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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대송(大宋, 960년~1127년)
北宋. 960년 오대십국시대 후주(後周)의 무신 조광윤이 후주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한 중국의 한족 왕조. 수도는 개봉(카이펑)이었다. 조광윤이 송주에서 절도사로 부임했기 때문에 나라이름을 송, 연호를 건륭으로 정했다. 보통 북송은 960~1127년까지 존속한 167년의 역사를 말하나, 이후 남송도 1127~1279년까지 152년을 더 존속했으므로 송이라 하면 보통 960~1279년까지 총 319년간 존속했다고들 여긴다.
2. 역사
송나라는 육조시대 유송(공교롭게도 이름이 똑같이 宋이다) 이래로 계속되던 전 황제에게 선양을 받고 그 일족을 멸족하던 관행을 중지하고, 후주의 황족인 시씨 일족을 보전하고 우대하면서 상당히 인도적으로 건국되었다. 실제 송태조 조광윤의 유언에 따라 송나라 존속 기간 동안 시씨 가문은 계속 유지되었으며 남송 멸망시 다수의 시씨가 송나라와 마지막을 함께 하였다. 이때 시씨들을 쉽게 죽이지 않겠다는 증거로 내려준 것이 바로 단서철권이다. 애초에 후주 자체가 단명 왕조이기도 했지만, 후한의 유지원 - 후주 태조 곽위 - 후주 세종 시영처럼 양자제로 대를 이어왔던 상황이었다. 곽위에 비해서도 매우 온건한 계승을 한 셈이다.
송태조는 스스로 장수 시절부터 거란족을 물리치고 후주의 북조 전역을 완수하는 제1공신이었으나, 광주의 남한과 남부 최대의 국가였던 남당을 멸망시키는데 그치고 자기 대에 통일을 완수하진 못했다. 2대 황제는 조광윤의 동생인 송태종 조광의.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이번에도 송 태조 조광윤의 의지로 조광의가 선양 받았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조광의가 방에 들어간 다음 갑자기 조광윤이 급사하고 다음 황제가 되는 식의 기록으로 볼 때,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이 자체가 조광의를 디스하는 이들의 주장이란 말도 있다. 어쨌든 송태종은 오월과 북한을 멸망시키고 통일을 완수한다.
하지만 이후부턴 약한 군사력이 발목을 잡게 되는데, 태조 조광윤과 태종 조광의 시절엔 이들이 무인 군벌 출신이기도 해서 나쁘지 않은 군사력을 선보였으나, 태종의 아들 송진종은 심성이 여린 군주로 거란(요나라)의 침략에 우물쭈물하다 굴욕적인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맺게 된다. 이 조약은 거란이 송을 형으로 모시는 대신에 송이 요에게 비단 20만필과 은 10만냥 등을 바치는 내용으로, 한마디로 돈 뜯긴 대신 자존심은 그나마 지킨 요상한 조약이었다. 심지어 송은 요를 물리쳤었다.
이후엔 요와 금에게 눌려서 찍소리도 못하던 서하에게조차 여러 전투에서 참패한다. 서하 건국 초기의 혼란한 시절에 송나라는 자기들이 황제국임을 내세워 이제 막 건국한 서하에 자주 찝쩍댔으나 오히려 빡친 서하의 역공을 받고 호수천이라는 곳에서 크게 패한다. 덕분에 서하에게 공물을 바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사실 지휘관들이 대부분 군대를 전혀 모르는 문관 출신인데다 작전에서 장군들의 말을 안듣고 제멋대로 하니 당연히 발릴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송 초기의 경제력은 후술되어있듯 가히 역대급이라 서하와 금에 바치는 세폐가 큰 부담은 아니었지만, 이후 송의 재정이 나빠지자 문제가 된다.
그러다 1127년에는 정강의 변으로 송휘종과 송흠종이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고, 남은 세력은 항주로 천도하게 되는데 이후의 시기를 남송, 그 전은 북송이라 일컫는다. 이 사건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송의 외교로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있었던게, 송은 요를 제압하고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금과 결탁했는데, 이후 승리 좀 했다고 기분에 취해서 금나라까지 뒤통수 치려다 되레 털린 것이다.
관료제의 발달과 중앙집권화 성공, 하지만 허약한 군사력
조광윤은 당나라 멸망 후 거의 60년에 가까운 전란을 수습하고, 이 혼란이 나라 각지에 군벌(절도사)들이 할거하여 생긴 것이라는 판단 아래 모든 절도사를 해체하고 전군을 황제의 아래에 두며 금군을 설치하는 등 중앙집권제를 완성하였고, 과거제로 관료를 발탁해 그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강력한 군주제를 완성한다. 원래 과거 제도가 시행된 시기는 수나라 때지만, 진정한 관료 발탁의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한 때는 송나라부터라고 할 수 있다.
청나라의 학자 조익(趙翼)이 송나라의 관리에 대해 평하길 송나라가 사대부를 대우하기를 매우 두텁게 하였고 재물의 하사가 실로 풍족했기에, 관직에 오른 자들은 일신의 걱정에 매달릴 필요가 없이 각자 직무에만 몰두하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니 어진 신하들이 대로 나왔고 관리들의 품행과 치적이 뛰어났으나, 재물을 베푸는 것이 너무 지나쳤기에 나라의 곳간을 흔들리게 만들었으므로 송나라의 제도는 법으로 삼을 것이 못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뛰어난 관료제와 중앙집권화 성공, 풍성한 경제력, 넓은 국토, 많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송나라의 군사력은 이상하리만큼 너무나 허약했다. 그렇다고 송이 국방력에 마냥 소홀하기만 했던 것도 아니라, 송나라 후기의 병력수는 무려 126만명에 달하기도 했다. 다만 이 병력은 송 인종 시기에 서류상의 병력이었고 실제 병력은 이보다 더 적기는 했다. 실제 전투에서 송군이 이긴 횟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특히 북방 민족과의 전투는 상당수가 개박살이 났다. 북방 유목 민족들이 너무 강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실제 요나라는 발해도 멸망시켰다. 송만 털린게 아니었다. 하지만 1억 인구의 송나라와 말기 발해의 압도적인 체급차이를 고려하면...
이러한 문제가 생긴 원인 중 하나는 송 조정이 당나라 이래로 무인(절도사)들의 힘이 강해져서 통제를 잃어버리고 심지어 반란까지 일으켜 왕조를 갈아치우는 사태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무관 대신 전투 경험이 없고 군대를 잘모르는 문관을 사령관으로 임명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한 몫 했다. 지휘관과 병사들이 서로를 잘 모르는데다 의견도 일치되지 않아 군대의 단합이 도무지 안되었던 것. 한 예가 바로 동관이다. 반면 한·당은 이세적, 이정 같이 사령관을 무관으로 임명하거나 군대를 잘 아는 문관을 임명하였기에 흉노, 돌궐과의 전쟁에서 충분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
반대로 무인들의 지위는 격하되었는데,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몇몇이 있다.
