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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라고 증거된 아래의 본문 말씀과 그 전후로 해서 소개되고 증거된 이스라엘의 첫 왕인 사울은 오늘날의 성도들에 있어 가장 많이 오해하고 있는 성경의 인물들 중 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무엘상 15장 22~23절에서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라고 증거되어 있는 것에서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이듯이 불순종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게 됨과 함께 그 자신과 그의 가계에서의 왕위가 다윗과 그 가계로 넘어 가게 된 사실에 있어 마치 구원까지 돌이켜 진 것으로 단정 짓는 우를 범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그 어느 곳을 봐도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게 되고 왕위를 잃게 된 것으로 증거되어 있는 것이지 구원이 돌이켜 지고 영생이 취소될 정도로 영원히 버림받았다는 내용은 없는 것을 보게 되고, 어떤 면에서는 사실상 구원에 참예케 됨이라는 것이 행함으로 인해 가능한 것임이 아닌 것이기에 행함의 잘못으로 인해 구원이 돌이켜 지는 개념이나 차원일 수가 없는 것인데..
심지어는 고린도 전서 5장 1~5절에서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증거되어 있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듯이 이미 구원에 참예케 된 자에 있어서 도무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끔찍한 음행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사탄에게 내어준 바와 같이 된 자까지도 구원이 돌이켜 지는 것은 아닌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상 만일 그러한 것이 아닌 것이라면 다른 그 누구보다도 그러한 사울 왕과는 비교조차도 못할 큰 죄악들,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 있어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어 보이는 간음 및 살인 교사와 유사한 죄악들을 범한 다윗이나 적지 않은 기간 우상 숭배의 죄악들을 범했던 솔로몬, 또한 구주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을 뿐 아니라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부인했던 베드로야 말로 그 이상으로 구원이 돌이켜 졌어야 마땅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정말 그런 것이라면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참예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날마다 순간마다 크고 작은 죄악들, 곧 절대 진리이자 하나님의 법인 말씀을 여러 모양들로 수없이 어기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 또한 하나같이 구원이 돌이켜 져야 마땅한 것이며, 진정 그런 이치와 원리인 것이라면 아무도 끝까지 구원이 유지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없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 따지고 보면 단 한 사람도 없게 되는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처음에 있어서의 믿음으로 인한 구원은 전적으로 값없는 은혜이고, 오직 말 그대로 믿음으로 인해서만 가능한 것이며, 근원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으로 인한 역사인 것이자 인치심인 것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부연하면 그 위치와 역할 상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상상도 못할 사랑과 은혜와 능력으로 창세 전부터 뜻하시고 계획하시며 약속하시고 예정하시며 준비하시고 진행하시면서 그의 시간에 따라 하나하나 나타내시고 누리게 하시며 성취해 나가시는 역사들 한가운데 있는 것으로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서만, 곧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신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특히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악과 진노와 사탄과 음부와 사망과 심판들의 영적 노예 상태에 빠진 우리 인생들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길과 통로와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의 구주로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우리 인생들에 있어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세상 끝 날과 부활과 영생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을 위한 값과 대가들을 대신 다 치르심과 함께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값없이 참예케 되는 것이고 마치 목욕하듯 통째로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며..
직접적, 현실적, 경험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분이며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뜻과 약속과 말씀들을 다 실행하시고 무엇보다 그 한가운데 계신 구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다 이루신 구원의 일들을 시간과 공간들을 초월해서 믿음과 함께 말씀대로 모두 실제가 되게 하시는 성령님께서 정말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본질적으로는 말씀이신 하나님의 것, 말씀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 곧 말씀의 백성으로 뒤바뀌게 하시는 차원인 것이기에 그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정도로까지 하나되시어 실질적으로 이미 참예케 하시고 새롭게 하신 구원이, 게다가 이미 영원에까지 이어진 의미도 포함된 구원이 중간에 잘못된 행위 한 두 번으로 취소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죄악을 범해도 된다거나 죄악을 범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거나 회개가 필요 없다거나 한 번 구원에 참예케 되면 모든 게 끝이라거나 하는 의미나 차원은 전혀 아니고 오히려 반대에 가까운 것으로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한 