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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출정시의 규례
신 20:1-9
1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2 너희가 싸울 곳에 가까이 가면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아가서 고하여 그들에게
3 말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
4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 할 것이며
5 책임자들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행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낙성식을 행할까 하노라
6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 과실을 먹을까 하노라
7 여자와 약혼하고 그와 결혼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를 데려갈까 하노라 하고
8 책임자들은 또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의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낙심될까 하노라 하고
9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친 후에 군대의 지휘관들을 세워 무리를 거느리게 할지니라
신 20:1-9 / [거룩한 전쟁에 대한 규정] 적과 싸우러 나갔을 때에 여러분이 보기에 군마와 전차와 군인들이 여러분보다 훨씬 더 많더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애굽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2)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군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서 용기를 북돋워 주십시오. 3) `이스라엘의 군인들은 똑똑히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이제 적들과 싸우러 나갑니다. 이제 겁을 내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며 떨지도 말고 적들이 공격할 때에 뿔뿔이 달아나지도 마십시오. 4)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과 함께 가셔서 여러분의 원수들을 쳐부수고 여러분을 건져 주실 것입니다.' 5) 그 다음에는 병무 담당자들이 이스라엘 장병들에게 이렇게 물어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에 새 집을 짓고 아직 들어가 살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가 이번에 출전하여 전사하면 다른 사람이 그 집에 들어가 살게 될 것이니 그런 사람은 지금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6) 또 새 포도원을 만들어 놓고 아직 수확을 해보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가 이번에 출전하여 전사하면 다른 사람이 그 포도원에서 첫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니 그런 사람은 지금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7) 또 여자와 약혼만 하고 아직 결혼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가 이번에 출전하여 전사하면 다른 사람이 그의 약혼녀와 결혼하게 될 것이니 그런 사람은 지금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8) 그런 다음에도 병무담당자들은 이스라엘 장병들에게 한 번 더 물어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에 두려워서 마음이 약해진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이 미쳐 용기를 잃게 할 것이니 그런 사람도 지금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9) 병무담당자들이 장병들에게 말을 마친 다음에는 지휘관들을 임명하여 군대를 인솔하게 하십시오.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며 모압 평지에서 진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聖戰)에 임하는 자세를 말씀하십니다. 참혹한 전쟁에 임하는 이스라엘에게 매우 중요한 규례가 될 것입니다.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라(1-4)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전쟁에 임하게 될 때에 제사장을 통해 용기를 불어넣게 하십니다. 이를 통해 적군과 싸우려 할 때 곧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애굽 땅에서 자신들을 인도해 내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기에 정신적으로도 육신적으로도 자신감이 없었던 백성이었고, 출애굽 2세대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해서 광야를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세상문명을 본적도 없고 전투와 관련된 훈련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애굽을 이기고 자유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가나안이 적군의 강력한 군대와 말과 병거와 더 많은 백성을 보지 말고 오직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적군들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왔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싸움은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제사장을 통하여 듣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하는 것을 꼭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이 싸움은 이스라엘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이미 승리가 정해진 전쟁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용기를 복돋게 하셨습니다.
그의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낙심될까 하노라(5-9) 하나님의 전쟁은 무기의 정도와 군사의 숫자와 상관이 없습니다. 전쟁을 임하는 하나님의 군사들의 신앙의 정도에 달려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다른 것을 의지하려고 하는 여지를 가지고 있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聖戰)에 참여하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의 영광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쟁에 참여하는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적용: 당신은 지금 영적인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여정 중에 있습니다. 때로는 전쟁도 해야 합니다. 거대한 세상의 적들과 부딪혔을 때 당신과 함께 계시고 싸워주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그들의 현상적인 것을 보고 겁내거나 두려워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도망가서는 안 될 전쟁이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전쟁입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영적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전쟁을 수행하라고 이미 명령 하셨습니다. 이것은 총과 칼과 숫자와 병기로 이기는 전쟁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우리의 거룩성으로 싸우는 전쟁입니다. 우리가 거룩할 때에 이기는 전쟁입니다. 거룩성을 이루고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가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 하셔서 반드시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 설 교 >
겁내지 말며 두려워 말며 떨지 말며
신 20:1-4 / 문기태 목사
두려움은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 거센 비판에 대한 두려움,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 거절에 대한 두려움, 대립에 대한 두려움, 능력부족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갖가지 두려움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 두려움에 붙잡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두려움에 시달리다가 질병을 얻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두려움을 피해 도망갈 길만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은 크게 달라집니다. 특히 믿음의 사람들은 두려움을 만났을 때 효과적으로 두려움과 맞서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만나는 적들과 싸울 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 말라는 말씀입니다. 적군의 숫자가 이스라엘 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적군이 말과 병거라는 첨단 무기를 가지고 강력하게 무장하고 있어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골이 장대한 아낙자손 즉 거인들이라도 겁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철옹성과 같은 성안에서 단단히 방비를 하고 있어도 당황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제사장들에게 전쟁에 앞서 끊임없이 백성들을 격려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놀라지 말라'고 하며 격려하라고 하였습니다. 두려워 말라는 말을 네 번이나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강조 중에 강조입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도 두려움을 떨치고 담대하게 맞서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느껴져도 두려움에 붙잡혀 굴복하지 말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현실이 어떻든, 스스로의 힘이 부족하든, 누가 뭐라고 하든 무조건 두려워하지 말고 싸워서 승리를 하라는 것입니다.
너무 무모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위험 부담이 너무 큰 것 아닙니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강하고 잘 무장된 적이 그것도 견고한 성에서 버티고 있는 데 수적으로 열세요, 무기의 강도로도 열세며 전술전략도 없고 경험도 부족한데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습니까? 패배할 것이라는 생각이 밀려오는 데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전쟁터에서 처한 현실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만난 상황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우리의 대적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은 날로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 자신은 연약하고 부족함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우리의 일터에서 단순히 돈을 벌어 생활만 하라고 하지 않고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저들의 영혼을 구원하라고 하십니다. 세상에는 수시로 우리를 비난하고 조금만 허점을 보이면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낙오자가 되기 쉽습니다. 나 하나 생존하기 바쁜 현실 속에서 사명을 감당하며 산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때로 사람들이 무섭게 여겨집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이 여겨집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깜짝깜짝 놀랍니다. 앞으로가 몹시 불안하고 걱정이 됩니다.
사회와 일터만이 영적 전쟁터가 아닙니다. 가정도 영적 전쟁터입니다. 가족들간에 갈등이 적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많은 문제가 발목을 잡는데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막막합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본을 보이고 사랑을 실천하고 말씀으로 양육하며 기도에 힘써 거룩하고 아름다운 작은 천국을 만들라니? 될 법이나 한 말입니까? 절대 우리 가정만은 불가능하게 여겨집니다. 칼을 들고 적들과 싸워 이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불가능하게 여겨집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 두 가지를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1.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1).
대적들은 자신들의 숫자가 많음을 의지하여 싸우고, 철 병거를 의지하여 싸우고, 힘이 센 것을 의지하여 싸웠습니다. 이스라엘은 적들과 싸우며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희는 말이나 철 병거 대신 나를 의지하여 싸우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더 셀까요? 사람의 생각으로는 군인들의 숫자가 많아야 되고 최신식 첨단 무기를 갖추어야 하고 훈련된 마병이 많아야 승리합니다. 그렇지만 군인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말과 철 병거를 많이 갖추고 싸워도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영적인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전쟁에 나가면 두려울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까지 수없이 많이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고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시 세계 최강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해오자 막아내시고 홍해바다에 애굽의 군대를 다 몰아 넣으셨습니다.
