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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영근 신부님 묵상글을 올립니다.
✠ 마태오 복음 9,18-26
오늘 <복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야이로는 회당 장으로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자였지만, 죽어가는 어린 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을 뿐입니다.
그 속수무책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모든 희망이 무너져 버린 참담한 순간입니다.
또한 열 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은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느라 고생하였지만, 가진 것마저 모두 탕진해 자포자기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바로 이 절망의 순간, 억울함과 원망이 밀어닥치는 이 순간, 하염없이 넘어지는 이 순간이 그들에게는 더 깊은 데서 물을 길어 올리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퍼 올리는 기회의 순간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의 시련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또한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이 그를 더 깊은 믿음에로 이끄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혈루증 여인도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믿었지만, 사실 그들의 믿음은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믿음은 언뜻 보기에는 미신적이기까지 합니다. 어찌 보면 주술적이고 마술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미 죽은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면 다시 살아나리라’는 회당 장의 믿음 역시 억지 부리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짓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났다고 여길 때,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실 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절망적이라고 여길 때,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요, 은총의 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습니다.”
바로 이 순간 주님을 밀쳐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의 옷깃을 만지는 일이 필요합니다. 만약,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약한 까닭일 것입니다.
베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의심과 이중성으로 주님께 다가가기 때문에 만져도 만져지지 못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거나, 예수님이 손을 얹어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 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 곧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줍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이, 끝까지 믿고, 오로지 예수님께만 희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전부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으로 이끄시는 그분의 전능한 손길에 우리의 손을 맡겨드려야 할 일입니다.
믿음의 손으로 그분의 옷을 부여잡고 그분의 권능과 자비가 우리들 안에 흘러들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7월6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호세아 2,16.17ㄷ-18.21-22 마태오 9,18-26
하루를 더 살고 싶다면, 내일 왜 살아야 하는지 오늘 써 놓아라!
의미 있게 죽는 것이 나을까요, 의미 없이 사는 게 나을까요?
만약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면 우리는 의미 있게 죽는 것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사느냐입니다.
그리고 그 사는 이유가 있는 곳이 ‘집’이 됩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병원에 입원하시어 20일 만에 췌장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볼 때마다 “집에 가자!”라고 하셨습니다.
집에는 왜 가려고 하셨던 것일까요?
집에 가면 하루를 살아도 의미가 있고, 병원에서는 의미를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생존보다는 의미입니다.
워싱턴주 올림피아 인근 세인트헬렌스산에 살던 헨리 트루먼 할아버지는 1980년 화산이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상황임에도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화산 폭발이 임박하자 정부는 화산 근처 모든 사람에게 대피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트루먼 할아버지만 끝까지 버텼습니다.
강제로 연행하여 구출할 수도 있었지만, 여론과 할아버지의 연세를 생각하여 그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화산이 폭발하였고 할아버지는 16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화산재에 묻혔습니다.
할아버지는 말했다고 합니다.
“이 집이 사라지면 어차피 나도 일주일 내로 죽을 것입니다.
나는 이 집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겠습니다.”
[참조: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책한 민국’, 유튜브]
할아버지의 선택이 어리석었다고만 할 수 있을까요?
할아버지는 하루를 살더라도 의미 있게 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모든 삶의 의미는 집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의미를 잃고 생존에만 집착하는지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잊고 생존에만 집착할 때 사실 건강도 잃고 죽음을 재촉하게 됩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의미’입니다.
이것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이 찾아낸 결론이었습니다.
사람은 생존 자체가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입니다.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기적은 살고 싶다는 희망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완벽하기만 했던 26세의 홀리는 결혼 하였고 사랑을 받았고 케이시라는 예쁜 딸을 출산하였습니다.
