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8월19일 [(녹)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제1독서 판관기 2,11-19
복음 마태오 복음 19,16-22
◈ [서울]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2019년 다해 8월19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매일 아침 산책하는 것이 취미이며 운동입니다. 성당, 현대시장, 성현동
성당, 봉천 고개, 상도 중학교, 중앙시장, 성당입니다. 1시간 30분
정도 걷습니다. 중간에 운동기구가 있어서 허리, 다리 운동을 합니다.
요즘은 방학이라 학생들을 보지 못하지만, 학생들의 생기있는 모습을
보는 기쁨은 덤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한 학생이 빨간불인데 건널목을
건너려고 했습니다. 저는 급히 학생을 불렀습니다. 학생은 스마트폰을
보면서 무심결에 건너려고 했습니다. 스마트폰이 좋고, 중요하겠지만
건널목을 건널 때는 신호를 꼭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옷을 입고 삽니다. 옷은 간편하고, 실용적이면 좋습니다. 사제는
사제의 복장을 하면 좋습니다. 스님은 승복을 입으면 좋습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품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옷을 입습니다. 체면이라는 옷, 가식이라는 옷, 직책이라는 옷,
욕심이라는 옷, 시기와 질투라는 옷, 책임이라는 옷, 도덕과 규율이라는
옷입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옷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옷이지만 말과 행동으로 그 사람이 입고 있는 마음의 옷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옷’이라는 이야기를 남겨주었습니다. “그대의 옷은
그대의 아름다움은 많이 가리면서도 아름답지 못한 것은 가리지 못하는
것. 그대는 옷으로 개인의 자유를 얻으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갑옷이
되고 사슬이 됨을 깨닫게 되리라. 그대가 옷을 좀 덜 입고 살을 좀 더
내놓아 태양과 바람을 더 많이 만날 수 있기를. 생명의 숨결은 태양
속에 있고, 생명의 손길은 바람 속에 있으므로. 잊지 말라. 부끄러움은
순수하지 못한 이의 눈을 가리는 방패일 뿐. 순수하지 못한 것이 거기
더는 있지 않을 때, 부끄러움은 오히려 마음의 족쇄, 마음의 얼룩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잊지 말라. 대지는 그대 맨발의 감촉을
기뻐하고, 바람은 그대의 머리카락과 장난치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오늘 복음에서 한 젊은이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젊은이에게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살인해서는 안 됩니다. 간음해서는 안 됩니다.
도둑질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해야 합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젊은이는 규율과 율법이라는 옷을 잡 입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예수님께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체면,
가식, 율법이라는 옷까지 벗으라고 하십니다. 욕심, 시기, 질투라는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아를 보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자아를 보면 누군가에게 묻지 않아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보입니다.
모범생들은 열심히 살았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공부도 잘했고, 법도
잘 지켰고,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학생 중에도 이런
모범생들이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잘하는 학생들입니다. 그런
모범생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큰 사명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컴퓨터도, 내비게이션도 업그레이드를 시켜 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모범생이라 해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보다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 나라를 향한 달음질
2019년 다해 8월19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하느님 나라를 향한 달음질>
복음: 마태오 19,16-22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항상 “당신도 할 수 있어요. 내가 했는데 당신이
왜 못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일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이 따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영화 터미네이터로 유명한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보디빌딩에서 전설로 남은 인물입니다. 미국에 이민 온
오스트리아계 유학생이었지만 20살 때에 세계 최연소로 미스터
유니버스 대회에서 우승합니다. 그의 목표는 세계 최고의 보디빌더가
되는 것이었고 그것을 통해 영화배우가 되어 많은 돈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보디빌딩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잘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니 영양을 보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학에
다니며 건축현장에서 막노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루 5시간씩
대학교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였습니다. 이것만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저녁 8시부터 12시까지는 연기연습을 했습니다. 그는 하루의 단 1분도
허비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수많은 영화에 출현해 성공작을 만들어냈고
나중엔 캘리포니아 주지사까지 하게 됩니다. 지금은 은퇴하고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강사로 활약 중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 나도 하면 할 수 있다. 근데 왜
그렇게 고생하며 살아야 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평범하게 살다
천국 가면 되는데 왜 그 고생을 하면서 살아야할까요? 예수님이라면
그런 자수성가한 동기부여 강사의 말에 어떤 대답을 해 주실까요?
예수님은 그렇게 성공을 목표로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나무라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만약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장려하실 것입니다. 대부분의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부자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와서 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냥 하느님 나라에만
들어가도 좋기는 하지만 더 큰 상을 추구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만약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은 상을 받고 어떤 사람은
상을 받지 않는다면 하늘나라에서도 조금은 마음이 상할 것입니다. ‘
내가 왜 조금 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라는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도 이 세상에서 노력한 것만큼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습니다.
