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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겨울 바다와 파도 원문보기 글쓴이: 요산 요수
* <역마차>의 동영상과 음악,이 영화 음악 담당자는 솔 캐플란인데 지난번 처럼 특별히 언급할
내용이 없어 소개를 생략합니다.이 영화의 테마음악은 맨아래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 영화 "역마차(Stagecoach,1939)" ]
* <역마차>에서 링고 키드(존 웨인)
오늘은 고전 서부극 4대작(황야의 결투,셰인,하이 눈,역마차) 중의 하나인 역마차(Stagecoach)를 소개합니다.
<모호크족의 북소리>와 같은 해에 나온 <역마차>는 존 포드의 초기 대표작이자, 이듬해 존 스타인벡 원작의 <분노의 포도>가 보여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전형적인 서부극의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서부극의 장르가 정착되는 시기의 작품으로 여전히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을 악으로 규정하고 있지요. 존 포드는 서부극의 개척, 변형,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서부극의 거장이지만, 그의 초기작에서 보여준 전형성은 인디언의 터전을 침탈한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모습에 머물러 있습니다. 요컨대, 침략의 합리화로 말미암아 새로운 악을 탄생시킨 셈이지요.
* 모뉴멘트 벨리(아리조나주와 유타주 접경에 있습니다)
역마차는 이름 그대로 철도가 개설되기 이전에 마차를 이용한 지역간의 이동수단이지만, 이 영화는 그 역마차를 통해 서부개척시대의 일면을 엿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먼저 역마차에 탑승한 각양각색의 인물을 되짚어 보기로 하죠.
수비대 남편을 찾아 온 젊고 아름다운 루시 멜로리 부인(루이즈 플랫), 마을에서 쫓겨난 창녀 달라스(클레어 트레버) 등 두 여인과 루시의 미모를 좇아 온 도박꾼 핫필드(존 캐러딘), 알코올중독 증세를 보이는 의사 분(토마스 밋첼),
플러머 형제를 향해 복수에 칼날을 가는 탈주범 링고 키드(존 웨인), 링고를 체포한 보안관 등이 역마차를 몰며 서부를 돌아다니는 마부 북의 손님들입니다. 그 외 공금을 횡령한 채 도망가는 은행가, 유태인으로 보이는 위스키 도매상이 함께 역마차에 탑승합니다. 이들은 각자 서로 다른 이유로 제로니모가 이끄는 아파치 인디언의 침공이 예상되는 로즈버그행 여정에 오릅니다. 그 과정에서 존 포드의 연출 의도는 다채로운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우선, 로즈버그로 가는 중간 기착지에서 출산이 임박한 루시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는 달라스의 존재입니다. 달라스가 역마차를 탄 이유도 그녀의 직업에서 기인했듯, 모든 역마차 승객들이 달라스와 함께 식탁에 앉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달라스에게 놓여진 암묵적인 직업과 신분의 차별을 대변합니다. 그 차별은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존 포드에게 사라져야 하는 요소이고, 루시의 출산을 통해 달라스의 존재는 재탄생하게 됩니다.
역마차는 결국 인디언의 습격을 받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인디언이 쏜 총과 화살에 맞아 은행가와 위스키 도매상은 숨지게 되고... 여느 재난영화처럼, 살아남는 자와 죽는 자의 구분에 깃든 당위성을 찾자면, 인디언과의 전투에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내내 비겁한 모습을 보이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한 인물들을 죽음으로 내몰린 셈입니다.
이를 확대해석 하면, 그들은 미국 서부개척시대에 무용한 존재이고, 단죄되어야 마땅하다는 전언에 다름 아니겠죠.
이에 반해 탈주범의 신분으로 보안관에게 붙잡힌 링고의 경우, 인디언의 습격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유로 플러머 형제와의 3:1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게 하고 보안관의 용인 하에 달라스와 함께 새로운 희망의 땅으로 향하도록 선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의 용맹성과 아울러 달라스의 신분에도 개의치 않고 루시와 동등하게 대우를 했던 링고 키드의 품성을 높이 산 이유기도 할 것입니다.
* 링고와 달라스
이와 같이 존 포드는 영화 <역마차>를 통해 서부개척시대에 진보적이며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순수한 사랑을 동경하는 도덕적 우위 혹은 포용력), 영웅적인 (악의 침략에 맞서 이를 응징하고 위기를 극복한 위용) 선조들을 탄생시키면서, 다분히 미국의 역사를 정당화시키려는 의도를 감추지 않고 있다고도 할 수 있죠.
* 링고와 달라스
[ 서부영화로서의 역마차 ]
서부 영화는 이미 1910년대 무성영화 시절부터 전형적인 장르 영화의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사실 대사보다는 액션 위주였던 서부영화는 오히려 유성 영화의 등장으로 쇠퇴기를 맞게 되고, 1930년대에 이르러 서부 영화는 메이저 제작사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B급 영화로 전락하면서, 장르적 공식에 충실한 저예산 영화들이 짧은 기간 동안에 다량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말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던 중립국가 미국의 고립주의는 미국적인 것, 즉 서부 개척 정신으로 표상되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고, 이런 변화 때문에 30년대 말 일시적으로 B급이 아닌 A급 서부 영화의 제작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등장한 작품이 바로 존 포드의 <역마차>인 것이죠.
