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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정면승부는 자존심을 죽이는 것
LG 트윈스의 팬 나상욱(36,회사원) 씨는 일희일비하는 야구팬이 아니다. 2002년 이후 LG가 비보이가 된 듯 하염없이 바닥을 맴돌 때도 그는 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챙겨 입고 잠실구장을 향했다. 선수들이 잘하면 힘찬 박수를 보냈고 못해도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누군가 LG 선수를 비난하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LG 없으면 못 살아”를 목이 쉬어라 외쳤다.
하지만 이런 나 씨도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 불만을 토해낼 때가 있단다. “다른 건 몰라도 서울 라이벌 두산 베어스에 지면 속이 상한다.” 나 씨의 진심이다.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는 두 구단의 라이벌 의식을 고려할 때 이해 못 할 말도 아니다. 하지만, 나 씨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2000년 이후 두 팀을 라이벌이라고 하기엔 뭔가 어색한 게 사실이다. 이유가 있다.
2000년 LG는 두산을 상대로 시즌 전적 10승1무9패를 기록했다. 1승 차이였지만 엄연한 우위였다. 하지만, 그해를 제외하고 LG는 지난해까지 8년 연속 시즌 전적에서 두산에 모두 뒤졌다. 라이벌은 고사하고 이만한 밥도 없던 것이다.
“2000년대만 그런 건 아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때부터 MBC(LG의 전신)는 OB(두산의 전신)에 무척 약했다.” 나 씨의 말이다. 정확한 지적이다. 1982년부터 1988년까지 두 팀 간 시즌 첫 경기의 승자는 예외 없이 OB였다. 프로야구 사상 특정 팀에 7년 연속 시즌 첫 경기에서 패한 팀은 MBC가 유일하다. 그래서일까.
나 씨는 “올 시즌 우승은 둘째 치고 두산에 시즌 전적에서 앞서는 게 소원”이라고 속내를 밝혔다. 8년 동안 뒤졌는데 올 시즌 갑작스럽게 LG가 두산을 앞설 수 있을까. 두산은 2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오른 강팀이 아닌가. “김기범 같은 ‘곰 사냥꾼’이 나온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나 씨의 말은 그랬다.
‘곰 사냥꾼’ 김기범이라,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펼칠 때처럼 아련한 감정이 밀려오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LG 왼손투수 김기범은 11년 동안 트윈스 유니폼만을
입었다. LG가 기록한 두 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김기범은 모두 기억한다. 그야말로 LG의 전성
시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다
1989년 신인 1차 지명자로 MBC에 입단한 김기범은 아마추어 시절 이선희의 뒤를 잇는 ‘일본 킬러’로 명성을 날렸다. 각종 국제대회에 출전할 때마다 유독 일본전에서 호투를 펼친 까닭이다. 1985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제7회 대륙간컵 세계야구대회에서 한국이 사상 처음으로 국제대회 대일본전 콜드게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김기범의 호투가 배경이 됐기 때문이다.
대일본전 호투가 얼마나 인상적이었으면 훗날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포수로 성장하게 될 후루타 아쓰야로는 김기범을 “신비의 왼팔”이라 부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다 김기범은 탁월한 ‘베어스 킬러’이기도 했다. 1982년부터 88년까지 OB와의 시즌 첫 경기에 내리 패하며 체면을 구겼던 MBC의 기를 1989년 살린 것도 다름 아닌 신인 투수 김기범이었다. 김기범은 이후로도 두산에 강한 면모를 보였고 LG를 사랑하는 많은 팬들은 그를 ‘곰 사냥꾼’이라 부르며 각별한 애정을 나타냈다.
1990, 1994년 두 번에 걸쳐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를 손에 낀 김기범은 1999년 은퇴할 때까지 줄곧 LG 유니폼을 입었고 그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지금은 미국 애틀랜타에서 스포츠 비즈니스맨으로 ‘제2의 인생’을 사는 김기범(45). 스포츠춘추가 LG 전성시대를 대표하는 그를 미국에서 만났다.
현역시절 야구선수답지 않은 이미지로 유명했다. 롯데 양상문 2군 감독과 함께 가장 ‘탈(脫)’ 야구적인 분위기를 풍겼던 선수가 아닐까 싶은데. 그만큼 겉으로 풍기는 인상이 이지적이고 학구적이었다. 그래선지 은퇴 뒤 야구지도자가 아니라 사업가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이들이 많았다. 요즘 근황이 궁금하다.현재 미국 애틀랜타에서 살고 있다. 1999년 미국에 이민 온 뒤 골프장 운영부터 시작해 리조트, 골프아카데미까지 여러 가지 사업을 손댔다. 지금은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에 도전하며 회사를 조금씩 키워가고 있다.
