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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권 보장과 징벌규례
신 21:15-23
15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이면
16 자기의 소유를 그의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17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 21:15-23 / [장자 상속권]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한 아내를 다른 아내보다 더 사랑하였다고 합시다. 그런데 두 아내가 다 같이 아들을 낳았으나 미움을 받는 아내가 장자를 낳았다면 16) 재산을 자식들에게 나누어 줄 때에 미움받는 아내에게서 태어난 장자를 무시하고 사랑받는 아내에게서 태어난 아들을 장자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17) 오히려 그는 미움받는 아내의 아들에게 장자권을 인정하고 자기에게 있는 모든 재산의 3분의 2를 그에게 주어 그가 동생보다 갑절의 재산을 상속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정력에서 태어난 첫 열매이기 때문에 그에게 장자권이 있습니다. 18) [불효자 처형 규정] 어떤 사람에게 고집이 세고 반항하는 아들이 있어서 아버지의 책망도 듣지 않고 어머니의 호소도 무시하며 부모가 벌을 주면서까지 타일러도 듣지 않는다고 합시다. 19) 그러면 그의 부모는 그를 붙잡아 성문의 광장으로 끌고 가서 그 성읍의 장로들 앞에 세우고 20) 그들에게 이렇게 공언해야 합니다. `이 녀석이 우리 아들인데 고집이 세고 반항만하며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방탕하고 술만 마시는 녀석입니다.' 21) 그러면 그 성읍의 온 주민들이 그를 돌로 쳐죽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에서 죄악을 척결하십시오. 그러면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22) [처형된 시체의 매장 규정] 어떤 사람이 무서운 죄를 지어서 여러분이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처형한 다음 그 시체를 나무에 매달았으면 23) 그 시체를 어두울 때까지 달아두지 마십시오. 그런 시체는 반드시 그날 해 지기 진에 매장하십시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 땅에 재앙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상속 재산으로 주시는 그 땅을 더럽혀서는 안됩니다.
자녀가 많은 것이 큰 축복과 번성이라고 생각한 고대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한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본문은 이에 대한 방안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15-17) 일부다처제로 인한 폐단 중 하나가 복잡한 상속의 문제였습니다. 이에 본 단락의 규례는 장자의 권리를 보장해 주게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똑같을 수 없고, 아내를 사랑하는 데에도 사람에 따라 차별을 두게 되기 쉽습니다. 문제는 그 사랑의 정도에 따라 자녀에 대한 사랑도 그 질량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산을 상속하게 될 때에도 더 사랑하는 아내의 자녀에게 더 많은 상속을 하려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방치되면, 상속의 문제가 있을 때마다 가정과 집안에 큰 갈등과 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상속의 문제로 형제끼리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하여 장자의 질서를 하나님께서 정해 주십니다. 장자의 권한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고 바꾸어서도 무시해서도 안된다고 규정해 주십니다. 재산에 대한 상속을 사사로운 개인적 감정에 두지 말고 말씀대로 장자에게 두 배의 상속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가정의 화목을 지키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18-21) 본 단락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보여줍니다. 부모의 말에 순종치 않고, 불순종하기에 징계하여도 순종치 않는 자녀는 악이라고 말하고 그러므로 제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성읍의 사람들이 돌로 쳐 죽여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는 본보기로 삼으십니다. 효는 가르침과 훈련의 영역에 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따르게 해야 합니다.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22-23) 사형에 해당되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그 대가를 사형으로 치르게 하고, 죽은 후에도 그 시체는 나무에 달아 본보기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죽은 후에도 철저한 모욕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한편 사형으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렀지만 시체 자체가 부정한 것이기에 조속한 장사를 치르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적용: 당신의 경험적이고 합리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와 기준을 무시하며 무너뜨리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봅시다.
옛날부터 그 집안이 잘 되려면 세 가지 소리가 밖으로 흘러나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먼저 글 읽는 소리, 다음은 절구통을 찧는 소리나 다듬이 방망이 소리, 그리고 웃음소리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가정이라면 한 가지 소리가 더 나야 합니다. 찬송하는 소리입니다. 이 소리가 떠나지 않는 집은 영원 대대로 행복하고 형통할 것입니다.
< 설 교 >
불효자의 말로
신 21:18-21 / 박한응 목사
할렐루야!!
오늘 저녁에도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이 시간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그래서 낮 시간에는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이 시간에는 부모님께 불효하는 사람들의 그 말로가 어떠한 것인가를 성경에서 찾아서 함께 상고하면서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고자 합니다.
옛부터 효도는 백행의 근본(百行之根本)이라고 하였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옛부터 효도를 인륜지 근본(人倫之根本)으로 여겨 왔습니다. 더욱이 성경에서는 일찍이 하나님이 계명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는 네가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또 오늘 말씀을 보면 자식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며 방탕하면 그 아들을 성내의 장로들에게 고발하고 성내의 사람들은 그 패륜아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온 나라 안의 모든 자녀들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불효의 악을 행치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레20:9) “만일 누구든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출21:15)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신27:16)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잠30: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잠20:20)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의 등불이 흑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
이와 같이 부모에게 불효하는 사람에게 경고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예>어느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너희들이 새가 된다면 무슨 새가 되고 싶으냐?”
