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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이야기 727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 동학의 땅 정읍
정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이다. 고부군이 지금은 정읍시에 딸린 면이지만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정읍이나 부안보다 더 세력이 컸으며, 쌀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삼남이 풍년이면 천하는 굶주리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생겼는데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풍년이 들면 우리나라에 식량이 부족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중 가장 큰 평야가 있는 곳이 바로 고부고을과 김제고을이었다. 고부를 중심으로 줄포, 염포, 사포, 동진과 같은 큰 포구가 있었으므로 어선과 상인들이 활발하게 오갔고 주변에서 나는 농산물과 수산물이 모두 이곳으로 집결되었다. 그러나 당시 호남 지방은 3년 내내 가뭄이 들어 사람들의 삶이 막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 당대의 실력자인 조 대비의 조카이자 이조판서 심상훈과 사돈 간이었던 탐관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발령을 받고 오게 된다. 조병갑이 군수로 고부에 와서 자행했던 일을 황현은 『오하기문(梧下記聞)』에 이렇게 적고 있다.
계사년에 충청우도 일대가 가뭄이 극심하여 세금을 거둘 수조차 없었는데, 고부는 산과 바다가 서로 엇갈리는 지형으로 북쪽은 흉년이 들었지만 남쪽은 그런 대로 추수를 하였다. 병갑은 가뭄에 대한 보고를 받고 각 고을을 순시하면서 북쪽 네 개 면의 세금을 탕감해주었다. 그러나 각 고을에는 “가뭄의 재해로 세금을 탕감하지는 않는다” 하고 말하면서, 북쪽 지방의 세금을 남쪽 지방에다 옮겨 부과하고 실제보다 배나 되게 독촉하여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북쪽에는 세금을 다른 지방에 옮겨 부과한 것을 자랑하고 백성들에게 후한 보상을 요구하여, 논 백 이랑당 거두어들인 것이 백 말이나 되었다. 이것은 실제로 국세의 세 배나 되었다.
또 자기가 관할하는 지역에 집을 짓고 첩을 사서 거기에 살게 하였다. 그 집을 지을 때 국가의 공사보다 더 심하게 닦달하여 백성들이 견딜 수 없어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수천 명이 모여서 이러한 사정을 호소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되자 병갑은 급히 전주로 달아났다. 이것이 2월 초순의 일이다.
이 사건이 파문을 일으키자 조병갑은 1893년 11월 30일 익산군수로 전임되었다. 이은용이 고부군수로 발령되었으나 이은용은 부임하지 않고 있다가 안악군수로 갔고, 계속 신재묵, 이규백, 하긍일 등이 고부군수로 발령을 받았지만 여러가지 이유를 내세워 부임을 기피하였다.
이렇게 발령을 받은 고부군수들이 부임을 하지 않은 까닭은 조 대비의 조카이며 이조판서 심상훈과 사돈 관계에 있는 조병갑이 고부마을을 떠나지 않으려는 유임 공작을 이면에서 치열하게 벌였기 때문이다. 조병갑 역시 익산군수로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전라감사 김문현이 장계를 올려 “고부 전 군수 조병갑은 포흠(逋欠, 세를다 거두지 못하여 나라에 체납한 세금)이 많아 점차 청산하고 있으며, 때마침 세를 받아들이려는 중인데 타읍으로 옮기게 되면 착오가 생길 우려가 있다”라고 하였다. 결국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에 부임하였고, 그 과정을 지켜본 농민들은 감정이 폭발하였다. 그들은 사발통문을 돌렸고 드디어 말복장터에 모였다. 1894년 1월 10일이었다.