• 북송의 명장이었던 적청의 옛 부하인 초용이라는 자가 부하들의 고발로 한기에게 처형당할 위기에 놓이자 적청은 한기를 찾아 용서를 빌려고 했는데, 정작 한기는 만나주지도 않았다. 하여 적청은 한기의 처소 밖에서 '초용은 전공을 많이 세운 호남아입니다'라고 빌었지만, 한기는 '과거시험 진사급제도 못한 놈이 무슨 자격으로 호남아 소리를 듣는가'하며 쪽을 준 뒤, 초용을 처형했다. 이렇게 대놓고 무시하는데도 적청은 꼼짝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총관(당시 적청의 직위)께서는 너무 오래 계셨습니다'라고 알려줘서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한기가 자신까지 처형할가봐 두려워서였다.
• 진종 대에 이광보라는 자가 진사에 급제하였는데 검술에 능하다는 이유로 황제에게 진시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백성들이 검술을 좋아하게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대충 이정도다.
송군이 오합지졸이었음을 증명해주는 극단적인 사례를 하나 들자면, 1126년 음력 2월 송 지방관 중 한 명이 무슨 배짱인지 공을 세우겠답시고 애먼 지나가던 금 사신을 공격했는데, 이때 송의 보병이 무려 2천 명이나 동원되었다. 그렇게 송나라 장군 이간과 보병 2천 명은 금나라 사신 일행들을 공격했지만 황당하게도 이들은 기병,궁기병이긴 했지만 금 호위무사 17명에게 가볍게 발렸고, 금의 사신은 그대로 제 갈 길 갔다. 심지어 이때 금나라 호위 무사 17명은 중앙에 7명, 양익에 5명씩 배치하는 진까지 짰다. 송 보병들도 제대로 훈련이 되었으면 싸울 수 있었을텐데, 훈련도 제대로 안되어있을 뿐더러 목숨 아까우니 서로 앞에 나가려 하지 않다가 오히려 겁을 먹고 전부 다 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해당 기록은 금나라도 아니고 송나라 사람 서몽신이 쓴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의 권36, 정강(靖康) 원년 2월에 나오는 기록으로 승리자가 멋대로 부풀린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다만 군사비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상당히 높았는데 정1품 재상의 식비 보조금은 매월 300관인데 장군인 정2품 절도사의 식비 보조금은 400관이었다. 장군들의 녹봉도 등급에 따라 매월 3천 관 내지 1만 관을 받았다. 군인들의 정치, 사회적인 지위가 낮은 대신에 많은 봉급이라는 반대 급부를 주었던 것이다. 송태조가 휘하 번진 절도사들에게 병권을 회수하는 대신에 많은 재산을 줘서 고향에서 행복하게 살게 한 것과 비슷한 이치.
하지만 북송시절에는 이미 "좋은 철은 못으로 쓰지 않고, 훌륭한 인재는 군인으로 만들지 않는다"라는 말까지 있었고, 이 때문에 질 나쁜 범죄자들이 주로 병사가 되었기에 규율이 잘 서지 않았다. 그 외 송의 군사력이 약했던 원인 몇가지와 재평가 할 부분을 거론하자면 다음과 같다.
보병 위주의 송군
송과 비슷하게 친문관 정책을 펼쳤던 고려의 경우에는 기병이 약하진 않았으나, 상대 기병과의 야전을 최대한 피하고 산성에서 버티는 전법을 썼다. 사실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던 것이 송은 목초지를 당 말기와 오대 십국 시대 때 유목 민족들한테 빼앗기다보니 목초지의 부족이 심각해져 기병을 양성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러니 보병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기병 위주인 여진족이나 거란족, 몽골 같은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훨씬 불리한 요인이 되었다.
다만 보병이 기병에 비해 야전에서 흔히 불리하다고 하지만 항상 보병이 불리한 건 아닌데, 예를 들면 평지에서의 대규모 야전은 보병대가 장창 등으로 진형을 구성하고 버티기 시작하면 기병대가 역으로 화력에 눌릴 가능성이 높다. 또한 제대로 자리잡은 궁병이나 총병이 사격하면 충분히 기병을 상대할 수 있다. 나당전쟁 당시 기병이 주축이던 당나라군을 상대하던 신라군의 주력 병력은 장창병이었으며 나당 전쟁에 승리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들을 이용한 전술이다.
하지만 송나라처럼 지나치게 보병 위주로 전력을 짜면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기동력 때문이다. 보병은 기병에 비해 기동성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기동성이 우수한 기병이 불리한 장소에서의 회전에 응하지 않고 유리한 장소에서 싸우면 그만이라 보병 쪽이 수동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기병 입장에선 보병이 대응을 잘해서 만만치 않다면 진형을 우회해서 보병대의 거점을 타격하는 것이 가능하다. 보병이 대응을 위해 이동하여 도착할 무렵 기병대는 이미 상황을 끝내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렇게 거점이 당하면 보병대는 버틸 수가 없다.
특히 전략적으로 로마처럼 바다를 끼고 있거나 이탈리아와 같이 본토의 입구 경계가 생각보다 좁거나 하는 등의 지리적인 배경이 없으면 기병에 비해 보병은 매우 불리하다. 보병을 중시하고 잘 육성하던 로마 역시 기병을 망치와 모루 같은 전술, 전략에서 핵심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보병보다 높은 전력으로 두었던 것이 사실인만큼, 보병도 기병을 막을 수 있다 정도로 생각을 해야 한다. 대전차 보병/창병이 전차/기병을 상대로 대승하거나 선전하는 사례가 있다고 항상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짓이며 동서고금 할거없이 보통은 선제공격권의 차이 때문에 기병이 선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다 송나라는 일단 영토가 크고 그리 쓸만한 자연적인 장애물들도 없다 보니 많이 불리했다. 그리고 대륙적 민족성(?)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벌판에 성 여러 개 짓는 비용 감당이 어려웠는지, 성에 짱 박히는 것을 선호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멀쩡히 잘 싸우던 장군을 불러다 숙청하기도 했다. 주전론자였던 악비를 처형한 게 바로 그 예다.