학생들이 너도나도 대답을 합니다.
“선생님, 저는 꾀꼬리가 되고 싶어요”
“저는 종달새가 되고 싶어요”
“저는 까치가 되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겠어요”
“선생님, 저는 앵무새가 되고 싶어요” 라고 각기 자기가 좋아하는 새 이름을 대면서 그 새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저는 까마귀가 되고 싶어요” 라고 말하자 다른 아이들이 모두 와! 하고 웃었습니다. 선생님은 의아해서 그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왜 까마귀가 되고 싶은 거냐?” 그러자 그 아이는 정색을 하면서 말합니다. “다른 새들은 모양도 예쁘고 노래도 잘 하지만 그 새들은 부모 새에게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모양도 흉하고 노래 소리도 나쁘지만 부모 새에게 효도를 하는 새이기 때문에 저는 까마귀가 되고 싶어요”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이 싫어하는 쥐가 늙으면 털도 빠지고 밤눈도 어두워지고 또 동작도 느려지기 때문에 고양이에게 잡히기가 쉽고 또 사람들에게 잡혀 죽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어미 쥐가 늙어서 이와 같이 되면은 그 새끼 쥐들이 먹을 것을 물어다가 어미를 봉양합니다. 그런 반면에 솔개라는 새는 그 새끼들이 둥지 안에서 어미 새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면서 점점 커져서 둥지가 좁아지면 어미 새를 둥지 밖으로 몰아내 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물의 짐승들도 이와 같이 자식을 사랑하고 또 부모를 공경하지만 왜 우리 인간만이 부모에게 효도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부모에게 효도는커녕 부모를 박대하지만 안 해도 다행이라고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부모님들이 자식들의 박대를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 여자 홀몸으로 힘든 농사일을 하며 판사 아들을 키워낸 노모는 밥을 한 끼 굶어도 배가 부른 것 같고 잠을 청하다가도 아들 생각에 가슴 뿌듯함과 오뉴월 폭염의 힘든 농사일에도 흥겨운 콧노래가 나는 등 세상을 다 얻은 듯 해 남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이런 노모는 한 해 동안 지은 농사 걷이를 이고지고 세상에서 제일 귀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 한복판의 아들 집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재촉해 도착했으나 이날따라 아들만큼이나 귀하고 귀한 며느리가 집을 비우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판사이기도 하지만 부잣집 딸을 며느리로 둔 덕택에 촌로의 눈에 신기하기만 한 살림살이에 눈을 뗄 수 없어 집안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뜻밖의 물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물건은 바로 가계부였습니다.
부잣집 딸이라 가계부를 쓰리라 생각도 못했는데 며느리가 쓰고 있는 가계부를 보고 감격을 해 그 안을 들여다보니 각종 세금이며 부식비, 의류비 등 촘촘히 써내려간 며느리의 살림살이에 또 한 번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조목조목 나열한 지출 내용 가운데 어디에 썼는지 모를 '촌년10만원'이란 항목에 눈이 머물렀습니다. 무엇을 샀기에 이렇게 쓰여 있나 궁금증이 생겼으나 1년 12달 한 달도 빼놓지 않고 같은 날짜에 지출한 돈이 바로 물건을 산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용돈을 보내준 날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촌로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아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 아들 가족에게 줄려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이고지고 간 한해 걷이를 주섬주섬 다시 싸서 마치 죄인 된 기분으로 도망치듯 아들의 집을 나와 시골길에 올랐습니다.
가슴이 터질 듯 한 기분과 누군가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분통을 속으로 삭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가운데 금지옥엽 판사 아들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어머니 왜 안주무시고 그냥 가셨어요”라는 아들의 말에는 빨리 귀향길에 오른 어머니에 대한 아쉬움이 한가득 배어 있었습니다. 노모는 가슴에 품었던 폭탄을 터트리듯 “아니 왜! 촌년이 어디서 자-아”하며 소리를 지르자 아들은 "어머니 무슨 말씀을....,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노모는 “무슨 말, 나보고 묻지 말고 너의 방 책꽂이에 있는 가계부한테 물어봐라 그러면 잘 알 것이다”며 수화기를 내팽개치듯 끊어 버렸습니다. 아들은 가계부를 펼쳐 보고 어머니의 역정이 무슨 이유에서 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내와 싸우자니 판사 집에서 큰 소리 난다고 소문이 날거고 때리자니 폭력이라 판사의 양심에 안 되고 그렇다고 이혼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사태 수습을 위한 대책마련으로 몇날 며칠을 무척이나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 어느 날 바쁘단 핑계로 아내의 친정 나들이를 뒤로 미루던 남편이 처갓집을 다녀오자는 말에 아내는 신바람이나 선물 보따리며 온갖 채비를 다한 가운데 친정 나들이 길 내내 입가에 즐거운 비명이 끊이질 않았고 그럴 때마다 남편의 마음은 더욱 복잡하기만 했습니다.