영어 격언 중 매우 짧으면서도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No Pain, No Gain”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공허하다고 말하며
그냥 하루하루 연명하듯이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우리는 분명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을 허비하라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목표가 있어야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만드신 이유를
찾아야합니다. 그리고 목표를 찾았다면 열심히 달려야합니다. 노를
저어야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필리 3,12-13)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는 지금 가진 돈을 가지고 불편하게 살아가는
삶을 두려워했습니다. 고통을 받기를 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편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상을 타고 싶다면
고통을 즐겨야합니다. 무료함과 지루함을 사랑해야합니다. 그것 없이는
어떠한 성취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무하마드 알리에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 번은 기자가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때 알리는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윗몸일으키기를 몇 개나 하시죠?”
알리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픔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세지 않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세기 시작한다는 것일까요? 고통이 와서 그만하고 싶을
때부터 세는 것입니다. 힘이 들 때부터 진짜 운동이 되기 때문에 더
많이 하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에서 상을 받고 싶다면 내가 견딜 수 있는 시간보다
10분 더 성체 앞에 앉아 있으려고 노력합시다. 내가 할 수 있는
묵주기도보다 1단만 더 하도록 해 봅시다. 내가 읽은 성경보다 1절만
더 읽으려고 해 봅시다. 이런 ‘조금 더’들이 쌓이면 하느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도 그만큼 더 쌓이게 될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연중 제20주간 월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8월19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19,16-22: 하느님 나라와 부자 젊은이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16절) 돈 많은 젊은이가 예수님께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청했다.
그 젊은이가 생각하는 영원한 삶이란 자신의 만족과 함께 하느님을
함께 누리고자 하는 편안함이었던 것 같다. 이 질문은 율법을 잘 지키고
선행을 쌓음으로써 그 대가로 영원한 삶을 받겠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 계명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8-19절)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 젊은이는
그 계명들을 지켜왔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 외에 영원한 생명을 위해
또 다른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런 그에게 더 큰 계명이 주어진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그것을 잃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율법을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는
슬퍼하며 떠나갔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의 선택만이 남아있다. 완전하게 되려고 한다면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판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즉 악을 끊고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본받고
그분이 가신 길을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가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이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 준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영적인 부를 나누어 받아 자신에게 모자라는 것을 채움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해도 영적인 선물은 풍성히 받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일 것이다.
그 젊은이는 이 말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22절)고 한다. 그는
재산을 아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잘 지켜왔다고 했지만,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든지 간에
아직은 미성숙한 사람이었다. 그 젊은이의 비극은 그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이웃에게 봉사하기보다는 그 재물에 더 아까워하고 마음이
집착되어 있다. 당연히 예수님께 등을 보이지 않을 수 없으며, 무엇인가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데, 결국 재물을 포기할 수 없을 때, 오늘
복음의 젊은이처럼 슬픈 얼굴로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가르치고 있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8월19일 월.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 21)
가난함과 영원함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생명의 소유권은 언제나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삶인 나눔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나눔의 삶은 하느님을 향하는 삶입니다.
그냥 생명의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생명의 하루이길 바라십니다.
영원한 오늘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욕심과 집착으로부터 우리를 살리십니다.
끊임없이 내려놓는 여정을 우리는 걸어가야합니다.
하느님 아닌 것에 매달려 살고있는 우리를 반성합니다.
지나가고 사라지는 허망한 욕심이 아닌 쏟아지는 은총
영원한 생명이 있을 뿐입니다.
나눔이라는 영원한 생명을 향합시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돈이 다가 아닙니다! 돈 없이도 살만합니다!
2019년 다해 8월19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돈이 다가 아닙니다! 돈 없이도 살만합니다!
가끔씩 어깨 너머로 자주 듣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나라, 돈만 좀
있으면 정말이지 살만한 곳이다.” 비록 우리나라 뿐이겠습니까만,
따지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좁은 땅덩어리지만 여기저기 즐기고
누릴 곳 많지, 돈 좀 있으면 어디 가나 대우받지, 치안 안전하지...
그러다보니 돈이라는 것이 점점 위로 치고 올라와 우리네 삶 가운데
가장 윗자리를 떡 하니 차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한 존재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가진 것 없으면 어디가나 홀대받고 무시당하기 일쑤입니다.
과도하게 돈돈! 하다보니 지금 돈은 최고의 자리를 넘어 하느님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이른바 배금(拜金) 주의, 즉 돈 앞에 무릎 꿇고
절하는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경제적으로 위축된
삶을 살아가는 약자들, 빈자들, 노인들, 환우들은 시대의 변방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부모 자식간에도 서로를 향한 기대치가 확연히 다릅니다. 특히
물질적 유산(遺産)이 넉넉한 가정에서는, 그로 인한 갈등과 상처가
빈발합니다. 유산 분배 과정에서 눈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현실과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저희 집안은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남겨주신
물질적 유산이 없으니 그에 대한 기대치가 조금도 없습니다. 단
신앙이라는 멋진 유산을 남겨주셨으니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합니다.
앞다투어 효심을 발휘합니다, 따지고 보니 유산 많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네요.
