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밤에 월광 소나타가 흐른다. 달빛 대신 차창을 타고 내리는 밤비가 마음까지 흠뻑 적신다. 베토벤의 월광은 운명처럼 나에게 왔다. 그날은 신부님의 영명 축일이어 조촐한 축하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사제의 삶으로 살아가는 영상을 보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웃음꽃이 만발하다가도 눈물이 핑 돌며 숙연해지는 순간도 많았다. 낯선 공동체에서 유학 생활의 어려움 중 위로가 되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이 있었다. “음악이요!” 짐작으로 답한 행운이 신부님께 큰 위안이 되었다는 음반 ‘월광’(moonlight)을 선물로 받았다. 가끔 꽃꽂이를 하러 수도원에 가면 강당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리곤 했다. 기척을 느낀 신부님은 연습 중이라 시끄러울 텐데 괜찮겠냐고 어려워하신다. 오히려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유순하고 겸손하신 심성이 겉으로도 드러난다. 해맑은 청년이었던 첫 만남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부끄럼이 많고 순수한 모습이 변함이 없으시다. 평소 꾸준한 연습으로 축일 날엔 기타나 피아노 연주로 즐거움을 선사하시는 신부님의 모습에서 음악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둔 밤에 길을 잃어 돌고 돌아 얼마를 헤매었는지 아이들과 약속 시각을 훨씬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기억이 나지 않아 혼돈의 세계를 헤매다가도 곰곰 유추하여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곤 한다. 달빛 없는 밤에 월광은 흐르는데 기억은 온전치 못해도 아직은 사고하는 능력이 남아 있음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고 스스로 자신을 달래본다. 피아노의 진동을 느끼려 얼굴에 막대기를 대고 몰입하는 청력을 잃은 베토벤, 절망을 뿌리치고 고뇌의 숲을 지나 환희로 나아가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슈퍼 문(super moon)의 영향으로 천재지변이 발생할 수 있다는 괴담보다는 옥토끼가 방아 찧는 보름달을 기다린다. 블루문은 불행의 징조라고 믿는 벽안의 여인네가 아니라 정화수 맑은 물에 소원을 빌고 비는 소복의 여인이고 싶다. 온 천지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던 은빛 나라를 날아오르던 기쁨을 불러온다. 달그림자를 밟으며 이집 저집 밥 얻으러 다니던 그 아이들은 다 어디 있을까, 엊그제 같은 정월 대보름날이 화롯불처럼 따스하다.
에콰도르에는 세상 끝이라 불리는 그네(La casa del arbol)가 있어 사람들은 아찔한 묘미를 즐기기 위해 가는 줄에 생명을 건다. 온통 암흑뿐인 세상 끝 벼랑에 서 있는 비통이 엄습하면 나도 그네를 탄다. 구태여 먼 나라까지 가지 않아도 뒷마당에 그네를 맨다. 새들도 쉬어가라고 인동 그늘에 달아 준 그네는 초저녁이면 달빛이 대신 그네를 탄다. 고요한 달빛 아래 별들이 내려오고 피아노 위에 청포도가 영롱히 빛나던 그 밤을 더듬어 찾아간다. 창호에 어리는 댓잎의 그림자는 님 오시는 기척일까, 노랗게 방바닥에 앉은 달빛을 손 모아 담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하루 먼저 뜨는 고향의 달님이 머리맡에 당도하면, 달그네를 타고 날아가는 자작나무 숲에 푸른 달님이 한 개 두 개 자꾸만 늘어난다.
슈퍼문이 뜬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왠지 내 달은 콩알만큼 작은 한가위 달님이다. 구름을 뚫고 아득 높은 비상으로 속진의 때를 모두 벗어 놓고 창공을 나르며 밤새 달그네를 탄다. 힘드니까 이제 그만 내려오라고 발 구르며 재촉하는 이가 있다. 오돌돌 떨고 있는 춥고 시린 몸을 다사롭게 감싸주는 달빛은 자애로운 이불자락을 덮어준다. 오로라 새벽의 여신이 이마를 짚어주며 들려주는 이야기, 청력을 잃은 후에 오히려 더 많은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킨 이가 있단다. 그는 절망하여 죽으려 했으나 예술이 붙잡은 큰 사람, 악성이 되었다고 토닥인다.
그제야 달그네를 허공에 달아놓고 꿈속에서 벗들과 그네를 탄다.
이웃집 벗들과 내기 그네를 뛰었지요/ 띠를 매고 수건 쓰니 신선놀음 같았어요/ 바람 차며
오색 그넷줄 하늘로 굴려 오르자/ 댕그랑 노리개 소리가 나며 버들에 먼지가 일었지요// 그네뛰기 마치고는 꽃신을 신었지요/ 숨 가빠 말도 못하고 층계에 섰어요/ 매미 날개 같은 적삼에 땀이 촉촉이 배어/ 떨어진 비녀 주워 달라고 말도 못했어요 -그네뛰기/허난설헌-
늦잠에서 깨어보니 아직도 미덥지 못한지 달님은 하얀 얼굴 되어 내려다본다. 그만 쉬시라는 아침 인사에 낮달은 구름 속에 숨어들고 바람은 달그네를 가만 어루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