이렇게 말이 부족한 문제점을 막기 위해 왕안석은 보마법을 시행했다. 호구마다 말을 기르게 하여 농사 짓는데 이용하고 전쟁시엔 징발한 말을 기병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들어보면 그럴 듯 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목초지가 심각하게 부족해서 말을 기를 여건이 안되는데다 농사 짓는 말과 기병의 말은 요구되는 스펙이 다르다. 농사용 말은 소처럼 좀 느려도 덩치크고 뼈 튼튼하고 근력과 지구력만 좋으면 그만이지만, 기병용 말은 좀 작아도 빠르고 민첩해야 한다. 따라서 평생 농사 짓던 말로 전쟁에 나서면 나가는 족족 발리기 십상이다. 전쟁나면 농사용 트랙터를 징발해 탱크로 쓰자 수준이다. 평야가 넓다 하지만 그만큼 사람이랑 다른 가축도 많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 그래서 요, 금, 원의 기병 앞에서는 족족 참패하기 십상이었다.
2.1.2. 비효율적인 용병술
총 병력 중 절반 가량인 60만명을 수도 방위 겸 해서 수도인 카이펑 근처에 밀집시켜놨었다. 당나라 시절 변방의 군대가 지나치게 막강해져서 안록산의 난이라는 사태가 터졌기에 그걸 방지하려고 한 조치인데 이걸로 인해 변방의 수비력이 약해지고 만다. 변방이 깨지면 어쩔 수 없이 중앙군을 보내야 했는데, 자원과 시간 낭비도 있었을 뿐더러 중앙군은 변방의 지리와 기후를 자세히 알기 힘들었다. 지방군의 협조가 이루어진다면 어느 정도 개선이 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변방이 근본적으로 오합지졸 투성이였다.
조선이 쓴 진관 체제와 제승방략과도 어느 정도 겹치는 문제이기도 하다. 시간낭비, 지휘관이 현지 사정을 잘 모름 등.
또한 군사 지휘권을 여타 장수들이 아닌 황제가 직접 가지게 하였다. 당연히 황제는 대개 군사 전문가가 아니다. 이는 전 통일 왕조인 당(唐)의 실책에서 배운 것이였으나, 진짜 위협인 이민족 방어에 허술한 약점을 노출하였다. 거기다 국경 지대에 배치하는 군사는 서류상으로는 수만 대군이었으나 실제 배치 병력은... 게다가 앞서 말했듯 장수들의 반란을 견제하기 위해 장수 직속 부하들을 대폭 줄여 군사 훈련과 상하 교류를 적게 만들어 버렸고, 이민족의 침략 당시에는 멀리서 파병한 생판 처음 보는 군사를 억지로 훈련시켜 싸워야 했으니... 상황이 이러면 전투에서 이기는 건 기적이다.
이런 사태는 조선의 임진왜란 때 재현되기도 한다. 그나마 조선에서는 군사 지휘권이 그래도 현지의 장군들에게 있긴 했다. 이거라도 없었다면 이순신이 날아다니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송의 군대는 병사들의 연령대도 높았다. 당시 군대가 철밥통이다보니 병사들이 군대에 오래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군대에 들어오는 자들은 위에서 언급된 대로 소위 '질 나쁜 놈들'이었고, 그들은 결국 군대 밖 사회 양지에 발 붙일 곳이 없다는 말이니 오래 남아있으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송 정부 입장에서는 이 '질 나쁜 놈들'이라도 있어야 했기에 군대를 철밥통으로 만들 수 밖에. 자연스럽게 평균 연령은 높아지고 병사들이 죽은 다음에야 충원이 가능했기 때문에 병사들의 약체화를 초래했다.
2.1.3. 재평가 할 부분
다만, 그렇다고 송이 동네북마냥 매번 털리는 군대는 아니었다. 초기에도 요를 상당히 몰아 붙였고, 서하랑 금나라와 몽골 제국의 침략을 막고 심지어는 북방 중원을 일부 회복하는 경향도 있었다. 물론 그 이전대인 전한, 당이나 이후의 명처럼 밖의 이민족들에게 진출하여 간섭하는 수준이 되지 못하고 셔틀화 된건 사실이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질 낮은 군대와는 달랐다. 남송시대 군사력에 대한 나름의 검토. 그리고 화약 무기가 본격적으로 쓰인 것도 이때였다.
또한 북, 남송 합쳐 직계 왕조로 300여년을 유지한 것도 결코 쉽게 볼 수만은 없는 부분이다. 중국의 통일 왕조들 중에서 300년 이상을 유지한 건 한과 송 뿐이다. 명 또한 남명을 포함하면 306년가량 존속했지만 사실 남명 정권은 합치기에는 뭣한게 여러 지방에서 우후죽순으로 등장한 명나라 후신을 자처한 세력들을 하나로 묶어서 본 개념으로, 단일 왕조가 아니었다. 때문에 망한 후 남쪽으로 이동한 다른 정권인 동진, 남송과 같은 선에서 비교하기가 어렵다. 심지어 그 때문에 혼란스런 동진마저 사직을 그래도 100년 넘게 보존했는데 남명은 50년도 못갔다. 재위한 황제들의 기간을 다 합쳐도 50년이 안 된다.
실제 남송은 금나라에게 바로 망하지 않고 금나라를 포함한 수십개국을 멸망시킨 전천후급 전투 민족이었던 몽골에게 망했다. 그것도 한방에 폭삭 무너진게 아니라 장장 40여년에 걸친 항전 끝에 망했다.
전한, 당나라, 명나라처럼 경제력 + 군사력으로 주변국에 패권을 행사하는 강대국은 아니었어도, 송은 적어도 경제력으로 자기 나라 국방을 300여년간 땜빵할 정도는 되었다는 것. 즉, 송대가 문치주의였던건 맞지만 그것만 가지고 부정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피상적인 견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송이 가지고 있던 지리적인 약점도 있었다. 바로 연운 16주의 상실이었다. 거란이 이 연운 16주의 생산력을 기반으로 송과 전면 대결을 할 수 있는 국가 세력으로 성장한 부분도 무시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연운 16주는 송 이전 한족 왕조들의 북방 방어선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런데 이 요충지를 몽땅 거란이 차지해버린 것. 연운 16주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연운 16주 이남에는 딱히 지리적으로 진격에 방해가 되는 지형이 없으며 화북과 강남의 평야 지대로 직행할 수 있는 루트이다. 즉 북송은 처음부터 방어상의 불리함을 안고 싸워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반면 남송 때는 국토가 쪼그라들고 장강, 회수, 사천의 산맥 등 험준한 지형을 국경으로 삼게 되면서 오히려 방어에 유리해졌다.
사실 졸전 중 송 사례가 많이 알려져있다보니 편향적 시선을 많이 받아 그렇지, 무경총요 같은 걸 보면 이론적으로는 군사학 진보도 상당히 이룬 시대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의 실사용자인 전문적인 군인들이 문제라 상당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좌절을 많이 겪었다. 이점은 지나친 문치주의의 폐해라고 볼 수 있다.
