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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에 대한 대속규례
신 21:1-14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피살된 시체가 들에 엎드러진 것을 발견하고 그 쳐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거든
2 너희의 장로들과 재판장들은 나가서 그 피살된 곳의 사방에 있는 성읍의 원근을 잴 것이요
3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그 성읍에서 아직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여
4 그 성읍의 장로들이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않고 씨를 뿌린 일도 없는 골짜기로 그 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 골짜기에서 그 송아지의 목을 꺾을 것이요
5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갈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
6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모든 장로들은 그 골짜기에서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7 말하기를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
8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하면 그 피 흘린 죄가 사함을 받으리니
9 너는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여 무죄한 자의 피 흘린 죄를 너희 중에서 제할지니라
10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울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손에 넘기시므로 네가 그들을 사로잡은 후에
11 네가 만일 그 포로 중의 아리따운 여자를 보고 그에게 연연하여 아내를 삼고자 하거든
12 그를 네 집으로 데려갈 것이요 그는 그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13 또 포로의 의복을 벗고 네 집에 살며 그 부모를 위하여 한 달 동안 애곡한 후에 네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의 남편이 되고 그는 네 아내가 될 것이요
14 그 후에 네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마음대로 가게 하고 결코 돈을 받고 팔지 말지라 네가 그를 욕보였은즉 종으로 여기지 말지니라
신 21:1-14 / [살인범을 알 수 없을 때]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서 피살된 시체가 들녘에서 발견되었는데도 누가 죽였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2) 그러면 이스라엘의 장로와 재판관들이 나가서 그 시체와 인접한 성읍들까지 거리를 재십시오. 3) 그 시체와 가장 가까운 성읍에서 그 피살된 사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성읍의 장로들은 아직 멍에를 메워서 일을 시킨 적이 없는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4) 쟁기질도 않고 씨를 뿌리지도 않은 곳으로서 항상 물이 흐르는 시냇가로 내려가서 그 송아지의 목을 쳐서 자르십시오. 5) 그러면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그리로 올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선택되어 성소의 일도 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도 하며 모든 소송 사건과 폭행 사건을 판결하는 사람들입니다. 6) 장로들은 제사장들이 보는 앞에서 목이 잘린 암송아지 위에다 대고 손을 씻으며 7) 자기들의 온 성읍을 대신해서 이렇게 선언해야 합니다. `우리의 손도 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고 우리의 눈도 이 사람이 죽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8) 여호와여, 죄 없이 죽은 이 사람의 피값을 갚기 위하여 주님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는 마소서.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님의 백성을 삼으셨으니 이 사람을 죽인 죄를 주님의 백성에게 씌우지 마소서' 그러면 여호와께서 그 사람을 죽인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9) 여러분이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에서 살인죄를 씻어 내십시오. 이것이 여호와께서 옳게 보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10) [포로된 여자와 결혼하는 규정] 여러분이 싸움터에서 원수와 싸울 때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원수들을 여러분의 손에 넘겨 주셔서 여러분이 원수들을 포로로 잡았는데 11) 여러분 가운데에서 어떤 남자가 포로들 가운데에서 마음에 드는 처녀를 보고 결혼하기를 원하였다고 합시다. 12) 그러면 그 남자는 처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도 됩니다. 그 처녀는 남자의 집에 가서 먼저 머리를 말갛게 밀고 손톱을 깎고 13) 새 옷으로 갈아입고 이미 전사한 자기 부모를 위하여 한 달 동안 애곡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들이 부부가 될 수 있습니다. 14) 만일 그가 나중에 자기 아내를 좋아하지 않게 되면 그 여자가 마음대로 나가게 하십시오. 그 여자는 이미 여러분 가운데에서 아내가 되었던 사람이므로 돈을 받고 노예로 팔거나 자기의 노예로 부려먹어서는 안 됩니다.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에 관한 규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피살된 사람의 피를 대속하는 규례(1-9)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땅에서는 거룩함을 지켜야 합니다. 특히 살인자에 대해서는 살인에 대한 보응을 받게 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살인 사건인데 범인이 없는 경우에 범인이 없다고 해서 죄악을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무고하게 죽은 자의 피에 대한 책임이 남아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경우에는 살인죄에 대한 책임을 사건이 난 곳에서 가장 가까운 성읍에 묻게 하십니다. 이때 해당 성읍의 장로들은 흠 없는 암송아지를 취하여 거룩한 장소에서 암송아지의 목을 꺾고 제사장들의 입회하에 대속제물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죽은 자의 피에 대한 책임이 자신들에게 임하지 않도록 하는 대속예식을 드리는 것입니다. 한편 암송아지의 목을 꺾어 죽이는 것을 통해 범인이 치러야 하는 징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규례는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허락하신 새로운 땅에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서의 죄악의 요소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규례입니다.
여자 포로를 아내로 맞이하는 규례(10-14)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한 가나안 7족속 외에 전쟁 중에 포로로 잡은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고 싶다면 다음의 규례를 따라야 합니다.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먼저 이방의 죄악된 땅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리고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어버려 이방의 풍습을 버리게 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포로의 옷을 벗겨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백성으로 신분을 바꾸어 주게 하셨습니다. 이때 1개월간 애곡하여 이전 이방인으로서의 삶과의 단절하고 새 출발하라고 하는 정결예식을 꼭 거치게 하셨습니다. 또한 이렇게 이방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후에는 그 여인을 아내로 취하였으니 그 책임으로 그 여인을 노예와 같이 돈을 주고 팔지 말아야 하고 종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적용: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당신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범죄들이 우리 가운데 머물지 않도록 당신은 노력하고 있습니까? 당신과 상관이 없다고 방치해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뇌 과학자들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사랑에 빠질 때 뇌에서 페로몬,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및 세로토닌 등의 화학물질이 분비되어 쾌락중추를 자극하고 이로 인해 심박 수의 증가와 식욕과 수면욕의 감퇴 및 강한 흥분 상태 등을 경험하게 된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더 큰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 설 교 >
신뢰 받는 사회
신21:1-23 / 양인국 목사
1. 21장은 여러 가지 제도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그 제도들을 허락해 주신 목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서로 신뢰하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요청되는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기 원한다.
2. 구성원들이 서로 신뢰하는 공동체는 복된 공동체다. 왜냐하면 이런 공동체야 말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더불어 살 수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물음은 신뢰의 유무에 따라 공동체의 모습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말해줄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들의 지도자 모세를 신뢰하였더라면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서로 신뢰했더라면 그들의 결말은 어떠했을까? 만일 기드온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의 삼백 명의 군사들이 지도자인 기드온을 신뢰하지 않았더라면 미디안과의 전쟁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로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위대한 출발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여정은 위대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여정은 안타깝게도 성공보다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들의 이와 같은 실패는 무엇이 부족하거나 연약함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고 불신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고 또한 지도자 모세를 신뢰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광야애서 사십년을 방황해야 했고 또한 그 여정의 대부분을 실패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기드온과 그의 군사들은 지극히 적은 힘을 가지고 미디안의 대군과 싸워 승리하였다. 힘의 우위(優位)를 비교할 때 기드온의 군사는 미디안과 싸워 승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기드온의 군사는 삼백 명이었지만 미디안의 군사는 수조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대군이었기 때문이다. 사사기는 그 때 미디안의 군사의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이렇게 말해 주고 있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삿 7: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의 군대가 미디안과 싸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가운데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도자 기드온을 신뢰하였고 그들 서로를 신뢰하였다.우리가 언급한 두 가지 물음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한 공동체가 동일한 환경에서 일어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들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는 신뢰의 유무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신뢰가 있을 때는 일어설 수 있지만 반대로 서로에 대한 불신이 있다면 넘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현재 속해 있는 공동체를 세울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말해 주기 때문이고 또한 우리 모두는 속해 있는 공동체를 세우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길은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신뢰 관계를 세워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서로 신뢰하는 공동체를 세울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본문이 주는 대답들 가운데 하나는 투명성이다. 여기 투명성이란 공동체 안에 음습(陰濕)하거나 의혹이 있는 곳이 없는 밝은 상태를 말한다. 물론 이와 같은 투명성은 공동체 안에서 제기 되는 모든 의문에 대하여 “예” “아니오”가 분명할 때 주어진다.