고부 봉기가 그렇게 발발하자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조병갑을 파면하였고 다음과 같은 임금의 전교(傳敎)를 내렸다.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난 것은 실로 오랫동안 백성들의 원망이 쌓이고 정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까닭이지 그 연유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런 사태를 불러온 해당 관리가 직책을 망각하고 일을 그르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 그런데 지난번에 유임을 상신한 관리가 끝내 파직을 당하니, 앞뒤의 일이 어찌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전라감사 김문현은 먼저 봉급 삼등을 감하는 조치를 시행하고, 전 군수 조병갑은 난을 불러일으키고 뇌물을 받은 죄를 범하였으니 의정부에서 잡아들여 죄를 다스리도록 하라. 그리고 장흥부사 이용태를 고부 안핵사(按覈使)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하루빨리 부임하여 엄중히 사실 조사를 하여 보고토록 하고, 또 용안현감 박원명을 고부군수에 임명하니 그로 하여금 난민을 수습토록 하라.
그러나 박원명의 선정(善政)과는 달리 이용태는 동학군 주모자들을 색출한다면서 농민들을 달달 볶았다. 결국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은 그해 3월 백산기포(白山起包)를 일으킨다.
고부 관아고부는 물산이 풍부해 탐관오리들이 발영을 받기 위해 욕심을 냈던 고을이다. 관아 주변에 정자를 짓고 유희에 빠지곤 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흔적이 남아 있던 고부관아는 1926년에 발간된 『조선고적보도(朝鮮古蹟報道)』에 한 장의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대다수의 관아 건물이 학교나 면 소재지로 변하였던 것처럼 고부초등학교로 변하고 만 것이다.
고부 향교고부 일대는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되면서 관군과 농민군의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다. 정부군은 일본군을 앞세워 농민군을 탄압하기도 했다.
당시 죽창을 들고 흰옷을 입은 동학농민군들이 앉으면 푸른 대나무로 산이 덮이고, 일어서면 흰옷 때문에 산 전체가 하얀색으로 변한다고 해서 “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그렇게 죽산이라는 이름을 얻은 백산에서 사열을 정비한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크게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전주성에 입성한 동학농민군은 전주화약을 맺은 뒤 집강소(執綱所)를 열었다.
그래도 정부는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고, 결국 삼례에서 2차 기포를 했던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완패하고 태인 성황산에서 관군과 마지막 싸움을 벌였다. 결국 마지막 싸움에서 진 전봉준은 동학군을 해산하고 입암산 너머 순창의 피노리로 갔고, 김개남은 회문산의 종성리로 피신하였다.
전봉준은 그곳에서 부하 접주였던 김경천의 고발로 관군에 다리가 부러진 채 붙잡혔으며, 김개남은 회문산 아래 산내면 종성리 매부의 집으로 몸을 숨겼다. 그 마을에 옛 친구 임병찬이 있었다. 그는 아전 출신이었고 그 근방의 부호였다. 임병찬이 아랫마을에 있는 김개남에게 자기가 있는 마을로 올라오라고 한 뒤 전주감영에 신고하였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강화 수비병의 종군이었던 황헌주와 포교들을 보냈다.
김개남이 숨어 있던 집을 포위한 관군이 “어서 나와 포승줄을 받으라” 하고 말하자 김개남은 측간에서 변을 보고 있다가 “올 줄 알았다. 똥이나 누고 나가겠다” 하고 껄껄 웃었다고 한다. 그를 잡아갈 적에 그가 혹시 도술을 부릴지 모른다 하여 손가락 끝, 발가락 끝 전부에 대꼬챙이를 박았다고 한다. 김개남은 전주로 끌려가 전라관찰사 이도재의 즉결심판으로 전주 서교장에서 효수되어 고난에 찬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 처형 상황을 황현은 이렇게 적었다.
적 김개남이 형벌에 복종하여 죽음을 받았다. 심영(沁營)의 중군 황헌주가 개남을 포박하여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 이도재가 개남을 신문하였다. 개남은 큰 소리로 “우리들이 한 일은 모두 대원군의 은밀한 지시에 의한 것이다. 지금 일이 실패한 것은 또한 하늘의 뜻일 뿐인데 어찌 국문한다고 야단이냐”라고 하였다. 도재는 마침내 난을 불러오게 될까 두려워 감히 묶어서 서울로 보내지 못하고 즉시 목을 베어 죽이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냈는데 큰 동이에 가득하여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투어 내장을 씹었고, 그의 고기를 나누어 제사를 지냈으며, 그의 머리는 상자에 넣어서 대궐로 보냈다.