현 사업체가 스포츠 비즈니스 회사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개를 끄덕이며)제 2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서 우리 회사가 메이저리그로부터 한국기업을 광고할 수 있는 권리를 따냈다. 펜스를 비롯해 구장 곳곳에 한국기업의 광고판을 붙일 수 있는 권리를 따낸 것인데, 시기적으로 다소 늦게 뛰어들어 큰 재미를 보진 못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와 끈끈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만큼 다시 기회가 오면 꼭 좋은 결과를 내리라 본다.
26년 만에 한양대를 잡은 건국대 왼손 에이스
충암고 졸업, MBC 입단인 까닭에 서울 토박이 같지만 정작 고향은 인천이다.
맞다. 야구도 인천 축현초등학교에서 시작했다. 사실 초교 때 축구를 먼저 했다. 하지만, 축구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체격도 축구를 하기엔 컸었고. 담임선생님이 “야구를 한번 해보라”고 해서 그 길로 야구 글러브를 끼게 됐는데…. (벅찬 표정으로)누가 눈치나 챘겠나. 그 뒤로 24년 동안 야구 글러브를 끼게 될지.
인천 동인천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특이하게 중 3때 서울 충암중으로 전학을 갔다.
중 3때 충암중이 동인천중으로 연습경기를 하러 왔다. 서울의 명문 중이라고 동인천중을 얕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노히트노런 수준으로 동인천중한테 졌다. 그때 한동화 충암고 감독님이 날 눈여겨본 모양이었다. “당장 충암중으로 오라”고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원래 중 3때는 전학이 안 되지만, 부모님이 회사를 서울로 옮기면 가능하다는 예외조항을 활용해 충암중으로 학교를 옮겼다. 그때부터 서울생활이 시작됐다.
충암고 시절 촉망받는 왼손투수였음에도 이름이 덜 알려졌다. 전국적으로 쟁쟁한 동갑내기 선수들이 워낙 많았던 탓이 큰데.
음, 사실 고교 때는 ‘가능성이 있는 선수’ 정도로만 평가받았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현 삼성 투수코치 조계현, 아직도 현역에서 뛰는 송진우(한화), 과거 해태 에이스였던 문희수(동강대 감독) 등이 당시 고교야구를 주름잡던 스타들이었다. 그에 비하면 난 부족한 게 많았다.
지나친 겸손이다. 실력만 놓고 본다면 그 선수들과 비슷비슷했다는 게 야구 원로들의 기억이다. 다만 당시 충암고가 약체라, 전국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한 게 당신에게 마이너스로 작용했다는 지적이다.
돌아보면 고교 때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한 번도 없다. 8강까지 잘 나가다가 4강에서 미끄러지길 반복했다. 프로에 간 동기들이 없는 걸 보면 약체이긴 했는데. 어차피 내가 잘 던졌으면 준결승, 결승까지 가지 않았겠나. 누굴 탓하겠나. 다 내 탓이다(웃음).
인천축현초등학교 때부터 김기범은 가능성을
인정받은 투수였다
1984년 건국대로 진학했다. 왼손투수라는 프리미엄을 고려할 때 연세대, 고려대, 한양대 등 야구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었을 텐데.여러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그 가운데 개인적으로는 연대에 가고 싶었다. 충암고가 있는 응암동과 연대가 위치한 연희동이 가까워 자주 연습경기를 했다. (환하게 웃으며)그때 연대 캠퍼스가 어찌나 멋있던지. 게다가 예쁜 누나들은 얼마나 많던지(웃음). 속으로 ‘꼭 연대에 입학해야지’ 마음먹었다.
고(故) 최관수 고대 감독이 당신을 스카우트하려고 꽤 노력한 것으로 안다.최 감독님이 인천출신이셨다. 정말 도시락 싸들고 나를 스카우트하려고 우리 집을 제집 드나들듯 하셨다. 하지만, 왠지 고대는 칙칙해보였다(웃음). 그건 농담이고. 아버지가 이북 실향민인 이유가 컸다.
이북 실향민과 건대 진학이 무슨 상관이 있나.아버지 고향이 이북 평안도시다. 한동화 충암고 감독도 평안도고. 공교롭게도 건대 한을룡 감독님 고향도 평안도였다. 아버지가 “우리 이북 출신들은 배신하지 않는다. 당장 건대로 가라”고 하시는 통에 연대를 뒤로하고 건대로 진학했다.
당신의 아버지가 이북 출신을 배신할 수 없었던 만큼 당신도 동기생들을 배신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건대 입학 조건으로 동기생을 몇 명이나 데리고 갔나.다 지나간 일이니까. 건대 입학 조건으로 충암고 동기생 4명을 함께 뽑기로 했다. 그리고 옵션으로….
옵션으로?친동생을 입학시켜달라고 했다.