그런데 3주 뒤부터 손가락부터 시작하여 몸이 서서히 마비되더니 결국, 마비가 전신으로 퍼져
호흡기 없이는 숨도 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그녀에게 희귀 난치병인 GBS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온몸이 마비되기는 했지만, 통증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말하는 능력을 잃어가며 “나 너무 아파!”라는 말만 하였습니다.
GBS는 그녀를 서서히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하지만 끔찍한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딸 케이시는 엄마의 곁을 지켰습니다.
홀리는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딸을 바라보며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가 바라던 엄마가 되어주지 못해 그게 가장 고통스러웠어요.”
사랑해주어야 할 아기에게 사랑을 줄 수 없는 고통이 죽음의 고통보다 컸던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포기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마비된 지 두 달 되던 날 홀리는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팔을 움직이고 혀를 움직여 딸에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움직일 수 있는 손으로는 딸에게 처음으로 우유를 먹였습니다.
70일 뒤 호흡기 없이 자가 호흡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재활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양손으로 휠체어를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딸을 안아줄 강한 엄마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87일째 되는 날 그녀는 간호사들의
도움으로 두 발로 일어섰습니다.
홀리는 엄청난 투혼으로 하루가 다르게 강해졌고
4달째 되는 날 그녀는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딸 케이시와 함께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집은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1년 뒤 엄마, 홀리는 마라톤을 완주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고통이 우리를 끝장낼 건지, 아니면 더 강하게 만들 건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출처: ‘딸아이 출산 후 전신 마비된 26세 엄마가 내린 결단’, 포크포크, 유튜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두 여인을 치유해 주십니다.
한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더라도 12년 동안 앓던 병이 나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소녀의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손을 얹으시면 나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아직 할 일이 남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당연히 살려주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오지 않을까요?
마치 어린이가 부모님께 ‘학교에서 선생님이 꼭 필요한 걸 사 오라고 했는데 설마 돈 안 주시겠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언가 청하려면 그 청하려는 것이 의미 있다고 믿을 때 강력하게 청할 수 있습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건강이나 생명이라면 그 건강이나 생명이 의미 있을 때 강력하게 청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의미가 기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의미는 청할 때 모든 망설임을 이기게 해 줄 힘을 지닙니다.
내일 또 살게 해 주시기를 청하고 싶다면 오늘 저녁에 내일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지 적어놓으십시오.
그러면 내일도 주님께서 더 살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확신을 두고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십니다.
그 확신은 내가 청하는 것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오늘을 의미 없게 산다면 내일도 살 수 있게 청하는 것은 자신 안에서 힘을 잃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강론>
(2026. 7. 6. 월)(마태 9,18-26)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 하는 부인을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마태 9,18-26)>
1)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쳐 주신 이야기는, ‘절망’에 초점을 맞추면 사실상 ‘같은 이야기’입니다.
야이로와 그 여인은 죽음과도 같은 절망에 빠졌다가 예수님께 마지막 희망을 걸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들에서 성가 517장의 가사가 연상됩니다.
“내가 절망 속에서 주께 아뢰나이다.
주여, 나의 간구를 들어 허락하시고, 주께 비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마르 5,26).”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에서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다.” 라는 말은, 재산뿐만 아니라 믿음과 희망까지 다 쏟아 부었다는 뜻이고, 그 여인이 믿음도 희망도 다 잃어버리고 깊은 절망에 빠졌음을 나타냅니다.
글자 그대로,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상태였을 것입니다.
야이로의 절망은 누구든지 금방 공감할 수 있는 절망입니다.
<소녀의 나이가 열두 살이었고(마르 5,42), 여인이 병으로 고생한 기간이 ‘열두 해 동안’인데, 성경에서 ‘열둘’은 하느님과 관련된 숫자이기 때문에, 두 이야기에 있는 ‘열둘’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가 작용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절망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라는 말이 아니라,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을 마련해 주시는 것,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빛을 더 잘 볼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겪은 절망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겪은 환난을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너무나 힘겹게 짓눌린 나머지 살아날 가망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죽은 이들을 일으키시는 하느님을 신뢰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과연 그 큰 죽음의 위험에서 우리를 구해 주셨고 앞으로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께서 또다시 구해 주시리라고 희망합니다(2코린 1,8-10).”
