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 티옴킨의 <나바론의 요새>테마음악, 티옴킨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소개합니다.
[ 영화 ‘나바론의 요새 ]
2차 세계대전 시대를 배경을 벌어지는 특수부대의 목숨을 건 작전을 숨가쁘게 다룬 수작입니다. 제작 당시 역대 최고의 제작비로 만들어졌고, 1961년 개봉했을 때 최고 흥행수입을 올린 빅히트작이었습니다. 그레고리 펙, 데이비드 니븐, 안소니 퀸 같은 명배우들이 출연했습니다. 조연으로 나온 안소니 퀘일,스탠리 베이커, 이렌느 파파스같은 이들도 모두 당대의 톱 스타들이었습니다.
* 나바론 요새의 거포 2문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무렵. 영국군은 그리스 케로스 섬에 억류돼 있는 영국 병사 2천명을 구출하려 하지만 그 인근 절벽에 있는 독일군의 나바론의 거포 때문에 작전성사가 불투명합니다. 영국군은 그 거포의 제거 작전을 위해 암벽 등반가, 폭파 전문가, 테러리스트 등으로 구성된 특공대를 구성합니다.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나바론 요새에 잠입하기 위해서 등반전문가인 말로이 대위(그레고리 펙), 게릴라전에 능한 안드레아(안소니 퀸), 폭약전문가 밀러(데이비드 니븐),그리고 암살전문가 2인과 지휘관인 프랭클린 대령(안소니 퀘일)등 6명이 차출되어 사실상 무모할 수도 있는 나바론 작전을 6일간에 걸쳐서 수행하는 내용을 장장 2시간 30여분동안 다루고 있습니다.
거친 폭풍우 속에 가까스로 목적지 섬에 도착한 6명의 대원들은 깎아지른 수직의 200여미터 암벽을 한밤중을 틈타서 오르는 과정에서 벌써 지휘관인 프랭클린 대령의 다리가 부러지는 악재가 발생하는 등 천신만고 끝에 마을에 진입합니다. 식량과 의약품까지 잃어버린 이들 특공대원들 앞에는 수많은 독일군들이 첩첩이 에워싸고 있는 요새로 가기 위해서는 험난한 모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당시 단성사에서 개봉했던 영화 신문 광고
더구나 접선하여 만난 내부의 동료 중에 배신자도 있었고, 결국 전원이 체포되기도 하고...... 아무튼 이들은 극적으로 임무수행을 하여 나바론의 대포를 폭파하게 됩니다마는 이 마지막 과정까지를 긴박하게 그려낸 J 리 톰슨 감독(영화 '대장 부리바'의 감독)의 연출이 꽤 볼만한 영화였지요.
디미트리 티옴킨의 멋진 음악과 그리스 현지촬영을 통한 생생한 분위기가 영화의 재미를 더해줍니다. 작전성공을 위해서 부상당한 프랭클린 대령을 이용하는 말로이 대위를 향해서 “나는 케로스의 2,000명은 모르지만 프랭클린 대령은 좋아한다”라고 내밷는 데이비드 니븐의 말은 전쟁과 살상에 대한 아픔과 고통을 되짚게 합니다.
큰 희생과 아픔이 없이 전쟁의 승리와 작전의 성공은 있을 수 없겠죠. 나바론은 오락적인 재미와 통쾌한 작전성공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그 이면의 아픔도 슬쩍슬쩍 건드렸던 그런 영화였습니다.
* 영화 <나바론의 요새> 주요 동영상 장면, 절벽을 오르는 장면과 대포 폭파 장면이 나옵니다
[ 영화 음악가 드미트리 티옴킨 ]
티옴킨은 제정 러시아 말기인 1894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의학자, 어머니는 음악가였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이어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 학원에서 작곡을 공부했습니다.