또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 볼 수도 있다. 송나라를 '약체' 취급하는 관점 자체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질 여지가 있는 것이다. 상기된 바와 같이 중국 역대 통일왕조의 존속기간을 비교해보면 거의 320년에 달하는 송나라의 존속기간은 한나라의 뒤를 이은 2위에 해당한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식의 사고방식으로 접근해보면 약하기는 커녕 오히려 명백히 강자그룹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이 존속기간동안 송나라가 주변국(특히 중국의 영향권인 동아시아)에서 군사적으로 강맹한 위세를 거의 보여주지 못한 것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고, 이런 면에서 송나라를 (중국 통일왕조 치고는) '군사적 약체'였다고 취급하는 관점이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송나라의 '유지력'은 충분히 강력했고, 국가의 유지력에 있어서 자국을 지킬 수 있는 군사력은 필수적 요소다. 즉 송나라의 군사력은 대외적 영향력을 과시하기에는 부족했지만 자국에 대한 유지력을 지탱할 수준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송의 군사력을 ①'국내의 안정성'과 ②'정주제국의 유목민 대책' 이라는 두 측면에서 다시 살펴볼 수도 있다. 먼저 국내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송나라의 문치주의는 <군벌의 발호를 막고 중앙집권을 확립하기 위해 군사력의 강화를 포기>한 정책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문치주의로 인해 송나라의 군사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문치주의가 문제다' 라는 분석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송나라는 <군사력의 약화를 댓가로 중앙집권의 확립과 군벌의 탄생 방지, 국내의 번영이라는 결과를 얻어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다른 장수 통일왕조인 한, 명, 당나라의 사례와 비교하면 이 점은 명백하다. 한나라와 당나라는 결국 군웅(군벌), 절도사의 발호로 멸망했고, 명나라의 멸망에도 오삼계와 같은 군벌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송나라는 강력한 외적의 공격으로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어쨌건 지방 군사력의 반란이나 배신 문제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문치주의의 결과를 군사력의 약화라는 대가를 확실하게 치른 대신, 군대에 대한 통제력과 정국 안정성이라는 성과도 확실하게 얻은 것.
이는 결국 전근대 국가에서 '국내 안정성'과 '군사력 강화'라는 두 목표가 사실상 서로 상충되는 것이었음에서 기인한다. 당시의 기술적, 제도적 한계에서 군대를 강화시키려면 반독립적인 군사세력의 탄생을 허용해야 하고, 이 반독립적 군사력은 중앙정부를 위협하여 정국의 안정성을 저해한다. 하지만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군사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수록 군대의 유지와 운영에서 비효율적인 면모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봉건제 문서에서도 다뤄진 내용이지만 기술적, 제도적 기반이 갖춰진 현대를 기준으로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면서도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유지하면 된다'고 접근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이 선택지에서 송나라의 선택은 '안정성'에 아주 높은 우선순위를 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평가는 과연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선택, 예컨데 안정성을 조금 포기하더라도 군사력을 좀 더 강화시키는 등의 선택이 더 좋은 선택이었을지에 대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 경우 물론 역사적으로 '가지 않은 길'의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 이 질문의 정답이 무엇인지도 아무도 답할 수 없겠지만... 송나라의 번영과 존속기간이라는 결과를 기준으로 보면 나쁜 선택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어쨌건 송나라는 이 선택의 결과로써 (보다 군사력에 우선순위를 둔) 다른 왕조들에 비해 오랜 기간 역사의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은 것이다. 물론 무조건 오래 살아남았으니 더 강하다고 보는 것도 균형을 잃은 관점이겠지만 연운 16주를 잃은 상태로 왕조 초기부터 이미 결집된 상태의 유목제국을 상대해야 했다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왕조보다 오래 견뎌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두번째, 정주 제국의 유목민 대책이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다. 흔히 <문약한 송나라는 북방 유목민들의 침탈에 시달리며 돈과 외교로 평화를 사려고 했지만 결국 견디지 못하고 멸망했다>는 이미지가 소비되지만, 이 역시 공정하게 따지면 역대 중국 통일왕조 중에서 북방 유목민의 침탈에 안 시달린 왕조는 없다. 당장 역대 중국 왕조 중 비교적 장수한 왕조들의 사례를 보더라도 명나라는 북방 유목민(여진족)에 의해 멸망했고, 한나라의 경우 한나라 자체의 멸망은 유목민과 무관했지만 한나라의 체제를 계승한 서진이 영가의 난으로 무너지고 중원을 상실함으로써 한나라가 400년에 걸쳐 구축한 체제 자체를 무너트린 것은 유목민이었던 것이다. 정주 제국에게 있어 유목민은 언제나 두려운 적이었으니 유목민에게 시달렸다는 것 자체가 곧 그 나라가 약체였다는 근거는 아닌 셈.
그리고 군사력으로 유목민을 막아낼 힘이 없어 돈과 외교로 평화를 사려 했고 이 과정에서 박쥐같은 행태로 신뢰를 잃고 적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원래 이이제이 정책은 모든 정주제국의 대 유목민 대책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송나라가 특별히 한심해서 유목제국을 정면으로 상대하지 못하고 다른 유목제국의 손을 빌린 것이 아니라, 원래 정주제국의 입장에서는 강력한 유목세력과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것 보다는 다른 유목민을 끌어들여 상대하게 하는 쪽이 더 효율적인 선택지였던 것. 한 세력과 손을 잡고 다른 세력을 친 후 손 잡았던 세력을 배신하여 신뢰를 상실했다는 것 역시, 원래 이이제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상대적으로 약소한 여진족과 손을 잡고 강성한 거란족을 친 후, 그 결과로 거란족이 무너지는 대신 여진족이 성장하면 동맹을 끊고 이번엔 몽고족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여진족을 견재하는 패턴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 이이제이의 기본이다.
