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상카시아에 살고 있는 석가족들과 하루 종일 회의하고 수련을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오전 7시부터 실무자들과 발우공양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상카시아 담마센터를 아침 일찍 찾아온 인도인 스님 두 분도 발우공양을 함께 했습니다.
각자 발우를 하나씩 들고 자리에 앉은 후 죽비 소리에 맞춰 소심경을 하고, 밥과 반찬을 발우에 담았습니다.
“불생가비라 성도마갈다 설법바라나 입멸구시라”
부처님 당시처럼 발우 하나에 밥과 반찬을 모두 담아서 손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오늘 일정에 대해 공유한 후 발우공양을 마쳤습니다.
곧이어 오전 8시부터 실무자들과 이번 인도 성지순례에 대해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스님이 지금까지 보고된 내용을 정리해서 알려 주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간 1250명의 순례자들은 무사히 귀국을 했다고 합니다. 다만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과정에서 두 명이 잠시 쓰러져서 응급처치를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병원으로 잘 모셔다 드렸고요.
그리고 스님의 하루에 성지순례의 모습이 매일 연재가 되었는데, 기원정사에서 1250명이 탁발하는 모습이 너무 거룩했다고 하면서 1250만 원을 보시하신 스님이 있었습니다.” (박수)
이어서 숙소팀, 행사팀, 수행팀, 영상팀 등 각 팀별로 부족했던 점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으로 1250명이나 되는 대규모 순례단을 이끌어야 하다 보니 미흡한 점이 많았습니다. 특히 버스를 계약한 사람이 부도를 내는 바람에 여러 가지 말썽이 생겼는데요. 갑자기 버스를 담당해야 했던 보광법사님에게 모두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번에 버스가 문제가 많았죠. 그래서 보광 법사님은 속이 시커멓게 탔을 것 같아요. 얼마나 시커멓게 탔는지 엑스레이를 한번 찍어보세요.” (웃음)
스님은 수고한 스태프들을 격려한 후 곧바로 1층 법당으로 내려갔습니다. 법당에는 U.P주 불교협회에서 스님들이 몇 분 오셔서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럭나우에 꼭 오셔서 저희들에게 법문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어렵지만, 인도에 오는 일정이 생겼을 때는 꼭 럭나우 인도불교협회를 방문하겠습니다. 연락을 주세요.”
멀리서 온 인도인 스님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힌디어로 번역한 희망편지 책을 선물했습니다.
11시 20분부터는 석가족 청년회(YBS) 임원들과 회의를 했습니다. 스님은 먼저 성지순례단을 위해 밥을 준비하고 환영식을 준비해 준 석가족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번에 한국에서 많은 순례객이 왔는데 여러분이 많이 도와주셨다고 들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와서 힘들었어요?”
“네.” (웃음)
“고맙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스님은 앞으로 상카시아 담마센터를 건립하기 위해 필요한 일과 논의해야 할 지점을 하나하나 짚어주었습니다. 공사를 누가 맡아서 책임지고 할 것인지, 어떤 모양으로 건물을 지을 것인지, 회계를 어떻게 투명하게 할 것인지, 석가족이 대단위로 참여할 수 있도록 모금 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 여러 가지 안건에 대해 의논을 했습니다.
“담마센터를 지으려면 자기 일처럼 봉사하고 보시해야 합니다. 회계는 모든 사람에게 투명하게 공개해야 해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단순히 여기 있는 몇몇 사람의 일이 되면 안 돼요. 담마센터를 짓는 과정이 모든 불자를 위한 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어떻게 조직을 운영하는 게 좋을까요?”
석가족 청년회 임원들은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습니다. 하지만 한 시간 여 만에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웠습니다. 스님이 던진 화두를 주제로 임원들이 회의를 해서 초안을 내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스님은 힌디어로 번역한 법륜스님의 희망편지를 선물했습니다.
“지난번에 받지 못한 분들은 받으러 오세요.”