이렇게 크고 강하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자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까? 믿음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육안으로 적군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두려워졌습니다. 육안으로 자신들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겁이 났습니다. 적들은 거인으로 보이고 자신들은 메뚜기처럼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면 믿음이 충만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 믿어집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으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어린 아이도 믿음으로 충만하면 담대해집니다. 그러나 용사도 믿음이 없어지면 두려워 떨게 됩니다.
오늘도 그 원리는 그대로입니다. 여러분 중에 두려움이 가득한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틀림없이 환경을 보거나, 여러분을 공격하는 사람을 보거나, 실패하고 실수투성이인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시선을 하나님께로 옮기면 믿음이 충만해지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여러분, 믿음이 성장하고 믿음이 더 좋아지기를 원하세요? 믿음이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좋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시선을 세상에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께 향하고 사는 것입니다. 시선을 내가 만난 문제에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을 하나님께로 옮기고 하나님만 늘 바라보면 믿음이 아주 좋아진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염려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불안함을 떨쳐 버리지 못합니다. 왜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만 바라보고 세상만 바라보고 환경만 바라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합니다. 연약한 자신도 바라보고 험난한 세상도 바라보고 입을 크게 벌리고 달려드는 문제도 바라보지만 그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밀려와 벌벌 떨다가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면 하나님이 잘 보이고 담대해집니다. 염려에 사로잡히고 불안함에 시달리다가도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 보면 용기가 생기고 평안이 밀려옵니다. 시선을 잠깐 세상에 빼앗겨 쩔쩔 매다가도 목장모임에 가서 은혜를 나누다 보면, 교회 와서 예배 드리다 보면 함께 계신 하나님이 다시 보이고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여러분 모두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향하고 살면서 두려움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 이기심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4)
오늘 말씀 3절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하고는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 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강조가 많은 데 이렇게 네 번이나 단어를 바꾸어가며 강조를 한 곳은 흔치 않습니다. 두려워 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4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대신 싸워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되었는데 우리가 우리 역사를 배워야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왜 배우느냐?'고 말합니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행하신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용맹하고 무기를 다루는 기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을 위해 싸우시고 승리를 주신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우리 역사책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록한 부분이 한 군데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계속 강조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겠다." "내가 싸워서 너희에게 승리를 안겨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나만 믿고 전쟁터에 나가라." 신납니까? 신이 안 납니까? 신나지요. 내가 부족한데 내가 연약한데 하나님이 내편이 되셔서 나를 위해 싸우시고 승리를 안겨 주시는데 얼마나 신납니까?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짜릿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심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싸우는 영적 싸움에 관여하시고 대신 싸워서 여러분에게 승리를 안겨 주심을 날마다 경험하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지만 하나님은 싸우지 않고 여러분 혼자 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체험적 신앙이 아니고 관념적인 신앙입니다. 생활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지식적인 신앙 즉 머리로만 아는 신앙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친히 싸워주시는 그래서 승리를 안겨주시는 사건을 날마다 경험하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이 참 많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늘 보좌를 비우고 이 땅에 인간이 되셔서 종의 모습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탄생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우리에게 천국을 선물로 주시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시려고 애쓰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시려고 몸소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가 받을 천벌을 받으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약속이 보혜사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계시며 하나님의 뜻을 알게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능력을 주셔서 다 감당하게 도와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어떻게 될까요? 오래 가지 못하고 지쳐 쓰러집니다. 내가 하지 않고 성령님이 하시게 해야 합니다. 내 것으로 하지 말고 그분이 주신 것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하지 말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 지치지 않습니다. 아주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좋은 열매가 맺혀지고 아주 행복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심을 믿고 하나님 크기의 일에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싸워 주심을 믿고 어려운 싸움에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승리를 안겨 주심을 믿고 여러분의 힘으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가 여러분을 위협해도 도망가지 말고 울며 주저 앉아 있지 말고 맞서 싸우시기 바랍니다. 떨지 말고 쫄지 말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명령하며 물리치고 정복하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TV광고는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팔고 있습니다. 저들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건드려서 뭐든 팔고 있습니다. 건강에 대한 두려움을 자극하여 건강보조식품은 날개 돋친 듯이 팔리고 있습니다. 보험회사는 사고와 질병을 이용하여 두려움을 건드려서 온갖 종류의 보험상품을 팔고 있습니다. 온갖 다이어트 산업은 비만이 만병의 근원이라며 살을 빼지 않으면 곧 병에 걸린다고 두려움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일찍부터 학원에 보내고 남들처럼 조기 유학을 보내지 않으면 국제화 시대에 자녀들이 뒤쳐지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을 팔아 영어 교육시장이 얼마나 빠르게 성장했는지 모릅니다. 화장품은 비쌀수록 잘 팔립니다. 성형외과는 요즘 같은 방학에는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아름답지 않으면 취직도 안되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버림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늙는 게 두렵고, 외로울까 봐 두렵고, 가난해 질 까봐 두렵고, 무시당할 까봐 두렵고, 실패할 까봐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상인들은 우리의 지갑을 열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두려움을 건드리는 것은 상인들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두려운 감정을 자극하여 우리를 조종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노리는 세력이 있습니다. 바로 두려움을 이용하여 우리를 조종하고 파멸에 이르도록 하는 세력은 사단입니다. 사단이 가져다 주는 두려움에 끌려 다니다 보면 우리의 믿음은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는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결국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만 하시지 않고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평안을 누리도록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친히 싸워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 우리가 함께 계시는 그분께 시선을 드린다면 두려움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싸움에 내 힘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힘든 싸움에 하나님을 앞 세운다면 그분이 대신 싸워 주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위기에서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비참한 패배자로 불행하게 끝날 우리를 화려한 승리자, 행복한 승리자로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 사단이 가져다 주는 두려움에 속아 끌려 다니지 말고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담대하게 두려움과 맞서서 물리치고 승리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두려움은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 거센 비판에 대한 두려움,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 거절에 대한 두려움, 대립에 대한 두려움, 능력부족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갖가지 두려움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 두려움에 붙잡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두려움에 시달리다가 질병을 얻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두려움을 피해 도망갈 길만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은 크게 달라집니다. 특히 믿음의 사람들은 두려움을 만났을 때 효과적으로 두려움과 맞서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만나는 적들과 싸울 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 말라는 말씀입니다. 적군의 숫자가 이스라엘 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적군이 말과 병거라는 첨단 무기를 가지고 강력하게 무장하고 있어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골이 장대한 아낙자손 즉 거인들이라도 겁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철옹성과 같은 성안에서 단단히 방비를 하고 있어도 당황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제사장들에게 전쟁에 앞서 끊임없이 백성들을 격려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놀라지 말라'고 하며 격려하라고 하였습니다. 두려워 말라는 말을 네 번이나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강조 중에 강조입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도 두려움을 떨치고 담대하게 맞서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느껴져도 두려움에 붙잡혀 굴복하지 말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현실이 어떻든, 스스로의 힘이 부족하든, 누가 뭐라고 하든 무조건 두려워하지 말고 싸워서 승리를 하라는 것입니다.