1-9절은 공동체 안에서 제기되는 의문에 대하여 “예” “아니오”가 분명할 때 투명성이 확보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해 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살인 사건이 발생했지만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때 그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재판장들에게 피살 된 사람이 발견 된 곳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로 하여금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 하나를 취하여 인적이 없고 물이 항상 흐르는 골짜기로 끌고 가서 그 송아지의 목을 꺾고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하셨다.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21:7,8)”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그 피흘린 죄”를 사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의식을 하는 목적은 살인한 자로 의심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의심으로부터 자유 하게 해 주기 위함이고 또한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의혹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한 공동체 안에서 투명성이 확보될 때 그 공동체는 서로를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더불어 사는 공동체로 세워지는 것이다.
구성원들이 서로 신뢰하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요청되는 것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책임성이다. 즉 책임져야 할 일이 있을 때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질 때 구성원들이 서로 신뢰하는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 10-14절은 이스라엘 가운데 전쟁에서 포로로 붙잡아 온 여인들 가운데 자신의 아내로 삼고자 하는 자들이 지켜야 할 일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아내로 삼고자 하는 여인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율법에 따라 모든 절차를 마친 후 그를 아내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후에 남편된 사람이 아내로 삼은 여인을 기뻐하지 않아 그와 이혼 할지라도 그를 전쟁의 포로처럼 취급하여 팔 수 없었다. 이것은 비록 아내 된 여인이 전쟁의 포로이며 이방 여인이었을지라도 율법의 절차에 따라 그를 아내를 삼았다면 그 여인을 이스라엘의 여인과 동등하게 인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 여인을 이스라엘의 여인처럼 존중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 그 여인과 이혼할 때도 그를 존중하여 그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해야 하고 포로나 노예처럼 팔아서는 안된다고 한 것이다. 본문이 주는 중요한 교훈은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하여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주었다면 그가 필요하지 않을 때도 변함없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 말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동체 안에서 책임적 존재로 사는 것이다. 이처럼 공동체 구성원들이 책임적 존재로 살 때 공동체는 서로 신뢰하는 공동체로 세워진다.
구성원들이 서로 신뢰하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요청되는 것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원칙에 따라 사는 것이다. 원칙은 내적으로는 감정의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중심을 가지고 살게 해고 외적으로는 탐욕에 이끌려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환경 가운데서도 중심을 가지고 살게 한다. 그러므로 사회구성원들이 원칙에 따라 살수록 그 사회는 건강한 사회로 세워지는 것이다. 다음은 15-17절의 내용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을 때 미워하는 아내의 소생이 장자라면 그 어미를 미워한다는 이유로 인하여 그의 장자권을 인정하지 않고 사랑하는 아내의 소생으로 장자를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감정에 따라 해서는 안 되고 원칙에 따라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여기 원칙이란 보편적 의미로 말할 때 사회의 구성원들이 더불어 살기 위하여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칙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삶의 원칙이 된다. 원칙에 충실할 때 구성원들이 서로 신뢰하는 공동체로 세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우리의 내외적인 환경은 언제나 변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변하는 환경이나 감정에 좌우된다면 중심을 지킬 수 없고 중심을 지킬 수 없으면 혼돈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혼돈이 있는 곳에는 신뢰도 있을 수 없고 또한 샬롬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원칙에 따라 사는 것은 서로 신뢰하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이다.
구성원들이 서로 신뢰하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요청되는 것들 가운데 마지막 한 가지 더 말한다면 그것은 죄를 죄로 인정하는 것이다. 18-21절에서 하나님은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에 대하여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지 말씀해 주셨다. 여기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란 부모의 말을 순종하지 않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듣지 않는 자를 말하며, 또한 방탕하며 항상 술에 취해 있는 자를 말한다. 하나님은 부모가 이와 같은 아들을 성읍 장로들에게 고소하면 모든 사람이 그를 돌로 쳐 죽이도록 했다. 여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부모일지라도 아들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죄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죄를 범하든지 죄를 죄라고 말하고 또한 죄를 지은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때 구성원들이 서로를 신뢰하는 공동체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처음 물음으로 돌아가기 원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들의 지도자 모세를 신뢰하였더라면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서로 신뢰했더라면 그 결말은 어떠했을까? 만일 기드온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의 삼백 명의 군사들이 지도자인 기드온을 신뢰하지 않았더라면 미디안과의 전쟁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이 물음들은 공동체 안에 있는 신뢰의 유무는 동일한 환경에 있는 공동체와 구성원들을 세워주기도 하고 넘어지게도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신 말씀에 따라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서로 신뢰하는 공동체로 세울 때 공동체와 우리는 시간이 더해 갈수록 보다 더 온전함으로 세워질 것이다. 특별히 우리 모두 자신에게 집중함으로 잠시 잊었던 투명성, 책임성 원칙이라는 말들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김으로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서로 신뢰하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힘쓰기 원한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를 세움으로 우리 모두 더불어 살 수 있게 해 주시고 또한 온전함에 이르게 해 주옵소서.
죄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
신 21:1-9 / 피영민 목사
신명기 21장부터 26장까지는 사람이 살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매우 일상적인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군대의 화장실은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 집을 지을 때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려면 난간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 전쟁 포로 중 아내로 삼고 싶은 여자가 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돈을 빌려줬는 데 이자를 받아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등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이런 사소하고 일상적인 문제까지 세심하게 배려하신다는 사실이 놀랍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혼자 살 수는 없습니다.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서는 이런 세부적인 규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동체가 공의로운 공동체를 이루어야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는 작고 사소한 문제까지도 정의를 실현하면서 살아야 하며, ‘나 혼자만 의롭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면 됐지 공동체가 나와 무슨 상관인가’하는 영적 이기주의는 철저히 배제하고 있습니다.
성경 교리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연구하는 21세기 이전의 체계신학, 혹은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자들은 죄를 하나님과 개인간의 일대일의 문제로만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1,2차 세계대전과 같은 갖가지 전쟁을 겪으면서 죄는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죄는 집단성, 혹은 공동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21세기에 나온 조직신학 서적들은 죄의 공동체적인 면을 한 항목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한 개인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보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그가 속한 사회가 공산주의, 혹은 전체주의 사회라면 그 사람은 공산주의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한국 남자들은 군대에서 죄의 집단성을 잘 배웁니다. 내무반에서는 한 사람만 잘못해도 모든 장병들이 체벌이나 기합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군대에 가면 ‘죄는 내가 짓지 않는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구나. 우리 공동체 중에 한 사람이라도 죄를 지어서는 안되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모세의 율법은 이미 그 옛날에 죄의 공동체성을 심각하게 강조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 규례의 내용
본문이 다루고 있는 규례(規例)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 경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피살된 시체가 들에 유기된 살인죄와 사체 유기죄가 경합된 경우입니다. 그런데 그를 쳐 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미제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거룩한 땅과 하나님께서 택하신 거룩한 백성의 공동체에서 이런 야만스러운 문제가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성경이 단지 이상만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현실적인 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거룩하게 되었고,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게 되었지만 완전하게 거룩한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와 투쟁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게 되면 죄에 미혹되기 쉽다는 사실을 먼저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든지 ‘나는 예수님을 믿어서 죄를 안 짓는 거룩하고 완전한 존재가 되었다’는 완전주의(perfectionism)를 말한다면 이는 그릇된 주장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거룩한 백성의 공동체 안에 이렇게 무서운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내가 범인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상관없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이스라엘의 장로와 재판장이, 즉 행정부와 사법부가 모두 동원되어 시체가 유기된 장소로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가까운 동서남북 사방의 모든 성읍들의 거리를 측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살인죄에 대한 책임을 시체로부터 가장 가까운 성읍이 지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비합리적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이는 대단히 합리적인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살인죄를 저질러도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시체를 자동차에 싣고 가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 유기할 수도 있지만, 옛날에는 자동차가 없었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면 시체를 스스로 운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대낮에 시체를 메고 갈 수는 없기 때문에 아마도 밤에 움직였을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사람을 사형시킬 때 이미 죽은 시체와 함께 꽁꽁 묶어놓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시체와 산 사람을 묶어 놓으면 시체에서 나오는 병균과 벌레 때문에 산 사람도 결국 죽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담대한 사람이라도 시체를 메고 먼 거리를 이동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자살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이 살인범을 알 수 없는 미제의 살인사건에 대한 죄책을 그 시체에서 가장 가까운 성읍 공동체에 돌리는 것은 대단히 합리적니다.
