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사태는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을 계기로 정승화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취임하면서 수도권 지역의 주요 군 지휘관을 교체하는 등 내부개혁이 진행되면서 정치군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군 내부에서 부각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를 감행하여 불법적으로 군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12월 12일 저녁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합수부 소속의 허삼수·우경윤 대령에게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강제연행을 지시했다. 한국정치사에서 5·16이후 또 한 번의 군사쿠데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인사처장 겸 계엄사령부 소속 합동수사본부 조정통제국장이던 허삼수 대령은 합동수사본부 수사 제2국장 우경윤 등과 함께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저녁 6시 50분 경 무장한 제33헌병대 병력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공관 주변에 배치하였다.
이로부터 약 20분이 지난 7시 10분경 참모총장 공관으로 들어가서 총으로 위협하는 가운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여 강제로 끌고 나와 저녁 7시 30분경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로 연행하였다. 연행과정에서 참모총장 부관이 전화로 외부와의 연락을 시도하자 합수부측 보안사 수사관들이 권총을 발사해 양측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신군부는 큰 저항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함으로써 군사쿠데타에 성공했다.
같은 시간에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총리공관에 머물고 있던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저녁 9시 30분경 유학성·황영시·차규헌·백운택·박희도 등과 함께 집단적으로 대통령을 찾아가 재차 정승화 총장의 체포 및 연행에 대한 재가를 강압적으로 요구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부분에 대해 대법원은 12월 13일 새벽 5시 10분경 신군부세력의 주장대로 재가를 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정승화 총장이 이미 체포되었고 또 신군부 세력이 군권을 장악한 이후 이루어진 것으로서 '사후승낙'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란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결하고 있다.
12·12사태 다음날 아침 정승화 총장 연행에 대해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여했던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라는 짤막한 배경설명을 발표했지만 그 역시 신군부에 의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2·12사태를 통해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12월 13일 0시부터 새벽 6시 20분 사이에 육군본부·국방부·중앙청·경복궁 등 핵심 거점을 차례로 점령하고, 방송국과 신문사를 통제하에 두었다.
한편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체포하고 수도경비사령부에 모여있던 윤성민 참모차장과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문홍구 합동참모본부장 등 육군본부측 장성들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신군부 세력은 이듬해인 1980년 1월 20일자로 정승화 추종세력인 이건영 3군사령관과 정병주·장태완 등을 모두 예편시키고 정승화 참모총장에게는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이들과는 달리 12·12사태를 주도했던 신군부세력은 대부분 승승장구하여 권력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중장이 임명되었고 수도경비사령관에 노태우 소장,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소장이 임명되었다. 그 외에도 황영시·김복동·유학성·유병현·박준병 등 신군부 세력은 군 요직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이들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계기로 국가권력을 탈취함으로 긴 쿠데타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1980년 '서울의 봄'을 짓밟고 등장한 제5공화국의 뿌리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12·12사태의 진상은 그 후 십여년간 밝혀지지 못한 채 권력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가 김영삼 정부 아래서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이 구속되어 사법적 심판을 받는 과정에서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2. 신군부의 정치 장악
-미군의 지지
신군부세력에 의한 12.12쿠테타에 대해 군작전권을 보유하고 있었던 주한미군 수뇌부는 우려를 표명하였으며 12월 13일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는 정부, 군 요인들과의 회담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방해하는 어떠한 행동도 한미관계에 중대한 역효과를 미치게 될 것이라는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조금 후에 미국은 이러한 입장을 번복하였다. 12월 28일 위컴 한미연합 사령관은 “국가안보를 위해 국내불안이 있어서는 않된다.” “군은 국방에 전념하고 정치와 헌정은 민간 지도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경고하여 12.12쿠테타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국가안보를 위해 국내불안을 통제하여야 한다고 시사하여 암묵적으로 쿠테타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국가안보를 위해 국내불안이 있어서는 안된다.“ ”군은 국방에 전념하고 정치와 헌정은 민간 지도자에게 맡겨야 한다.“ 고 경고하여 12.12쿠테타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국가안보를 위해 국내불안을 통제하여아 한다고 사사하여 암묵적으로 쿠테타를 기정사실화하였다. 또한 미국은1980년 3월 1일 연례행사였던 ‘팀스피리트’ 한미연합작전 훈련을 예정대로 실시함으로써 신군부에 대한 지지를 확인시켜주었다.
-신군부의 정치세력화
더욱이 집권세력은 공화당을 중심으로 신당창당을 기도하면서 이원집정부제를 검토하기 시작했으며 헌법개정을 국회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현행헌법에 의해 정부가 주도하여 대통령이 발의하는 방안을 공표하였다. 1980년 3월11일 신현확 국무총리는 산케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유신은 국방과 경제 면에서 필요했던 조치였으며 유신체제를 부인하는 급속한 민주화는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고 밝혔다.