지난번에 책을 받았던 학교 교장 비크람 지는 책이 너무 좋아서 교사들에게 모두 선물하고 싶다며 20권을 더 받아갔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담마센터 바로 옆 인도 스님인 담마팔라 스님이 운영하는 절로 이동하여 석가족들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석가족 어린이가 스님에게 꽃 공양을 올리며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빨리어로 삼귀의와 오계를 한 후 석가족들이 삼배의 예로 법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먼저 붓다 담마의 핵심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법을 보는 자 곧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 곧 법을 본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곧 담마가 곧 부처님이고, 부처님이 곧 담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담마를 받아들여서 담마를 행하면 그 사람이 곧 부처님과 같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들기 전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와 함께 하리라.’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 아난다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는 늘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했는데,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누구를 스승으로 모셔야 합니까?’
‘아난다여, 걱정 마라. 여래가 없는 세상에서 여래의 가르침인 수트라(sutra)와 여래의 행(行)인 비나야(vinaya)를 스승으로 삼아라. 나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경(經)에 따라 수행을 하고 계율을 잘 지키면, 그는 나와 같이 있는 것과 같고, 설령 나와 함께 있더라도 경과 계율을 따르지 않으면 내가 모르는 사람과 같다.’
이런 모든 말씀의 요지는 ‘담마가 곧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붓다 담마를 잘 배우고 그것을 따라 행하면 부처님이 늘 우리와 함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붓다 담마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사람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일로 괴로워하며 살아갑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 때문에 괴로워하고 돈만 있으면 괴롭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돈이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그 사람도 괴롭게 살아가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지위 때문에 괴로워하고 출세해서 지위가 높아지면 괴롭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물어보면 그 사람도 괴로움에 빠져 있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아플 때는 건강하기만 하면 아무런 괴로울 일이 없을 것 같은데, 건강한 사람한테 물어보면 그는 또 그 나름의 이런저런 괴로움에 빠져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은 괴로움이 떠나지 않고, 조건이 달라진다고 해서 괴로움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괴로움이 전생에 지은 죄 때문에 생기는 것인가, 신이 내리는 벌 때문에 생기는 것인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 괴로움은 잘 살펴보면 괴로울 만한 어떠한 원인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깊이 탐구해 보면 그 뿌리에는 집착이 있습니다. ‘왜 그런 집착이 생기는가’ 하고 생각해 보면 우리가 분명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집착이 생깁니다. 그러니 집착으로 인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그것이 정말 옳은가’ 하고 깊이 탐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깊이 파고들면 결국 우리의 어리석음과 무지가 괴로움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무지’가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무지로 인해 옳다고 할 수 없는 것을 옳다고 믿고 그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자신의 무지를 깨달으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괴로움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자신의 무지를 한 번 깨닫는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다시 어리석음에 빠져 괴로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다시 괴로움에 빠지지 않으려면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다시 괴로움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여덟 가지 바른 길을 팔정도(八正道)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괴로움 없이 사는 것이 수행의 목표입니다. 수행의 목표는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도 아니고, 죽어서 극락에 가는 것도 아니고, 다음 생에 부자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수행의 목표는 바로 괴로움 없이 사는 것, 즉 니르바나(Nirvana, 열반)입니다. 이 관점을 분명히 해야 여러분이 법을 본다고 할 수 있고,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란 담마를 이해하고 담마를 행하는 것
그렇다면 괴로움이란 게 무엇일까요? 바로 화내는 것, 짜증 내는 것, 미워하는 것, 원망하는 것, 슬퍼하는 것, 불안한 것, 근심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 등 부정적인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는 삶이 니르바나(Nirvana, 열반)입니다. 니르바나의 상태는 어떤 특별한 사람만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도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붓다담마를 공부하고 행하면, 완전하게는 안 되더라도 조금은 개선이 됩니다. 앞으로 여러분들도 불교라는 종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담마를 이해하고 담마를 행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이번에 한국에서 온 1,250명의 순례객들을 봤습니다. 15일이라는 시간을 내고, 많은 돈을 들여서 이곳에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복을 구하러 온 게 아니라, 인생을 괴롭게 살다가 부처님의 법을 만나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부처님의 흔적을 찾아서 온 것입니다. 담마의 혜택을 입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삶을 다시금 새기고자 이곳에 온 것입니다. 여러분도 직장에 다니고, 돈도 벌고, 바쁜 생활이 있겠지만, 하루에 1시간이든 2시간이든 시간을 내서 담마를 공부하고, 담마를 행하는 명상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출가해서 수행하는 비구와 비구니만 인정한 게 아니고, 집에 있으면서도 담마를 행하는 우바새, 우바이도 재가수행자로 인정했습니다. 그저 절에 다닌다고 해서 재가수행자가 되는 게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인 담마를 알고 담마를 행해야 재가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막을 치고도 그곳에서 담마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건물이 있으면 먹고 잘 수 있는 공간도 생기고, 여러 가지 편리한 점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담마센터를 지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건물을 짓고 법을 전한 게 아닙니다. 그냥 나무 밑에서 법문을 하시고, 숲에서 지내면서 수행을 하셨습니다.