처갓집에 도착해 아내와 아이들이 준비한 선물 보따리를 모두 집안으로 들여보내고 마당에 서 있자 장모가 “아니 우리 판사 사위 왜 안 들어오는가” 사위가 한다는 말이 “촌년 아들이 왔습니다” “촌년 아들이 감히 이런 부잣집에 들어 갈 수 있습니까” 라고 말하고는 차를 돌려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시어머니 촌년의 집에는 사돈 두 내외와 며느리가 납작 엎드려 죽을죄를 지었으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며 빌었습니다. 이러 한 일이 있고 난 다음달부터 '촌년 10만원'은 온데간데없고 '시어머니의 용돈 50만원'이란 항목이 며느리의 가계부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하나님이 주신 천사입니다. 그 부모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 낫고 또 그 부모님 은공으로 우리가 오늘까지 배우고 성장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고 하셨고,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고 하였으며,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된 말씀 중에서 불효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노아의 아들 함은 아비의 허물을 드러내어 비방하다가 저주를 (창9:20-23).
()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잠에서 깬 노아가 이 사실을 알고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하고 함에게는 저주를 내렸습니다.
이로부터 함의 자손과 셈의 자손 사이에는 끝없는 분쟁과 다툼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비극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계속되는데 셈 족속의 후예인 이스라엘과 함의 후손들인 지금의 이라크와 이란의 아랍제국들이 이스라엘을 삼키려고 하여 그 분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2. 엘리 제사장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비의 훈계를 멸시하였습니다.
(1) 홉니와 비느하스는 불량자라고 하였습니다.
(삼상2:12)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그들은 비록 제사장의 아들이었는데도 불량하기가 이를 데 없고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까지도 멸시를 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백성들이 제물을 가지고 오면 자기들이 먼저 그 제물을 빼앗아다가 먹곤 하였습니다.
(삼상2: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2) 홉니와 비느하스는 성전에서 시중드는 여인들을 겁탈하는 간음죄를 범했습니다.
(삼상2:22-23)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세상에서 못된 일만 골라서 하는 불량자였습니다.
(3)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의 간곡한 훈계를 듣지 않았습니다.
(삼상2:24-25)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죄를 범하게 하는도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아버지의 훈계를 듣지 않고 그들의 죄악은 날이 갈수록 더 해만 갔습니다.
(4)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에 나가서 죽고 말았습니다.
불레셋 나라의 침략으로 나라는 극도로 어려워 갔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선봉장이 되어서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싸웠으나 하나님이 이미 두 사람을 죽이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삼상2:25) 연전연패를 거듭하여 군사 4천명이 죽었습니다. 그들은 생각다 못하여 최후의 수단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다가 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미 이스라엘에서 떠나셨기 때문에 그도 별수가 없었습니다. 그 날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는 3만 명이 전사를 당하였고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고 하나님의 법궤는 불레셋 나라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최대의 치욕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엘리 제사장은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비느하스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는데 이 충격으로 갑자기 산기가 있어 조산을 하고 죽었는데 그 아들을 이가봇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가봇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엘리에게 말씀을 주신 바가 있는데 그 말씀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삼상2:31-33)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내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네 사람이 네 눈을 쇠잔하게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어느 주석에 보면 그 후로 엘리의 가문에서는 남자가 18세 이상을 산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멸문의 화를 당한 것입니다.
3. 다윗왕의 아들 압살롬은 아비에게 반역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삼하 18장에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부왕 다윗에게 반역을 하여 부왕을 몰아내고 그것도 모자라서 부왕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다가 다윗의 부하들에게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1) 압살롬은 형제를 죽이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다윗 왕에게는 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가 차기의 왕이 되려고 암암리에 시기와 다툼이 대단하였습니다. 압살롬은 그의 이복형인 암논이 자기의 친누이 다말을 욕보인데 앙심을 품고 있다가 양털 깎는 잔치에 형제들을 모두 불러 잔치를 하는 척 하다가 암논을 살해하였습니다. 형제간에 피를 흘리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2) 압살롬은 따르는 무리를 규합하여 헤브론에서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된다는 것은 아비에 대한 반역입니다. 이와 같이 부왕 다윗에게 반역을 한 압살롬은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 왕궁으로 진격하여 옵니다. 다윗왕은 자신이 거느린 군사들과 함께 능히 저를 대적할 수가 있었지만 부자간에 유혈을 막기 위하여 왕궁을 비워두고 피난길에 오릅니다. 아비와 자식의 생각과 마음이 이와 같이 차이가 있습니다. 자식은 아비를 죽이려고 하는데 아비는 자식과의 싸움을 피하여 피난을 가는 것입니다.
(3) 압살롬은 부왕의 후궁들을 모두 차지해 버림으로 해서 패역을 저질렀습니다.
패륜아라고 해도 이와 같은 사람이 또 있겠습니까? 그것도 백주에 왕궁의 옥상에서 패역을 범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4) 그것도 모자라서 압살롬은 부왕을 죽이려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전을 감행하였습니다.
부왕 다윗은 전술에 능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떻게든지 아들과의 접전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압살롬은 끈질기게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쫓아갑니다. 오히려 아버지 다윗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신신 당부하기를 아들 압살롬을 절대 죽이지 말라고 까지 하였습니다.
(5) 압살롬의 말로가 어떠하였습니까?