너무 무모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위험 부담이 너무 큰 것 아닙니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강하고 잘 무장된 적이 그것도 견고한 성에서 버티고 있는 데 수적으로 열세요, 무기의 강도로도 열세며 전술전략도 없고 경험도 부족한데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습니까? 패배할 것이라는 생각이 밀려오는 데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전쟁터에서 처한 현실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만난 상황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우리의 대적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은 날로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 자신은 연약하고 부족함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우리의 일터에서 단순히 돈을 벌어 생활만 하라고 하지 않고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저들의 영혼을 구원하라고 하십니다. 세상에는 수시로 우리를 비난하고 조금만 허점을 보이면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낙오자가 되기 쉽습니다. 나 하나 생존하기 바쁜 현실 속에서 사명을 감당하며 산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때로 사람들이 무섭게 여겨집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이 여겨집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깜짝깜짝 놀랍니다. 앞으로가 몹시 불안하고 걱정이 됩니다.
사회와 일터만이 영적 전쟁터가 아닙니다. 가정도 영적 전쟁터입니다. 가족들간에 갈등이 적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많은 문제가 발목을 잡는데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막막합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본을 보이고 사랑을 실천하고 말씀으로 양육하며 기도에 힘써 거룩하고 아름다운 작은 천국을 만들라니? 될 법이나 한 말입니까? 절대 우리 가정만은 불가능하게 여겨집니다. 칼을 들고 적들과 싸워 이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불가능하게 여겨집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 두 가지를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1.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1).
대적들은 자신들의 숫자가 많음을 의지하여 싸우고, 철 병거를 의지하여 싸우고, 힘이 센 것을 의지하여 싸웠습니다. 이스라엘은 적들과 싸우며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희는 말이나 철 병거 대신 나를 의지하여 싸우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더 셀까요? 사람의 생각으로는 군인들의 숫자가 많아야 되고 최신식 첨단 무기를 갖추어야 하고 훈련된 마병이 많아야 승리합니다. 그렇지만 군인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말과 철 병거를 많이 갖추고 싸워도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영적인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전쟁에 나가면 두려울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까지 수없이 많이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고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시 세계 최강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해오자 막아내시고 홍해바다에 애굽의 군대를 다 몰아 넣으셨습니다.
이렇게 크고 강하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자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까? 믿음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육안으로 적군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두려워졌습니다. 육안으로 자신들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겁이 났습니다. 적들은 거인으로 보이고 자신들은 메뚜기처럼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면 믿음이 충만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 믿어집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으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어린 아이도 믿음으로 충만하면 담대해집니다. 그러나 용사도 믿음이 없어지면 두려워 떨게 됩니다.
오늘도 그 원리는 그대로입니다. 여러분 중에 두려움이 가득한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틀림없이 환경을 보거나, 여러분을 공격하는 사람을 보거나, 실패하고 실수투성이인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시선을 하나님께로 옮기면 믿음이 충만해지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여러분, 믿음이 성장하고 믿음이 더 좋아지기를 원하세요? 믿음이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좋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시선을 세상에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께 향하고 사는 것입니다. 시선을 내가 만난 문제에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을 하나님께로 옮기고 하나님만 늘 바라보면 믿음이 아주 좋아진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염려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불안함을 떨쳐 버리지 못합니다. 왜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만 바라보고 세상만 바라보고 환경만 바라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합니다. 연약한 자신도 바라보고 험난한 세상도 바라보고 입을 크게 벌리고 달려드는 문제도 바라보지만 그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밀려와 벌벌 떨다가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면 하나님이 잘 보이고 담대해집니다. 염려에 사로잡히고 불안함에 시달리다가도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 보면 용기가 생기고 평안이 밀려옵니다. 시선을 잠깐 세상에 빼앗겨 쩔쩔 매다가도 목장모임에 가서 은혜를 나누다 보면, 교회 와서 예배 드리다 보면 함께 계신 하나님이 다시 보이고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여러분 모두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향하고 살면서 두려움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 이기심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4)
오늘 말씀 3절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하고는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 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강조가 많은 데 이렇게 네 번이나 단어를 바꾸어가며 강조를 한 곳은 흔치 않습니다. 두려워 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4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대신 싸워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되었는데 우리가 우리 역사를 배워야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왜 배우느냐?'고 말합니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행하신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용맹하고 무기를 다루는 기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을 위해 싸우시고 승리를 주신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우리 역사책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록한 부분이 한 군데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계속 강조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겠다." "내가 싸워서 너희에게 승리를 안겨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나만 믿고 전쟁터에 나가라." 신납니까? 신이 안 납니까? 신나지요. 내가 부족한데 내가 연약한데 하나님이 내편이 되셔서 나를 위해 싸우시고 승리를 안겨 주시는데 얼마나 신납니까?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짜릿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심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싸우는 영적 싸움에 관여하시고 대신 싸워서 여러분에게 승리를 안겨 주심을 날마다 경험하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지만 하나님은 싸우지 않고 여러분 혼자 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체험적 신앙이 아니고 관념적인 신앙입니다. 생활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지식적인 신앙 즉 머리로만 아는 신앙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친히 싸워주시는 그래서 승리를 안겨주시는 사건을 날마다 경험하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이 참 많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늘 보좌를 비우고 이 땅에 인간이 되셔서 종의 모습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탄생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우리에게 천국을 선물로 주시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시려고 애쓰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시려고 몸소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가 받을 천벌을 받으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약속이 보혜사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계시며 하나님의 뜻을 알게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능력을 주셔서 다 감당하게 도와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어떻게 될까요? 오래 가지 못하고 지쳐 쓰러집니다. 내가 하지 않고 성령님이 하시게 해야 합니다. 내 것으로 하지 말고 그분이 주신 것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하지 말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 지치지 않습니다. 아주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좋은 열매가 맺혀지고 아주 행복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심을 믿고 하나님 크기의 일에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싸워 주심을 믿고 어려운 싸움에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승리를 안겨 주심을 믿고 여러분의 힘으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가 여러분을 위협해도 도망가지 말고 울며 주저 앉아 있지 말고 맞서 싸우시기 바랍니다. 떨지 말고 쫄지 말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명령하며 물리치고 정복하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TV광고는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팔고 있습니다. 저들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건드려서 뭐든 팔고 있습니다. 건강에 대한 두려움을 자극하여 건강보조식품은 날개 돋친 듯이 팔리고 있습니다. 보험회사는 사고와 질병을 이용하여 두려움을 건드려서 온갖 종류의 보험상품을 팔고 있습니다. 온갖 다이어트 산업은 비만이 만병의 근원이라며 살을 빼지 않으면 곧 병에 걸린다고 두려움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일찍부터 학원에 보내고 남들처럼 조기 유학을 보내지 않으면 국제화 시대에 자녀들이 뒤쳐지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을 팔아 영어 교육시장이 얼마나 빠르게 성장했는지 모릅니다. 화장품은 비쌀수록 잘 팔립니다. 성형외과는 요즘 같은 방학에는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아름답지 않으면 취직도 안되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버림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늙는 게 두렵고, 외로울까 봐 두렵고, 가난해 질 까봐 두렵고, 무시당할 까봐 두렵고, 실패할 까봐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상인들은 우리의 지갑을 열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두려움을 건드리는 것은 상인들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두려운 감정을 자극하여 우리를 조종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노리는 세력이 있습니다. 바로 두려움을 이용하여 우리를 조종하고 파멸에 이르도록 하는 세력은 사단입니다. 사단이 가져다 주는 두려움에 끌려 다니다 보면 우리의 믿음은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는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결국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만 하시지 않고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평안을 누리도록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친히 싸워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 우리가 함께 계시는 그분께 시선을 드린다면 두려움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싸움에 내 힘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힘든 싸움에 하나님을 앞 세운다면 그분이 대신 싸워 주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위기에서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비참한 패배자로 불행하게 끝날 우리를 화려한 승리자, 행복한 승리자로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 사단이 가져다 주는 두려움에 속아 끌려 다니지 말고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담대하게 두려움과 맞서서 물리치고 승리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적군과 싸우려 할 때
신 20:1-20 / 양인국 목사
1. 20장은 적군과 싸울 때 승리를 위하여 주신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이 중요한 것은 싸움 또는 전쟁은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피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고 또한 그 결과가 우리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에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새로운 역사가 시작 되었지만 패배하면 한 나라의 역사가 단절되었고 국민들 대부분은 노예로 전락하였다. 물론 지금도 전쟁에서의 승리와 패배는 동일하게 우리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다만 그 양상이 다를 뿐이다.