정토회도 아무것도 없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가정집, 식당, 사무실 등 법문을 할 수 있는 곳이면 가리지 않고 했지, 처음부터 절을 짓고 시작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지금부터 얼마든지 자기 공부를 할 수 있고, 법을 전하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도에 부처님의 담마가 다시 재현되기를 바랍니다. 그 일을 석가족 불교인들이 먼저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까지 법문을 하고 석가족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무슨 질문이든 괜찮습니다. 개인 인생사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도 괜찮고, 세상에 대한 이야기도 괜찮고, 담마에 대한 이야기도 괜찮습니다. 내용이 무엇이든 모든 것이 다 담마의 주제입니다. 괴로운 사람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담마입니다.”
여러 사람이 손을 번쩍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여덟 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불교를 믿고 공부하는 데도 집안에 자꾸 어려움이 생긴다며 답답한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불교를 믿고 봉사를 하는데 집안에 어려움이 생겨요. 왜죠?
“저는 담마를 공부했고, 부인과 함께 봉사활동도 하고 있고, 사회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집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두 번이나 수술을 하게 되었고, 형은 척추가 안 좋아서 3년 전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고, 그 외에도 계속 집안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청정한 마음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데도 왜 이러한 어려움이 계속 생기는지, 제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그런 것인지, 어떤 벌을 받아서 그런 것인지, 스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그건 전생의 죄도 아니고, 벌도 아닙니다. 그냥 사고가 났고, 병이 생겼을 뿐입니다. 불교를 믿으면 이런 병이 안 생기고 사고도 안 난다고 생각하는 건 복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담마는 이런 일이 생기든 저런 일이 생기든 그것에 구애받지 않는 것입니다. 다리가 부러지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됩니다. 그때는 ‘두 다리가 다 부러졌으면 큰일인데 그래도 한 개만 부러져서 다행이다’ 하고 웃어야 합니다. 그러니 담마는 날씨를 따뜻하게 하거나 춥게 하는 게 아닙니다. 날씨가 더우면 옷을 벗고, 날씨가 추우면 옷 하나를 더 입는 것입니다. 즉, 날씨가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내가 그것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담마입니다.
병이 나면 치료받으면 되고, 죽음이 찾아오면 죽으면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습니다. 여기 안 죽는 사람 있어요? 다만 조금 먼저 가거나 조금 늦게 갈 뿐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이 니르바나(Nirvana, 열반)이지, 안 죽는 게 니르바나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아직 담마를 배우는 게 아니라 불교를 믿고 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좋은 일을 해서 뭔가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고,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고, 복을 받겠다는 생각을 하잖아요. 그건 윤회의 삶입니다.
니르바나(Nirvana, 열반)는 이런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일이 생길 때마다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면서 거기에 놀아나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이 생기든 저런 일이 생기든 그것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니르바나입니다.
만약 봉사하면 돈도 많이 벌고 사고도 안 난다고 하면 봉사를 계속하고, 봉사를 해도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면 이제 봉사활동을 그만둘 거예요?”
“그래도 계속할 겁니다.”