압살롬은 머리털이 다른 사람들보다 길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몇 번씩 잘라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산중에서 다윗을 추격하다가 상수리나무에 머리털이 걸리고 타고 있던 노새는 그대로 빠져나가서 나무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다윗의 부하 요압 장수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심장을 찌르고 그를 따르는 군사들이 압살롬을 쳐 죽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에게 불효를 하다못해 반역을 한 사람의 말로가 이와 같이 비참한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에게 순종하라. 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입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사람들이 잘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부모님께 불순종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부모님께 순종하고 효도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요 또 너희가 땅에서 장수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부모님께 순종하고 효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불효자의 말로는 비참합니다. 멸망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님께 효도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위선이요 거짓입니다. 부모님께 효도와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축복이 오늘 이 시간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아 멘>
약속있는 첫 계명
신 21:18-21, 엡 6:1-4 / 이선균 목사
어떤 지혜자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갈 때 하루는 사람들의 뼈가 산더미처럼 쌓인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런 재난이 닥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곳이었습니다. 살아있을 때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 고생하던 사람, 나이가 많거나 어린 사람, 권력이 있고 명예가 있는 사람, 또는 그렇지 못한 사람, 갖가지 사람들의 뼈가 모인 곳입니다. ‘삶이란 참으로 무상하구나’ 탄식하는 제자들에게 지혜자가 묻습니다.
‘너희 중 누가 여기서 어머니의 뼈를 가려낼 수 있느냐?’
제자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데 성인은 검은 색으로 착색된 뼈 하나를 쳐들고 ‘자, 이것이 어머니 뼈란다.’ 제자들은 놀라 ‘어찌 아십니까?’ 그 현자는 ‘어머니는 온 몸의 양분을 태아에게 주고, 젖을 먹이고 자녀를 위한 수고를 하다보면 뼛속의 양분까지도 다 주게 된다. 그래서 자신을 희생하는 어머니의 생은 그 뼈를 이렇게 가볍게 또 검게 만들었느니라.’
어머니는 모든 것을 그 자식에게 다 주시기때문에 뼈가 검고 가볍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머니의 사랑과 고난에 찬 삶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부모 공경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고속버스터미널이나 서울역 근방에는 자식이 데려다 놓고 가버린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있다고 합니다. 낙동강 을숙도도 단골지역이랍니다. 갖다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양로원이나 보호소로 가게 되는데, 놀라운 것은 그 노부모들에게 주소나 자식의 이름을 물으면 결코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식의 명예에 먹칠이 될까봐 자기를 버린 자식이지만 그래도 그 자식을 보호하려고 침묵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버리는 시대가 될 만큼 우리 시대는 절망적입니다. 어느 며느리 금전출납부에 매월 ‘아까운 돈’이란 항목이 적혀 있길래 그게 뭔가 하고 물으니 ‘시어머니 용돈’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까운 돈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부모공경은 물 건너 간 것입니다. 에덴동산이 천국이고 낙원인 이유를 아십니까? ‘시어머니가 없기 때문’이랍니다.
부자로 살면 뭐합니까? 배웠다는 것이 뭡니까? 도대체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말 우리 세대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까? 우리 시대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효가 무너지면서 모든 가치관이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도 어버이를 공경 안하니 어버이날이 생긴 것입니다. 절망적인 우리의 세계로 향해 하나님은 엄하게 명하십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을 주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십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약속 있는 첫 계명인 부모 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임을 믿고 하나님의 계명임을 확신하고 부모공경의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네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것이 옳으니라’고 하십니다. 옳다는 말의 어원은 선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 즉 의라는 뜻입니다.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은 선이나 공로가 아니며 덕도 아닙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부모공경은 젊은이 용어로 ‘당근’이라는 말입니다. 부모님을 섬기는 것을 굉장한 일처럼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공경하고 효도하는 것은 평균 수준, 당연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이를 계명으로 가르칩니다.
십계명 중 인간에 관한 첫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깊은 마음입니다. 사람에게 반드시 이렇게 하라고 원하시고 섭리하시고 인도하시고 때로는 심판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효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의 이해나 납득을 필요로 하지않습니다. 순종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믿고 순종할 뿐입니다. 엄한 명령입니다.
딴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 인간을 향한 첫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인데, 계명의 순서는 죄의 무거운 순서부터 차례로 나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계명보다 앞서있는 계명이 부모공경인데, 이 뜻은 부모를 공경치 않는 죄가 살인죄보다, 도둑질보다, 더 큰 죄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불효가 큰 죄이기에 성서는 그 형벌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1장15절에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17절엔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죽이라” 마태복음15장 4절에 예수님께서 “부모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구약 본문 말씀에는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 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중의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거의 공포심을 유발해서라도 부모를 공경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불효의 죄가 크기에 형벌도 크고 또한 용서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도 단호합니다. 여기에는 타협도 없고 용서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첫 계명, 약속 있는 첫 계명에 순종하여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공경은 헬라어로 “티마”라고 하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존경하는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버이 주일에 존경하는 사랑으로 약속 있는 첫 계명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을 세 구분으로 나누어 보면 나보다 불쌍히 여기는 사랑과 나와 같은 자를 대등하게 사랑하는 친애의 사랑과 나보다 높은 이에 대한 우러러 보는 존경의 사랑이 있는데, 여기서 공경이란 말은 바로 이 존경을 의미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공경은 우러러 보며 마음으로 존경하고 마음으로부터 높이는 사랑입니다.