친동생?두 살 아래 동생도 야구를 했다. 2년 뒤 건대에서 뽑아달라고 했다(웃음). 물론 동생도 야구를 웬만큼 해 옵션으로 입학하진 않았다(웃음).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건대에서 활약이 대단했다.지금도 기억나는 대회가 있다. 1985년 대통령기대회다. 내가 예선부터 결승까지 팔이 빠져라 전 경기를 다 던졌다. 결승전에서 우리(건대)가 연장 10회 접전 끝에 한양대를 4대 3으로 이기며 우승했는데 알고 보니 1974년 이후 11년 만에 같은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었다. 더 놀라운 건 그 경기가 26년 만에 한양대를 상대로 처음으로 이긴 경기였다는 거다. 26년이라, 상상이 가나(웃음).
당신을 ‘컨트롤 투수’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만, 아마추어 시절에는 왼손 강속구 투수였다.요즘 투수들과 비교하면 명함도 내밀기 어렵다. 하지만, 180cm도 안 되는 키에 시속 140km 후반대의 속구를 던졌으니 당시로선 ‘강속구 투수’로 불릴 만도 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출전했던 대륙간컵 세계야구대회에서 시속 147km를 기록한 게 기억난다.
이선희의 뒤를 잇는 차세대 ‘일본 킬러’의 등장
1986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대표팀 선수들. 사진 가운데 줄 왼쪽에서
3번째가 김기범이다
대륙간컵 이야기가 나왔으니 본격적으로 ‘일본 킬러’에 대해 물어야겠다. ‘일본 킬러’란 별명이 붙은 건 언제부터였나.1984년 호주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부터다. 당시 대표팀 투수진은 선동열(삼성 감독), 윤학길(히어로즈 2군 감독), 한희민, 이상군(한화 투수코치), 오명록 등 쟁쟁한 선배들이 포진해 있었다. 대표 팀 막내였던 나는 마운드에 오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 예선리그 일본전에서 우리가 7회까지 1대 3으로 뒤질 때였다. (선)동열이형이 컨디션이 좋지 않아 마운드를 내려가고 다른 선배 투수가 올랐는데 역시 투구가 좋지 않았다.
기회가 올 법도 한데.이야기를 들어봐라. 그때 코칭스태프에서 날 가리키면서 마운드로 올라가라고 손짓을 했다. 7회 1사 1, 3루 위기 상황에 등판하라고 하니 긴장이 될 수밖에. 속으로 ‘에라 모르겠다’하고 던졌는데 이게 웬걸.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은 다음 9회까지 별일 없이 잘 던졌지 뭔가. 거기다 우리 타자들이 점수를 내며 9회 역전에 성공한 게 아닌가. 화려하진 않지만 그게 ‘일본 킬러’의 첫 시작이었다.
그 대회 결승전에서 다시 일본과 만났다.(고개를 끄덕이며)결승전에서 다시 일본과 맞붙었다. 그때는 구원이 아니라 처음부터 선발로 나왔다. 7회 1사까지 일본 타선을 상대로 1점만 내주는 호투를 펼쳤다. 스코어는 3대 1. 그런데 갑자기 예선리그 일본전과 같은 상황이 연출되는 게 아닌가.
같은 상황?7회 1사 이후 1, 3루 실점위기에 몰린 거다.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나.극복? 이야기를 잘 들어봐라. 1, 3루 위기에 몰렸지만 침착하게 던진 통에 투수 앞 땅볼을 유도할 수 있었다. 여기서 2루에 던졌다면 병살이 됐을 거다. 그런데 순간적인 판단에 1루 주자가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2루로 던지는 대신 실점을 막자는 의미에서 홈으로 던졌다. 하지만 포수가 협살을 하다가 주자 머리에 공을 맞히며 졸지에 3대 3 동점을 허용했다. 나는 할 수 없이 9회 마운드에서 내려왔고. 결국, 다음 투수가 실점하며 3대 4 역전패를 하고 말았다.
일본전 1승1무를 기록한 셈인데. 1985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대륙간컵 세계야구대회에서 다시 일본과 맞붙었다. 예선 첫 경기부터 일본과 상대했다. 당시 일본 대표팀 멤버가 대학 선발도 아니고 사회인 선발팀이라, 무척 강했다. 내가 선발투수로 나갔는데 다행히 완투를 하며 제 몫을 다했다. 그때 우리가 일본을 몇 대 몇으로 이긴지 아나?
국제대회 대일본전 첫 콜드게임승이었다는 것만 기억난다.12대 2였다. 8회 콜드게임으로 끝났는데 당신 말대로 한국야구가 국제대회에서 일본을 상대로 콜드게임승을 거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내 나이가 만으로 19살이었으니 참 큰일을 해낸 셈이었다.
3일 뒤 예선 미국전에서는 연장 11회까지 완투하는 괴력을 선보였다.예선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미국전이 무척 중요했다. 왜냐? 미국전에서 지면 조 2위가 돼 4강에서 쿠바와 만나야 했다. 반대로 미국전에서 이기면 조 1위가 돼 일본과 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누가 보나 쿠바보단 일본이 편했으니까 미국전에 사활을 걸고 던질 수밖에 없었다.