물론 이 전략의 실행에서 송나라의 연약한 군사력이 심각한 장애요소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원래 이이제이란 시행하는 측이 명백한 우위에 있을 때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전략인데 송나라는 군사력 부족으로 인해 전략적 주도권과 정국 통제력을 상실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휘둘려버린 결과 심각한 타격을 입는 상황을 자주 겪었다. 그러나 그 원인이 전적으로 송나라의 문치주의에 있다고 보기는 또 애매한 것이, 일단 송나라가 처해있던 상황 상태가 심각하게 불리했다. 본래 대 유목민 방어의 핵심 거점이어야 할 연운 16주는 석경당에 의해 요나라로 넘어가 오히려 유목민의 남진 교두보이자 전략적 거점이 되어버렸고 건국 초기부터 (이이제이가 쉽게 통하는) 부족 단위로 분열된 상태가 아니라 국가 수준으로 결집한 유목민 세력을 상대해야 했던 것. 즉, 문치주의를 포기하고 군사력 확충에 중점을 두었다 하더라도 과연 유목 세력을 상대로 우위를 확실하게 차지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 만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역시 결과적으로 본다면 '다른 경우보다 불리한 상황' 에서 '결과적으로 더 오래 버티는데 성공' 한 송나라의 선택이 반드시 잘못된 선택이었다, 더 좋은 다른 해결책이 있었다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리하자면, 일단 문치주의로 인하여 송나라의 군사적이 잠재적 국력에 비해 미약했고, 이 때문에 대외관계에서 지속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며 군사적 방위력보다는 외교적, 경제적 수단에 의존하여 자국의 안전을 확보해야 했다는 것 자체는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그러나 송이 선택한 외교적 수단은 나름의 합리성과 효과를 가지고 있었고 어떤 면에서는 역대 다른 통일왕조에 비해 더 불리한 상황에서도 장기간 국가를 존속시키기까지 했던 것이다. '항상 얻어터지고 털리기만 했던 약체 송나라'라는 이미지는 일면 정확하지만 다른 일면에서는 과장되거나 편협한 관점으로써 지나치게 군사력 지상주의에 기반하고 있거나, 평가의 기본인 '비교'를 무시하고 선입견에 부합하는 부분만을 취사선택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2.2. 실패한 외교 정책
허약한 국방력에 가려진 송나라의 진짜 문제. 허약한 국방력을 메꾸기 위해 송나라는 문인들이 외교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는데, 의도는 좋았지만 방법이 한참 잘못되어서 외교책이랍시고 내놓을 때마다 나라를 두동강 냈다. 이게 송이 화를 자초한 큰 원인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 실제적인 사례는 후술되어있는 고려와의 관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는 중원 북쪽을 찝적대는 요나라를 해결하기 위해 금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 사실을 안 고려에서는 사신을 보내 여진은 믿을만한 족속이 아니라고 설득했지만 송은 듣지 않았다. 송은 순망치한이라고 요가 쿠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제일 큰 문제는 송과 금 연합군에 의해 요가 무너졌을때 금에게 바치기로 한 공물을 그냥 씹어버렸던 것이다. 덕분에 송은 빡친 금에게 수도가 함락되고 황제는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며 나라 반쪽을 잃었다. 다행히 남쪽으로 이동 후 회수까지 영토를 확보하긴 했다.
그런데, 그 전략을 남송때 썼다가 이번엔 아예 멸망까지 당했다. 다만 이 경우는 참작의 여지가 있는 것이, 남송 문서에서도 보듯 금나라가 먼저 남송을 공략해 몽골에 대항하려했다. 즉, 남송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초기 금나라에 세폐를 끊는 정도에서 대응하던 남송은 결국 금의 멸망이 분명해지자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금나라를 공격하기로 마음 먹었고, 그 전략으로 벌충한 시간을 통해 양양 공방을 우주방어로 30년간 지연하며 막을 수 있었다.
3. 왕안석의 신법(新法)
송(북송)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법이다. 송인종 이후 송은 재정상 큰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비대해진 관료제와 군대, 지주들의 토지 겸병, 대상인의 독점 행위, 세폐 문제 등이 재정 적자를 초래하여 이에 대한 해결이 필요했다. 이런 때 왕안석은 송신종의 신임을 얻어 신법을 시행했다. 신법은 부국책과 강병책의 두 종류로 나뉘는데 부국책은 청묘법과 시역법, 모역법, 균수법이 시행되었고 강병책으로는 보갑법과 보마법이 시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청묘법은 20%라는 싼 이자로 농민들에게 자금을 대출해주어 자연 재해로 인한 농민들을 구제함과 동시에 대지주들의 토지 겸병을 막음으로서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려는 의도였다. 송대에는 호구를 따질 때 주호와 객호로 따졌다. 그 중 주호가 주 납세층이었는데 주호 또한 5개 등급으로 나뉘었다(1, 2등급이 대지주, 3, 4등급이 대부분의 보통 농민, 5등급이 영세 농민). 그러나 대지주들은 토지 장부를 위조해 은닉하기 일수여서 세금을 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5등급의 영세 농민들은 세금낼 능력이 없다보니 자연스레 3, 4등급의 농민들이 1, 2등급의 대지주의 세금까지 떠맡게 되었고, 이들마저도 몰락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폐단을 막고 대지주의 성장을 막기 위해 실행된 청묘법은 안정된 세수 확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시역법을 실시해 중소 상인들을 보호하였다.
무엇보다도 왕안석이 가장 심려를 기울인 신법은 모역법이었다. 당헌종 때 양세법이 시행되어 원칙상 양세를 제외한 잡세는 폐지되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송대에도 여전히 양세법 하에 여러 잡세들이 많았다. 그 중 백성들을 괴롭힌게 역이었다. 일반 농민 뿐 아니라 지역의 유지들도 역을 져야 했다. 돈많은 지주야 거주지를 도시로 옮겨 역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일반 농민들은 그렇지 못해 자살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따라서 왕안석은 광범위한 여론조사와 시범운영을 통해 모역법을 시행하게 된다. 모역법은 납세층을 재산에 따라 5등급으로 나눈 후 각 등급에 맞게 세금을 거두고, 국가는 거두어진 세금으로 역을 수행할 사람을 고용하는 제도였다. 송철종 즉위 후 사마광 등 구법당이 신법을 폐지할 때 모역법을 폐지했다는 소식을 듣자 왕안석이 탄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무튼 왕안석의 신법은 전체적으로는 적절한 개혁이었지만 문제는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 관리들이 실적만 노리고 부실 운영하는 등 많은 부작용을 낳아 결국 송철종 때 구법당이 세력을 잡자 폐지된다. 그 후 다시 신법당이 등장하지만 이때가 되면 개혁 의지는 사라지고 오로지 정쟁을 위해 신법을 이용하게 된다. 결국 구법당과 신법당의 당쟁 심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백성의 실생활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안타까운 결과로 그치고 말게 된 셈이었다.
군사, 외교적으로는 안습한 행보를 거듭해서 보였으나,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 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역대급의 융성과 호황을 누렸다. 과거 중국 대륙은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져 있었으나, 송나라 대에 서역과의 무역 등이 활발해지면서 그 폐허를 딛고 완전히 부활했다. 수도 개봉은 당시에만 인구가 무려 130만여명, 남송 수도 임안은 100만여명이었으며, 불야성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24시간 내내 각종 상점은 불이 꺼지지 않고 시장에는 사람들이 빼곡했다고 한다. 각종 문화, 예술도 꽃을 피우기 시작하여 중국의 산수화나 성리학도 이 때 기틀이 서기 시작했다.