특별히 본문을 통해 주시는 말씀이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적군이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부에도 있기 때문이고 또한 외적 전쟁의 결과들이 우리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처럼 내적 전쟁의 결과들도 동일한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전쟁에서 패할 경우 깊은 상처를 받게 되고 어떤 경우는 회복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승리하면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본문을 통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2. 믿음의 사람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요청되는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20:1)” 여기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요청되는 믿음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고백으로 표현되는 믿음이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은 환경이 어떠하든지 전쟁의 승리와 패배를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적군이 자신보다 더 강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기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들과 함께 해 주실 것을 말씀하시며 적군의 말과 병거 그리고 군사의 수가 그들의 것보다 더 많을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전쟁에서 승리를 보장해 주는 말씀인 동시에 또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승리의 길은 오직 한 길뿐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실 때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언제나 적군과 직면할 수 있다. 물론 여기 적군은 내외적인 환경으로부터 오는 도전들 혹은 어려움들을 의미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당하는 어려움들은 경제적인 문제로부터 오는 어려움일 것이고 그 외에도 건강, 가정, 결혼, 취업 등으로부터 오는 어려움 등일 것이다. 적군의 말과 병거 그리고 군사의 수가 우리의 것보다 많다는 것은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들이나 문제들이 너무 커서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를 말한다. 만일 사울이 삼천 명의 군사를 가지고 병거가 삼만, 마병이 육천, 군사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이 많은 블레셋과 싸우려고 했을 때와 같은 경우를 우리가 만난다면 그때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삼상13:5-7)? 놀라운 사실은 이와 같은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승리를 위해 요청되는 조건이 충족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경우에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믿는 것이 바로 적군과 싸울 때 승리를 위하여 요청되는 믿음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만일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그것은 적군이 우리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니고 믿음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은 적군과 싸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힘을 더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삼천 명의 군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병거가 삼만 마병이 육천 그리고 군사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이 많은 블레셋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쟁에서 패하는 원인들 가운데 대부분은 적군보다 더 큰 힘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전쟁에서 승리를 위하여 우리에게 군사적 힘을 더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싸워 주실 것을 믿는 믿음 안에 거할 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요청되는 것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믿음의 격려다. “너희가 싸울 곳에 가까이 가면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아가서 고하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 할 것이며 책임자들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행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낙성식을 행할까 하노라…또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의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낙심될까 하노라 하고(20:2-8)”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전쟁 직전에 백성들에게 행하여야 할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는 내용이다. 제사장의 해야 할 일은 백성들을 격려해 줌으로 그들로 하여금 믿음 위에 굳게 서도록 해 주는 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갖지 못하고 연약함 가운데 있는 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전쟁에서 승리는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에 있음을 말해 준다. 안타깝게도 믿음이 요청 되는 곳에는 그 요청에 응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연약한 자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것을 말씀하셨다. 이렇게 명하신 것은 믿음이 요청되는 곳에서 그 요청에 응답할 수 없는 자들이 함께 할 때 공동체의 믿음을 세우기보다는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고, 또한 연약한 자들에게 믿음을 강요하거나 비난하기 보다는 오히려 기다려 줌으로 그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줌으로 스스로 믿음을 세워 후일에 믿음이 요청되는 곳에서 그 요청에 응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적군과 싸우려 할 때 하나님께서 제사장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전하도록 주신 말씀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반복하여 전하도록 하신 것은 전쟁에 직면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다음의 사실을 말해 준다. 즉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나는데 한 번 들음으로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반복하여 들음으로 온전함으로 세워져 간다는 것이다.
특별히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를 상징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전쟁의 직전 백성들의 믿음을 격려해 주도록 하신 것은 모든 시대 영적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들 가운데 하나는 싸움에 직면한 개인이나 공동체로 하여금 구원의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그들의 믿음을 격려해 주는 일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즉 영적 지도자들이 이와 같은 일을 행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믿음을 굳게 할 수 있고 이로 인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요청되는 것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지도자의 지도를 받는 일이다. 지도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들 가운데 하나는 싸워야 할 대적이 화해의 대상인지 멸해야 할 대상인지 분별하는 일이다. 만일 적군이 화해의 대상일 때는 먼저 화평을 선언하고 그들이 이 요청에 응답하면 조공을 받고 전쟁을 마치고 거절하면 싸워서 그들을 멸하고 그들로부터 전리품을 얻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적군들 가운데는 화해의 대상이 아닌 자들도 있다. 그들에 대해서는 모두 멸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진멸하지 않으면 그들의 유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도자들이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싸움의 대상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적군을 멸하되 생산적인 것들은 파괴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처럼 지도자에게 주신 말씀들은 전쟁의 목적은 파괴에 있지 않고 멸해야 할 것들을 멸하고, 함께 해야 할 것들은 함께 함으로 약속의 땅에서 더욱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려 함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에게 어쩌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 자체가 전쟁과도 같을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할 때 도전해 오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도전들에 대하여 응전함으로 더욱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 앞에 승리의 길을 열어 두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도전에 직면해 있더라고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열어 놓으신 승리의 길로 행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주께서 우리 앞에 열어 놓으신 승리의 길로 행하게 해 주시고 이로 인하여 더욱 온전한 마음으로 주를 경외하는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두려워말라
신 20:1-9 / 박봉수 목사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많은 일들을 겪으며 원치 않는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 두려움이 우리에게서 행복을 빼앗아갑니다. 우리의 인생을 힘겹게 합니다.
미국의 철학자 나폴레온 힐(Napoleon Hill)은 [부와 성공의 열쇠]라는 책에서 인간에게는 여섯 가지 원초적 두려움이 있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이 여섯 가지 중에 하나, 또는 몇 가지가 결합된 두려움에 시달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 여섯 가지 원초적 두려움은 이런 것들입니다.
1. 가난에 대한 두려움, 2. 비판에 대한 두려움, 3. 건강 악화에 대한 두려움, 4. 실연에 대한 두려움 5. 노화에 대한 두려움, 6.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을 가장 힘들게 했던 두려움은 어떤 것입니까? 혹시 지금 두려움에 힘들어하고 계시다면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러면 이런 두려움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를 그 원인으로 꼽습니다.
하나는 무지(無知)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밤중에 산길을 걸을 때 두려워하는 것은 앞에 무엇이 있고, 어디에서 누가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뒤에 어떻게 될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능(無能)입니다. 힘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산길을 걷다가 다람쥐를 마주치면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호랑이를 만난다면 두려워합니다. 우리에게는 호랑이를 물리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기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치료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코로나19바이러스는 두려워합니다. 아직 치료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설명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가 겉으로 볼 때 분명히 무지와 무능 때문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려움의 원인의 본질은 아닙니다.