만약 어느 가게에서 빵을 절도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평소에 “배고파. 빵 먹고 싶어”란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그 장소 주변에서 배를 두드리면서 트림을 하고 빵 냄새를 풍기고 다닌다면 그 사람을 의심하는 것이 불합리한행위입니까?
따라서 시체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에 있는 장로들은 살인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기 공동체가 그 죄와 관련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장로들은 아직 부리거나 멍에를 메어 보지 못한 암송아지 한 마리를 취해 물이 항상 흐르고 농사를 한 번도 짓지도 않은 골짜기에 데려가서 그 암송아지의 목을 꺾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이 꺾인 암송아지 위에서 손을 씻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그러면 그 피 흘린 죄를 사함 받게 됩니다.
2. 규례의 관찰
이 규례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살인죄는 범인을 아는 경우와 범인을 모르는 경우에 해결 책임자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살인죄의 범인을 아는 경우에는 피해자의 가족이 그 살인자를 처벌할 책임을 안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그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다가 일어나 쳐서 그 생명을 상하여 죽게 하고 이 한 성읍으로 도피하거든 그 본 성읍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거기서 잡아다가 보수자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할 것이라 네 눈이 그를 긍휼히 보지 말고 무죄한 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신 19:11-13)
성읍의 장로들이 살인자를 체포하면 피해자의 가족이 보수자가 되어서 살인자를 처형해야 합니다. 그러나 살인자가 누군지 모르는 경우에는 복수되지 않은 피에 대한 책임을 가장 가까운 성읍의 공동체가 져야 합니다. 이처럼 살인자를 아는 경우와 모르는 경우에는 각각 책임자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죄를 짓는 주체와 죄에 대한 책임을 지는 주체가 다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죄는 남이 지고 책임은 내가 뒤집어 쓸 수 있다는 말입니다. 대통령이 잘못해서 IMF 사태가 왔다 해도 온 국민이 그 책임을 모두 뒤집어쓰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국가 원수가 잘못해서 전쟁을 일으켰다고 해도 국가 원수 혼자 전쟁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이 책임을 지고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처럼 죄의 주체와 책임의 주체가 다를 수 있습니다.
살인죄의 경우, 주체는 물론 살인자입니다. 그러나 이 살인자가 증거를 남기지 않아서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경우에 살인죄에 대한 책임은 가까운 성읍 공동체가 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내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해도 남이 지은 죄의 책임을 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죄책을 왜 우리가 져야 하는가에 대해 분노합니다. 그러나 이 규례에 비추어 볼 때, 아담이 죄를 지었어도 우리가 죄책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사무엘하 21장에는 다윗 왕이 통치를 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3년 동안 기근이 계속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근으로 백성들이 모두 굶어 죽게 되자 다윗이 하나님께 기근이 이유를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삼하 21:1)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여호수아 9장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기브온 사람과 언약을 맺은 내용이 나옵니다. 기브온 사신의 속임수로 이스라엘과 기브온이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 언약을 통해 기브온 사람들은 멸망을 당하지 않게 된 대신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 나무도 패고 물도 긷는 이스라엘의 종이 되었는데 사울 왕이 성경도 모르고 역사도 몰라서 기브온 사람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죄는 사울이 범했지만 죄책은 다윗 임금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어떻게 하면 이 죄책을 제거할 수 있는지 하나님께 질문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자손 중에 일곱 명을 택하여 여호와 앞에서 목매달아 죽이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윗 왕이 사울의 자손 일곱 명을 뽑아서 목매달아 죽였을 때, 비로소 기근이 그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죄는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나는 죄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죄는 공동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 중에 누군가 죄를 지으면 우리가 그 책임을 뒤집어 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로 목이 꺾인 암송아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전통적으로 살인자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의 제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옳지 않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알지도 못하는 살인자를 위해서 왜 제물을 드리겠습니까? 어떤 학자는 이 의식이 서약적이고 맹세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장로들이 송아지의 목을 꺾는 것은 우리 중에 누구라도 이 살인죄를 저지른 자가 발견된다면 목이 꺾인 송아지처럼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가능성이 있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암송아지는 살인죄로 인해서 떠안은 공동체의 죄책을 제거하기 위한 희생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농사를 지어보지도 않은 암송아지가 농사를 짓지않은 계곡에 가서 원시적인 순수성을 가지고 땅과 백성에게 임한 오염과 저주를 제거하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범인을 알 수 없는 살인죄의 경우에 제사장의 책임은 무엇인지를 규정한 점입니다.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올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신 21:5) 제사장은 레위사람들로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하나님을 섬기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을 축복하며, 모든 소송과 투쟁에 최종적인 판결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역할을 따져 보았을 때, 이 미제의 살인사건에서 주도권을 지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 사람들은 제사장일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성읍의 장로들에게 주도권을 지고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은 현장에서 성읍의 장로들과 함께 있다가 오직 죄가 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선포하기만 하는 수동적인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3. 규례의 목적
하나님께서 이처럼 원시적인 것처럼 보이는 규례를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너는 이와 같이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여 무죄자의 피 흘린 죄를 너희 중에서 제할지니라”(신 21:9)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규례를 주신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정의로운 공동체가 되도록 이런 규례를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혼자 먹고 살다가 혼자 죽었다면 정의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정의는 공동체 안에서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안에서 정의가 실현되기를 원하십니다. 공동체가 정의를 왜곡하고 정의에 무관심하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징벌하실만한 분명한 사유가 됩니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정의로우면 복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불의하면 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정의에 대한 보상은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어떤 경우에는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나 성경을 살펴볼 때에 결코 불의가 이긴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불의는 현세에서도 이기지 못하고 내세에서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정의는 잠깐 지는 것 같이 보여도 현세에서도 이기고 내세에서는 영원토록 이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땅에서 살 때에 정의롭게 살아야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마음속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정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억울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어느 공동체든 억울한 사람이 많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복잡한 규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공동체에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목적은 죄가 뿌리내려 열매 맺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무죄자의 피 흘린 죄를 너희 중에서 제할지니라’는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설령 범인이 누군지 모르는 죄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죄가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려서 열매를 맺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죄가 주인 노릇해서는 안 됩니다. 죄가 왕노릇 할 때에도 ‘나는 저 죄를 안 지었어. 내가 한 짓이 아니니까 나는 관계없다’고 생각하면서 모른 체 하는 이기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18세기 영국의 정치가였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악이 승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선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결국 그런 공동체에서는 악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여러 해 전보다 획기적으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줄어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먹고 살만하기 때문입니다. 배가 부르고 땅도 가지고 있고 자식들에게도 양질의 교육을 시킬 수 있으니, 내 자신의 만족을 채울 수 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게 대합니다. 이런 일에 기독교인들이 앞장서고 있으니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죄악에 무관심(indifference)해서는 안 됩니다. 또 나는 이제 먹고 살만하니까 괜찮다고 하는 자기만족(complacency)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무관심과 자기 만족은 공동체가 악에게 질 수 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결 론
별세하신 거지(巨智) 이중표 목사님이 제 33차 국가 조찬 기도회에서 김대중 대통령 내외분을 모셔놓고 설교를 할 때, 아인슈타인의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위대한 과학자이지만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교회는 연약한 사람들이 종교를 의지하러 가는 곳이라고 비하하며 무시했습니다. 이 아인슈타인이 활동할 당시에 독일에서 나치스가 일어났습니다. 그 때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대학의 지성인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대학교수들은 즉시 나치즘에 무릎을 꿇고 아첨했다. 그들은 나치즘이 주장하는 잘못된 인종이론을 마치 옳은 것인양 떠들어댔다. 또한 나는 신문과 언론인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신문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필봉을 놓았다. 그런데 오직 교회만이 독재자에 항거하여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줄지어 감옥으로 향하였다. 나는 교회에 한없는 찬사를 보낸다.”