두 사람이 모두 잡히지 않았다면 전봉준은 종성리에서 김개남을 만나 재기의 칼날을 갈았을 것이다. 김개남을 밀고한 임병찬은 훗날 면암 최익현과 더불어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고 대마도까지 동행한다. 최익현의 순절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그 후 체포되었고, 1916년 5월 유배지 거제도에서 단식사하고 만다. 나라를 위한 마음은 똑같았지만 나라를 위한 방법은 그렇게 달랐다.
전봉준은 김경천의 고발로 다리가 부러진 채 들것에 실려 금강을 건넜고 손화중, 김덕명, 성두환 등은 밧줄에 묶여 건넜다. 훗날의 의병장 임병찬의 고발로 붙잡혀 동학농민운동은 막을 내리게 된다.
결국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던 동학농민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지만 그날의 함성이 결국 우리 근현대사의 시작이 되었다. 그 바탕 위에서 증산교를 창시한 강일순과 보천교를 세운 차경석으로 맥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거슬러 오르면 고부는 마한의 땅이었다. 백제 오방성(五方城)의 하나가 되는 중방고사성(中方古沙城)이 있던 곳으로 정치, 군사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백제가 사냥을 핑계로 아름다운 나라 마한의 도성을 습격하여 고부는 백제에 편입된다. 이어 백제는 고부에 고사부리(古沙夫里)라는 성을 쌓았다. 고려 때에 이르러 영주(瀛州)라 개칭하고 관찰사를 두었다. 그 고을 터가 정읍에서 고부로 오는 길가의 입석리 부근이다.
황토현 동학농민혁명 기념탑고부는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전라도에서 전주 다음으로 번창했던 고을이다. 동학농민운동 역시 이곳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 근세를 뒤흔든 원동력이 된 고장이다.
『여지도서』에 “산천이 빼어나게 아름다워 세상에서는 신선 동네라고 부른다. 최집평이 말하기를 ‘남쪽으로 방장산(方丈山)에 이어지고, 서쪽으로 봉래산(蓬萊山)과 마주 보고 있다. 초천(楚川)이 동쪽을 지나고, 율포(栗浦)가 서쪽을 두르고 있다’고 하였다”라고 실려 있는 고부는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전라도에서 전주 다음으로 번창했던 고을이다. 서울의 당상관 자제들이 수령 자리로 가장 가고 싶어 했던 고부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부안과 정읍, 고창으로 나뉘어 정읍시에 딸린 하나의 면 소재지로 전락한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조선 영조 시절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경상도 안의 사람이었던 정희량이 주동 세력으로 끼였다는 이유로 안의 땅 절반은 거창에, 절반은 함양에 쪼개주고 안의 사람들의 벼슬길을 막았던 적이 있다. 고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것이 아니라 철로가 통과하면서 정읍이 중심지가 되자 고부가 면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다는 강변도 나오지만, 분명한 사실은 고부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부안, 고창, 정읍으로 쪼개지면서 정읍시에 딸린 하나의 면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지금의 고부에 남은 자취라곤 1403년에 지어져 갑오년에도 있었다는 고부향교 그리고 조병갑이 기생을 끼고 놀았다는 군자정(君子亭)만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서 있을 뿐이다.
“달이 뜨니 구름은 섬으로 돌아오고, 때는 가을이라 달이 누각에 가득 비치네”라고 노래한 이첨의 시를 읊조리며 태인천을 건너면 정읍시 태인면에 이른다.
태인면 곳곳에 신라의 문장가인 최치원의 자취가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최치원이 스스로 서쪽에서 배워 얻은 바가 많다고 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장차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쇠해가는 나라의 정국은 의심과 시기가 많아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결국 외직으로 태산군 군수가 되었다”라고 실려있다. 그런 연유로 태산군수가 된 최치원이 풍류를 즐기며 놀았다는 정자가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라는 피향정(披香亭)이다.