마 28:2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갈릴리에서 11제자들을 만나신 뒤 지상명령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안 계신데 자기들끼리 이 세상에서 주신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겉으로 보면 앞으로 어떤 박해가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고, 그리고 자기들 힘으로 그 고난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의 본질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앞일을 모른다고 해도 그리고 닥칠 일을 극복해 갈 힘이 없다고 해도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두려워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두려움의 본질은 주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늘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미국의 예일대학 교육학과 교수 단 바틀렛(Dan Bartlett)은 외모만 볼 때 어떻게 저런 사람이 예일대학 교수가 됐을까 의문을 품을 정도로 추합니다. 흑인이고, 언청이에 귀밑에 혹까지 있습니다.
그는 의무교육인 고등학교까지 졸업은 했지만,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고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하며 자랐습니다. 늘 위축됐고, 자존감이 형편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앞날을 생각할 때면 두려웠습니다.
졸업 후 백인 가정에 막노동하는 일로 취직이 되었습니다. 주인은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의 전도를 받아 교회를 가게 됐습니다. 예배드리면서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큰 은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성경을 읽다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는 말씀을 읽고, 주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게 됐습니다.
이 말씀 때문에 두려움을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고,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게 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주었습니다. 바틀렛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나와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서 앞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지금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평상시에는 믿는 것 같았는데 위기가 닥치자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두려움의 본질은 불신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게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위기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위기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두려움을 떨쳐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그 답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신 20장은 전쟁에 관한 규례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가면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들 가운데 가장 강조한 것이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약해 보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모세는 이스라엘백성에게 두려워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나안땅에 들어갔을 때 가나안족속들과 전쟁을 치러야할 텐데, 이 때 그들의 병력과 무기와 같은 군사력을 보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해 됐습니다. 교역자수련회 차 속초를 간 일이 있습니다. 일정 중 짬을 내서 울산바위를 등반하게 됐습니다. 설악산 소공원에서 정상까지는 약 4킬로미터 정도여서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닙니다. 그중에 흔들바위까지 3킬로미터 정도인데, 1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흔들바위에서 울산바위 정상까지 1킬로미터 정도 밖에 안 되는 거리인데, 워낙 가파라서 1시간이나 걸립니다. 지금은 철 계단을 놓아서 위험하지는 않지만,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올라야하기 때문에 무척 힘이 듭니다.
일행 중에 여전도사님 한 분이 정상까지 저를 따라왔습니다. 탁 트인 전망을 보고 사진을 찍고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그만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땅에 주저앉아서 못가겠다고 우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고소공포증이 있습니다. 올라올 때는 위만 바라보고 올라와서 몰랐다가 내려가려니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만 것입니다. 할 수없이 돌려세웠습니다. 저 하늘의 구름만 보고 난간을 붙잡고 뒷걸음으로 내려왔습니다. 시간이 참 많이 걸렸습니다.
저는 이 일을 겪으면서 영적인 교훈을 깨닫게 됐습니다. 우리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지만, 반대로 위를 올려다보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 교훈의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마 1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배에 태워 갈릴리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홀로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마침 큰 바람이 불면서 바다에 풍랑이 일었습니다. 제자들이 큰 위기를 겪게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고, 급히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 곁으로 가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주님께 엉뚱한 청을 드렸습니다. 자기도 물위를 걷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물 위로 걸어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보고 물 위를 걸었습니다. 바로 그 때 바람이 불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바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면서 물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물리칠 수도 있고,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을 볼 때는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 문제들, 사람들, 주변 환경들을 바라보면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눈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같은 사건을 겪으면서도 누구는 믿음의 눈으로 그 사건을 보지만, 누구는 세상의 눈으로 봅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겪으면서도 누구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만, 누구는 담대하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이야기는 참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민 13-14장을 보면 각 지파의 대표 12사람이 40일 동안 가나안땅을 정탐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12사람이 똑같은 것을, 똑같은 기간 동안 보고 왔습니다. 그러나 돌아와서 백성들에게 한 보고가 정 반대입니다.
10사람은 자기들은 가나안사람과 비교해 볼 때 메뚜기와 같다며,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며, 들어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민 14:9를 보면 이 두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말라”
그렇습니다. 이 두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보고 두려움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둘째, 믿음의 귀로 듣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모세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앞으로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정착하는 동안, 출애굽할 때 그리고 지난 광야 40년 동안 함께 하시며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너희가 싸울 곳에 가까이 가면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아가서 고하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앞으로 가나안땅에서 가나안족속과 전쟁을 치르게 될 때 제사장은 이스라엘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왜 말씀을 전했을까요? 그리고 앞으로 위기상황이 닥칠 때 제사장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했을까요? 그 답은 바울이 롬 10:17에서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이 두려움을 떨쳐버리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유언비어’(流言蜚語)라는 말이 있습니다. 근거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나쁜 소문을 말합니다. 이 말에서 ‘유언’(流言)은 글자 그대로 떠돌아다니는 말 또는 흘러 다니는 말이라는 뜻이고, ‘비어’(蜚語)는 비어(飛語)와 같은 뜻으로 날아다니는 말을 의미합니다.
이 유언과 비어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발 없는 말[言]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처럼, 순식간에 퍼집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사실을 확인해 보지도 않은 채, 덮어놓고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져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특히 이 유언비어는 세상이 어지러울 때 더 난무합니다. 그리고 위기상황에서 더 극성을 부립니다. 그래서 이 유언비어 때문에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저는 이 유언비어 뒤에 사탄이 있다고 믿습니다. 사탄이 이 세상을 어지럽히려고 유언비어를 퍼뜨립니다. 사람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려고 유언비어를 퍼뜨립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이런 유언비어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듣게 되더라도 잘 분별해야 하고 새겨서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귀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사탄의 간교한 소리는 흘려듣고,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믿음의 귀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세상의 소리는 흘려듣고 말씀의 소리는 경청하는 믿음의 귀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저는 창 3장을 읽을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사탄이 뱀의 모양으로 하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간교한 말로 하와를 미혹합니다. 하와가 사탄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탄의 말을 믿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믿음의 귀가 닫히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또 어땠을까요? 아담은 하와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사탄의 말을 믿고 있던 하와가 하는 말을 수긍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사탄의 말에 동조하는 하와의 말을 따르게 됐습니다. 역시 아담도 믿음의 귀가 닫혀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백성이 이렇게 믿음의 귀가 닫힐 것을 염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에게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위기가 닥칠 때면 더욱 강력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믿음의 귀를 잃지 않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믿음의 귀를 잃지 않는 일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는 귀를 잃지 않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 잘 듣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TV를 보고, 신문을 읽고,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검색하고, 유튜브나 SNS로 세상의 소식을 듣는 일에 시간을 물 쓰듯이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는 너무도 인색합니다. 어떤 경우는 하루에 단 5분도 시간을 내지 못하고 지나갑니다. 점점 믿음의 귀가 닫히게 됩니다.
많은 교우들이 감사의 인사를 해옵니다. 집이 멀어 새벽기도회에 참여하지 못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새벽기도회 영상을 집에서 볼 수 있어서 매일 새벽기도회 말씀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출퇴근하는 도중에 들을 수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주일예배를 드리고 집에 와서, 주중에 또 영상을 본다는 것입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믿음의 귀를 활짝 여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움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갑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짓누르는 위기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 두려움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눈을 열고 함께 하시는 주님을 보고, 믿음의 귀를 기울여 주의 말씀을 들으며, 믿음으로 두려움을 떨쳐버려야 하겠습니다.