죄는 남이 지었더라도 언제나 악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의로운 공동체, 정의를 지향하는 공동체, 억울함이 없는 공동체, 죄가 자리 잡지 못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교회가 불의하면 이 사회는 아예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교회조차 불의하다면 이미 다른 집단은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의 왕이 자신의 공주를 너무 사랑해서 공주가 좋아하는 곰 인형, 토끼 인형등 갖가지 종류의 인형을 사 주었고 공주도 인형을 너무 좋아해서 항상 인형을 안고 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공주가 폐결핵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음식도 좋고, 환경도 좋은 왕궁에서 어떻게 공주가 폐결핵에 걸리게 되었는지 왕이 애통해하며 조사하기 시작했을 때 곧 그 원인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왕은 자신의 왕국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잘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 밖의 가난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곧잘 폐결핵에 걸리곤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소일거리들뿐이었기 때문에 어떤 폐결핵 환자들은 인형을 만들어서 팔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들이 기침하면서 만들었던 인형을 공주가 갖게 되었고 그 인형을 통해 공주가 폐결핵에 걸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왕은 성 중에 있으면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지내면 늘 건강하고 괜찮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가 돌보지 않았던 가난한 사람들, 폐병환자로 인해 결국 자신도 사랑하는 공주를 잃게 되는 끔찍한 피해를 입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나만 괜찮으면 다 괜찮다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공동체가 정의로운 공동체가 되어서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서로 정의를 격려하면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 흘린 죄를 제할찌니라
신 21:1-9 / 윤태성 목사
들어가는 말
“피 흘린 죄를 제할찌니라” 이 주간은 전직대통령의 장례식이 국민장으로 치루어졌습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애도하는 중이기도합니다. 단순히 고향마을 뒷산에서 투신한 자살이지만, 일각에서는 외압적인 죽음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몸을 던지는 그 순간도 이제까지 보여준 일관된 철학의 연장선상이고, 언론과 또 검찰의 강압적인 수사가 이런 지경으로 몰고 갔다. 그런데 저는 이런 죽음의 원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 죽음을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바라보아야하는가? 추모식 내내 불편한 것은 이번에 국민장을 치루면서 불교나 카톨릭의 역할은 주어져 있는데 기독교의 공간이 별로 없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고인의 종교적인 성향과 추모식을 보면 노제, 만장, 화장과 같이 전통으로 진행되는 추모식에 기독교가 영향을 발휘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죽으면 그만이다 죽은 자는 하늘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이니 우리는 관계가 없다 이렇게 뒷짐을 짓기에는 무엇인가 불편한 기색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죽은 사람은 주님 앞에서 살아온 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죽음은 죽은 자의 문제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가 남겨놓은 문제는 언제나 살아있는 자의 문제로 바뀌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이 죽음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가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풀리지 않는 사건
첫 번째 죽음은 다른 사람의 일만은 아닙니다. 1절 말씀입니다. 사건의 개요가 등장합니다. 같이 읽어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혹시 피살한 시체가 들에 엎드려진 것을 발견하고 그 쳐 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거든”
이 말씀은 이러 합니다. 어느 마을 근처에서 살인 사건이 납니다. 참 난감한 것이 마을과는 멀리 떨어져서 범인을 찾기가 어려운 사건입니다. 들에서 발생했기에 목격자를 찾기도 쉽지 않고, 뚜렷한 증거품도 없습니다.
증인이 없고 물품도 없다 참 어렵죠! 그런데 이런 사건들은 옛날에도 있었던 일이고 오늘날에도 발생하고 있는 일입니다. 길에서 “목격자를 찾습니다”는 플랭카드로부터, 살인 절도 같은 강력범죄가 있습니다. 전직대통령조차도 고충을 토로할 정도의 힘이 있는 권력이나 집단에 의해서 벌어지는 참사들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의 이유조차 구명되지 못하는 사건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합니까? 보통 우리나라 법으로는 장례를 치루고 경찰에서는 공소시효를 기다리고 영구미제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데 까지 다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자동소멸이 됩니다.
그리고 살인사건이 난 그 동네 사람들은 그 자리를 지날 때 왠지 꺼림칙합니다. 그리고 그 장소를 지나가며 그 사람 참 안됐다 측은한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다시일상으로 돌아갑니다.
보통 우리가 대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조금 다릅니다. 조금 자세히 보면 죽은자의 죽음이 그 사람의 일로 끝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절에 보면 재판장과 장로들이 나가서 피살한 속에서 거리를 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피살한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장로들이 성읍에서 제물을 취하라고 합니다. 제물의 조건은 아직 부리지 않는 멍에를 매지 않는 암송아지를 취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송아지를 잡는데 어느 곳에서 잡습니까?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심지도 아니한 골짜기로 가서 그 송아지의 목을 꺽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제일 먼저 거리를 잽니다. 지금이야 지도를 보면 쉽게 계산이 되지만 옛날에는 측량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아마도 발로 걸어서 규빗으로 환산해서 거리를 쟀을 겁니다. 그리고 송아지를 아무 곳에서나 잡는 것이 아니라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아니하고 심지도 아니한 골짜기로 찾아갑니다. 마을에서 한참을 가야 찾을 수 있는 골짜기에서 송아지의 목을 꺽으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복잡한 절차가 있습니까? 구약에서 이런 제사가 있으니 이렇게 드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복잡한 과정은 사람의 생명은 이처럼 귀한 것를 보여줍니다. 죽은 자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은 또 다른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의 억울한 죽음을 그냥 평범하게 넘길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16장을 보시면 아브라함의 잘못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자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그와 부인인 사래는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어떤 일을 합니까? 사라의 몸종이였던 하갈을 아브라함과 동침하게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갈이 잉태함을 깨닫고 여주인을 멸시합니다. 종이였지만 주인의 아이를 가졌으니 나는 이제 팔자가 펴나보다 우쭐한 마음을 가졌는데, 웬걸 여주인의 반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결국 여종은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쫓겨나옵니다. 여인의 몸으로 갈 곳이 없어 울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나 위로합니다. 이제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아들이 크게 번성하게 될 것이다. 이방 여인이였지만 하갈은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듣게 되고 그 자리를 브헬라헤로이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명명을 하게 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은 아브라함과 사라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했고, 자신의 몸종을 학대하는 일을 범하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잘못을 주님께서 못본 척하지 않습니다. 약한 자에게 나타나셔서 위로하십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어떤 면에서 전직대통령의 죽음가운데 우리들이 회계해야 하는 부분을 생각합니다. 우리 많은 기독교인들은 전임정부의 공과보다도 장로가 집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번 정부의 절대적인 지지층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중적인 행태가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모든 권세가 주님께로 온 것이다. 맞는 말입니다. 장로인 김영삼 대통,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였을 때는 무엇이라고 기도합니까? 하나님께서 권세를 주신 것이다. 기름 부어 세운 대통령에게 힘과 능력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 면에서 전임의 믿진 않는 대통령에게는 이런 기도를 왜 하지 않았는가! 기도뿐 아니라 우리와 다른 신앙인이라고 배척하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전직대통령은 신앙인은 아니였지만 그분의 모습은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을 많이 추진합니다. 정치적 신념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서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남북의 평화와 각 지역이 골고루 잘살게 하자는 정책을 폅니다. 그때 마다 반대자들은 그런 정책은 아마추어이고 포풀리즘이다 그러나 가만히 보시면 그런 정책과 이상은 그리스도인이 이루어야할 가치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두는 죄 된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좋은 점은 부각시키려하지만 잘못한 점은 회계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교회사가운데서도 교회의 부흥과 선교라는 밝은 면을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강한 자, 같은 믿음을 가진 자를 칭찬하고 축복하지만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고 고민한 적도 없습니다. 제대로 된 신앙이라면 우리가 약한 자 소외된 자 가난한자를 돌보지 못한 부분을 회계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의 하나님, 약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성경에는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남들이 인정하자고하는 낙태, 안락사, 전쟁을 반대하는 이유가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존엄한 형상임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알지 못하는 죽음입니다. 