연장 11회 말 2대 2 동점에서 팽팽한 접전을 깨는 홈런이 나왔다.유중일(삼성 2군 수비코치) 선배가 끝내기 2점 홈런을 치지 않았나. (두 팔을 허공에 들며)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두 팔이 절로 올라가고 함성이 나올 것만 같다.
1985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대륙간컵 세계야구
대회에서 호투하는 김기범. ‘일본 킬러’라는
별명이 본격적으로 붙기 시작한 대회였다
예선리그에서 쿠바가 일본에 지며 한국이 기를 쓰고 미국전에서 이기지 않았어도 준결승에서 일본과 맞붙을 상황이 연출됐다. 준결승 일본전에서도 선발로 나가지 않았나.그렇다. 하지만 일본은 예선 때와는 눈빛부터가 달랐다. 아마추어 최강 쿠바를 이긴 팀답게 맹렬한 기세로 한국을 몰아붙였다. 6회까지 우리가 1대 3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7회초 4안타를 집중시키면서 3점을 얻어 4대 3 역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때도 완투했나.(손을 내저으며)아니다. 9회 1사까지만 던졌다. 사흘 전 미국전에서 연장 11회까지 던져서 그런지 어깨가 아팠다.
결국 결승에서 쿠바에 아깝게 3대 4로 지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대회 4승을 기록한 당신은 다승투수상과 올스타 11에 뽑히며 세계야구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다시 일본과 맞붙는다.‘서울올림픽’ 하면 사연이 있다. 정상적인 순서였다면 그해 나는 대학졸업과 함께 프로에 입단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대한야구협회에서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만큼 프로 입단을 1년 뒤로 미루고 대표 팀에서 뛰어달라”고 읍소해 결국 프로에 가지 못한 채 실업팀에 입단했다.
프로 입단을 미루면 그만큼 금전적 손해를 보는 게 아닌가.누가 아닌가. 그때 내가 한국화장품, (조)계현이가 농협, (송)진우가 세일통상이란 곳에 입단했다. 하지만 당시 실업야구단 월급이라야 30만 원 정도에 불과했다. 야구협회에서 그걸 알고 프로 입단을 미룬 선수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
보상금이라, 얼마나 됐나.500만 원이었다. 따지고 보면 야구협회가 500만 원으로 우리를 볼모로 잡은 거였다(웃음).
대표팀 선발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사양할 수도 있었을 텐데.굳이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그때 여론이 우리가 프로에 가면 “매국노” 소리가 당장 나올 판이었다(웃음).
서울올림픽에서 캐나다에 5대 3, 호주에 2대 1로 이기고 미국에 3대 5로 지며 예선 2위로 결선에 올랐다. 이윽고 준결승에서 ‘숙적’ 일본과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한 가지 바로 잡을 게 있다. 부정확한 야구사다. 많은 이들이 서울올림픽 준결승 한·일전 선발투수로 박동희와 노모 히데오가 나와 맞대결한 줄 안다. 하지만 당시 경기의 선발은 당신과 이시이 다케히로(주: 2003년 롯데 투수코치)였다. 박동희는 2번째, 노모는 3번째 투수로 출전했다.
1984년 LA올림픽 3, 4위전에서 선동열과 타이완의 궈타이위안(곽태원)이 연장 12회까지 투수전을 벌였다는 것(주: 이 경기의 타이완 선발은 장성슝이었고 궈타이위안은 출전하지 않았다. 선동열 역시 오명록, 한희민에 이어 3번째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과 함께 가장 잘못 알려진 야구사다.당신 말대로 선발은 당시 나였다. 일본 선발은 1992년 퍼시픽리그 MVP에 오른 바 있는 이시이였고. 수많은 일본전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서울올림픽 준결승전을 다시 볼 기회가 있어서 한 번 복기를 해봤다. (잠시 침묵하다가 혼잣말로)그때 고의사구를 내줬어야 했다.
고의사구? 무슨 말인가.(다시 혼잣말로)난 언제나 7회가 고비였다. 그 경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7회, 고의사구, 고비. 무슨 퍼즐 같다.7회 초 한국이 선취점을 내며 1대 0으로 앞섰다. 일본의 7회 말 공격만 잘 막으면 8, 9회를 쉽게 갈 수 있었다. 그때 일본 4번 타자가 (주: 나카지마 데루시)가 타석에 들어서는 게 보였다. 갑자기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유가 뭔지 아나?