[영화로 살펴 본 존 웨인 이야기 ]
본명은 Marion Michael Morrison으로 후일 듀크(Duke)라는 닉네임(nickname)으로 통한 존 웨인.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결국 미국의 핵실험 때문에 죽게 됩니다. 핵폭탄 앞에서는 그의 애국심도 통하지 않았나 봅니다(핵실험 장소였던 아리조나 주에서 영화 "징기스칸"을 찍고 후에 암에 걸렸다고 합니다).
존 웨인은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미식축구 선수였을 때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20세기 폭스사의 소품 담당자로 일하던 중 존 포드 감독을 알게 되고, 1928년 포드 감독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합니다.
그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영화는 라울 월시감독의 <빅 트레일,1930>이었고, 그 뒤 8년간 그는 80편이 넘는 대단하지 않은 영화에 출연하며 자칫하면 그냥 그렇게 사라져버릴 형편에 처하였습니다.
* 영화 <수색자>에서
그를 진정한 스타로 떠오를 수 있도록 한 배경에는 감독 존 포드가 있었습니다. 존 포드 감독은 고전 서부극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역마차(Stagecoach)>의 링고 키드 역을 존 웨인에게 맡기며 그를 미국의 상징으로 떠오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원래 이 역은 평생 존 웨인의 라이벌이 될 게리 쿠퍼에게 돌아갈 것이었으나 존 포드가 당시로서는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존 웨인에게 맡겼습니다. 존 웨인과 자주 공연한 여배우 모린 오하라는 존 포드와 존 웨인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습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존 웨인은 그저 존 웨인일 뿐이다. 존 웨인을 만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그 자신일 뿐이다. 그러나 포드 감독은 그가 가진 그 위대하고 멋진 남성적인 면을 카메라에 담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감독이었다. 나는 세트장에선 그를 ‘Mr 포드’라고 불렀지만 그의 집이나 다른 곳에선 ‘아빠’ 라 불렀다. 존 웨인은 그를 ‘코치’라고 불렀다.
* 영화 <진정한 용기> 촬영장에서
50년 유타주 모아비에서 <리오 그란데,1950>를 찍을 당시 우리 일행은 한 모텔에 머물렀다. 그런데 포드 감독이 노래를 좋아해 우린 거의 매일 밤 콘서트를 열다시피 했다. 그는 음치였다. 존 웨인은 노래를 잘했지만 아빠(포드)를 즐겁게 하려고 일부러 음정을 틀리게 불렀다. 포드를 웃기고 또 포드가 큰 소리로 그를 놀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이 영화로 미국 영화계에 확고한 그의 지위가 성립되었으며 그는 불굴의 미국인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가 되었습니다.
존 웨인은 <역마차>를 통해 스타덤에 올랐고, 보수적인 미국의 정재계인사들에게 환영받는 영화배우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전적 서부극에 있어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게리 쿠퍼의 영화 <하이눈>을 몹시 불쾌한 영화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존 웨인의 생각으로는 법과 질서의 수호자인 보안관이라면 마을사람들의 도움 따위를 얻기 위해 구걸하듯 돌아다니기보다는 좀 더 의연하게 처신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모든 사태를 해결하고 나서 환멸감 속에서 보안관 배지를 내던지는 케인(게리 쿠퍼)의 마지막 행동은 국가(공동체)의 명예를 짓밟는 불순한 행동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존 웨인은 그의 생애 동안 사회의 낙오자,안티 히어로(anti hero)가 사회(공동체)와 갈등을 빚어내는 모습이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하이 눈>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감독 하워드 혹스와 존 웨인이 비슷한 설정이지만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영화가 바로 <리오 브라보>였습니다.
* 영화 <마지막 총잡이>에서
존 웨인의 아메리카니즘은 보잘것없는 민중의 소박한 윤리의식을 찬양하는 프랭크 카프라( 감독),제임스 스튜어트(배우)의 인민주의(populism)와 달리, 이 나라엔 찬미할 만한 정의롭고 위대한 영웅이 필요하다는 영웅주의 신념이었던 것입니다.
이 이데올로기에 일종의 버팀목으로 작용한 것이 길들여지길 거부하고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사내다움을 칭송하는 마초(macho, 스페인 어로 남자를 뜻함)기질이었습니다. 현재까지도 미국인들의 심성의 저류를 관통하는 진정한 미국의 영웅 웨인은 철저한 엉클 샘이었던 것입니다.
이 미국의 전사는 스크린 안팎에서 맹목적인 애국주의자, 보수주의의 골수 대변인으로서 강경한 우익 노선을 취했죠.