심지어 송은 요, 금, 서하에 막대한 조공을 바치고 고려에 그렇게 퍼주고도 이 경지에 이를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수준. 아니, 사실 그 '막대한 조공' 자체가 당시 송 입장에서는 별 것 아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 막대한 군사비 지출보다 조공으로 몇 푼 주고 백성들을 덜 고생시키는게 당시 풍요롭던 송 입장에선 더 싸게 먹히는 측면도 있었다. 문제는 그동안 허약한 군사력 문제를 보완했어야 되는데 이후 송의 재정이 악화되면서 이것을 키우는 것이 부담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력의 근원은 송나라가 당시만 해도 촌동네에 불과했던 강남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과 연관이 있다. 삼국지연의에선 이런 이미지를 반영하여 오나라가 '비옥한 강남의 토지'를 끼고 어쩌구 하는데, 삼국지연의가 쓰여진 시기가 명나라 초기였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그렇게 묘사한 것이지 실제론 고증 오류다. 후한 말 남양에서 강성한 세력을 지닌 군벌이었던 원술이 비어있는거나 다름없는 강남 놔두고 중원에서 피터지게 싸우다 망한 것도 그만큼 강남이 별로 매력적이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강남에 자리를 잡은 손책과 그 뒤를 이은 손권 역시 지방 군벌로 끝났거나 독자적으로 제위에 올랐지만, 당시 한(漢)의 천하에 군사적이거나 경제적, 정치적으로 심대한 영향은 주지도 못했다. 강남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어디까지나 육조시대 이후로, 그것도 강북을 능가한 것은 남송 이후의 이야기다.
송나라 때에 드디어 강남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던 이유는 쌀에서 찾을 수 있다. 송 이전에 쌀은 주식이 아닐 뿐더러 강북에서는 자라기 힘든 작물이었다. 그러나 가뭄에 강하며 성장이 빠른 ‘점성도(占城稻)’ 품종이 동남아에서 들어와 강남 전역에 쌀 농사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쌀 농사에서 중요한 물 때문에 수차가 개발되어 계단식 논 또한 생겼다. 게다가 이앙법의 도입으로 이모작이 가능해졌다. 이런 연유로 백성들의 경제적 부가 늘어나자 상업이 발전하였고 운송업도 같이 발달했다. 그에 따라 숙박 시설이나 여관 수리업 등 서비스업도 발전했다.
생산력의 급증과 함께 중국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1억 명을 넘는 시기도 이 때쯤 시작되어, 화폐의 발전을 불러왔다. 그렇게 나온 것이 천희통보이나 연간 막대한 양을 찍어내도 수요를 완전히 따라잡지 못하였다. 화폐 다음 거래 수단으로 어음이 지목되었다. 원거리에서 무거운 화폐 대신 어음동이를 가져가면 되니 매우 편리했다. 하지만 이 또한 문제가 있었다. 가짜 어음으로 사기를 치거나, 어음을 주니 실제 가치하고 다르거나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1024년 세계 최초의 지폐인 "교자"가 발행되었고 근대적 회계 방식인 복식부기를 시행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때 일본에서도 중국의 화폐를 잔뜩 배에 싣고 와 자기네 나라에서도 썼다고 한다. 나름 동아시아 글로벌 화폐였던 셈. 한의학에서 기존과 선을 긋는 사상적 전환이 일어난 것도 이 시기.
상업 발달의 산물로서 상인 동업 조합(행, 작)도 번성했다. 도자기 기술도 발전을 거듭했으며 차 문화가 발달해서 농민들은 차를 상업적인 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고 찻집 같은 곳도 생겨났다. 예식을 대신 준비해주는 (요즘으로 말하면) '출장 뷔페 서비스'(!)가 있었고 기계식 물시계가 등장했으며 시중에는 음식점 숫자가 너무 많아서 맛을 넘어서 공연이나 냉난방, 배달 서비스 같은 마케팅으로 경쟁하였다. 도시 내에는 수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간이 극장이 존재했고, 각 가정에서는 석탄을 가정연료로 썼다.
또한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 도자기가 본격적으로 수출품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시점도 이 시점으로, 도자기의 도시 경덕진이 본격적으로 융성하기 시작했다. 외국 무역과 수출입 관리, 출입품 검사와 징세는 당나라때 설치된 시박사에서 담당하였다. 송대에는 광주를 비롯해 항주, 명주(영파), 천주, 밀주(칭다오), 화정 등 여덞 곳의 시박사가 설치되었다. 고려와의 무역은 주로 명주 시박사에서 관리했다 한다.
당시 사람들의 성품이나 인심 역시 매우 후했다.
외지에서 새로 이사 와 옆집에 살게 되면 서로 도구들을 빌려주고, 뜨거운 탕과 마실 것을 갖다 주었으며, 물건을 사고 파는 일 등에 관한 정보를 알려줬다. … 어떤 집에 경사나 흉사가 생기면 사람들이 모두 몰려가 그 집을 가득 메웠다.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
그러나 송대 이후 중국의 경제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예컨대 화북 지방의 철강 생산량은 송대에는 3만 5천 톤이었지만 원대에는 8천톤으로 격감했다. 이는 철강이나 석탄이 고갈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서양 학자들 역시 송나라의 경제력을 높게 평가하는데, 앵거스 매디슨(Angus Maddison)은 1인당 GDP를 450달러로 추산해 당시 송나라가 세계 전체 GDP 비율 중 23%을 차지한다고 추산했고, 더 최근의 연구 결과에선 스티븐 브로드베리(Stephen Broadberry)가 1인당 GDP가 1200~1500달러 사이였다고 추산했다. 산업혁명 초인 1750년 영국의 1인당 GDP가 1710달러, 1800년엔 2080달러였다.
1인당 PPP 또한 송이 압도적으로 우월하다고 추정했다. 북송 시대 인구는 대략 8천만,# 유럽은 서유럽만이 아니라 전체 유럽 인구가 같은 시대 5천만 정도로 추정된다. 다만 Angus의 수치는 1990년대 초반의 자료이며, 2014년 기준(Angus의 최신 자료 포함) 학자들의 자료로 추산할시 1인당 PPP가 앞선 중국 시대 또한 많다.
'사회발전지수'라는 에너지/도시성/전쟁 수행 능력 기반의 지표로 동/서양을 구분한 이언 모리스는 저서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에서 제시한 그래프로 기원전 1만 4천년부터 서기 2000년까지의 비교선을 그려보였는데, 대운하가 뚫리고 남중국이 개발되면서 동서양의 격차가 가장 컸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이 시기가 청대까지도 이어지고 1700년대 중반에 가서야 끝난다고 봤다.