이런 죽음을 보며 내가 죽이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지 말고, 대신 제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6절 성읍장로들이 제물이 된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기도하라 7절 “우리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 8절“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하면 그 피흘린 죄가 사함을 받으리니” 주님께서는 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무죄한 자의 피흘림은 이 땅의 저주가 됩니다. 땅이 저주를 받으면 밭을 갈아도 효력이 없고, 땅이 엉겅퀴를 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제물의 피로 속죄하신 것입니다. 멍애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특별한 장소로 끌고 가서 잡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든 행위들이 무엇을 상징합니까? 바로 예수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죄로 인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한 죽음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죄의 피가 머물러있는 이 땅에서 피를 흘려 주심으로 이 땅의 저주가 풀리게 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오늘의 말씀처럼 억울한 한자의 피가 더 이상 흐르지 않기를 간구하신 것 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의미를 기억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억울한 죽음을 그냥 지나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ex) 요즘 청소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합니까? 어느 중학교에 여자 선생님이 이전에는 아이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은 있었지만 그렇게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녀를 낳고 보니 이분에게 걱정이 생겼는데 이일이 남의 일 같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누구나 이러한 일을 해결하지 않고는 또 다른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구원을 강조하다보니 우리의 삶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신앙이 되고 맙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땡처리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았으니 그 이후는 아무렇게 살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 구원이 중요하셨다면 믿음을 고백한 자를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아마 그 자리에서 즉시 천국으로 데리고 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일예배 때 서로 인사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니 김집사님 아직도 천국에 못가셨어요” 설교하시는 목사님께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우리 목사님은 믿음이 없으신 가봐 아직도 설교하고 계시네” 주님은 구원받은 백성에게 이 땅에서 삶을 맡기셨습니다. 왜 이 땅을 두시는가? 이 땅을 거룩한 땅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면에서 이제 부터는 죽은자를 위한 추모보다도 산자들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할 때입니다. 분명한 경우에는 피 흘림이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이 땅에 드리워진 자살의 영은 막아야합니다. 서양에서는 자살을 자신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용기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지만 동양에서는 윤리사상이 있어서 자살을 통하여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또 그것을 거룩한 뜻처럼 인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전직대통령의 죽음은 많은 국민에게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 시켜주었지만 반대로 많은 청소년들에게 꿈을 빼앗아 갔다는 사실입니다. 계속되어지는 유명연예인들의 죽음과 대통령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보여준 불행한 사건입니다. 우리나라에 자살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특별히 자살율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습니다. 10만명 당 24.0명으로 OECD 국가 중 최고인 자살이 있습니다.
남아있는 우리들도 살다보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자존심이 상처를 입을 수도 인생의 허무를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좌절을 겪는다고 모두 자살을 한다면 누가 살아남아서 하나님의 뜻과 비젼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까? 우리 삶에는 수모가 있고 참기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살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있다면 우리는 이 부분을 바꾸어 나가는 노력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 이십니까 생명을 사랑하고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죽은 자를 알 수 없는 살인사건의 해결책은 분명합니다.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나오는 말
“인생예찬”으로 유명한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는 인생을 아름답게 예찬했지만 그의 삶은 불행의 연속입니다. 첫 번째 부인이 오핸 병으로 죽게 되고 두 번째 부인도 끔찍한 화상을 입게 됩닏. 그리도 그는 인생을 아름답게 보내며 신념과 소망을 노래합니다. 말년에 기자가 물어봅니다. 어떻게 인생을 아름답게 노래 할수 있느냐? 그러자 그는 그의 정원에 있는 늙은 사과나무를 가르키며 이야기합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입니다. 늙은 나무에 언제나 새로운 가지가 움돋고 그 가지위에 꽃이 핍니다” “저는 언제나 저의 인생이 새로운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늙은 가지에 언제나 꽃이 핍니다.”
저도 이즈음에 목향 초등학교에 있는 황화산에 오릅니다. 올라가는 길은 어렵지만 내려오는 길에 아카시아 꽃길 속에서 꽃망울을 터트린 찔레꽃의 향기는 정말 신선합니다. 저는 늘 느낍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선물인가 그리고 산다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주님 주신 생명을 누리며 사는 일은 더욱 아름다운 일입니다. 생명을 주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신명기 21:1-14
찬송가 294장 ‘하나님은 외아들을’ / (작성 : 강동윤)
앞서 전쟁에 관한 법에 대해 설명했던 20장에 이어 21장은 각종 상황에 대한 규례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규례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설명했는데 그 중 레이먼드 브라운 교수는 이 규례들이 이스라엘 공동체 내 비극이 발생했을 때에 대한 대응을 다루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21장에는 서로 다른 비극에 처한 다섯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1-9절은 ‘피살자’, 10-14절은 ‘포로된 여자’, 15-17절은 ‘불우한 아들’, 18-21절은 ‘타락한 아들’, 그리고 22-23절은 ‘처형당한 범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섯 부류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라고 말씀하시는지를 곰곰히 살펴보다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더욱 선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 2가지인 ‘피살자’와 ‘포로된 여자’에 관한 규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범인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1-9절)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피살된 시체가 들에 엎드러진 것을 발견하고 그 쳐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거든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땅 곧 가나안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할 경우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살인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창세기 9장 6절입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기에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의 권위로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생명을 강제로 빼앗은 살인은 창조주에 대한 반역인 것입니다. 그런데 살인이 약속의 땅에서 벌어졌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민수기 35장 34절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 곧 내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있음이니라” 그 땅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불어 거하시는 땅 곧 하나님의 안방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안방에서 부정한 살인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피살된 시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할랄’은 칼 자국 등 폭력의 흔적이 있는 시체를 뜻하기에 본문의 살인은 자연사나 과실치사가 아닌 고의적 살인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살인범이 누구인지 모르는 데에 있습니다. ‘들’로 번역된 히브리어 ‘싸데’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경작되지 않은 들판을 뜻합니다. 곧 성 밖 외진 곳에서 살인이 일어난 경우입니다. 범죄자 아간을 제비뽑기로 색출해내셨던 하나님은 분명 살인범이 누구인지 아셨지만 본문은 범인 색출보다 공동체의 대응에 초점을 두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2 너희의 장로들과 재판장들은 나가서 그 피살된 곳의 사방에 있는 성읍의 원근을 잴 것이요
범인을 모르는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장로들과 재판장들이 처리해야 했습니다. 장로들은 성읍 내 존경받는 어른들로서 성읍 백성의 대표들이었고, 재판장들 또한 성읍에서 세운 지도자였습니다(신명기 16:18). 하나님은 생명을 강탈해간 살인 사건에 대해 백성의 대표들이 나서서 해결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피살된 곳으로부터 각 성읍의 원근을 재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가장 가까운 성읍이 어디인지 찾아냈습니다.
3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그 성읍에서 아직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여
무죄한 자의 피로 가장 부정해진 성읍 곧 가장 가까운 성읍에서 미제 사건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성읍의 장로들은 부리지도 멍에를 메지도 않으며 한 번도 일을 시키지 않아서 흠 없고 온전한 암송아지를 취했습니다(민수기 19:2). 그리고 의식을 행할 장소로 데려갔습니다.
4 그 성읍의 장로들이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않고 씨를 뿌린 일도 없는 골짜기로 그 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 골짜기에서 그 송아지의 목을 꺾을 것이요
장로들은 경작도 파종도 하지 않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외진 장소로 온전한 송아지를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물이 항상 흐르고’에서 ‘항상’으로 번역된 ‘에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논란이 있습니다. 우기와 건기가 뚜렷한 이스라엘에 물이 항상 흐르는 곳이 있기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주석가들은 이 단어의 의미를 ‘강력한’ 혹은 ‘세찬’으로 이해해서 항상 물이 흐르는 곳이라기보다, 우기 때 강력하고 세차게 흐르는 시냇가를 뜻한다고 보았습니다.