죄악들에 있어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비의 심정으로 더욱 사랑하셔서라도 더 이상의 죄악들을 반복하지 않고 하루바삐 돌이키며 속히 제대로 된 믿음에 설 수 있도록,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이나 후세에 교훈과 각성과 경고와 돌이킴과 믿음의 경주 등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시간까지 응답과 승리와 복들 등은 막으시곤 하시고, 대신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 같은 징계들을 아끼지 않으시곤 하시며, 뿐만 아니라 마치 광야 40년과 같이 돌고 방황케도 하시곤 하는 것이고, 사실상 사울 왕의 사례도 그런 맥락이나 관점에서 통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우선 그 사울 왕은 구약의 다른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담과 하와 때부터 미리 구주 예수님에 대해 보이시고 안내하시며 연결될 수 있게 하신 여자의 후손에 대한 계시, 여러 모양의 피 제사와 희생 제물들, 유월절 어린 양, 모세를 통한 장대 위의 놋뱀, 모세의 지팡이, 깨어진 반석, 회막, 지성소, 제사장, 선지자, 사사, 멜기세덱, 제사장과 선지자 역할을 했던 믿음의 선조 등과 같은 다양한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들, 약속과 계시와 상징들 등을 통해 말 그대로 오실 메시야를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자라 할 수 있는 것이고, 심지어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들의 첫 왕으로 택함을 받았던 자인 것이며, 게다가 아래 본문에서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라고 증거되어 있는 것과 같이 구주 예수님에 대한 구약 시대의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와 상징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사사 사무엘에 의해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기름 부으심까지 받은 자인 것이고, 심지어는 사무엘상 10장 10절에서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라고 증거되어 있는 것과 같이 성령님께서 크게 임하시기도 했던 자인 것이며, 더군다나 하늘의 힘과 은혜와 응답과 승리들을 적지 아니 누리기도 했던 자인 것으로 이미 구원에 참예케 된 자인 것임은 확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죄악들과 함께 왕위의 자리가 다윗에게로 넘어가게 되고 뿐만 아니라 여러 모양의 사악하고 안타까우며 처참한 모습들을 보였으며 특히 그 최후까지도 비참한 것이었으나 사실은 잘 통찰하고 살펴보면 그와 유사한 모양들이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모습들은 적지 않은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셀 수 없이 있었거나 있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이고, 실제로 믿는 자들이든 아니든 그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의 끝과 죽음이 반드시 있는 것이며, 그 모양에 있어서는 실로 다양할 수 있고 반드시 겉으로 은혜되고 평온하기만 하기는 어려우며 심지어는 가장 믿음이 대단해 보이는 자들도 돌에 맞아 죽게 되거나 목이 베이거나 기름에 튀겨지거나 또는 질병이나 치매나 사고 등과 같은 죽음들도 있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도 있는 것인데..
어쨌든 사울 왕 중심으로 좀 더 구체적이면서 현실적으로 정리하면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어떤 식으로든 사도 바울과 같이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 죄악들, 악한 세력들, 유혹과 시험들, 시련과 위기들 등과 싸우고 혹 범하게 된 죄악들에서는 최대한 빨리 자복하며 참회하고 돌이키면서 다른 그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가까이하며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실천하며 증거하는 등과 같은 결단과 몸부림들로 살아 있고 깨어 있는 믿음이 아닌 마치 옛 사람과 같이 자신의 힘과 의, 세상적인 능력과 방법들 등을 의지하고 최우선을 두게 되면 그로 인해 미지근해 지고 잠자며 병들고 죽은듯한 신앙이 됨과 함께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과 같은 징계들에 허덕이게 되고 광야 40년과 같이 돌고 방황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아래 본문의 사울 왕이야 말로 그에 있어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한 사울 왕이 인생을 잘 마무리하기 보다는, 좀 더 정확하게는 잘 마무리되기 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끝에 있어서까지도 비참했던 것과 같이 굳이 표현해서 심히 부끄러워 보이는 구원이 된 것은 우리 인생들이 알기 힘든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그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첫 왕이었기에 여러 모로 다른 그 누구보다 더욱 엄중했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 그때 당시의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 뿐 아니라 그 후세들, 심지어는 오늘날의 우리들에 이르기까지 경고와 교훈이 필요했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종류의 도구와 통로가 된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며, 그마나 합력하여 선이라 할 수 있는 측면은 바로 그와 같은 부분들 하나하나를 포함해서 특히 다윗이 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늘날의 우리들에 있어서까지 선한 영향력이 될 수 있는 정도까지의 큰 그릇으로 준비되어 짐에 있어 사울 왕의 불신앙과 사악과 핍박들이 어떤 식으로든 단련과 연단과 훈련들이 될 수 있었다는 것, 무엇보다 그 사울 왕 자신의 구원이 돌이켜 진 것이 아니라는 것, 심히 부족하더라도 이 세상에서의 경점과 같은 삶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시간을 영원한 본향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것 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사무엘상10:1)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9월 10일(화)1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