러시아 공산혁명 직후 그는 어머니와 함께 독일 베를린으로 건너가 천재 피아니스트 페루치로 부조니의 마스터 과정을 이수했습니다. 1922년 베를린 관현악단과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협연하며 클래식 피아니스트로 정식 데뷔했습니다.
다음해 파리로 무대를 옮겼다가 25년에는 미국의 초청을 받고 카네기홀에서 연주회를 가진 후 미국에 정착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인생 전반기는 클래식 음악인의 길을 밟았습니다.
30년대 초가 되자 티옴킨은 새로운 전기를 맞습니다. 팔꿈치에 이상이 생겨 더 이상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할리우드 MGM 영화사가 그를 초청해 영화음악 작곡을 맡겼습니다.
인생 후반기에 영화음악 작곡가로 변신한 것입니다. 영화음악이 대중음악 범주에 속하기는 하지만 티옴킨은 반드시 100명 이상 규모의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작품을 녹음했다고 합니다. 33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영화음악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영화음악을 작곡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잃어버린 지평선(37)>,<백주의 결투’(46>),<하이 눈’(52>,<다이얼 M을 돌려라’(54)>,<우정 있는 설복’(55)>, <자이언트(56)>,<OK 목장의 결투’(57)>,<바다와 노인(58)>,TV 서부극시리즈 <로하이드’(59)>,<리오 브라보’(59)>,<알라모(60)>,<나바론의 대포(61)>,<로마 제국의 멸망(64)>,<무장마차(67)>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증에서 <하이 눈>은 많은 일화를 남겼습니다. 이 영화를 만든 유대인 감독 프레드 진네만은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걱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대 인기 절정의 컨트리 송 가수 텍스 리터가 부른 이 영화 주제가 ‘나를 버리지 말아주오(Do Not Forsake Me)’가 영화 개봉 두 달 전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자 영화도 덩달아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영화음악이 영화의 흥행을 도운 것이죠. 명배우 게리 쿠퍼와 미녀 배우 그레이스 켈리(훗날 모나코 왕비)가 주연한 <하이 눈>은 역대 미국 대통령 모두가 추천한 불후의 명작이 됐습니다.
티옴킨은 러시아 작곡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리듬 사용법의 기재였으며 곡에 강렬한 선율을 많이 가미했습니다. 티옴킨은 서부극, 애정물, 전쟁극, 스릴러물 등 모두 78편의 영화 또는 TV 시리즈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22회에 걸쳐 오스카상과 골든글로브상 지명을 받았고, 이중 4개의 아카데미상과 6개의 골든글로브상을 수상했습니다. <하이 눈>은 작곡상과 주제가상을 함께 받았습니다.
티옴킨은 70년 전기 영화 <차이코프스키>를 마지막으로 작곡 활동을 마쳤습니다. 말년에 런던으로 이주한 그는 비행기 사고 후유증으로 투병하다 79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 나바론의 촬영지였던 장미꽃 피는 섬,로도스 ]
* 아래 초록색 표시 섬이 로도스 섬입니다(그리스 령입니다)
터키 바로 밑, 에게 해에 위치한 로도스는 그리스에서 가장 동쪽에서 있는 섬입니다. 고대부터 무역 중심지로 번성하여 오랜 역사와 그에 걸맞은 다양한 문화유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풍광이 아름답고 기후가 온화한데다가 교통의 요지여서 동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서 고대 그리스 때부터 각광 받아온 섬이었습니다.
특히 로마 시대에는 학문이 번성하여 아테네,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로마 귀족 자제들의 3대 유학지로도 유명했지요. 카이사르도 이곳으로 유학을 왔다고 합니다. 물론 빈둥거리며 놀다가 갔지만...
로도스 섬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1988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세도시’입니다. 이곳에 중세도시가 들어선 것은 1309년 예루살렘의 성 요한 기사단이 섬의 일부를 점령하면서부터였습니다. 당시는 십자군 전쟁 시기로, 기사단은 이곳을 유럽 중세의 이상적인 요새도시로 탈바꿈시킵니다.