장로들은 그곳에서 흠 없고 온전한 암송아지의 목을 꺾어 죽였습니다. 그리하여 무죄한 자의 피 흘린 죄를 덮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이 엄숙한 의식에 권위를 더하도록 참여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5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갈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
중앙 성소로부터 제사장들이 파견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아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들을 축복하고, 모든 사건의 최종 판결을 담당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받은 그들의 참석은 이 의식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권위 있는 의식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6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모든 장로들은 그 골짜기에서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가장 부정해진 성읍 곧 제일 가까운 성읍의 모든 장로들은 송아지를 목 꺾어 죽인 다음 그 송아지 위에서 물로 손을 씻었습니다. 손을 씻는 것은 범죄와 무관하다고 결백을 주장하는 상징적 제스처였습니다. 장로들은 이와 더불어 고백해야 했습니다.
7 말하기를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
장로들은 이 죄로부터 이스라엘 공동체가 무고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고백했습니다. 나아가 용서의 기도 또한 드렸습니다.
8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하면 그 피 흘린 죄가 사함을 받으리니
장로들은 하나님의 속량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여기에 나온 ‘속량’은 출애굽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긍휼로부터 시작됐던 출애굽 구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빌 수 있는 근거 또한 우리의 의가 아닌 오직 하나님 자신이 베푸신 구속,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듯이 우리도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용서 덕에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날마다 기억해야 합니다. 이 규례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됩니다.
9 너는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여 무죄한 자의 피 흘린 죄를 너희 중에서 제할지니라
9절을 새번역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당신들은 당신들에게 지워진 살인의 책임을 벗으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죄로 인한 징계에 있지 않고, 죄를 제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정직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샤르’는 ‘기뻐하는’, ‘옳은’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의지하여 죄를 제하고 공동체의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공동체가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지금까지 범인을 모르는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대응책을 살펴봤습니다. 들에 버려진 시체를 묻어주는 것만으로도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한 생명의 무게를 아셨기 때문에 한 생명도 가벼이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무고한 생명의 죽음을 엄중하게 다루셨습니다. 성읍 대표인 장로, 재판장을 넘어 하나님의 권위를 지닌 제사장까지 참석시켜 해결하게 하셨습니다. 이 또한 징계를 위한 모임이 아니라 공동체가 부정을 해결하고, 다같이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모임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살리는 공동체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우리도 죽음의 행렬에서 벗어나 생명의 행렬 가운데 사람 살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혹여나 우리의 언행이 공동체원에게 언어 폭력, 정서 폭력을 가하여 그를 피살자로 만들지는 않았었는지 돌아보길 바랍니다. 우리는 공동체원을 피살자로 만드는 자가 아니라 피살자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원들을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100주년기념교회 공동체가 예수님을 필두로 한 생명의 행렬 속에서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로 살아내기를 소망합니다.
피살자의 억울한 죽음을 엄중하게 다루시며 생명 존중을 가르치신 하나님께서는 ‘포로된 여자’를 위한 규례 또한 정하셨습니다.
여자 포로를 아내로 삼는 규정(10-14절)
(10-11)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울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손에 넘기시므로 네가 그들을 사로잡은 후에 네가 만일 그 포로 중의 아리따운 여자를 보고 그에게 연연하여 아내를 삼고자 하거든
앞서 전쟁에 관한 법을 다룬 신명기 20장 15-17절에 따르면 가나안 정복전쟁시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려두어서는 안됐습니다. 따라서 이 규례는 가나안 밖 원정 전쟁에서 잡아온 여자 포로에 대한 규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녀를 인간으로서 제대로 존중해야 한다며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또 다시 생명 존중을 가르치셨습니다.
12 그를 네 집으로 데려갈 것이요 그는 그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군인은 자신이 사랑해서 결혼하고 싶은 외국인 여자를 적절한 은신처인 ‘네 집’으로 데려가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욕대로 대해서는 안됐고, 그녀를 한 인격체로서 제대로 존중해야 했습니다. 먼저는 그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게 했습니다. 이는 이전에 믿었던 이교를 나타내는 외적 상징을 청산하고 새로운 관계와 생활을 시작하는 상징적 행동이었습니다. 레위기의 정결법도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을 규정했고(레위기 14:8), 레위인을 드릴 때에도 속죄의 물을 뿌리고, 전신을 삭도로 밀며, 의복을 빨고, 몸을 정결케 했습니다(민수기 8:7). 이제 그녀는 포로나 외국인이 아닌 엄연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13 또 포로의 의복을 벗고 네 집에 살며 그 부모를 위하여 한 달 동안 애곡한 후에 네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의 남편이 되고 그는 네 아내가 될 것이요
게다가 포로의 의복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히셨습니다. 의복은 신분과 지위를 나타냈기에 그녀는 포로가 아니라 이스라엘 여자와 동등한 위치에서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부모를 위하여 한 달 동안 애곡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한 달간의 애곡을 허용한 것은 자기 가족에 대한 여자의 심리적, 정서적 건강을 존중한 처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간 동안 남자가 여자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슬픔에 잠겨 있는 여자를 강제로 범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잔인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남자가 자기 정욕대로 그녀를 부도덕하고 냉혹하게 대우하지 않고,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30일의 애곡 기간까지 마친 후에도 여자를 향한 남자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비로소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들어가서’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보’는 마지막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결혼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여자의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남자의 죄로 인해 여자가 겪게 될 아픔까지도 보호하셨습니다.
14 그 후에 네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마음대로 가게 하고 결코 돈을 받고 팔지 말지라 네가 그를 욕보였은즉 종으로 여기지 말지니라
남자가 여자를 더 이상 기뻐하지 않아서 즉, 감정과 태도의 변해서 이혼하는 일은 고대 사회에서 포로로 잡힌 여자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남자의 헌신 없는 이기심의 죄로 여자가 겪게 될 어려움까지도 헤아리며 보호하셨습니다. 그녀는 이미 배우자에게 거절당한 슬픔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웠기에 하나님은 그녀가 종으로 팔려 더 큰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아내의 권한을 가진 그녀가 이혼 후에도 여전히 이스라엘 여인으로서의 신분과 지위를 유지하며 권리를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혼 후 그녀는 마음대로 즉 자유롭게 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를 어기고 남편이 그녀를 부당하게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남자를 죽이도록 명령하셨습니다(신명기 24:7).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극에 빠진 두 부류의 사람, 피살자와 포로된 여인의 슬픔을 돌보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공동체와 포로된 여인 모두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그들의 인격을 지켜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사람을 귀히 여기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을 바라보시는 시선에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창세기 9장 6절입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바라보시되 자기 형상을 지닌 존재로 바라보셨습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의 가치를 지극히 존귀하게 여기셔서 그들이 어떠한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지 않았음에도 1세기에 자기 외아들을 제물로 삼는 독특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주셨고, 우리 안에 심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우리 자신 안에 심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기억하십시다. 나 자신을 혐오하고 폄하하는 일은 그치고, 나를 진실로 존중하며 살리십시다. 나아가 가족을 포함하여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여기며 존중하십시다. 그렇게 나와 남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고 존중하는 그 삶이야말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외아들의 생명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삶이요, 생명의 행렬을 진두지휘하시는 예수님을 신실하게 좇는 삶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시선으로 생명을 존중하며 살아내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창조주 하나님, 우리에게 살 길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는 그리스도의 희생 덕에 생명의 행렬로 건져진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게 하옵소서. 나아가 우리 곁에 붙여주신 존귀한 생명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며 하나님을 존중하는 삶 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생명의 행렬을 이끄시는 대장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리는 인생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심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나는 소속된 공동체에서 죽이는 자와 살리는 자 중 어떤 자로 살아가고 있었는지 돌아봅시다.
2.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근거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내 공로와 업적으로 하나님과 관계 맺으려고 애쓰지는 않았는지 돌아봅시다.
3. 포로로 잡혀 온 외국인 여자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동등한 이스라엘 공동체원으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대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4. 나와 남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봄으로 다 같이 살아나는 승리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대속과 배려를 실천하는 성숙한 공동체
신명기 21:1-14
누구에게 살해되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의 죽음이 발견되면, 그 죽음의 피 값을 무엇으로 해결해야 했나요?