나이 많은 부모를 불쌍하게 여기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용돈이나 드리고 관광 보내 드리는 것으로 효도를 다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은 공경하고 거리가 멉니다. 높이고 우러러 보며, 존경을 겸한 사랑이어야 공경입니다. 옳음을 인정하고 더 크심을 인정하고 높이는 마음, 우러러 사랑하는 마음이 공경입니다. 지혜를 높이고 명예를 인정하고 그분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그리고 그분의 인격을 아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라야 그것이 효도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장점만 보고 훌륭한 점만을 생각합니다. 항상 고개를 숙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효도이고 부모공경입니다.
비록 초등학교밖에 못나오셨지만, 비록 허리는 굽어 있으셔도, 눈이 침침하고, 잘 듣지 못하고, 딴 소리를 하신다고 해도, 얼굴에 주름이 패이고, 검버섯이 돋아 있다 해도 바로 그런 어머니가 나의 어머니이며 그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이시며 나를 위해 저렇게 고생하신 훌륭한 분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어머니 그 아버지가 바로 내 생명의 터전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어머니는 밥이라고 까지 했습니다. 어머니를 먹고 이만큼 컸고 이만큼 산다는 것입니다.
김 구 선생님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며 한참 고생할 때 정말로 끼니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가 시장에 나가셔서 남이 버린 시래기를 주어다가 씻어서 국을 끓이곤 했습니다. 김구선생은 너무 민망해서 ‘어머니 제발 그런 짓 좀 하지 마세요.’ 하고 만류했더니 어머님은 당장 몽둥이를 들고 김구 선생의 종아리를 쳤습니다. 매를 맞으면서 김구 선생이 자꾸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어머님이 작년에 때리실 때보다 힘과 기운이 약해져서, 늙어 가시는 것이 안타까와서 운다고 대답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아무 기대가 없습니다. 효도 또한 아무런 조건을 붙일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님이란 존재 그 자체를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바로 그 마음이 효의 마음인 것입니다. 높이는 사랑으로 공경하며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진정한 효도는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잠언23장24절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가장 좋은 효도는 신앙 안에서 부모님을 기쁘시게 즐겁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공경과 효를 다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진정 효도할 마음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루에 세 번 약을 먹는 것처럼 하루에 세 번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부모님은 꼭 계셔야 합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 때문에 행복합니다.’ 말하시기 바랍니다. 이 약의 효과는 즉효입니다. 선다싱은 ‘어머니의 품이 하나님의 신학교’라고 했고 루터는 ‘부모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의 선함과 사랑을 인정해 드리면서 감사와 존경과 순종과 기쁨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효도입니다.
중국에 노래자(老來子)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70살이 넘은 노인이면서 90살이 넘은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분이셨습니다. 노래자는 항상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힘썼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마음을 살펴보니 아버지께서는 아직도 자기를 어린아이로 생각하시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물 가져 오너라.”고 했습니다. 노래자는 물 사발을 들고 가다가 일부러 아버지 앞에서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처럼 ‘잉잉’ 우는 흉내를 냈습니다. ‘조심하지 않고 아직도 어린애 구나!’ 부친은 크게 껄껄 한참이나 웃으셨답니다. 노래자는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일흔이 넘은 분이 아버지 앞에서 어린애 노릇을 하며 물 사발을 들고 일부러 넘어지는 마음, 이것이 부모에 대한 효도의 마음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부모를 어버이로 기쁘시게 해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버이주일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내 육신과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지, 어려운 살림과 힘든 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오신 아버지.” 사랑하는 아현중앙교회 가족 여러분! 어버이 주일을 맞아서 아버지를 찾아뵙고 위로와 존경의 마음으로 주름투성이인 얼굴에 입맞춤을 해드리세요. 그리고 힘 빠진 아버지의 손에 용돈 꼬옥 쥐어드리십시오. 이번에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표현을 못하면 혹시 영영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겁니다.
짝을 잃으신 분이라면 더더욱 아버지의 외로움과 지탱하기 어려운 생의 마지막을 격려해 드리십시오. 후회할 날이 곧 닥칠지 모르잖습니까. 쭈굴 쭈굴해진 얼굴로 빠진 이를 드러내 보이며 해맑은 웃음을 웃으시는 모습을 꼭 보시고 내 아이들이 내 나이 될 때까지 그 모습을 기억해 두십시오. 아마 그때 되어야 지금 내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테니까요. 할 수 있으면 아이들 모두 데리고 가서 큰 절도 올리십시오. 영원한 마음의 고향 어머니. 한없이 그리운 어머니 모진 고생하시다 껍데기만 남은 어머니. 어버이주일을 맞이하는 아현중앙 가족 여러분, 쭈글쭈글 주름진 어머니 얼굴에 사랑의 입맞춤을 해드리십시오. 힘 빠진 손에 위로의 마음을 봉투에 넣어 쥐어 드리십시오.
