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문학사에서 영과회의 위치
일제 강점기에 대구의 미술단체로는 향토회 이전에 영과회가 있었다. 영과회는 자료가 부족하여 그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1927년에 노동공제회관에 제 1회 전시회를 가진 사실도 최근에야 알려졌다.
이원식의 증언에 의하면 영과회는 향토회와 이념적으로 반대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미술 단체이다. 최근에 제 2회 영과회 전시와 관련된 자료가 발굴됨으로 영과회에 대한 재평가가 시도되고 있다. 1928년 3월 영과회의 전시회에 작품 모집 요강을 알리는 기사가 매일신보에 실렸다.
“대구에 있는 문예소년과 미술소년들로 조직된 대구 O(零)과회에서는 동아, 조선, 중외, 매신 네 신문지국과 무영당 서점의 후원 밋테서 오는 사월 이십 팔일부터 오월 이일까지 연 오일간 신정(新町) 조양회관에서 제 2회 O과회 전람회를 개최하리라는데 작품 모집에 대한 주의 사항은 아래와 갓흐며, 동호자(同好者)는 밋치는 대로 만히 출품하야 주기 바란다.”
신문기사에 의하면 영과회 전시는 기성 작가들의 단체전이기 보다는 소년(학생일 것이다.)을 대상으로 하는 공모전의 성격을 띄고 있다.
광복이 된 후에 영과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이상춘에 대하여 절친한 친구였던 신고송이 조사를 발표하였다.
“그 뒤 우리는 대구에 있는 소년 작가, 소년 화가들이 작품(동요, 시, 그림 등)들을 모아 전람회를 열었다.
신고송은 대구사범학교를 다니던 1927년에 동요시인 윤복진과 동인잡지를 냈다. 김용준을 위시한 향토 작가에게 삽화를 부탁하였다. 그때 이상춘은 삽화작가로 참여함으로 서로 가까워 졌다. 이상춘이 영과회에 핵심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최근에 제 2회 영과회 전시에 출품한 사람의 명단이 발굴되었다. 작품은 동인과 찬조 출품자로 나뉘어져 있었다. 동인의 작품은 다시 양화부와 동요부로 나뉘어져 있으므로, 전시회가 미술 전시회가 아닌 미술과 문학을 아우러는 예술 전시회로 보아야 한다. 양화부는 다시 동인의 작품과 찬조 출품작으로 나누어서 명부를 작성하였다. 문학분야에서는 동요부와 시가부로 나누었다. 3회전(1929)은 동인과 비동인의 친조 작품으로 나누어서 전시한 것이 특이하다.
2회전에 출품한 사람을 오늘까지 이름이 알려져 있는 유명인을 거명해 보면 양화부에는 배명학, 김성암, 이인성, 이갑기, 이상춘이 동인으로 출품했고, 박명조, 김용준, 서동진, 최화수가 찬조 출품하였다. 동요부는 동인과 찬조자의 구분이 없었다. 이원수, 윤석중, 방정환, 신고송, 윤복진이고, 시가부는 김용준, 이상화, 최화수였다.
*표
회수 | 기간 | 장소 | 양화부 출품 작가 | 동요부, 시가부 출품작가 | 보도 |
2회 (1928) | 4.28 - 5.2 | 조양회관 | 박효선. 배명학. 최유근 주정환. 허소양 . 권태철 주재환. 백남익. 김영교 김영호. 김성암. 김삼선 이인성. 이종용. 이갑기 이상춘. *찬조출품 박명조. 김용준. 서동진. 士 肥春草. 최화수. | *동요부 천정철. 최경화. 이원수 홍태유. 최인준. 임동혁 윤석중. 강중규. 송완순 최창화. 조광걸. 최영애 선우만년. 최순애 추범 서덕출. 송무익, 김려수 방정환. 한창동. 백합화 박태석, 정문진, 파랑새. 신고송., 윤복진 *시가부 이원조. 남만희. 이상타. 남만희. 김용준. 이상화 최화수. | 중외일보 28.4.30
동아일보 28.4.30
매일신보 28.3.22 조선일보 28.4.29 |
1928년에 이상춘, 이갑기, 배명학은 20세이었고, 이인성은 16세, 이원수와 윤석중은 17세, 신고송과 윤복진은 21세 이었다. 이들은 잡지 ‘어린이’에 쟉품을 투고 하면서 서로가 알고 있는 사이였다. 윤복진(1907 – 1991)은 대구 화원보통학교를 나와서 계성학교를 다녔다. 일본 호세이 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귀국하여 아동문학에서 활발히 활동하다 6.25때 월북하여 꾸준히 활동했다.
이러한 자료들을 분석해보면 영과회가 서양화의 기성 작가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 아니고 소년들의 예술 활동을 이끄는 단체로서 조직력은 아주 약한 단체로 보아야 한다. 더욱이 신고송 등이 사범학교에 다녔다는 것은 소년 예술 운동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해준다. 더욱이 신고송의 증언에 의하면 O(零)의 읽기에서도 확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사범학교 학생들이 소년 예술 운동을 진작하였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과회에 참여한 이들 중에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한 사람이 나오면서 소년 예술운동을 한 사실은 유야무야 되고, 사회주의 이념의 미술 단체로 오해하게 되었다.
이 글은 미술단체로서 영과회를 조명하는 대구미술사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영과회의 전시에 문인들이 참여한 기록이 있다. 이 명단에는 대구의 문인들이 다수 있으리라 생각되어서 미술자료는 삭제한 자료를 올린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이 자료를 가지고, 일제강점기의 대구 문학사를 보완해주시면 고맙겠다.
첫댓글 새로운 글 접해 봅니다.
전 대구수필문여대 학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