남송시대를 북송의 후계구도로 보지 않고 남북조시대의 재현으로 간주할 경우, 첫번째 남북조시대가 호한체제(胡漢體制)로 이어진 것과 달리 이 두번째 남북조시대는 오히려 강남인들의 선민의식으로 이어진 원인을 북송의 높은 경제력에서 찾기도 한다. 남쪽의 한족들 입장에서 사마진 정도의 나라가 파괴 당한 것은 극복 가능했지만 북송이 파괴 당한 일은 정신적으로 매우 큰 여파를 미쳤다는 것. 이는 먼 훗날 아이러니하게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다민족국가로서의 길을 공언한 뒤에야 어느 정도 해소된다.
5. 사회와 계급제도
기존 봉건적 세습과 인맥등으로 이루어지던 관료층들이 모든 계층이 응시 가능한 과거제로 완벽히 대체되었다.
과거제 자체는 후한 시기에 개념이 제시 되었고,수나라 시기에 처음 실행되어서 당나라 시기에 제한적 국소적으로 운영된 과거제 선발 관료제가 실행 되었지만, 절대 다수의 관료 기득권층은 귀족 계급에 세습 되었다.
흔히 당나라 시기에 우리가 상상하는 완벽한 선발관료제가 정착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655년 한해동안 꼴랑 44명만 합격했으며 ,이후 측천무후가 실권을 잡기 이전인 7년동안 연간 평균은 매년 58 명 정도 밖에 안 되었다. 이후 측천무후 이후부터 활성화되어서 매년 수백 수천명의 과거 합격자가 나왔으나 거의 대부분은 빈손으로 떠나야 됐다. 실제 관료로 임명되는것은 1~2%에 불과했다. 잘못 적은게 아니다. 측천무후 이후의 평균 과거제 관료 발탁은 년평균 23명에 불과했다.
당나라 시절에 과거 제도는 어디까지나 귀찮은 인재발탁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였지, 실제로 관직에 임명 시키는것은 과거시험와 완전히 별개로 황제 개인의 호오에 전적으로 달려 있었다.
이런 과거제와 송나라 시대의 선발 관료제는 사실상 완전히 별개의 것이고, 일반적으로 시험 합격자가 관직을 얻게 정착시킨것은 엄청난 혁명이자 급진적인 사회발달이였다. 이러한 혁명의 결과 수당 시기에 지속적으로 약화되어온 관롱집단 귀족층 계급을 사실상 와해 시켰으며 부르주아 신사층으로 대체되는 결과를 갖게 된다.
더군다나 아래로는 천민계급을 폐지해서 진정한 황제 밑의 평등을 이룩하게 된다. 이전 당나라 왕조에서 범죄자와 외국인을 제외한 자유민을 노예로 삼는것을 금지하긴 했으나, 자기 자신을 스스로 노예로 파는 행위와 외국인과 소수민족의 노예화를 허용하면서 사방에서 대놓고 북새통을 이루는 노예거래와 노비세습이 이뤄져 다른 노예제 합법 중세 국가들과 근본적 차이가 없었다.
반면에 송나라에서는 사회 구조 자체를 재편해, 노예 매매 자체를 불법화하고, 자유인이 자기 자신을 노예로 팔거나 스스로 노비로 전락한다는 노예무역의 눈가리고 아웅하는 실태를 법적으로 완전히 금지시켰다. 오직 범죄로 인한 노예화만이 인정되었으며, 그러한 케이스도 노예거래가 불법이니, 관아의 재판 기록으로 멀쩡한 사람을 범죄자라고 위조하는 행위가 상당히 힘들어졌고, 송나라 이전시기나 원나라 등 이후 시기에 보통 노예였던 종과 머슴들도 금전고용 거래 관계가 일반적 관행으로 정착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상당히 근대적이나, 송나라에서는 재상중심제도의 운영으로 황제도 법치주의의 구속을 받았다. 유명한 춘추전국시대 법가조차도 어디까지나 황제는 법을 초월하고, 오직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이념에 그쳤는데도 말이다.
어사 유불은 "천하의 일은 천하가 함께 해야 한다.군주가 개인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란 공화주의적 발언을 했다.
어사 방정실은 송 고종 면전 앞에서 "천하는 중국의 천하입니다. 조종의 천하입니다. 군신,백성,삼군의 천하입니다. 폐하의 천하가 아닙니다."
재상 두범은 "천하로써 천하를 삼고, 개인으로써 천하를 삼지 않는 것이 만세를 지나도 바뀌지 않을 수 있다"
성리학자 서의는 송효종에게 이런 상서를 올린다.
"만일 군주가 성인이면 신하는 멍청이다. 폐하는 누구와 공명을 함께 하시겠습니까?"
성리학자 정희도 면전에서 "천하를 잘 다스리고 못 다스리고는 재상에게 달려 있으니, 군주의 덕으로 성취를 경연에서 꾸짖으십시오"라고 말하는 등 일부 위험 분자의 사상이 아닌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이상적인 사회상이 모두의 천하이고 모두가 함께 다스린다는 "공천하" "공치"의 이념이 주류를 이뤘다.
물론 이러한 구조 자체를 명백하게 법으로 못박아 놓은것은 아니나, 실제로는 송인종이 개인적으로 관직에 임명하는 독단적 조서가 여러번 있었으나 재상이 직접 되돌려 보내고 하나도 실행 되지 않았던 등, 전체적으로 권력의 분화와 견제, 합의과정의 중대성등에 의해 돌아가던 시기였다.
중서성은 행정부고 재상은 행정부의 수장인 총리, 황제는 내각제의 대통령의 역할을 하던 매우 근대적인 정부를 구성했고, 이는 앞서의 계급간의 평등을 합치면 융커와 군부의 전횡이던 독일 제국은 물론이고, 계급제 사회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빅토리아 시기 대영제국보다 나은점이 많다.
한마디로 송나라는 근대 서양 국가에 비해 기술과 과학이 중근세수준에 불과했으나, 사회 구조는 오파츠 수준으로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
북송은 기존의 주현제보다 더욱 효율적인 행정단위를 설치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로(路)이다. 북송의 행정구역 체제는 로(路)-주(州)-현(縣) 체제였으며, 주를 부(府)로 승격시키거나 현을 군(軍)으로 승격시키기도 하였다.
7. 평가
송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평가를 가질 수 있는 나라다. 일단 경제적으론 상당히 융성했고, 이를 기반으로 각종 문화들이 무르익기 시작한 시대였다. 서민 문화도 발달해서 그래서 그런지 송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이 많다. 수호전, 금병매 등이 대표적이고 건축적으로도 이전 시대에 비해서 구조가 복잡한 누각 등이 많이 출현하고, 의장 면에서 풍부해졌다.