신군부가 공식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밝힌 것은 1980년 2월 9일의 계엄사령부 발표였다. 이 발표에서 신군부세력은 ‘정치발전이 우리의 안보태세를 방해해서는 안되며 정치과열현상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또 4월 14일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겸직 임명함으로서 신군부세력에게 권력을 증강시켜주었다.
이와같이 신군부세력의 권력이 강화되어 가던 과정에서 4월 30일 계엄사령부 전군지휘관회의의 결의가 공표되었는데 핵심내용은 “과격한 노사분규,학원소요, 일부정치인의 학원내집회는 안정과 질서를 해치므로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 주된 골자였다. 이것은5.17비상계엄령확대조치의 전조를 의미하는 것이였다.
-5.17비상계엄령확대 선포
12,12사태의 주역들, 신군부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실력자들은 유신연장 정권탈취의 음모를 가속화시키면서, 조속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에게, 1980년 5,17계엄확대를 선포함으로써 사실상 전두환 쿠데타를 일으킨다. 작전개시의 전야, 야당의 지도자 김대중씨 등 수많은 정치인,민주인사,학생들의 사전체포 구금이 시작되었고 학원가나 중요시가지에는 탱크가 배치되었다.
3. 5.18 광주 민중 항쟁
신군부세력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를 발표하고 민주인사들을 포 투옥하기 시작하자 광주에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과 이에 반발하는 학생 ·시민 연대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 항쟁은 5월18일 전남대정문 앞에서 휴교령 조치에 대한 대응으로 학생들이 이에 반대하고 있을 때 신군부의 공수부대와 이들에 대한 대비책이 전혀없던 학생들간의 최초의 충돌로 5월의 민중봉기가 시작되었다. 5월19일 대중의 투쟁은 그 중심세력이 대학생에서 시민 대중으로 바뀌면서 투쟁양상도 산발적이고 수세적인 저항에서 적극적 공세로 전화되었다. 계엄군에 대한 분노는 광주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시위군중의 무기 탈취로 인하여 무장한 시민들로 인하여 계엄군은 총퇴각을 한다. 민중봉기 4일째 교도소를 제외한 광주 전지역에 민중들에 의한 해방도시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후에 시민군은 도청을 접수하여 이를 작전상황실로 사용하고 계엄군의 동태를 감시 했다. 그리고 요구사항들을 제시했지만 협상은 결렬되었다. 시민군들은 관리 소홀에 의한 사고방지를위해 자발적인 무기들을 반납하였다.
도청앞 광장에서 대학생 중심의 수습위 주체로 제‘1차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열었다. 2차 대회에서 민중들은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고 관철시켜 나갔다. 일부 명예협상파와 투쟁파간의 투쟁노선의 분화와 대립이 보이기도 했다. 3차 대회에서 민중들은 스스로를 자유와 정의를 위해 궐기한 민주시민으로 그 책임 소재를 과도정부와 살인마 전두환으로 규정하고, 진정한 투쟁목표를 민주정부 수립으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투쟁파는 투항파를 물리치고 투쟁을 계속한다. 계엄군은 끊임없이 시민군 내부의 고란작전을 펴고 무력진압을 시사했다. 5월27일 계엄군은 작전을 개시하기 시작하였고, 광주공원과 도청을 비롯한 전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4천 여 명의 병력이 출동하여 유혈의 진압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광주 민중은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광주 항쟁은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의 권력장악에 대응하는 광주시민의 항거에서 비롯되었다.
3. 국보위 중심의 정권구축 과정과 야권의 대응
-국보위
신군부의 권력장악의 일환인 5·17 계엄 확대는 신군부세력의 반대급부로서 광주항쟁을 불러 왔지만, 그것의 진압과 동시에 군부의 실세들의 정권 장악을 위한 무든 구상와 작업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특히 보안 사령관과 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한 전두환 소장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동 기구의 상임위원장으로의 전면적 등장은 그의 대권장악의 예고된 수순이었다.