* 구시가지
현지인들은 이곳을 ‘구시가’라고 부르는데, 근처에 가면 먼저 견고하고 웅장한 성벽이 눈길을 끕니다. 유럽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성벽 중에 하나지요. 중세도시 내부는 크게 기사단이 거주하는 지역과 시민들이 거주하던 도시 구역으로 나뉩니다.
도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기사단 단장의 관저였던 그랜드마스터 궁전입니다. 웅장하고 화려한 2층 건물에 무척 넓은 뜰이 특징이다. 화약폭발로 1856년 무너진 것을 1940년 이탈리아인들이 복원한 것입니다.
* 영화 <나바론>에서, 이곳 성문을 통하여 독일 전차들이 우글우글 몰려 나옵니다
이외에도 과거의 주택, 병원, 우물, 기사단의 거리, 광장, 정원, 뜰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 중세의 풍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유적지가 아니라, 지금도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중세도시’. 6백여 년 전 성 요한 기사단이 살았던 건물에서 현재도 약 6000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93년 여름에는 당시 터키 이스탄불에서 근무하던 저는 가족들과 함께 이곳으로 휴가를 보낸 적이 있어 지금도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로도스 섬 공방전>
장미꽃 피는 섬이라는 어원을 가진 로도스 섬.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이스탄불)을 함락하고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술탄 메메드 2세가 1480년 로도스 섬 정복을 위해 10만 대군을 파견하지만 전염병 등의 이유로 성 요한 기사 수만 따지면 600명밖에 안 된 로도스 방위군을 상대로 실패합니다.
1520년 투르크의 술탄으로 즉위한 슐레이만 대제는 로도스 제압을 결심하고 성 요한 기사단 또한 베네치아 출신의 축성 기술전문가인 마르티넨고를 초청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1522년 6월 1일, 투르크 제국의 앞바다에 로도스 공략을 위한 투르크 해군의 집결을 완료하고 10만의 육군도 출발하여 7월 28일 투르크 전군이 로도스 섬에 상륙합니다. 8월 1일 술탄 슐레이만의 예고대로 로도스 섬의 공방전을 개시하여 연일 대포를 쏘아대고 지뢰를 터뜨려 공격하다가 9월 24일 마침내 총공격을 개시하지만 방위군의 20배가 넘는 병력을 투입하고도 첫날 로도스 성벽은 끝내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그 뒤로 10월이 들어서고 이제 총공격은 열흘 간격으로 되풀이 되었습니다. 그런 중에 축성 기술자 마르티넨고가 부상을 입었고 기사단의 제2인자인 다르말이 적과 내통하다가 붙잡혀 처형되기도 합니다.
겨울철이 되었어도 투르크의 공격이 끊이지 않았고 양측에서 모두 화평을 시도하였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다가 마침내 로도스를 떠나길 원하는 사람은 기사든 주민이든 안전하게 보내 주기로 하고 기사단이 항복하였으며 기사단과 주민은 술탄 슐레이만의 약속대로 모두 안전하게 로도스 섬을 떠납니다.
* 로도스 섬에 있는 다른 도시,린도스
로도스 섬에서 쫓겨난 지 8년 뒤 오랜 방랑 끝에 1530년 기사단은 몰타섬으로 이주하였고 1565년 봄 투르크 군이 3천 척의 선박에 5만 병사를 싣고와 몰타 공방전을 벌이지만 실패하고 석 달 만에 돌아갑니다.
* 린도스 꼭대기에 있는 그리스 유적, 영화에서도 나옵니다
그 뒤 1798년 6월 몰타섬의 성 요한 기사단은 이집트 원정길에 오른 나폴레옹에 의해 몰타에서 추방되지만 현재에도 로마의 콘도티 거리에 본부를 두고 의료 활동을 하고 있는 조직으로 남아있습니다.
* 린도스 골목길
겨울 바다와 파도카페를 방문한 께 인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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