대적과 싸울 때
신 20:1-9 / 피영민 목사
서 론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전쟁이 없는 시대가 아닙니다. 지금은 오히려 비행기 타기도 겁나는 시대입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폭탄이 금속이기 때문에 금속 탐지기에 걸려서 테러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했지만 이제는 플라스틱과 액체 같은 다른 재료로 만든 폭탄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비행기를 탈 때는 음료수를 포함한 모든 액체 형태의 물건을 가지고 탈 수 없도록 할 수도 있다는 뉴스를 엊그제 보았습니다. 모두 테러의 위험 때문입니다.
다니엘서 9장 26절을 보면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처럼 인류 역사가 존속하는 한 전쟁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레이 스테드먼 목사님의 글을 보면 이와 같은 일화가 소개됩니다. 한국 전쟁 때, 한 막사에서 주둔하던 미군들이 한국인 하우스 보이 한 명을 고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하우스보이가 아주 순진하게 생겨서 미군들이 골탕을 먹이기 시작했습니다. 난로 손잡이에 구리스라는 미끈미끈한 기름을 발라서 난로 뚜껑을 놓치게 하기도 하고, 물을 담은 물동이를 문 위에 올려서 아침에 하우스 보이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물벼락을 맞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구두에 못을 살짝 박아서 못이 발을 찌르도록 장난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달 동안 장난을 하다보니 미군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미군들이 하우스 보이를 불러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너에게 너무 심한 장난을 한 것 같다. 우리도 양심이 찔려서 안되겠다. 이제 장난을 그만 두겠다.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않겠다.” 이 말을 들은 하우스 보이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난로 뚜껑에 구리스를 바르거나, 물동이를 문 위에 올려놓거나, 구두에 못 박는 짓을 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죠?” 미군들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하우스 보이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당신들이 먹는 스프에 침 뱉는 짓을 그만 두겠습니다.”
성경에는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기록하고 있는 책이 출애굽기, 신명기, 그리고 여호수아서입니다. 신명기는 전쟁에 대한 규례를 정하고 있는 책이고, 여호수아서는 전쟁을 실천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전쟁은 일반적인 전쟁이 아니고 거룩한 전쟁(Holy War)입니다.
1. 거룩한 전쟁의 개념
그렇다면 어떤 전쟁이 거룩한 전쟁일까요? 거룩한 전쟁은 몇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거룩한 전쟁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전쟁입니다. 사무엘서를 보면 다윗은 언제나 전쟁을 시작할 때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올라가서 전쟁을 하리이까?” 그 때에 하나님께서 “올라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고 말씀하시면 비로소 다윗은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둘째로 거룩한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들은 스스로를 정결케 해야만 했습니다. 이 거룩한 전쟁은 군인들이 군사 훈련을 하거나 많은 무기를 가지고 참여하기보다는 먼저 스스로를 정결케 한 후에 참여하는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모든 악한 일들을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 신명기 23장 14절을 보면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붙이시려고 네 진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합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전쟁에서는 군사 훈련이나 무기가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일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전쟁에서는 군인들의 거룩성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진영에 함께 하셔야 거룩한 전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려면 앞의 두 가지 조건을 먼저 충족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해야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십니다. 만약 이스라엘 군대가 거룩하지도 않은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군대의 대적이 되어 이스라엘이 진멸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3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에게 우상 숭배하여 징벌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너희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 나는 너희들과 같이 가지 않겠다.”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는 엎드려서 “하나님! 우리 몸에 우상숭배에 관련된 단장품은 다 제하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주십시오”라고 간구했습니다. 모세의 목숨 건 중보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출애굽기 33장 14절을 통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셔야 거룩한 전쟁이 될 수 있습니다.
넷째로 거룩한 전쟁은 결코 실패할 수 없는 전쟁입니다. 아무리 대적의 말과 병거가 많을지라도, 대적의 숫자가 많을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군대가 아무리 소수이고, 병력이나 병기가 부족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이기려면 하나님과 먼저 싸워서 이겨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과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되었을 때, 그들을 건져내신 하나님이십니다. 엄청난 애굽의 군대와 병거들을 홍해에 파묻어 버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굽보다 힘이 약한 가나안의 7족들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보다 더 큰 군대도 모두 쳐부수었는데 그보다 약한 군대를 만날 때에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거룩한 전쟁을 수행할 때에는 백성들의 거룩성과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중요하지 군인들의 숫자나 병기의 강약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군대가 전쟁에 나가서 적지에 가까워지면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다. 우리 하나님은 애굽 군대도 무찔러 주신 하나님이시다. 고로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나가서 싸워라. 승리는 너희의 것이다”는 사실을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5절에 ‘유사(officers)'라고 번역된 군대의 장교들은 네 종류의 사람들을 골라내서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첫째로 집을 건축하고 아직 준공식을 하지 못한 사람, 둘째로 포도원을 건축하고 첫 열매를 먹어보지 못한 사람, 셋째로 약혼을 했지만 그 여자를 취하지 못한 사람, 넷째로 전쟁이 무서워서 두려워 떠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군대의 수가 작아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에 두려움으로 부대를 전염시킬 사람은 차라리 돌려보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사기 7장 7절을 보면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을 시작하는 장면이 기록되었습니다. 처음 군대를 모았을 때, 그 숫자가 32,00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31,700명을 모두 돌려보내시고 오직 삼백명의 용사들을 통해서 미디안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셨습니다. 이것이 거룩한 전쟁의 특징입니다.
마지막으로 10절 이하에 기록된 바처럼 거룩한 전쟁은 절차가 규정되어 있습니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평화를 선언해야 합니다. 만약 상대가 평화를 수락하면 죽이거나 약탈하는 일이 없이 그 나라를 속국으로 삼고 조공을 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상대가 평화를 수락하지 않고 전쟁을 시작하면 쳐들어가서 그들을 죽여야 합니다. 죽이되 가나안 밖에 있는 성읍에서는 남자들만 죽이고 여자와 유아는 살려둬야 했습니다.