권력기관으로 전면에 나선 국보위는 소위 ‘정치·사회정화’ 조치의 전격실시로 여러 의원들의 공직을 박탈했다. 그리고 관료사회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공무원에 대한 정치적 지배력을 확립하기 위해 수많은 공무원들을 숙청하였다. 또한 대학에서는 1천 여명의 학생과 수백명의 교수들이 제적과 해직되었다. 그리고 언론기관의 통폐합, 언론 기본법을 제정하여 언론 통제를 강화하였다. 8월 4일 국보위가 발표한 ‘사회악 일소를 위한 특별 조치’에 따라 30587의 체포와 이들 중 19,867명이 군부대 내의 삼청 교육대에서 혹심한 구타와 중노동을 시켰다. 그리고 서울의 학생 시위와 광주사태는 김대중의 추종세력 배후조종하에 일어났으며 그간 사태책임은 모두 김대중씨와 그 추종세력에게 있다고 했다. 그리고 김대중에게 사형선고를 한다.
-야권의 대응
학생운동을 마감하고 사회에 진출한 청년들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하고 정치규제법에 묶여 합법적 정치활동의 기회를 박탈당했던 야당정치인들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결성하였다. 이는 구신민당 정치인들을 주축으로한 것이었지만 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가진 과거의 친여 세력도 포함되었다.
민추협과 비민추협인사들을 근간으로 형성된 창당 준비위원회는 창당 발기인대회를 개최하고 12대 총선을 25일을 앞둔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정식 출범 시켰다. 총재에는 이민우 창당위원장을, 그간 민추협을 이끌어 온 김영삼 공동의장·김대중 고문의 내락하에 추대하였다. 그리고 선거를 앞둔 시점이었기 때문에 임시기구로 선거대책 본부를 구성하여 총선에 임했다.
신민당의 지도노선은 창당 선언문에서 나타나듯이 민주화를 위해 민주적 역량을 총집결하여 민족의 주체세력으로서 모든 반민주세력과 요소들을 과감히 제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신당인 신민당은 민한당에 비해 전통야당의 인사들이 해금된 이후 참여를 확대한 결과 정당노선에 있어 선명한 이미지를 주었으며 이런 선명한 이미지를 내세운 신민당의 돌풍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2·12총선 결과 민정당 87석, 신민 50석, 민한 26석, 국민 15석, 신사 1석 , 신민주1석 무소속4석으로 신당 바람의 주역인 신민당의 돌풍이 실현되었다.
총선의 결과를 분석해 봤을 때 각당의 승인과 패인은 다음과 같다. 신민당은 지난 4년의 정치부재에 대한 국민적 변화와 기대가 바람으로 나타난 결과였다. 그리고 선명성을 부각시켜 기존 야당에 대한 공격을 통한 국민의 기대 심리를 자극한 데서도 성과를 낳았다. 특히 김영삼, 김대중 등 재야인사들의 후광과 대학생 중심의 젊은 신세대가 참여하여 승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민정당의 경우 국정미숙과 정치 활성화 미흡에 대한 국민적 심판으로 보고, 특히 당내 민주화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즉, 지도부의 경직된 공천방식과 국민적 인신의 소홀, 그리고 군사문화 지향주의가 패인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2·12총선에서 당조직과 훈련, 자금 동원으로 특표율과 안정의석 확보에는 성공했으나 집권당의 프리미엄에도 불구하고 대도시에서는 현저한 당세약화를 보여준 것이다.
4. 4.13 조치와 6월항쟁
-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 투쟁
전두환 정권의 장기집권 음모가 노골화되어 갈수록 민중의 저항 의지는 그에 비례해서 한층 높아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사태를 극적으로 뒤집는 사건이 터졌다. 경찰이 서울대생 박종철군을 고문, 끝내 목숨을 앗아가고 만 것이다. 사건이 터지자 당국은 평소 해왔던 대로 사건을 얼버무리려 했다. 경찰 당국은 박종철 군이 심문을 시작한 지 30분 후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발맞추어 문공부 홍보조정실은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시달하여 '박군이 심장마비로 쇼크사한 것으로, 1단 기사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부검 결과 박군은 수십 군데에 이르는 피멍 자국이 있었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은 흔적이 뚜렷했다. 이 사건은 곧장 전두환 정권의 본질을 폭로하면서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성명서 발표와 추도미사 및 기도회, 항의농성 등도 잇따랐다.
이같은 민중의 거센 항의 열기에 김대중, 김영삼 양김씨는 통일민주당 창당을 선언했다.