혹시 이번이 어머니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어버이 주일이 될지도 모른답니다. 머지않은 날 외롭게 떠나버린 어머니를 생각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릴 때가 곧 닥칠 겁니다.
지금 내가 어려우면 지난 날 내 어머니가 어려울 때만큼 어렵겠습니까? 불러도 불러도 영원히 안타깝고 그리운 그 이름 어머니를 내 아이들 몰래 속으로 부르며 눈물짓는 날이 곧 닥칠 것입니다. 그러니 꼭 사랑을 표시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을 지켜가는 중에 약속의 축복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강 정철은 이렇게 시조를 지어 읽었습니다.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기기란 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 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수난의 길
신 21:22~24, 막 15:16~20 / 이성희 목사
어떤 분이 그러는데 우리나라의 교통 신호등은 가는 것밖에 없답니다. 초록 불은 가라, 노란 불은 빨리 가라, 빨간 불은 알아서 가라는 신호랍니다. 한국인의 성격을 잘 표현한 우스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수난의 길은 멈출 수 없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생애의 순간들은 모두 십자가를 향하여 가는 신호밖에 없었습니다. 겟세마네의 길도 멈출 수 없었습니다.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라는 뼈를 깎는 기도도 수난의 길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쓰러지고, 매를 맞고 아파도 멈출 수 없는 길입니다. 조롱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해도 내려가지 못할 멈출 수 없는 길입니다. 아무리 애절하게 “목마르다”고 소리치고, 하나님의 가슴을 쓸어내리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절규도 예수님의 수난의 길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갈 데까지 갑니다. 끝까지 가서 죽어야 하는 길이 수난의 길입니다.
지난 주간에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Christ)이란 영화가 상영이 되었습니다. 꼭 한번 보실만한 영화입니다. 특히 전도해야 할 예수 믿지 않는 이웃을 함께 모시고 가서 보시면 더 좋을 것입니다. 이 영화에 표현된 예수님의 수난도 얼마나 길고 먼지 모릅니다. 나를 위한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깊은지 모릅니다.
지난 주간에 때를 맞추어 존 파이퍼의 “더 패션 오브 지저스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Jesus Christ)란 책이 출판 되었습니다. ‘예수가 못 박힌 50가지 이유’란 부제가 있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예수께서 죽으신 사건의 핵심은 원인(cause)이 아니라 목적(purpose) 곧 의미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의 주된 질문은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죽였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이 인류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수난’ 영화에서도 표현하려고 애쓴 것은 유대인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못 박히시고 돌아가신 것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것이 수난의 길의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의 길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수난 주간의 삶을 다시 가다듬어 봅시다.
첫째, 고통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의 길은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의 길이 승리, 명예, 기쁨의 길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이미 그 길이 고통의 길인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사야 53:3은 말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오시기 전에 이미 간고와 질고를 지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16:21에는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신 것은 예수님 당신 스스로가 예고하신 것입니다. 성만찬 때에도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22:15에는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성찬을 통하여 고난의 의미를 마음에 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채찍으로 맞으셨습니다. 구전에 의하면 41번 맞으셨다고 합니다. 당시의 채찍은 한 번만 맞아도 살점이 떨어져 나간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수난’ 영화에는 그 보다 더 많이 맞는 것 같습디다. 그 장면이 가장 참혹하게 표현된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제가 수도원에 갔을 때에 수도사들의 옷에는 안 쪽에 가죽 허리띠를 하고 있습니다. 이 허리띠는 예수님이 가죽 채찍으로 맞으신 것을 상징하고 고통을 느끼기 위하여 허리에 차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침 기도 시간에 길게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엘리에손 퀴리에”를 41번 암송합니다.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에는 골고다로 가는 좁은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을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 합니다. 고난의 길이란 뜻입니다. 이 길은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을 나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신 길입니다. 가다가 지쳐 쓰러지고 멈추신 것이 14곳입니다. 지금은 그 곳마다 번호를 매겨 14정류소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진 곳은 14정류소 가운데 제5 정류소입니다. 예수님이 지쳐 쓰러지셨을 대에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준 곳도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수건에 예수님의 얼굴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주님이 고통당하신 이유는 우리가 고통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당하신 것과 똑같은 고난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통은 반갑지 않지만 때로는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합니다. 고통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고난은 유익합니다. 고난은 결코 무익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유익한 고난이었습니다. 이 고난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아무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결백만큼 더 큰 고난이나 결백이 없다고 존 파이퍼는 말했습니다.
둘째,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의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죽으러 가는 길이며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가시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죽음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입니다. 이게 그리스도 수난의 역설입니다. 죽음의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죽으면 살고,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고, 생명을 버리면 얻는 역설의 길이 수난의 길입니다.
요한복음 10:10에는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전 생애가 생명을 주는 일입니다. 수난의 길도 마찬가지로 죽음으로 가는 길이며 동시에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요한복음 14:6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길을 여시고, 길을 따르는 자들을 아버지께로 오게 하셨습니다. 이 길이 생명의 길이며 구원의 길입니다.