글쎄.그 타자는 올림픽 후 일본프로야구에까지 진출한 선수(주: 니혼햄 파이터스-긴테쓰 버펄로스)한 강타자였다. 공교롭게도 다른 국제대회에서 그 선수에게 홈런을 두 방이나 맞은 적이 있었다. 그것도 각각 1대 0 상황에서. 결국 두 경기 모두 이기고 있다가 그 선수에게 홈런을 맞은 게 악재가 돼 지고 말았다. 그런데 다시 1대 0 상황에서 그 선수와 만났으니 이걸 우연이라고 할지, 신의 장난이라고 할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무척 난감했을 것 같다. 음, 하지만 다시 홈런을 맞았을 리는 없고. 어떻게 승부했나.(기자를 빤히 쳐다보며)왜 맞았을 리 없다고 생각하나.
그럼 혹시 다시 홈런을….(길게 한숨을 내쉬며)거짓말처럼 다시 홈런을 맞았다. 두고두고 후회할 공을 던지고 만 거다. 2년 전의 교훈을 되새기지 못한 내 책임이 크다.
서울올림픽 준결승 일본전에서 호투하는 김기범
2년 전의 교훈이라면.서울올림픽이 열리기 2년 전인 1986년 대학대회에서 당시 동국대 4번 타자였던 백인호(히어로즈 수비코치)선배에게 3연타석 홈런을 맞은 적이 있었다. 다행히 솔로 홈런만 맞아 4대 3으로 이기긴 했지만 고비가 있었다. 바로 백 선배의 4번째 타석이었다.
어떤 승부를 했을까 궁금하다.(곰곰이 생각하다가)그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이 오갔다. 투수에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感)’이란 게 있다. 당시 감에 정면승부하면 또 맞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3연타석 홈런의 굴욕을 깨끗한 삼진으로 되갚자는 생각 역시 강했다. 그래….
정면승부했나.그렇다.
역시 건대 에이스답다. 백인호를 삼진으로 처리했나.(고개를 흔들며)아니다. 고의사구로 내보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정면승부를 했다고 하지 않았나.난 정면승부를 했다고 했을 뿐 공을 어떻게 던졌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정면승부가 뭔지 아나.
자존심을 걸고 당당하게 타자와 맞서는 게 아닌가.(또박또박한 음성으로)진정한 정면승부는 자존심을 거는 게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개인의 자존심을 위해 팀을 희생시키는 게 아니라 팀의 승리를 위해 개인의 자존심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면승부다. 그때 백 선배를 고의사구로 내보면서 결국 우리는 동대를 4대 3으로 이길 수 있었다. 일본과의 서울올림픽 준결승전 7회 1사에서 나카지마를 고의사구로 내보냈다면 난 팀에게 알량한 자존심 이상의 것을 선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진.정.한 정.면.승.부.는 자.존.심.을 거.는 게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많은 걸 시사하는 말이다.(단호한 음성으로)투수는 절대 자기 느낌이 아닐 때는 공을 던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두 번 생각하면 안 된다. 첫 느낌 그대로 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그 경기를 통해 뼈저리게 느낀 교훈이다.
결국 1대 1 동점에서 등판한 박동희(작고)가 2실점 하며 1대 3으로 일본에 패하며 결승진출에 실패했다.당신과 이름이 똑같네(웃음). 비록 그 경기에서 지며 노메달에 그쳤지만 후회는 없었다. 다만, 그 이후로 다시는 일본전에 나설 수 없었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나서 당시 일본 대표팀 포수였던 후루타 아쓰야가 당신을 가리켜 “신비의 왼팔”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당신의 투구에 감탄했다는 건데.후루타, 노모 모두 우리 세대 아닌가. 그 친구들도 나처럼 올림픽이 끝난 뒤 바로 프로로 간 것으로 안다. 당시 후루타는 사회인 야구선수임에도 투수 리드와 2루 송구가 좋기로 소문 나 있었다. 물론 타격도 좋았다. 노모는 사회인 야구시절 때가 공이 더 빨랐다.
‘일본 킬러’의 조건
대학시절 김기범에게 3연타석 홈런을 쳤던 백인호.
현역은퇴 뒤 KIA 코치를 거쳐 현재 히어로즈에서
수비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 킬러’의 계보가 있다. 이선희-김기범-구대성-김광현이 그것이다. ‘일본 킬러’의 조건이 한눈에 들어온다.죄다 왼손투수들이지 않나.
일본 타자들이 특별히 왼손투수에게 약한 이유는 뭘까.(고개를 갸웃하다가)일본 타자들이 왼손투수에 약하다기보다 스윙 자체가 안에서 바깥쪽으로 펼쳐지는 ‘인 아웃’이 많다 보니 왼손투수에게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 ‘인 아웃’은 몸쪽으로 파고드는 공에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현역시절 당신의 일본 타자 공략법은 무엇이었나.역시 몸쪽 승부였다. 70%의 공을 몸쪽으로 던졌다. 구종도 몸쪽 승부를 하기에 적격이었다. 속구, 슬라이더, 슈트를 잘 던졌으니까. 여기서 슈트는 어디까지나 당시 표현이고 요즘 말로 정확히 표현하자면 투심패스트볼이 아니었을까 싶다.