연꽃이 만발하면 그 향기가 그윽하다는 피향정은 앞에는 ‘피향정’, 뒤에는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태산군수로 와 있던 최치원이 이 연못가를 거닐며 풍월을 읊었다고 전해져 온다. 현재의 건물은 고려 현종 때 현감 박승고가 중건한 뒤 두 차례 중수를 거쳤고 지난해에 다시 보수한 것이다. 정면 5칸에 측면 4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사면이 모두 트였고 기둥이 33개이며 난간이 빙 둘러진 연등천장이고 합각 밑에 우물반자를 두었다. 보물 제289호로 지정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연지는 객관 남쪽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연지는 지금도 정자 아래쪽에 남아 있다. 원래는 상연지, 하연지가 있었는데 상연지는 민가가 들어서면서 도로로 편입되고 하연지만 남았다. 오늘날 하연지는 오염된 물과 온갖 쓰레기로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한때는 태인면사무소로 사용되어 기둥마다 상처 입은 피향정에 수십 개의 공적비들이 서 있다. 그중 하나가 동학농민운동의 도화선이 된 만석보를 세운 고부군수 조병갑의 아버지 조규순의 영세불망비다.
만석보동학혁명의 서막을 연 만석보. 고부군수 조병갑이 군수로 재직하면서 풍부한 곡창지대였던 이곳의 양민들에게 물값을 받고 핍박하면서 동학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부임하자마자 아버지 조규순이 이곳 태인현감을 지냈던 것을 명분으로 주민들의 혈세를 모아 선정을 베푼 그 공을 영원히 잊지 못하겠노라고 태인현감조규순영세불망비부터 세웠다.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비석들이 많고 이름난 산의 반반한 바위에는 어김없이 누군가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데, 어떻게 하면 단기간 내에 치부(致父)를 할 것인가에만 혈안이 되었던 조병갑이야 오죽했겠는가. 다른 돌과 달리 오석(烏石)에 새겨진 조규순영세불망비는 엊그제 새긴 것처럼 아주 선명하고 그 뒤편에는 조병갑이라는 이름이 너무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다만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하단은 부러져 그 아랫부분이 없는 것을 보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그 비를 세우며 재미를 본 조병갑이 백성들의 물 걱정을 덜어주겠다고 원래 정읍천변에 구보가 있었음에도 정읍천과 태인천이 만나는 동진강에다 만석보를 만든 뒤 물세를 더 걷게 되면서 근현대사의 출발점이 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한편 피향정 북쪽에 애련당(愛蓮堂)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동학농민운동이 끝난 해인 1885년에 헐리고 그 앞의 연못은 메워져 시장이 되고 말았다.
태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칠보면 무성리에는 최치원을 모신 무성서원(武城書院)이 있다. 광해군 7년(1615)에 창건하여 최치원을 모시던 태산사를 중종 때 현감을 지낸 신영천(申靈川)을 모시던 생사당과 합해서 숙종 22년에 무성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무성서원은 신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관을 배향하였는데 이서원은 병산서원이나 도산서원 또는 소수서원처럼 잘 짜인 위세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래된 은행나무가 노란 단풍으로 갈아입을 때는 켜켜이 쌓인 역사의 숨결을 접할 수가 있어서 다시 가고 싶어지는 서원이다. 이 서원은 고종 5년(1868) 전국의 서원이 철폐될 때도 살아남은 47개 중 한 곳이며 사적 제166호다.
“노래 소리 저녁 무렵 정자에 퍼지니, 나의 가는 길은 자유롭기만 하구나. 어찌 한식(寒食)이라 눈물을 흘리리오. 취향후(醉鄕候)나 닮아보리. 멀리 불빛은 소금 굽는 마을임을 알리고, 층층으로 된 구름은 신루(蜃樓)를 연상하게 하네. 청신한 기쁨에 오늘 같은 날 없으니, 의당 봄놀이의 으뜸이라 하겠네”라고 노래한 김종직의 시에서 느껴지는 평온함은 정녕 옛이야기일 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