반면에 가나안 안의 성읍들에 있는 남자와 여자와 유아와 짐승과 육축은 가리지 말고 모두 진멸해야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나안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으로 오염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모두 진멸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전쟁이 끝난 후에는 나무를 마구 착벌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나무를 잘 보존하면 거기에 열매가 맺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양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까지도 자세하게 규정해 놓은 것이 전쟁의 절차입니다. 이것이 신명기 20장전체의 내용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전쟁을 통해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의 개념을 사랑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잔인한 명령을 내릴 수 있었을까 궁금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목적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약속한 거룩한 땅에서 모든 우상을 몰아내고 너희는 거룩한 백성으로서 가나안 땅에서 존속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지 말고 그 땅에서 계속 터를 잡고 거룩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터를 잡고 살아야 그 땅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고, 인류 구원의 계획이 올바르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거룩한 전쟁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2. 거룩한 전쟁의 잘못된 적용
하나님의 말씀은 바르게 이해하는 것(right understanding)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삶에 바르게 적용하는 것(right application)이 더 중요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인류 역사는 거룩한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피비린내 나는 악한 전쟁을 많이 수행했습니다. 악한 전쟁을 하면서도 그것을 신명기 20장의 거룩한 전쟁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전쟁이 바로 ‘십자군 전쟁’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와 회교도 간에 갈등이 심한데, 그 근원은 십자군 전쟁입니다. 십자군 전쟁은 회교도들이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고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장악하자 교황 우르반 2세가 어려운 내치에 대한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1095년에 일으킨 전쟁입니다. 우르반 2세는 1095년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전쟁은 거룩한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이 이 전쟁에 참여하면 완전한 면죄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전쟁에 참여하다가 전사하면 연옥을 거칠 것도 없이 즉각 천국에 올라가게 됩니다.” 이 연설을 들은 많은 평민들이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봉건제도 하에 평생 한 곳에서 살아 이름도 없이 직업을 이름삼아 살고 있었던 평민들이 일어나서 1095년에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군사 훈련도 안 된 오합지졸 군사들로 이루어진 십자군이 1099년에 가까스로 예루살렘을 탈환했습니다. 십자군들은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40만명의 회교도들 중 36만명을 예수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살육을 벌였습니다. 이와 같은 만행을 저지르고도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의 골목길은 피로 강을 이루었다’고 자랑스럽게 떠들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기독교와 회교간의 갈등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회교도들은 기독교 국가를 향해서 테러를 할 때마다 ‘너희 조상이 우리 조상을 엄청나게 살육하지 않았느냐? 우리가 하는 일은 새 발의 피다’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1차 십자군 전쟁에서는 승리를 거뒀지만 결국 90년 뒤인 1,181년에 애굽의 살라딘이라고 하는 회교 지도자에 의해 예루살렘은 다시 회교도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1095년에 시작되어 1291년까지 200년 동안 무려 여덟 번이나 계속된 십자군 전쟁은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패배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거룩한 전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전쟁에는 패배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군 전쟁은 여덟 번 중에 일곱 번을 패했으니 이것은 거룩한 전쟁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가 회개해야 할 아주 근본적인 제목입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나치스 아돌프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을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는 하나님의 전쟁(God's War under God's specialprotec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히틀러는 성경을 마음대로 변경시켜 만든 히틀러 성경 10만부를 발간해서 ‘나의 투쟁’이라고 하는 자신의 자서전과 함께 전국 교회에 나누어 주고 그것을 읽게 했습니다. 이 히틀러 성경의 제목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독일’이었습니다. 또한 어떤 독일 군인들은 헬멧 뒤에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라는 문구를 새기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이런 독일군들이 유대인을 6백만이나 학살하는 대참사를 일으켰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십자가를 내걸고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인간의 죄악입니다. 신명기 20장을 모독하는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죄악인 것입니다.
한편 오늘날 이스라엘의 북쪽에는 크기가 충청북도만하고 인구도 3백만이 채 안되는 레바논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원래 레바논에는 기독교 인구와 회교 인구가 균등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레바논 남쪽에 정착하면서 레바논의 회교도의 숫자가 늘어났고, 균형이 깨진 레바논에는 내전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레바논에 정착한 테러집단 중에 헤즈볼라라고 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헤즈볼라는 강경파인 시아파 회교도들이 ‘회교로 통일하자’라는 기치를 내걸고 이란에서 처음시작한 무장단체입니다. ‘헤즈볼라’라는 말의 의미는 ‘신의 정당, 하나님의 정당’입니다. 이 헤즈볼라는 1983년도에 레바논 베이루트에 소재한 미국 해병대 사령부에 폭탄을 가득 실은 트럭으로 자살공격을 감행하여 241명을 사살하는 테러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 헤즈볼라는 현재 레바논에서는 국회의원 12명을 배출한 레바논 두 번째 정당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번에도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군인들을 납치해서 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회교도들도, 유대인들도 ‘거룩한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고 못된 전쟁을 계속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거룩한 전쟁의 올바른 적용
신명기가 명령하고 여호수아서가 실행하는 거룩한 전쟁은 과연 오늘날 어떻게 적용되는 것일까요? 신명기 20장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교회가 뭉쳐서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쳐들어가서 진멸하는 문자적인 적용을 해야 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기독교는 인류의 재앙이 될 것이고 목사는 전범자가 될 것입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실체가 아닌 그림자입니다. 구약성서는 실체가 되는 신약성경의 빛에 비추어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이 무엇인지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왕국은 물리적인 왕국(Physical kingdom)입니다. 이스라엘 나라 자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수행하는 전쟁이 거룩한 전쟁이 됩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Spiritual kingdom)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성된 나라이기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민족차별이 모두 철폐되었습니다. 유대인이나 레바논인이나 상관없이 하나님 왕국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명기 20장의 실체는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영적인전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21세기에 거룩한 전쟁을 하겠다고 물리적인 수단과 총칼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자 어처구니없는 적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명기 20장을 영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나라이며, 거룩한 전쟁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2절을 통해 이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악의 영과의 전쟁에는 세 가지 국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내 안에 있는 죄와의 전쟁입니다. 이것은 영적 전쟁의 대내전입니다. 악한 영은 우리의 죄성을 자꾸 부추깁니다.
“술 먹어라. 바람 펴라. 도적질해라. 거짓말해라. 쾌락을 즐기면서 살아라.”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서 ‘딱 한 번만, 딱 한 잔만’ 하다보면 거기에 코 꿰어서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죄성과의 전쟁에서 먼저 승리해야 합니다.
둘째는 밖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들과의 전쟁입니다. 악한 영들은 악한 소리와 악한 사상과 악한 신학과 악한 철학을 만들어내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우리가 치른 한국 전쟁은 단순히 동족과 동족간의 전쟁이 아닙니다. 한국 전쟁은 자유 민주주의라는 사상과 사단이 만들어낸 공산주의 사상과의 사상적인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외부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들과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의 대외전입니다.
셋째로 사회의 구조를 장악해서 부패를 일으키는 구조악과도 싸워야 합니다. 최근에 판사와 검사 등 사회의 정의를 실현해야 할 사람들이 줄줄이 구속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분들이 구속되면서 하는 말이 “왜 나만 죄가 되느냐? 똑같은 일을 한 다른 사람들은 왜 구속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 사회가 구조적인 악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조악은 한 두 사람이 거기 끼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구조악과 싸워야 합니다. 노예 제도가 폐지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싸워야 합니다.