투구 패턴은 어땠나.일정한 패턴은 없었다. 그날 경기 분위기나 앞선 경기에서 본 타자의 성향 그리고 내 컨디션을 종합 판단해 던졌다.
지난해 베이징올림픽에서 이선희-김기범-구대성의 뒤를 이어 김광현이 ‘일본 킬러’로 등장했다. 하지만 제 2회 WBC에서 다소 부진하며 ‘일본 킬러’의 명성에 흠집이 생겼다.김광현은 좋은 신체조건과 빠른 공 거기다 훌륭한 각도의 변화구를 갖춘 투수다. 결과적으로 김광현이 WBC에서 부진해 말들이 많았지만, 유달리 그 대회에서 컨디션이 나빴을 뿐이었다. 개인적으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생각이다. 아쉬운 대목이 있다면 하나다. 베테랑 투수였다면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자기 장점을 최대한 살려 던졌겠지만 경험이 미숙한 김광현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광현의 실투에 초점을 맞추는 이들도 많았다. 실투? 포수가 원하는 코스로 공을 던질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나. 절반도 채 안 된다. (마치 글러브를 쥔 것처럼 자세를 취하며)포수 무릎 위로 정확하게 공이 들어올 확률은 그보다 훨씬 낮다. 그런 관점에서 자세히 보면 거의 모든 공이 실투다. 결과적이지만 김광현의 실투보단 일본 타자들이 잘 쳤다고 보는 게 맞지 싶다.
어느 야구해설가는 김광현의 투구를 보면서 당신과 많이 닮았다고 했다.일단 릴리스 포인트가 높은 게 닮았다. 팔을 최대한 꼿꼿하게 세운 상태에서 팔 스윙을 짧고 빠르게 회전시키면 스피드와 낙차를 동시에 만족하게 하는 슬라이더를 던질 수 있다. 팽이를 연상하면 이해하기 쉽다. 왜 팽이도 옆으로 돌리는 것보다 위에서 찍으면 더 오래, 강하게 돌지 않나. 하지만 이러한 투구 폼은 어깨부상을 불러올 수 있다. (씁쓸한 표정으로)실제로 나도 어깨부상으로 상당히 고생을 많이 했다.
OB에게 선택받지 못한 대표팀 에이스. '곰 사냥꾼' 되다
재미 사업가로 ‘제2의 인생’을 사는 김기범. 그는 마운드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신념을 갖고 사는 이다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신인 1차 지명자로 MBC 청룡에 입단했다. 당시 대우가 좋았는데.계약금 4천만 원, 연봉 1천200만 원을 받는 조건이었다. 당시 MBC가 최고대우를 해줬다면서 얼마나 생색을 내던지(웃음). 하지만 차라리 1982년으로 돌아가 당시 특급선수들의 대우였던 계약금 2천400만 원을 받는 게 나을 뻔했다. 왜냐?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나서 물가가 ‘확’ 뛰었지 뭔가. 1982년 2천400만 원으로 강남아파트 40평을 사니 마니 했다면 우리 때는 꿈도 꾸기 어려웠다.
원래는 OB에 입단할 줄 알았다. 신인 1차 지명을 놓고 OB가 주사위 싸움에서 MBC를 이기며 국가대표 왼손 에이스였던 당신을 지목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성균관대 출신의 이진을 지명하지 않았나. 그럴 만도 했다. 당시 나는 혹사를 거듭하며 어깨가 좋지 않았다. 그에 반해 이진은 일단 구속이 나보다 빨라 신임을 얻었다.
서운했을 법도 하다. 속으로 ‘OB 너희 마음대로 해라’고 생각했을 뿐 서운한 감정은 전혀 없었다. 사실 나는 예전부터 MBC에 입단하고 싶었다. MBC에서 듣기 좋은 말로 “우리는 주사위 싸움에서 이겼어도 널 선택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거야 누가 알겠나(웃음). 어쨌거나 옛말에 ‘썩어도 준치’라고, 프로 입단하고 누가 더 성공작인가 보여주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프로 데뷔전이 1989년 시즌 개막전이었다. 신인 투수가 개막전 선발로 나가기란 좀체 쉽지 않은 일이다.당시 MBC 배성서 감독님이 2월 스프링캠프에서 날 불러 “네가 우리 팀 개막전 선발이다. 컨디션 조절해”라고 말씀하셨다. 시즌 들어서기 두 달 전부터 컨디션을 조절하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아무리 국가대표 출신이고 1차 지명자라곤 하지만 개막전 선발로 나간다는 건 역시 긴장되는 일이었다.