헬라어에는 생명이라는 단어가 두 개입니다. 자연의 보조를 받아야만 유지되는 생명은 바이오스(bios)입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안에 있는 영적인 생명, 자연 세계 전체를 만들어 낸 생명은 조에(zoe)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생명은 조에입니다. 하나님은 조에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조에의 길을 여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수난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브라질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란 소설에는 연금술사가 산티아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막에 있는 생명을 내게 보여주게. 사막에서 생명을 찾을 수 있는 사람만이 보물을 찾을 수 있네”. 참 멋있는 말입니다. 생명이 없는 곳에서 생명을 찾는 것이 보물입니다. 예수님은 전적 타락으로 전혀 회생의 가능성이 없고, 생명 없는 죄인에게서 생명을 찾으십니다. 그래서 못쓰는 돌을 보물같이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수난의 길입니다. 수난의 길을 가신 까닭입니다. 또한 작가는 “생명은 생명을 부르는 법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우리의 생명을 부릅니다. 그 분은 생명이시기에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의 길에는 생명이 즐비했습니다. 가시는 곳곳마다 생명의 씨를 뿌려 놓으셨습니다.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생명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전 삶은 구원을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71에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에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예수님의 구원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난의 길도 예고된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막 숨을 거두실 때에도 대제사장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이 구원자이시며 십자가를 지고 올라오신 수난의 길이 구원의 길이었던 것을 증언합니다. 마가복음 15:31에는 대제사장이 말합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빚을 다 갚았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완전히 구원이 성취됨을 증언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신비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떤 분은 기독교 진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단어 하나가 ‘단번에’(once for all)라고 하였습니다. 이 헬라어 단어는 “에파팍스”라는 말인데 ‘만대를 위하여 단번에’라는 뜻에서 유래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조금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덜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다 이루신 것입니다. 단번에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4:12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합니다. 구원을 얻는 유일의 길이 예수님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으로 가시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길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시는 길이 구원을 얻게 하는 길입니다.
어느 한 젊은이가 예리한 칼을 들고 동네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나는 5분 이내로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일 수 있소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칼로 하늘을 향해 내지르면서 하나님이 만약 있다면 5분 내로 이 칼을 가지고 나를 죽여 보시오. 당신께 도전하는 이 나쁜 놈을 죽일 수 있다면 당신은 살아있는 분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5분을 세기 시작합니다. 5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무런 일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선언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입니다”고 외쳤습니다. “나 같이 악한 사람을 벌할 수 없다면 그는 신이 아니요, 또 악한 사람을 심판할 줄도 모르는 신이라면 혹시 있다 할지라도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외쳐댑니다.
그러자 교회를 잘 다니는 어느 할머니 한 분이 그 젊은이 앞에 나가서 그 칼을 뺏어 들고 그 젊은이에게 아이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귀여운 아들이 하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렇다면 당신은 그 귀여운 아들이 이런 칼을 들고 와서 아버지, 이 칼로 나를 5분 내로 죽여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젊은이는, “그런 소리가 어디 있느냐,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들을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때에 할머니가 젊은이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요. 하나님은 어떤 죄인, 악한 사람이라도 벌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당신 같은 악한 사람이라도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참고 계시는 것이야”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어야 할 우리를 죽이지 않고 예수님을 죽게 하시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수난의 길의 의미입니다.
결 론
먹고 싶은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먹이면 됩니다. 자고 싶은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재우면 됩니다. 죽고 싶은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죽이면 됩니까? 사실은 죽고 싶다는 것은 위로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죽고 싶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죽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습니다.
최근에 웰빙(well being)이란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복지, 안녕, 행복’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잘 먹고 건강하게 살기’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몸과 마음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풍요롭고 아름다운 인생을 영위하자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웰빙이라고 합니다. 삶의 질을 생각하고, 건강한 영혼과 육체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웰빙이라는 영어의 뜻을 잘 몰라서 웰빙을 못하겠습니다. 요즘은 이런 어려운 용어들이 많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 용어는 모르지만 웰빙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잘 먹고 잘 살고 건강한 영혼과 육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의 길은 우리의 웰빙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통한 이 놀라운 은혜의 삶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
신 21:15-23
1. 하나님은 장자권을 어떤 기준으로 물려주라고 명하십니까?(15~17절)
어떤 사람이 두 아내와 사는데 두 아내가 모두 아들을 낳았다면, 장자권은 무조건 맏아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맏아들이 두 아내 중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어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일부다처제였습니다. 만약 한 남자가 두 아내 중 한 사람은 미워하고 한 사람은 사랑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두 아내 모두 아들을 낳았다면 장자권을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감정대로 한다면 사랑하는 아내가 낳은 아들에게 장자권을 물려주려 하겠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금하셨습니다. 미워하는 여인의 아들이라 해도 그가 장자라면 당연히 그에게 장자권을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맏아들이 기력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이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가 어느 아내를 더 사랑하느냐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법과 질서입니다.