통일민주당의 창당은 미국의 주도 아래 진행된 보수대연합 시나리오가 파탄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고 마침내 전두환은 민중의 개헌 요구를 거부하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그러나 4·13 호헌조치는 즉각 거센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켰고 각계각층속에서 호헌조치를 반대하는 서명과 농성이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 동안 전두환 정권의 폭정에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던 사람들이 다투어서 반독재 합류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급속도로 고립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던 중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중요한 사건이 터졌다.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7주년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당국은 철저하게 이 사건을 은폐했고 그 과정 일체도 조작해서 국민을 다시 한번 속였다"며 박종철 군을 고문한 경관이 모두 다섯 명임을 폭로했던 것이다. 민중은 경악했고 여론은 들끓었다. 민중의 분노는 한 점의 불꽃만 당기어진다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킬 기세였다. 이제 민중의 분노만 담아 낼 그릇만 준비하면 되었다. 이러한 여망을 딛고 마침내 5월 27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과 통일민주당이 주축이 되어 광범위한 민주세력을 묶어 세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탄생했다. 민중들은 국민운동본부를 통해 범민주세력이 하나로 단결되었음을 보았다.
- 6월 항쟁
6월 10일 아침,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 같은 육사 11기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손을 마주 잡고 치켜올림으로써 권력승계 절차가 원만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과시했다. 그러나 이날의 잠실 체육관은 분노한 민중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외로운 섬이었다.
같은 시간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22개 도시는 24만여 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1만 8천5백 명)이 참여한 가운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이날 서울에서만도 30여 군데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초조해진 경찰은 해가 지자 더욱 포악해져 무차별 폭행을 가하면서 전국에 걸쳐 3천8백여 명을 무차별 연행했다. 그러던 중 서울 도심의 시위대 일부가 명동성당으로 밀려갔다. 밤 10시가 되자 8백 명으로 불어난 명동성당의 시위대는 횃불을 들고 맹렬한 투석전을 벌여 경찰을 밀어내고 바리케이트를 설치했다. 이것이 전국을 휩쓴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된 5일간의 명동성당 농성투쟁의 시작이었다.
민중의 투쟁 열기는 갈수록 높아져 6월 18일 전국 16개 도시에서 항쟁 기간 중 최대 인파인 1백50만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8만 6천 명)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투쟁의 파고는 높아지고 경찰력은 한계가 드러냄에 따라 전두환 정권의 일각에서는 군대를 투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급속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정작 분노한 민중은 정권의 군투입 위협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군이 투입되면 결연히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의지가 민중들 사이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군투입 위협에 맞서 가장 과감하게 투쟁했던 것은 부마항쟁의 주역이었던 부산시민이었다. '최루탄 추방대회'가 열린 6월 18일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전개되었지만 그 규모와 치열함에서 부산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부산시민들은 자신들이 움직이면 정권이 바뀐다는 확신으로 이번 기회에 아예 정권을 갈아 치우자는 의지를 갖고 적극적인 투쟁을 벌여 나갔던 것이다.
부산에서의 대대적인 항쟁은 전국적으로 커다란 파급 효과를 가져왔으며 그 중에서도 광주시민에게 준 영향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이제 우리 민중은 광주민중항쟁의 세례를 받은 뒤 새롭게 투쟁의 현장에 나선 상태였다. 광주민중항쟁의 불씨가 전국에 퍼져 나가 마침내 수많은 불기둥을 만들어낸 순간이 바로 1987년 6월항쟁이었던 것이다.
6월 26일 국민운동본부의 제창에 의해 개최된 '국민평화대행진'에서 전국의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백만 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5만 8천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광주에서는 약 30만의 시민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 6.29 항복 선언
이미 6월 20일부터 백악관에 한국대책 특별반을 편성하여 운영하는 등 당황한 빛이 역력했던 미국은 더욱 공개적으로 한국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항쟁기간 동안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6월 26일의 투쟁이 벌어지자 더 이상 지체할수 없다는 판단에 도달했다.
결국 6월 29일 한국의 텔레비전에는 노태우가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 자리에서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의 수용과 구속자 석방 및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예의 6·29 선언을 발표했다. 6·29 선언이 민중을 뿌듯하게 했던 것은 거듭되는 군투입 위협에 맞서 항쟁을 계속했고, 그 결과 군투입 기도를 파탄시켜 내면서 끝내 항복선언을 받아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 총칼의 위협 앞에 맥없이 굴복해야 했던 굴종의 시대를 자신의 손으로 마감한 것에 대한 벅찬 환희였다.
그러나 민중들은 냉정을 잃지 않았다.
6월항쟁은 기나긴 압제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매듭 하나를 푼 것에 불과했다. 이러한 민중의 마음가짐은 항쟁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규모 행사를 통해서 뚜렷이 표현되었다. 6월 9일 직격탄에 맞아 여러 날 사경을 헤매다 숨을 거둔 연세대생 이한열 군의 장례식이 치러진 7월 9일 광장에는 1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로 가득 메워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군 장례식은 항쟁의 마무리이자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는 자리였다.
이러한 6월 항쟁의 불길이 노동현장으로 옮겨 붙음으로써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 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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