배 감독이 당신을 개막전 선발로 지목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며)글쎄, 잘 모르겠다. 프로야구 출범 이후 개막전에서 OB한테 매번 지면서 뭔가 승부수를 던져야겠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그러려면 기존 투수보다 신인투수가 낫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기대만큼 성적도 좋았다.개막전을 앞두고 잠을 자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이들은 큰 경기에 원체 강하지 않나. 그렇게 긴장이 됐는데도 초구 던지고 나니까 ‘딱’ 감이 왔다. 운이 따르려는지 프로 데뷔전을 겸한 개막전에서 4피안타 3볼넷 4탈삼진으로 OB를 상대로 완투승을 거뒀다. 그 뒤로도 OB 전에서는 특별히 좋은 성적을 냈다.
지금이야 두산이 8개 구단 최고의 스카우트 팀을 보유하고 있지만 당시 OB 스카우트 팀은 달랐던 모양이다.OB 스카우트 분들이 “너를 뽑았어야 했는데” 하면서 후회하던 게 눈에 선하다. 그때마다 내가 “그러기에 왜 그러셨어요” 하면서 짐짓 놀리곤 했다(웃음).
1990년 LG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시즌 성적도 5승 5패 평균자책 2.81로 좋았다. 11년간의 현역생활 가운데 그해 공이 가장 좋았다.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6⅔이닝 동안 2피안타 7탈삼진을 기록하며 삼성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지금도 그때 승리를 잊을 수 없다. MBC에서 LG 유니폼으로 갈아입으며 어수선한 와중에 차지한 우승이라 더 의미가 깊었다.
1990년 LG가 한국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우승했을 때
축하연 장면. LG는 최상의 구단주와 최고의 팬을
가졌으나 1994년 이후 가장 실망스런 팀이 됐다
프로 입단 뒤 투구스타일이 많이 바뀌었다. 제구가 좋아진 대신 속구 평균 구속이 시속 137km에서 142km 사이로 떨어졌다. 하지만 구질 자체가 묵직한 편이라 타자들이 느끼는 체감구속은 실제구속보다 빨랐던 것 같다.
1991년 12승 9패 평균자책 2.95를 기록했다. 164⅔이닝을 던져 개인 시즌 최다 이닝을 소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해를 기점으로 몇 년 간 하락세를 탔다.1992년 방위 복무를 시작하면서 좋은 흐름이 끊겼다. 훈련도 제대로 소화할 수 없었고. 하지만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1992년부터 1993년 소집해제될 때까지 18개월 동안 홈경기만 뛰며 17승을 거뒀다. 1992년에는 8승 가운데 7승이 완투, 1승이 완봉이었다.
어깨는 분필과 같고 지도자의 욕심은 허기진 아이의 배와 같다
1993년 방위 복무 마지막 해에도 전반기에만 8승을 올리는 투지를 발휘했다.
전반기 8승을 하고 나서 나도 깜짝 놀랐다. 평균자책도 2.10에 불과했다. 팀이 3점만 내줘도 지는 경기가 없었다. 그런데 당시 LG가 해태(KIA의 전신)와 1, 2위 순위싸움을 하며 그만 무리를 하고 말았다. (짧게 숨을 토하며)어느 순간 어깨가 아프기 시작했다.
코칭스태프에게 아프다고 이야기하지 그랬나.
(담담한 목소리로)했다. 그랬더니 “못 참겠느냐?”는 말이 돌아왔다. 그렇게 말할 때는 계속 던져달라는 뜻 아닌가. 어쩌겠나.
이런, 계속 던졌다는 뜻인가.
공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잘 던져도 계속 승수를 쌓는 데 실패했다. 전반기 8승 2패에서 시즌이 끝날 즈음이 되니까 9승 9패가 됐다. 평균자책도 2.60으로 많이 올랐고. 정규 시즌이 종료할 때는 어깨를 들 수 없을 만큼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투수에게 어깨는 분필과 같고 지도자의 욕심은 허기진 아이의 배와 같다. 어깨가 그 지경인데도 어째서 그해 준플레이오프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곰 사냥꾼’이란 별명을 달다 보니 엔트리에 이름을 올릴 수밖에. 왜 ‘연막작전’이라고 있지 않나. 덕분에 김형석을 비롯한 OB의 좋은 왼손 타자들이 나 때문에 선발출전을 하지 못했다. 결국 준플레이오프에서 OB에게 이긴 뒤 플레이오프부터는 엔트리에서 빠졌다.
1990년대 후반 LG 투수진은 '세대교체‘의 격랑 속에
순식간에 와해됐다. 사진 왼쪽부터
김기범, 송유석, 김용수, 최창호
그 여파일까. 이듬해인 1994년 3승 3패 평균자책 4.86을 기록했다.그해 선발투수로 나갔지만 누가 봐도 선발 공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중간계투로 2경기에 나와 4이닝 무실점으로 다시 한 번 팀이 우승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때 잘 던지고 나서 이광환 감독님이 내게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내년 시즌엔 네게 다시 선발 기회를 줄 것”이라고. 이 감독님은 약속을 지키셨고 난 감독님의 기대에 13승 7패 평균자책 2.86이라는 좋은 성적으로 보답했다.