언약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의한 사건에 대한 책임을 공유해야 합니다. 가해자 불명의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면, 장로들과 재판장들은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어디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의 장로들은 아직 부린 적이 없고 멍에도 메어 본 적 없는 암송아지 한 마리를 취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골짜기로 끌고 가야 합니다. 거기서 그 암송아지의 목을 꺾어서 잡은 뒤 손을 씻으며 자신들의 무고함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속죄를 기원하면 무고하게 피 흘린 죄를 용서받습니다. 예수님은 들판에 버려진 시체와 같았던 우리를 위해 친히 목 꺾인 송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대속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이 땅의 불의를 내 죄로 여기며 회개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애통하며 기도해야 할 죽음은 무엇일까요?
죽음은 이 땅에 죄의 결과로 들어왔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사람은 몸이 잠깐은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 영혼은 이미 죽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 먼저 애통해야 할 죽음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채 죽어가는 모든 사람들의 죽음입니다. 그 결과는 영원한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죽음들에 대해서 눈감아 버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반드시 때가되면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구약의 십계명에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셨고(신 5:17), 신약의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라도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5:21-22). 사도요한은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요일 3:14-15). 이 세상의 모든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롬 6:23).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에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이 세상 사람들의 죄에 대해 눈감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곧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눈 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있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받도록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죄와 타협하지 않고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포로로 사로잡은 여인과 결혼하기 위한 절차는 어떠했나요?
언약 백성은 전쟁 포로일지라도 그를 전리품 다루듯 함부로 대하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은 전쟁 중에 포로로 잡은 여인을 아내로 맞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 곧바로 아내를 삼을 수 없고 정결 의식을 치르게 한 후 포로의 옷을 벗기고 한 달 동안 부모를 위해 애곡하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절차는 여인이 종교적.문화적으로 이전 삶과 단절하고 새로운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였습니다. 만일 이 여인을 데려간 남자가 애정이 식어 헤어지길 원한다면, 대가 없이 자유롭게 풀어 주어야 합니다. 약자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 언약 백성은 그를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나와 공동체가 배려해야 할 연약한 이웃은 누구며, 그들을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도 여전히 죄 가운데서 죽은 자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행복한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죄 사함도, 구원도, 생명도, 자유도, 풍성한 삶도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 때문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과 은혜 덕분에 누리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다는 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는 뜻은 주님의 이 사랑과 은혜를 아는 자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을 뒤따라 주님이 베푸셨던 그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정, 교회, 직장, 지역사회 등 모든 곳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가 섬겨야 할 이웃들입니다. 그들의 연약함을 우리가 보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우리의 힘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으로,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또 하나님의 무한한 하늘 창고에서 꺼내어 그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그들을 도우시기 바립니다.
오늘의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께서 선하시고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분임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기뻐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죄 가운데 살면서 죄의 삯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합니다. 아버지께 받은 이 은혜와 이 사랑을 우리가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섬김으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이 세상에 드러내게 하여 주소서.
공의와 사랑의 공동체
신 21:1-14
COVID-19으로 많이 위축된 지역 사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에, 한국 인터넷 방송 사이트인 OnDemandKorea.com 미주 지역 허세욱 이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Mask를 Donation 할테니 온디맨드코리아 대신 저희 교회가 있는 지역 사회에 전달해달라는 것입니다. 협력 사역을 제안한 것입니다. 왜, 안 하겠습니까? 온디맨드에서 제시하는 기준에 맞춰서 관공서나 노약자 등을 우선 순위로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우리 교회가 속한 지역 사회 치안을 책임지는 경찰서 Andy 황 서장에게 마스크를 전달했습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경찰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경찰이 없는 도시를 상상해 보십시오! 상상만해도 끔찍합니다. 아마도 마트에 가는 것조차 두려울 것 같습니다. 공권력이 바로 서지 못할 때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혼돈의 상태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멕시코나 남미의 경우를 살펴보면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관공서와 공무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늘날과 같은 공권력이 없던 구약시대에 어떻게 치안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합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동해보복법1을 명령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게 합니다. 사실 동해보복법은 복수가 목적이 아니라 질서 유지가 목적입니다. 억울하게 당한 사람이 도가 지나친 복수를 함으로 복수의 고리가 끊이지 않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며, 그보다 먼저 남에게 해를 가한 자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인지함으로 범죄의 예방 효과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동해보복법의 원칙하에 미제(未濟) 살인 사건에 대한 규례입니다. 본문은 먼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1절)라고 시작합니다. 그 땅은 거룩한 땅이요, 하나님이 주신 땅입니다. 그러므로 그 땅은 반드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명기 21장은 만일 כִּי (키, if)로 시작합니다. 원하지는 않지만 있을 수 있는 일에 대한 규례를 신명기21-22장은 알려줍니다. 있어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땅에서 피살된 시체2가 발견되고, 살인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할 때 이스라엘이 취해야 할 행동입니다.
가장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은 제사장과 함께 아직 일을 해보지 않은 암송아지를 택하여 물이 항상 흐르는 깊은 골짜기로 끌고가 암송아지의 목을 꺾은 후 그 위에 손을 씻으며,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7-8절)라고 하면, 그 피 흘린 죄가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땅에서는 살인 사건은 있을 수 없습니다. 피를 흘린 대가는 반드시 피로써 갚아야 합니다.3 원래는 살인자의 피를 흘림으로써 그 땅의 거룩함을 회복해야 하는데, 지금처럼 법의학이나 CCTV와 같은 감시망이 발전한지 못한 시대에는 결코 살인자를 잡을 수 없으므로, 대신 제물로 쓸 수 있는 거룩한 동물을 희생함으로 대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Keil이라는 학자는 암송아지의 목을 꺾는 것은 알려지지 않은 살인자에 대한 처형의 상징이라고 말했고, Mattew Henry는 이 의식은 만약 살인자가 잡힐 경우 송아지에게 행한 대로 그를 취급하겠다는 하나의 엄숙한 선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무죄한 피를 흘린 죄에 대한 속량과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함을 받다(8b절) 는 כַּפֵּר֩ (카파르)인데, 원래의 의미는 덮다 로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살인죄를 암송아지의 피로 대신 덮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우리의 모든 죄를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어주시듯 말입니다.
10절부터 14절은 포로로 잡아온 여인을 아내로 삼을 때 규례입니다. 이것 역시 if 로 시작합니다.
만일 포로 중에 어떤 여인을 아내로 삼으려면 그녀의 머리와 손톱을 밀고, 옷을 갈아 입은 후 한 달 동안 그녀의 부모나 동족을 위하여 애곡하게 한 후에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결혼하여 살다가 더 이상 그 결혼 생활을 지속하고 싶지 않을 경우에는 그녀를 노예처럼 팔아서는 안 되고 자유롭게 가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일단 현대의 사고로 생각하면 “뭐 이런 나쁜 놈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적어도 4천 년 이상 고대 사회 문화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자신의 민족이 말살 당한 속에서 원수와 같은 민족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 하는 마음을 헤아리고 맘껏 울 수 있도록 한 달을 배려하는 것과 못된 남편한테 버림 받는 최악의 경우지만 그래도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 아닌 자유민이 되어 새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을 제도적으로 합법화 해주시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 말입니다.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은 공의와 사랑입니다.
이것은 마치 공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성격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너무도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암송아지의 피를 흘려서라도 억울하게 죽은 자의 피 값을 치름으로 공의를 이루시는 하나님, 포로로 잡힌 이름 모를 여인에 대한 따뜻한 배려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오늘도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성품을 닮기를 기도합니다.
날 대속하신 사랑의 예수님 성품을 닮기를 기도합니다.
