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봉쇄 50년이 지나서야 한국은 쿠바와 외교 관계를 시작했다.
쿠바는 미국의 경제 봉쇄로 힘들었지만, 얻은 것이 더 많다.
비료와 석유가 공급되지 않아, 농업은 유기농이 되었고, 수도 아바나의 공기질은 마치 시골 공기처럼 깨끗했다.
그리고, 쿠바 전 지역을 돌아다니는 공중의들은 말을 타고 다닐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오히려 공중의들과 주민들의 교류를 더 빈번하게 해 주었다.
쿠바의 의료시스템은 무상의료이고,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심지어 쿠바 정부가 사탕수수 왁스 성분으로 만든 폴리코사놀은 전 지구인들이 사용하는 건강 보조 식품이다.
미국이 소유했던 쿠바 담배 공장은 국유화가 되어 국민들의 일자리를 만들었다.
쿠바의 화폐는 국내용과 외국인용으로 나뉘어져 있으면 국내용 화폐는 달러의 영향이 없다.
오히려 쿠바 봉쇄는 쿠바로서는 더 잘된 일이었다.
1962년 10월 22일 존 에프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어 중대발표를 했다.
플로리다반도에서 남쪽으로 200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공산국가 쿠바에서 소련이 미국을 겨냥한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중이라는 내용이었다. 케네디는 쿠바에서 핵무기가 발사될 경우 미국도 핵무기로 대응하겠다며, 쿠바를 둘러싼 해상 900여㎞를 무력으로 봉쇄한다고 선언했다. 50년이 지나도록 여태껏 지속되고 있는 쿠바 봉쇄의 시작이었다.
그 뒤 미국은 동맹국들을 동원한 다양한 정책으로 쿠바를 옥죄어 왔다. 대표적인 것이 1996년 제정한 ‘헬름스-버턴 법’이다. 이 법은 쿠바와 상거래를 하는 국가나 개인에게 미국이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런 봉쇄의 결과로 쿠바는 2011년 12월까지 모두 1조 660억달러의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국제사회의 시선은 어떨까. 쿠바 봉쇄 50돌이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13일 유엔총회에선 쿠바에 대한 경제봉쇄 해제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표결에 부쳐졌다.
결과는 찬성 188표, 반대 3표, 기권 2표였다. 반대표를 행사한 나라는 미국과 이스라엘, 팔라우뿐이었다. 미국이 제 나라 이익에 몰두해 주도하는 ‘힘의 외교’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징표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1959년 쿠바 혁명을 이끈 전설적 혁명가 체 게바라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체 게바라-뉴맨>이 11월29일 개봉했다. 영화 개봉에 맞춰 한국을 처음 방문한 게바라의 맏딸 알레이다 게바라는 서울대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쿠바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이 많다. 외부세력은 우리를 붕괴시킬 수 없다.”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와 가치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새로운 성찰을 촉구하는 메시지다.
세계적인 밴드 퀸은 그토록 바라던 쿠바에서 공연하였고, 그 장면은 지금도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