재기에 성공한 원인이라도 있나. 단순히 감독의 믿음 때문이라고 보긴 어려운데.당시 LG는 8개 구단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재활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은 김연아의 전담 트레이너인 어은실 박사가 그때 팀 수석트레이너였는데 그분 덕을 톡톡히 봤다. 1999년 은퇴할 때까지 구속이 줄지 않은 것도 어 박사와 LG의 재활시스템 덕분이었다.
1995년 개인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다음해 4승 10패 평균자책 4.28을 거두며 평범한 투수로 전락했다. 게다가 시즌 중 보직도 선발에서 중간계투로 바뀌었고 그 이후 다시는 풀타임 선발투수로 뛰지 못했다.1996시즌 천보성 감독대행이 팀을 맡으며 팀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당시 천 감독님은 팀의 미래를 위해 ‘세대교체’가 절실하다고 느낀 것 같다. 그해를 끝으로 먼저 정삼흠 선배가 옷을 벗었고 김태원, 김용수(LG 2군 투수코치) 선배가 세대교체 리스트에 올랐다. 나 역시 1996년 단 2경기에 선발로 나간 뒤 중간계투로 밀렸다. (한숨을 내쉬며)1990년대 초반 한국프로야구를 휩쓸었던 LG 투수진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세대교체나 보직변경과 관련해 상심이 컸을지 싶다.처음에는 야구를 그만둘까도 심각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나중에 지도자가 됐을 때 투수의 다양한 보직을 체험한 것도 도움이 되리라 판단해 묵묵히 팀의 결정에 따랐다. 그 바람에 1998년 76경기에 출전하며 시즌 최다등판 기록(주: 1999년 두산 차명주가 83경기로 시즌 최다 등판기록 경신)을 세우지 않았나(웃음).
1998년 시즌 최다 경기등판 기록을 세운 김기범(사진 가운데)
이 ‘프로야구 올해의 상’을 수상한 뒤 기념촬영에
응하고 있다
1999시즌을 끝으로 야구계를 떠났다. 왼손투수가 부족했던 LG 사정을 감안할 때 2, 3년 더 현역생활을 연장할 수 있었을 텐데.(고개를 끄덕이며)아마 그럴 수도 있었을 거다. 그해 겨울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 파동이 터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LG에서 선수협을 이끈 주동자이자 책임자였다.
팀의 최선참 가운데 한 명이었다. 구단에 투항했다면 보장받을 수 있는 게 많았을 텐데.선수협은 ‘성공한’ 선수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공하지 못한’ 선수들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직이었다. 당시 LG 최선참 선수로 김용수 선배가 있었지만 그분은 우리가 지켜 드려야 할 분이었다. 팀의 또 다른 선참이었던 송유석과 “우리가 동료를 위해 목을 내놓자”라고 결의한 뒤 총대를 멨다.
선수협 파동이 일단락되며 대부분 선수가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표면적으론 그렇지만 많은 선수협 주동자들이 괘씸죄가 적용돼 다른 팀으로 쫓겨났다. 나는 구차하게 현역생활을 잇느니 스스로 옷을 벗겠다는 다짐을 했던 상태이기에 미련 없이 구단 측에 내가 먼저 은퇴 의사를 밝혔다. 결국 2000년 7월 16일 은퇴하자마자 8월 초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국 애틀랜타에서 골프장을 운영할 당시 메이저리그
에서 뛰던 김선우(사진 왼쪽)와 김병현(오른쪽)
선수가 방문한 사진
진정한 정면승부는 자존심을 죽이는 것이라 하지 않았나. 인생도 마찬가지 아닌가. 구단 측에 자존심을 숙였다면 당신을 사랑하는 팬들과 더 오랜 시간동안 함께 있을 수 있었을 텐데.(잠시 그라운드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그럴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난 ‘후배 선수들의 권익보장’이란 선수협의 가치를 구단과 사회로부터 인정받으려고 노력했고 어느 정도 구체적인 성과를 거뒀다. 이제는 과거처럼 시즌 20승을 해도 25% 연봉 상한선에 묶여 연봉 1천만 원의 선수가 다음해 연봉으로 1천250만 원을 받는 기형적인 시스템은 사라지지 않았나. 2군 선수들의 권익도 과거에 비하면 좋아졌다. (담담한 표정으로)정면승부는 좋은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방법론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당시 삶에 대항해 정면승부를 했다고 자부한다.
이름 : 김기범(金起範)
생년월일 : 1965년 12월 13일
체격 : 177cm / 78kg
이력 : 충암고-한국화장품-MBC 청룡-LG 트윈스
프로입단 : 1989년
통산성적 : 62승 61패 8세이브 평균자책 3.52
첫댓글 예전 하일성의원이 그랬었나? 허의원이 그랬었나? 슬라이더는 칼날이라고~ 넘흐 좋아했던 투수였는데 이렇게 뵈니 좋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