말보다는 주먹이 앞서는 고독한 서부의 사나이와 힘의 외교를 신봉하는 미국은 이로서 하나로 합일된다. 행동으로 말하는 과묵함은 미국적 영웅의 오랜 전통이었다. 그가 그런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서슴지 않고 드러낸 또 하나의 사건이 바로 영화 <그린베레>와 <알라모>의 제작이었습니다. 반전의 열기와 자유주의의 기운이 끓어 넘치던 1960년대, 그는 베트남전에 대해 끝까지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 영화 <알라모>에서
자신이 직접 제작, 감독, 주연을 맡은 전쟁 영화 <그린베레> 를 통해 미국이 싸우는 것은 정의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의 이런 과도한 애국심이 사실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군에 입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징집면제 처분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쨌든 존 웨인의 이런 모습들은 그후 헐리우드 영화들에 의해 끊임없이 피드백되며 실베스터 스탤론의 <람보>,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코만도>, 척 노리스의 <델타 포스>등과 같은 영화들을 양산해냈으며,
그와 함께 매카시즘(극도의 반공주의)을 지지했던 동료배우 레이건, 올리버 노스), 뉴트 깅리치, W. 부시같은 미국내 매파 세력의 영웅으로 현재까지 추앙받을 수 있는 배경이 됩니다.
언제나 정의로운 과묵하고 용감한, 그렇기 때문에 이웃의 이해나 도움을 구할 수 없는 고독한 서부 사나이의 이미지는 미국의 우파가 꿈꾸며 일반 대중이 믿어주길 바라는 미국의 이미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그의 전성기를 대변하던 장르인 서부영화의 퇴조와 함께 존 웨인도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출연했던 후기 웨스턴들은 삶에 지친 영웅들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존 웨인 자신도 늙었지만 월남전을 치러 내면서 천편일률적인 그렇고 그런 서부극의 영화에 대한 환상이 더 이상 일반에게 먹혀들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미국의 국민들은 자기 정부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이 지독한 극우주의자는 197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파나마운하의 반환을 지지함으로써 미국 내 진보진영의 환영을 받기도 했습니다.
1954년, 서부영화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존 웨인은 MGM 영화사로부터 칭기스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의 출연제의를 받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찍기로 되어있던 미국 애리조나의 피닉스 외곽 120km 사막지대는 1952년까지 핵실험이 있었던 방사능 오염 지역이었습니다.
방사능의 위험을 잘 몰랐던 제작자는 정부에서 허락한 문제의 지역에서 영화를 찍게 되었는데, 이때 영화 <정복자(The Conqueror,1956)>에 출연하거나 종사했던 스태프 117명과 수백 여명의 엑스트라 중 95%가 암으로 5년 안에 사망했습니다. 그중에는 존 웨인과 함께 감독 딕 포웰과 배우 수잔 헤이워드, 아그네스 무어헤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역시 나중에 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의로운 해결사의 대명사이자 아메리카니즘의 영웅, 존 웨인은 <마지막 총잡이,1976>를 마지막 작품으로 총 25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아카데미는 한 차례밖에 수상하지 못했습니다(영화 "진정한 용기"에서 주연상 수상). 매카시즘을 찬양하고 동료들에게 등을 돌린 댓가였을 것이라는 평도 있지요.
* 배우 윌리암 홀덴과
하지만 그를 보기 위해 관객들이 그의 영화에 지출한 돈은 5억 달러 이상이었고... 영화에서처럼 권위적이었던 그는 종종 영화 제작에 관여하고자 했고, 자신이 데이트하던 여성들을 데려와서 배역을 주도록 강요했다고 합니다.
영웅적 이미지와는 달리 매우 인색하여 자선 행사들을 외면한 것으로 팬들의 원성이 자자했다고도 합니다. 1955년에는 탈세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그의 주장대로 회계사의 잘못임이 드러나 겨우 체면을 유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웨인.... 그는 진정한 미국의 영웅이자 아메리카니즘의 대변자이고 정의로운 서부 사나이의 대명사로 영원히 영화사에 남을 것입니다. 그는 1979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 모뉴멘트 벨리 ]
미국 아리조나주와 유타주의 접경 지역에 있는 '모뉴멘트 밸리'는 나바호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의 성지입니다. 1400년전에 인디언 부족인 아사바스칸 족이 최초에 거주한 지역이고 그 후에 푸에블로 부족이 거주하다가 나바호 부족이 거대 부족이 되면서 거주하게 된 지역입니다.
모뉴멘트 밸리는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한데, 1938년 존 포드 감독의 영화<역마차>를 비롯해 1940년대 <황야의 결투>,<아파치 요새>,<이지 하이더>,<노란 리본>,<리오그란데>,<백튜더 퓨처2>,<델마와 루이스>,<포레스트 검프>,< 미션임파셔블2>,<옛날 옛적 서부에서> 등 부지기수로 있습니다.
* 모뉴멘트 벨리
* <역마차>의 테마 음악,아래 화면은 <역마차>의 장면은 아니고 <리버티 바란스를 쏜
사나이>의 촬영 장면입니다. 왼쪽부터 제임스 스츄어드,존 포드 감독,존 웨인이 보입니다
겨울 바다와 파도카페를 방문한
께 인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