간을 보내거나 죽이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오락(pastime)을 하고 있는 것은 시간을 죽이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다른 민족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던 그리스 사람들은 시간(때)을 독특하게 해석했다.
시간을 몹시 중요시했기 때문인 것 같다.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가 그것이다.
‘크로노스’는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으로
일련의 불연속적인 우연한 사건이 생긴 때를 뜻하고
‘카이로스’는 때가 무르익은 시간으로 구체적인 사건의 순간, 감정을 느끼는 순간,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의미 있는 순간을 뜻한다.
‘카이로스’는 자신의 존재의미를 느끼는 절대적인 시간으로 ‘깨어 있는 시간’인 것이다.
따라서 ‘크로노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은
역사가 자신을 어떻게 판단할 지에 관심이 없고 오직 현재만 중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깨어 있는 사람이 되어 현 순간을 아끼며 사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은
끊임없이 회개하며 사는 사람으로 매 순간 깨어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알고 있는 ‘카이로스’ 역사관(歷史觀)은 전혀 다르다.
‘카이로스’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한 시간이다.
더불어 사는 연대책임(連帶責任)의 삶을 사는 시간이다.
하느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입구에서
“네 이웃과 함께 오지 않고 왜 혼자만 왔느냐?”고 물으신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가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끝이 없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에는 그 마지막이 있다.
즉 하느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는 말이다. 그 때를 일컬어 ‘파루시아’라고 한다.
‘파루시아(Parousia)’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Para’와 ‘ousia’가 결합된 말로서,
‘Para’는 ‘along side’ 즉 ‘나란히’ 라는 뜻이고
‘ousia’는 ‘substance(본질 혹은 실재)’이란 뜻이다.
즉 ‘파루시아’는 ‘본질과 나란히 온다’라는 뜻으로
‘실재로서 오시는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한다.
우리가 당신의 영적 존재를 믿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날에 몸으로 즉 육체적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이것은 실재적 사건이다.
우리 모두가 실제로 체험하게 될 재림을 의미하는 이 종말론적 단어는
예수님께서 종말에 심판의 주님으로 다시 오신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파루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아무도 그날의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
‘파루시아’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는 언제나 ‘파루시아’가 임박한 것으로 생각하여 기대로 충만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사자의 이빨 앞에서도,
불타는 기둥에 묶여 죽어가면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시간으로 잴 수 없는 ‘파루시아’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적인 개념만은 아니었다.
‘심판의 주님’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기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세상에서 얻는 즐거움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무소유의 삶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루터의 유명한 말 중에 라틴어 ‘코람 데오(coram Deo)’라는 말이 있다.
‘coram’은 ‘앞에’라는 뜻이고 ‘Deo’는 ‘하느님’을 뜻한다. 즉 ‘하느님 앞에서’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다. 결코 ‘사람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하느님 앞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은 오늘을 종말처럼 산다.
날마다 순간마다 ‘파루시아’를 의식하며 살기에
결코 주어진 시간을 허비하거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어떤 난관 속에서도 ‘파루시아’에 대한 갈망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되게 하여,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다시 일어나게 한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소망이 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재림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파루시아’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기에,
비록 세상 사람들이 ‘파루시아’를 기다리는 우리의 믿음을 미련한 것으로 생각할지 몰라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삶을 책임 있게 살아가도록 하는 힘이 되며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 되는 것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이 끝나는 지점 즉 ‘파루시아’의 때를 알고 있는 사람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크로노스’의 시간에 살지만 동시에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 있다.
누구나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에게는
역사와 하느님 앞에서 책임을 감당해야 할 깨어 있어야 하는 시간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시간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Maranatha’는 아람어로 ‘주님, 어서 오소서!’의 뜻이다(1코린 16,22).
‘Maranatha’를 ‘마란 아타(maran-atha, 주님께서 이미 오셨다!)’고 말하든
‘마라나 타(marana-tha, 주님, 어서 오소서!)’ 라고 말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기도 하고 아직 오지 않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오고 있었지만 완성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17,21)에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고 말하며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마태오 복음(6,10)을 보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하고 말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가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 세상에 여전히 악(惡)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 아직 오시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개인이나 많은 단체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면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것입니다.” 하고 말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1코린 15,24)
첫댓글 '카이로스'구원의 기쁨! '파루시아'본질과 나란히 온다. 언젠가 송봉모신부님 말씀에서 들었던 단어들인데 다시 만나니 반갑네요. 후고님! 복된 말씀들 감사합니다. 겸허하게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