내 평생 소원 예수 닮기를 예수만 닮기를 내가 원하네
[1]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이란 고대 국가들에서 사회 질서를 의해 사용한 법으로서 해(害)를 끼친 만큼 해를 가한다는 보복률(Lex Talionis) 사상에서
나온 법입니다. 이 법은 구약 성경 외에 함무라비(Hammurabi) 법전(B.C.1750)에도 언급되어 있는 법입니다. 이 법의 목적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주는 죄행을 줄이고 피해자의 원한을 풀어 주므로 사회 질서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인권 차원에서 금전적 배상이나
금고형이나 징역형 등으로 대체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2] 이 규정은 성 밖에서 발견된 모든 시체에 관한 규례가 아니다. 피살된 시체 ללָ֗חָ 의 기본적인 의미는 시체에 칼 자국 등 폭력의 흔적이 있는 것을 뜻한다. (HALOT)
[3]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2)
하나님 백성으로 구별되어 사는 삶
신명기 14:1-21 / 코너스톤 장로교회
자신을 한국 사람이라고 소개한 어느 한 남자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머리카락은 검정색이요, 눈은 갈색 입니다. 피부도 분명 한국인과 같습니다. 겉으로 보면 누가 봐도 한국 사람 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생활하는 것이 어딘가 한국 사람과는 다릅니다. 명절이 되어 옷을 입는데, 한복이 아니라 기모노를 입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면, 일본 신사에 절을 하고 지냅니다. 집에서 된장찌개를 해먹는데, 일반 된장이 아니라 일본식 미소 된장을 풀어 먹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축구 시합을 하는데 한국은 제쳐두고 일본을 응원합니다. 이 남자 과연 진짜 한국 사람이 맞을까요? 누군가 이 남자를 곁에서 본다면, ‘무늬만 한국 사람이지 일본 사람 아닌가?’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머리만 검고, 눈이 갈색이라 해서 다 한국 사람은 아닙니다. 한 사람이 한국 사람으로 구별되게끔 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산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방 백성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삶의 규범을 지키고, 또한 이방신과 우상들을 섬기는 주변 이방 사람들의 문화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말씀 하십니다. 1절 말씀을 봅시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방신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며,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 없는 외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이제 이후에 나오는 내용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갖고 어떻게 구별된 생활을 살아갈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신 14: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이 당시 이방인들의 경우 사람이 죽으면, 죽은 자들을 위한 애도의 표시로서 자신의 몸을 칼로 베어 피를 내는 자해하는 것이 매우 일반화 되어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속의 아픔을, 육체의 상처와 아픔으로 표현하며 죽은 자를 그리며 애곡한 것이죠. 또 하나의 애곡하는 방법은 머리를 미는 것이었습니다. 1절을 보면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오늘 여기서 말하는 것은 머리 전체를 의미합니다. 쉽게 생각하면 우리 한국 남자들 군 입대 할 때 머리를 짧게 빡빡 밀지 않습니까? 이방인들은 사랑하는 이나, 가까운 이들이 죽으면 애도의 표시로 머리를 짧게 잘랐던 것이죠. 이방 사람들이 이와 같이 사람이 죽었을 때 칼로 몸을 자해하거나 머리를 짧게 자른 것은 죽은 자의 영혼이 산 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그릇된 미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더 나아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망자의 영혼이 살아 있는 자를 해한다는 잘못된 미신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는 예전에 어르신들이 장례식 다녀오면 마당에 소금을 뿌렸습니다. 그리고 입고 온 옷 다 빨고, 목욕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은 자의 귀신에 부정 탄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죠. 이스라엘이 살고 있던 가나안 땅에도 많은 미신들이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릇된 이방인들의 종교의식에 메이지 않으며, 죽은 자들의 영혼을 두려워하거나, 그로 인해 평안을 얻기 위해 우상들을 숭배하지 않도록 이와 같은 애도 행위를 금지 하셨습니다.
2절 말씀에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확인시키십니다. 2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신 14:2)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만일 이스라엘이 이방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면, 그들이 굳이 구별된 삶을 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것은 때로는 불편한 상황을 낳기도 합니다. 또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금지시 되는 일들도 생기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거룩한 백성’이며, 그들은 ‘지상 만민 중에서 택함 받은 자들’임을 다시 한 번 언급하시며 그들이 왜 이방인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말씀 하셨습니다. 2절에,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요, 하나님의 ‘특별한 보물’이라는 의미 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받은 이스라엘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 입니다.
3절부터 음식 규례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식용으로 먹을 수 있는 정한 동물들과 먹지 못할 동물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먼저 먹을 수 있는 동물들의 조건을 한 번 살펴봅시다. 6절을 봅시다. “(신 14:6) 무릇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땅에 사는 동물들 중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동물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로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새김질도 해야 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소, 양, 염소, 사슴, 노루 다 여기에 해당합니다. 다 먹을 수 있는 동물이죠.
동물들 중에도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것들이 있습니다만, 이 두 가지 특성 중 한 가지만 가지고 있는 동물을 먹지 못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동물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돼지 입니다. 왜 돼지는 못 먹을까요? 돼지는 발은 쪽발 입니다. 그러나 돼지는 새김질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돼지는 부정한 동물 입니다. 8절 봅시다. “(신 14:8)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유대인들 입장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돼지고기 먹는 거 보면, 기겁을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부정한 동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돼지는 절대로 먹지 않습니다.
물에 사는 물고기는 어떤 기준이 있을까요? 9절을 봅시다. “(신 14:9) 물에 있는 어족 중에 이런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무릇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요” 앞서 땅에 사는 동물의 경우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을 해야 하는 것처럼, 물에 사는 동물의 경우에도 두가지가 동시에 있어야 합니다. 먼저 지느러미가 있어야하고 비늘이 있어야 합니다. 자, 그럼 제가 한 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유대인들 추어탕 먹을 수 있을까요? 아니요 못 먹습니다. 왜요? 미꾸라지는 지느러미는 있지만 비늘은 없거든요. 고등어 조림은 먹을 수 있을까요? 아니요. 고등어도 지느러미는 있지만 비늘은 없습니다. 그럼 새우튀김은요? 낙지전골, 오징어볶음, 바지락 칼국수, 조개구이, 랍스터, 문어구이, 장어구이, 복어탕, 갈치조림 다 못 먹습니다. 이 맛있는 것들을 하나도 못 먹는 유대인들 참 불쌍하죠? 11절부터는 하늘을 나는 동물 중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동물에 대한 이야기가 20절까지 길게 나와 있습니다.
자,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정해주신,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지 못하는 동물에 대한 기준을 보면, 가장 크게 두가지 의문점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첫번째 질문은, ‘왜 어떤 동물은 먹을 수 있고, 왜 어떤 동물을 먹지 못하는 부정한 동물인가?’ 입니다. 더 구체적인 질문으로 바꾸면, 왜 발의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 하면 먹을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는 못 먹는가? 하는 질문 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모른다’가 정답 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 질문에 대한 해석들을 다양하게 내놓았는데요. 그 중 확실하게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해석은 아직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이와 같이 각 동물들의 정함과 부정함을 구분하는 기준을 알 수 없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머리로 다 이해하고 믿으려고 하는 우리의 교만함을 깨트리시는 말씀 입니다. “하나님 왜 이거 먹지 말아야 해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제 좁은 견해와 지혜로는 다 이해되지 않아도 그대로 순종하고 따르겠습니다.”하고 태도가 필요합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그 맛있는 음식들 안 먹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금지된 동물들을 멀리했던 것입니다.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태도의 요구는,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데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나 설명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 입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으면, 애초에 원수가 아니죠. 이와 같이 우리의 지혜로는 다 깨닫거나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상식과 지혜로 다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며 말씀이라면 겸손하게 따를 수 있는 믿음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3년 동안 나체로 다녔습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경우 왼편으로 390일, 오른편으로 40일 동안 모로 누어 새우잠 자듯이 옆으로 누워서 잤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의 원수 국가에 가서 회개하라 선포해야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전쟁을 준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적국에게 항복하라고 메시지를 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인간의 지혜로는 전부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비록 우리가 신약 시대를 살고 있으나, 성경에 나온 하나님 말씀이니까 우리들도 이대로 지키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 입니다. 이 질문은 오히려 답이 명확합니다. 아닙니다. 먹어도 됩니다. 자유함을 누리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에게는 놀라운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먹고 마시는 음식으로 정하게 되거나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새롭고 산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더 이상 내가 무엇을 먹는 것이 나를 정하거나 부정하게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주신 이 귀한 ‘자유함’이 내 육신의 방탕함을 이루기 위한 ‘방종’의 삶으로 이어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을 얼마나 일상적인 요소 입니까? 하나님은 이와 같이 우리 일상의 가장 평범한 모습 속에서도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들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위하여 해야 할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삶의 사소한 일상에서도 하나님은 거룩한 주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날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이며, 구별 받은 천국 백성임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부끄럽지 않도록 세상과 구별된 삶,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