결 론
신앙생활은 육적 전쟁의 삶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혈과 육의 전쟁은 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기가 학교 다닐 때 태권도를 배웠습니다. 열심히 수련을 해서 2단이 되었는데 자기를 가르치는 사범은 태권도가 무려 9단이었다고 합니다. 태권도로 치면 그 지역에서 최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함께 길을 가다가 정신이상자가 몽둥이를 들고 싸움을 걸며 욕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한 번 싸워보자고 마음을 먹고 자세를 잡은 후에 자기 사범님은 어떻게 하는지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사범님은 벌써 도망을 가고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 자리에서 정말 잘 싸우는 사람은 아무 곳에서나 싸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 수 배웠다고 합니다. 우리는 혈과 육에 속한 육적인 무기와 수단을 가지고 걸어오는 전쟁은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망가서는 안 될 전쟁이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전쟁입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영적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전쟁을 수행하라고 이미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총과 칼과 숫자와 병기로 이기는 전쟁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우리의 거룩성으로 싸우는 전쟁입니다. 우리가 거룩할 때에 이기는 전쟁입니다. 성도들은 신명기 20장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내 안에 거룩성을 이룰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거룩성을 이루고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가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셔서 반드시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마음에 공허함과 슬픔을 가진 분이 계십니까? 집 안에 원인도 모르게 갖가지 재앙이 임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이것이 영적인 싸움임을 깨달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나가 싸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수 없는 모든 거짓과 비열함과 야비함과 사기와 악독과 시기와 다툼과 미움을 버리시고 여러분 안에 거룩성을 이루십시오. 거룩함에서 나오는 담대함과 용기를 가지고 나가서 싸우면 우리의 싸움이 백백승이 될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8장 33-37절을 결론으로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는 모든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가까스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기게 될 것입니다. 가정을 훼파하고, 교회를 혼돈케 하며, 사회를 어지럽히는 악한 영들의 역사와 싸우십시오. 기도로, 믿음으로, 거룩함으로 담대하게 싸워 이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종군할 수 있는 자
신 20:1-9
신 20장은 거룩한 전쟁에 관한 규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0:1-9은 전쟁에 임하기 전에 제사장과 백성의 지도자가 발표하는 설교문이고, 10-18절은 전쟁 수행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이고, 19-20절은 어느 도성을 포위했을 때의 작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에 “네가 나가 대적과 싸우려 할 때 말과 병거와 민중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전쟁에 임할 때 원수의 말과 병거를 두려워하지 말것을 당부합니다. 이스라엘이 대적한 가나안 사람은 이미 철기문화의 덕택으로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목민인 보병들에게 기마부대와 전차 부대는 상대가 되지 않는 월등한 군사적인 장비를 보유한 대적입니다. 이스라엘이 말과 병거를 소유하게 된 것은 솔로몬 시대 이후이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같은 장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군을 두려워하지 말고 바로의 병거를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접전하기 전에 제사장이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거룩한 전쟁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며, 대신 원수와 더불어 싸우시기 때문에 백성들은 적군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4절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대적을 치고 너희를 구원하시는 자”라는 표현은 원래 법궤에 관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광야 유랑기간 중 이스라엘이 접전하였을 때에는 법궤가 진중에까지 동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명기에서는 법궤보다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거룩한 전쟁에 임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단 한 번의 말로 “두려워하지 말라”고만 하시지 아니하고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 말며 떨지 말며 놀라지 말라”는 여러 마디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대한 공격이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세우는데 있어서 다양한 대비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의 백성이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 원수들의 부당한 공격을 받아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경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싸워 주시겠다는 약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친밀한 면을 살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하나의 국가라기보다 야영하는 한 진영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한다는 것보다 정주를 위해 가나안에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거룩한 전쟁이기에 용기를 가지며,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믿고 공포심을 극복하고 전쟁에 임해야 했던 것입니다. 사 41:10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위태한데 처하지도 아니하며 두려워 할 필요도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바로와 애굽 군사 손에서 그들 조상을 인도하심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 그들을 위해서 더 맡은 일을 해 주시리라는 약속이 그들에게 있음을 말해 줍니다. 애굽 군에 비하면 가나안 군대는 보잘 것 없는 군대입니다. 이런 가나안과의 전쟁에서 어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려두시겠습니까 5절에 “유사들은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행치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요 전사하면 타인이 낙성식을 행할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전쟁 때문에 새로 지은 직을 사용해 보지도 못하게 하거나 새로 개간한 포도원의 소출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람의 재산을 빼앗고 자신의 소유인 땅에서 그를 쫓아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을 수 없는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포도원을 경작하는 일, 핍을 새로 짓는 일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볼 때 유익한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다는 소망으로 격려하는 가운데 집을 새로 지어 놀고 한 번도 살아보지 않았을 경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병역면제의 특권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아무도 자발적으로 집을 짓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포도원 경작자가 자신들의 수고의 열매를 아직 맛보지 않았거나, 남자들이 신부가 될 약혼자와 신방을 즐기지 않았을 경우에도 똑같은 규정이 따르고 있습니다. 마음이 약하고 게으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른 원칙이 적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공공의 안녕 때문에 야기되는 위험을 기피하는 그들의 소심증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군인들이 전쟁터에 나가는데 있어서 아무도 부적격자가 없이 기꺼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집을 새로 지은 사람이 그 속에 살면서 거기에든 비용에 대한 혜택을 어느 정도 받기 전에는 그를 전쟁터로 끌고 가지 말라는 것이며 포도원을 일상적인 것으로 가꾼 사람이 그들의 소출이 어느 정도 즐기기 전에는 놓아주라는 말은 그들의 근면과 열심에 대한 보상을 허용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직 신방을 꾸며보지 못한 자들은 아내에게 되돌려 보내라는 규정은 결혼을 존중하는 뜻에서 베풀어진 관용이기도 하겠지만 모든 소유 가운데서 가장 귀한 것에서부터 그들을 떼어 놓지 못하게 한 것은 각자의 권리를 보장하도록 하는 뜻이라고 봅니다. 말하자면 자손에 대한 소망이 사라지게 되고 따라서 상속을 타인에게 물려 줄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은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람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버리고 마는 처사가 될 것입니다. 이같이 새 집을 짓는 자, 새 포도원을 가꾼 자, 아직 결혼하지 자은 자 등 세 부류의 특혜자 이외에 성전에 임함이 두려워서 마음에 겁나는 자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같은 규정은 적어도 심리적으로 참전하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제거하고 단합하는 공동 유대를 형성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신앙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한 전쟁에서 여호와께 대한 신뢰없이는 승리를 보장할 수 없음으로 이같은 불안의 요소를 제거해 버리는 것입니다. 9절에 “백성에게 이르기를 필한 후에 군대의 장관들을 세줘 무리를 거느리게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비겁자들을 제한 다음 군대 장관들을 임명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즉 특별히 지도자들과 지휘관들은 용감한 사람들이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군대가 점호를 하고 정열되기 전에 먼저 혁신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군병들도 사내답게 행동하기 위하여, 그리고 선한 군인들과 같이 고난을 견디기 위하여 특별히 그리스도의 군대장이 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용기의 원천은 하나님
신 20:1~9
말씀 포인트 : 하나님은 결코 그분의 백성만 홀로 남겨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 나갈 때 함께 계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야말로 참 용기의 원천입니다.
1) 이스라엘이 아무리 강한 적과 맞서 싸울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1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하는 동안에는 전쟁을 치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해방되어 나온 후에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그들이 제일 먼저 치른 전쟁은 아말렉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이스라엘은 숱한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이스라엘보다 훨씬 강한 적들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강한 적 앞에서 두려워 물러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고,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근거는 바로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 왕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보다 더 큰 용기의 원천은 없습니다.
2) 전쟁에 나가기 전에 어떤 사람들을 돌려보내라고 명하시나요?(5~8절)
하나님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돌려보낼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새 집을 짓고 낙성식을 거행하지 못한 사람, 포도원을 만들었으나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사람, 여인과 약혼을 했지만 아직 결혼하지 못한 사람을 돌려보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사람들도 돌려보내게 하신 점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국은 불신앙의 사람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들과 전쟁하러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 처음에 모인 사람들은 32,000명이었지만 그중에 두려워서 돌아간 사람이 22,000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용기있는 사람들과 함께하셔서 승리를 얻게 하십니다.
3) 전쟁터 같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때때로 실망할 때는 없었나요? 이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해 용기 있게 살아가세요.
살아가면서 이스라엘 백성처럼 칼을 휘두르는 전쟁은 하지 않지만, 우리 인생은 소리 없는 전쟁터와 같을 때가 많습니다. 돈을 벌고, 아이들을 키우고, 미래를 개척하고, 건강을 지키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사는 가운데 마귀와 세상과 자신과 싸울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모든 형태의 전쟁 속에서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적이 너무 강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주어진 ‘임마누엘’의 은총, 그렇게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용기백배하여 적진으로 달려 나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