2. 하나님은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을 어떻게 징계하라고 명하십니까?(18~21절)
성문에 가서 성읍 장로들에게 우리 자식이 완악하고 패역하여 말을 듣지 않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고 말하면 그 성읍 사람들은 그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를 거역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부모는 그런 자녀를 꾸중하곤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자녀를 나무라면 부모는 “내 자식 문제에 왜 당신이 개입하느냐? 꾸중을 해도 내가 하고, 벌을 줘도 내가 벌을 줄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 부모는 자녀가 죄를 지어 끌려갈 때도 용서해 달라고 관원에게 빌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오히려 패역한 자녀를 부모가 성읍 장로들에게 고발하고, 성읍 사람들은 그를 돌로 쳐 죽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녀에 대해 가지는 감정보다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패역한 자녀를 엄히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우선됨을 보여 줍니다. 부모는 자녀를 대할 때 부모로서의 감정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 삶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입니다. 그렇기에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은 나무에 달려 처형당한 사람의 시신을 어떻게 다루라고 명하십니까?(22~23절)
하나님은 처형당한 사람의 시신을 밤새도록 나무 위에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처형당한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시신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엄격하게 율법을 시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사람들은 사형에 처했습니다. 시신은 나무에 매달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과 거절을 상징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밤새도록 그 시신을 나무에 매달아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처형당한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고, 저주받은 사람의 시신은 부정하기 때문에 밤새 매달아 놓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땅을 더럽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 주목할 것은 시신을 처리하는 문제 역시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땅이고, 거룩한 그 땅에 저주받은 시신을 밤새도록 두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련지어서 판단하고 생각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하나님의 것을 거룩하게 보존하는 것인지, 하나님께 옳은 것인지를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고려해야 했습니다.
4. 장자권 계승이나 불순종하는 자녀를 징계하는 규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은 어떠합니까? 일상에서 모든 일의 판단 기준은 무엇이 돼야 합니까?
장자권 계승과 불순종하는 아들을 처리하는 규정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시는 분이며,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특히 부모에게 거역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장자권을 물려주는 문제는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또 불순종하는 아들을 꾸중하는 문제 역시 부모와 자녀 사이의 문제로 여겨집니다. 그런 문제들은 부모가 알아서, 혹은 감정대로 처리하면 그만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런 문제까지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미워하는 아내의 소생이라도 그가 장자라면 장자권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를 먼저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또 부모에게 패역한 아들을 벌주는 것은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와 관련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모든 일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레위기 1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먹어도 좋은 음식과 먹어서는 안 될 음식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런 사소한 일상사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하나님의 지나친 간섭이란 차원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을 성결하고 행복하게 만드시려는 사랑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모든 삶이 언제나 함께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5. 그리스도인의 삶은 크게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두 관계가 바른지, 또 어떻게 세워 나갈지 나눠 보십시오. 우리는 신앙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국한된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고려한 채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 등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외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반대로 이해관계나 개인적 감정에 의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려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기준이 되셔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나 타인과의 관계 중 어느 한 부분이라도 어그러질 때 우리는 불안한 삶을 살게 됩니다. 반면 올바른 신앙을 가질 때 삶은 평안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를 때 타인과의 관계도 바로 서게 됩니다. 신앙은 우리 삶의 전 영역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삶의 모든 부분을 주장하십니다. 삶의 모든 결정을 하나님께 묻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성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뢰해야 하는 분이고 사람은 사랑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우리의 기준 되시는 하나님이 누구보다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도 타인을 사랑해야 합니다. 삶의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는 성도가 되길 기도합시다. 매 순간 하나님을 찾고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삶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3가지 주제 : 마음 내키는 대로 하지 말라
장자의 권리
불순종하는 아들을 처형하라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의 시체를 밤새 매달아 두지 말라
15-17절 장자 상속법
아내를 둘 두는 것은 상당한 재산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재산이 많은 집에 상속 문제로 분쟁이 났을 경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장자는 다른 자녀보다 두배 더 많은 재산을 상속받기 때문에 상속문제는 가정 내에 불화의 씨앗이 되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 하더라도 그 아내의 자식에게 장자의 권리를 주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태어난 아들의 장자권을 보장해 주라고 명하십니다.
우리는 편애의 안타까운 모습을 야곱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역사하심 속에서 요셉의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감정에 따라 치우친 야곱의 행위는 그 스스로에게 크나큰 고통으로 되돌아 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험한 세월을 보냈다고 하는 인생을 우리가 주목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편애마저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변경하십니다만, 그로 인해 레아와 가족이 받아야 했던 고통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18-21절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아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질서
아들이 완악하고 패역하여 도무지 부모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완악과 패역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겔 2:3).
Ezekiel 2:3 NKRV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이것은 가정의 문제로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은 부모가 성읍 장로들에게 끌고가서 고발해야 합니다. 그러면 부모가 아니라 성읍 사람들이 그 아들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 규례는 자녀를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이 부모를 존경하고 공경하게 하는 효과를 갖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질서가 확립되기를 바라셨습니다.
22-23절 땅을 더럽히지 말라
이 규례는 대단히 유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을 두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죄인 처형은 돌로 쳐 죽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는 것입니다. 아간의 처형
극악한 죄인의 경우는 처형한 이후 시체를 나무에 매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주변 나라에서도 죄인을 처형한 이후 새들과 들개가 먹도록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극악한 자라 할지라도 그 시체를 밤새도록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만 묻어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영내가 정결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마음과 악인을 향한 분노도 넘지 말아야 할 경계가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는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