이런 황금만능주의 시대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역할이 막중합니다. ‘돈돈! 뭐니뭐니 해도 돈이 최고다!’
하는 세상 앞에 돈이 다가 아니라고 외쳐야겠습니다. ‘돈만 있으면
살만하다!’고 부르짖는 세상 앞에서 ‘돈없이도 살만하다!’고
외쳐야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되면 즉시 다가오는 것이
당혹스러움이요 난감합입니다. 그만큼 우리 역시 자신도 모르게
배금주의, 황금만능주의에 깊이 빠져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곰곰이 따져보면 돈 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대상들이 참 많습니다.
언젠가 영성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아주 존경하는 한 인물을 만나 차와
담소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만남 한번이 제게는 수억 나가는
금은보화보다도 더 소중했습니다. 그 만남이 제게는 몇천만원 공돈
생긴 것 보다 더 기뻤습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생에 한번씩은 체험하는 바입니다.
한 존재가 바람결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우연히 다가옵니다.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합니까? 뭐라도 있으면 다 주고 싶습니다. 그 무엇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한 대상은 돈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지난 인생사와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주변 환경을 찬찬히 한번 살펴볼
일입니다. 과연 돈보도 더 우위에 있는 대상, 돈과는 비교가 안되는
특별한 것이 무엇인지 유심히 한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없을 것 같지만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 대상들을 찾아내고, 그
대상들에 더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더 깊이 사랑하는 노력,
그것이 배금주의와 황금만능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좋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황금만능주의에 흠뻑 젖어 살아가는 한 유다 청년과,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해서, 참으로 듣기 거북한
쓴소리를 건네십니다. 그러나 외면하지 말고 귀담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 자리에서 주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가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오 복음 19장 21절)
버림과 추종을 주제로 한 예수님의 말씀에 어떤 분들은 그러실
것입니다. ‘나는 수도자로서 이미 다 버렸고, 이미 주님 추종의 길로
깊이 들어섰으니,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려니...’ ‘나는 팔것도
나눌 것도 없는 사람,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도 벅찬 가난한 사람인데,
나는 해당사항 없는 듯!’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 삶 속에는 재물 못지 않은 것들, 재물에
준하는 것들이 다양한 대상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내가 목숨이
끊어져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대상들이 있습니다. 이것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 나만의 달란트, 내 삶
전체...!
그것들을 필요한 이웃들과 공유하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 아주 좋은
포기요 나눔, 봉헌이요 추종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나를 옭아매는 것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8월19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마태19,16-22)
나를 옭아매는 것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니면 흐뭇합니다. 언제든지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쓰지 않아도 든든합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저는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닙니다. 평상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간혹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을 알게 되면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주머니를 비워놓던 사람은 그런 것에 자유롭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19, 21). 그러나 젊은이는 답을
얻었으면서도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답을 얻었으면 그대로 해야 합니다. 답을 얻었으면서도 그대로 하지
않아 하늘의 보화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본인의 책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생에로 인도하면서 길을 알려 주시고 동행하여
주시지만 본인이 거부하는 데는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부자에게는
돈이 전부입니다. 그의 재산은 곧 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단순히
자선을 베풀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이 있으니 문제 입니다. 사람 나고 돈 났다는 것을 알지만
돈에 매이는 것이 사람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아프리카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젊은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돈 때문에
형제부모도 없는 사람처럼 싸우는 재벌들의 추한 모습을!
주목할 것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이라는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공로를 뛰어넘는 것이기 대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공로로
구원을 얻지 않고 주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재물로부터의 자유를 갖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님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학식도 명예도 권력도
재물에 속합니다. 그러한 것을 지니면 지닐수록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것은 다 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훌훌
털어버리고 먼저 따름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더 큰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고 항상 주님”을 앞세울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5).
버림으로써 얻는 신비에 눈뜨는 하루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이라는 것은 또 다른 무엇으로부터의 옭아 매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만을 갈망하여 세상 것에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아가에 대한 강론에서 “사랑은 그 자체로
만족을 줍니다. 사랑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닌 그 자체로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공로도 되고 상급도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말고는 다른 이유나 열매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매는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자신의 시초로 되돌아가고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되 흘러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항상 자신의
물줄기를 받아야 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에게서 모든 것이
솟아납니다. 주님을 오롯이 사랑한다면 무엇이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포기할 수 있고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화 있을 사람
오늘은 ‘화 있을 사람’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유다서 1장 12절~13절 말씀에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의 이 말씀은 ‘화 있을 자’의 모습에 대하여 표현한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쇠하여 지는 삶이요, 절망하는 삶입니다.
갈수록 잘 되는 삶은 그 자체가 천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쇠하여 지는 삶은 망하는 삶이요, 고난의 삶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성장하고 발전하지 못하고 쇠하여지고 망하여지는 삶은
화 있는 자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날로 쇠하는 언어, 쇠하는 행동으로 저주의 삶을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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