‘위대한 사도이며 선교사인 바오로 사도’도 절망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절망을 통해서 더 큰 믿음과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절망으로 약해진 것이 아니라, 더 강해지고 더 단단해진 것입니다.
그가 절망을 극복한 비결은 믿음과 기도입니다(2코린 1,11).
3) 야이로와 그 여인은 예수님 덕분에 원하는 것을 얻었고, 절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아마도 둘 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 같은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둘 다 구원받았지만, 그 구원은 ‘구원의 시작’일 뿐이고, ‘구원의 완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의 완성’은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만일에 지금의 치유에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잊어버린다면, 그 치유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4) 이야기에 나오는 여인보다 더 심한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간절하게 기도해서
치유의 기적을 얻는 사람들도 분명히 많고, 끝내 치유되지 않고 그냥 떠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누구에게는 기적을 허락하시고,
누구에게는 허락하지 않으시는지, 그 기준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모르지만(모르니까) 포기하면 안 됩니다.
결과는 주님께 맡겨드리고, 우리는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진짜 희망은 이쪽 세상에 있지 않고 저쪽 세상에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라고 말합니다(콜로 1,27).
이 말에서 ‘영광’은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광,
즉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병의 치유와 건강 회복은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긴 한데, 그래도 그것은 지나가는 현세의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7월6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9,18-26
가슴치고 부끄러워하는 것, 참으로 좋은 표시입니다!
연세가 조금 드신 분들 중에, 이야기가 무르익어가면서, 우울해지는 분들이 많습니다.
돌아보니 그 무엇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다며 크게 자책하십니다.
그때 왜 내가 그랬을까?
가슴 치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토록 부끄럽고 비참한 나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이런 내게 구원이나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냐며 좌절합니다.
그럴 때 저는 늘 큰 확신갖고 강하게 말씀드립니다.
꼭 그렇게 비관적이고 회의적으로 자신의 지난 인생을 평가하셔야 하느냐고?
내가 나를 존중해주지 않으면 누가 나를 존중해주겠냐고?
내가 내 삶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데, 누가 내 인생에 후한 점수를 주겠냐고?
지난 인생 돌아보면 누구나 오점이 있고 흑역사가 있는 것이라고. 젊은 시절, 다들 혈기왕성하고
마음만 앞섰기에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렇게 가슴치고 부끄러워하는 것, 참으로 좋은 표시라고. 큰 틀에서 바라보면 성장을 거듭한 표시가 분명하다고. 이 세상에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 살다가 세상 뜨는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이렇게 가슴 치는 것,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일이라고.
저도 솔직히 얼마 전까지 제 지난 인생에 대해서 너무 박한 점수를 매겼습니다.
100점 만점에 30점. 그런데 한 작은 만남, 한 작은 계기를 통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너무나 부족했고, 실수투성이였고, 그래서 아직도 자다가 이불킥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나를 통해 누군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한번 잘 해보고자 했던 내 진심을 누군가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나 훈훈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관대하신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그것을 잘 알수 있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한 여자가 혹시나 하고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습니다.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세상 작고 가련한 여인의 그 작은 터치 한번을 그냥 흘려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찰나 같은 한순간의 접촉을 크게 보십니다.
즉시 돌아서신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보십시오. 그 여인의 작은 손짓 한번이 죽어가던 여인을 살린 것입니다.
지상에서 새 생명을 얻은 것뿐 아니라, 영원한 구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신음 하나, 작은 손짓 하나, 찰나의 눈빛 한번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눈여겨보시고 귀여겨들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지상 생활하는 동안 지녔던 작은 선한 의지, 작은 사랑의 실천을 기억하셨다가 백배 천배로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