정치적으로도 중앙집권화가 이뤄지고 꽤 안정되어 유교적 이상에 상대적으로 가까웠던 시대였다는 것은 특별히 부정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냥 대충 봐도 정치적으로 뭔가 문제가 크게 꼬여서 사단이 난 경우는 별로 없었다. 일단 권력을 전횡하는 환관도 별로 없었고, 황제의 힘을 넘보는 황후도 없었다. 물론 아예 없는 건 아니라 송휘종 때 동관(童貫)이라는 환관이 방랍의 난의 시발점이 되기는 했다.
특히 잔혹한 혹형이 이후 시대보다도 오히려 훨씬 적었다는 것은 큰 특징이다. 송 이전인 위진남북조시대, 수나라·당나라, 오대십국시대의 막장 행각을 보고, 송나라의 뒤를 이은 원나라·명나라·청나라의 피비린내 나는 사태들을 생각해보자. 물론 정적 제거나 당쟁 같은 게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피비린내는 훨씬 덜 나던 시대였다. 송태조의 석각 유훈에도 '사대부와 상소하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리고 남송 문서에도 나오듯이, 국가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전조의 황족(후주의 시씨 가문), 사대부, 장수, 병사, 일반 백성들이 모두 끝까지 조정을 따라서 몽골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 애산 전투에서 최후를 맞이할 정도로 체제가 안정되고 그 단합력이 강력하였다.
그래도 송나라 이전의 나라들 중 비교할 법한 나라는 역시나 당나라인데, 문무에 고르게 편승된 과거 제도도 본시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가 확립했으며, 당나라 말기 지주전호제와 유사한 토지 제도의 영향도 송나라에 꽤 보인다. 뿐만 아니라 지공거 체제도 당나라와 송나라가 비슷하며 빈공과 역시 송나라가 그대로 계승했다. 대신에 당나라의 경우는 정복 전쟁을 활발하게 벌였다는 점과 송나라는 꽤 주춤했다는 점이 차이고, 반란의 빈도는 오히려 군사력이 강했던 당나라가 훨씬 심각했다는 점도 차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반란을 줄이려 시행한 여러 조치들이 송나라의 군사력 약화를 가져왔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
물론 허약한 송의 군사력은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그래도 북송에 비해 남송은 몽골을 상대로 멸망하긴 했지만 첫 침공을 받은 후 40년 동안 상당히 선전했다. 두 번째 침입 때는 몽골의 몽케 칸이 직접 나섰으나 도중에 병사했다. 몽골 주력 부대의 침공을 받고도 이처럼 오래 버틴 나라는 매우 드물었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송의 군사력이 부족한 부분도 물론 있겠지만 반대로 당시 북방 민족들의 전투력이 너무 강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송나라의 군사력을 마냥 저평가할 수 만은 없는게, 세계 최초로 화약무기를 본격적으로 쓴 군대가 송나라 군대라는 점은 분명 큰 의미가 있다. 다만 이때의 화약무기는 흔히 생각하는 대포 같은 건 아니었다.
중화권에선 중국 역사상 마지막 한족 통일 왕조였던 명(明)이 막장 황제들로 인해 말기에 실망스러운 행보를 꽤 보였기 때문인지, 한족 왕조 중 송을 은근히 더 쳐주는 분위기도 있으나 최근에는 명도 어느 정도 재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명이 암군들 때문에 과소평가 받는거지 국력 자체는 상당했던 나라고 후에 해금령을 내려서 그렇지 초창기에는 나름 국제사회에 관심이 있어서 동아프리카까지 사람을 보낼 정도였다.
지역별로 평이 좀 갈리긴 한데, 중국 본토의 경우 송의 경제력이나 문화력 등을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아직은 정강의 변이나 몽골 제국에게 치욕을 당한 것 때문인지 특히 한족주의자에겐 저평가 받는 부분도 있다. 오히려 대만 지역에서 문화 부흥 운동으로 송나라를 높게 쳐주는 편. 판관 포청천 관련한 작품들이 그 예로 이는 송나라의 치세를 가장 잘살린 매체로 알려져있다. 중국 본토 매체에선 보통 송의 영웅이 찌질한 황제에게 탄압받는 것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포청천의 경우는 성군과 충신이 둘 다 맞물려 신임을 두텁게 받는 것으로 나온다.
이 시기에는 법의학과 수학 등의 학문이 발달했고, 기계공학도 발달해서 소송(蘇頌)이 거대한 자동물시계를 만들었는데 톱니바퀴(물레)를 사용한 것이어서 자명종과 유사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졌고, 원대에 이르러 그러한 혁신들은 법의학만 남고 수학은 쇠퇴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송의 경제력은 많은 주목을 받는데, 때문에 일부에선 송대에 이미 산업 혁명의 기반이 있었다는 식의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이는 송의 발달된 과학력, 그리고 산업 혁명 시기 영국과 비슷한 석탄 사용량과 제철 능력 때문에 나온 말. 그러나 산업혁명이 단순히 석탄 사용과 제철 능력에서 비롯되었다는 단순화는 삼갈 필요가 있다. 애초에 흔히 주장하는 산업혁명 떡밥이라는게 송의 석탄 사용량을 주 근거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중국의 인구 수가 예나 지금이나 많아서 그런 것이다. 석탄을 취사, 난방용으로 이용하는 건 이슬람과 유럽에서도 옛날부터 있어왔다. 중국과 비견되도 지지않을 인구와 국가규모를 지닌 로마에서도 또한 근세 이후에서나 볼 이산화탄소량이 배출되기도 했다.
또한 중국의 수력 방적기는 유럽에서 산업혁명 과정에 쓰인 방적기와 큰 관련 없는 데다가 실제 사용 여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결정적으로 송 시대엔 산업에 필요한 제대로 된 증기기관이나 외연/내연기관의 발명도 없었고, 이걸 이용해 대량 생산에 응용하려는 시도도 전무했다. 애당초 '송나라 산업혁명론' 자체가 마오쩌둥 시절 정치성 이론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중국 자본주의 맹아론 부록이나 마찬가지다. 애초에 학술적인 연구나 고찰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서 파생된 썰에 불과하다는 한계가 있다.
한편, 송은 명나라와 더불어 조선 왕조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나라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 시기에 편찬된 대학연의가 조선 왕조에서 본격적으로 도입되었고, 과거제도 송나라의 과거 제도를 조선 왕조가 완성시켰다. 주자학과 강목체 역시 조선 왕조에서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형법 역시 송나라의 제도를 많이 참고하였다. 물론 조선은 이후에 등장한 명나라의 영향도 송에게 받은 영향 못지않게 많이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