“내가 봉사활동을 했다고 해서 사고가 안 일어나고, 봉사활동을 안 했다고 해서 사고가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옛날에는 왕이 부인을 두고 다른 여인을 만나면 하늘이 노여워해서 비가 안 온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그런 이유 때문에 비가 오고 안 오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건 다 비가 내리는 원리에 대해 잘 모를 때 하는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이치를 잘 모를 때 이런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저런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건 다 뭘 잘 모르는 옛날에 하던 생각입니다. 무지의 시대에 사람들이 하던 생각들이 아직도 남아있는 거예요.
그러니 남을 도우면 나중에 복을 받기 때문에 남을 돕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남을 외면하는 것보다 돕는 것이 나한테 좋기 때문에 남을 돕는 겁니다. 만약 내생에 복을 받기 위해서 남을 도왔는데 복을 안 받으면 내가 속은 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괴로워져요. 담마는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단야바드!”
(감사합니다.)
석가족들의 질문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엊그제 1250명의 순례단과 함께 담마센터 기공식을 했는데요.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석가족 한 분이 왜 상카시아에 담마센터를 짓고자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상카시아에 담마센터를 짓는다고 말씀하셨는데, 담마 센터를 짓는 이유와 목표가 무엇입니까?”
“이 주변에 30만 명 정도의 석가족 불자들이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불자들이 담마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담마센터를 지어서 우선 석가족 불자들이 담마를 배울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담마를 행할 수 있는 장소도 필요합니다. 담마를 배운다는 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고, 담마를 행하는 건 명상을 하는 걸 말합니다.
첫째,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연기법을 알아야 하고, 아닛짜(anicca, 무상 無常)와 아낫따(anatta, 무아 無我)를 알아야 하고, 인연과보를 알아야 하고, 사성제(四聖諦)를 알아야 하고, 팔정도(八正道)를 알아야 하고, 중도(中道)를 알아야 하고,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알아야 하고, 여섯 가지 바라밀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을 습득하듯이 무슨 단어나 뜻을 외우는 게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자기가 직접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법을 안다고 할 수가 있어요. 담마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기 때문에 배우면서 계속 검증하고 체험해야 합니다.
둘째,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는 것에서 머물면 안 되고 그것을 행해야 합니다. 명상을 하면서 직접 경험을 해야 하고, 일상에서도 그것이 활용돼서 화도 적게 나고, 두려움도 적어지고, 괴로움도 줄어드는 걸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담마를 직접 배우고 행하니까 실제로 괴로움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는 다른 사람도 그걸 배우고 경험할 수 있도록 법을 전해야 합니다.
이걸 하려면 많은 사람들이 와서 봉사를 해야 합니다. 담마를 공부하는 곳에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을 고용해서는 안 되고, 모두 다 자원봉사자와 수행자가 운영을 해야 합니다.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환경 실천 운동도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검소하게 살아야 합니다. 검소하게 살아서 남는 건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써야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 운동도 해야 합니다. 여자라고 해서 차별을 받거나, 카스트가 낮다고 해서 차별을 받거나, 장애인이라고 해서 차별을 받는 등 모든 종류의 차별을 없애고, 누구나 다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계속 확산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런 활동을 하는 데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담마센터를 지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처님은 나무 밑에서 모든 걸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이런 시설 없이 활동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2,500년 전과 지금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수행자의 삶이 지나치게 일상생활과 동떨어지면 사람들이 동참하는 데 거부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호텔처럼 화려하게 짓지는 않더라도 집에서 하는 생활 정도는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사람들의 불편도 적어지고 활동에 많이 동참하게끔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투파(stupa, 탑)를 지으려는 건 제가 30년 전에 왔을 때 여러분들 사이에 상카시아 스투파를 둘러싸고 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싸우는 건 부처님의 법이 아니기 때문에 옛날에 만든 탑은 그대로 두고 우리가 수행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탑은 따로 만들어 주려고 해요.
담마센터는 여기 있는 다른 절처럼 외국인을 위한 절을 지으려는 게 아닙니다. 이곳에 사는 불자들이 와서 담마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자는 취지입니다.”
석가족들은 스님의 답변을 듣고 너무나 기뻐하며 박수를 쳤습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