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8월20일 화요일.
[(백)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제1독서 판관기 6,11-24ㄱ
복음 마태오 복음 19,23-30
◈ [서울]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2019년 다해 8월20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진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습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것입니다.’
서양 철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변하지 않는 원칙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변하지 않는 원칙에서 드러나는 그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진리는 찾아가는 것이고, 진리는 탐구의 대상입니다. 지혜, 지식,
성찰은 진리로 안내하는 길잡이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던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무엇일까요? 내적인 결심과 그 결심을
인내로써 지키려는 삶의 태도입니다. 어떤 것을 진리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절대불변의 어떤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에 대해서 갖는 마음가짐입니다. 진리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면서 우리를 지켜보는 이데아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개입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역동적인 과정으로서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의로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십니다. 부자 청년에게는 가진
것을 전부 팔아서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지금
강도당한 이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하십니다.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부자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재물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자는 재물을 많이 소유한 사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내면을 가꾸지 않고, 다른 것들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재물, 우리의 권세, 우리의 업적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가꾸지 않는 사람은 재물이 많아도, 재물이 없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반면에 자신의 내면을 잘 가꾸는
사람은 재물의 유무와 상관없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내면을 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외모, 재산,
능력, 재능을 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우리의 내면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야 합니다. 잠시 일상의
삶에서 멈추어야 합니다. 나의 내면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내면을 잘 가꾸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기 마련입니다.
자캐오는 부유했지만, 내면을 보았고 구원받았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내면을 보았고 구원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잠을 죽음이라 생각하자
2019년 다해 8월20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잠을 죽음이라 생각하자>
복음: 마태오 19,23-30
우리나라에서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인생수업’의 저자 퀴블러 로스
박사는 시사주간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입니다. 그녀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임종 직전의 환자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로부터 얻은 지식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죽음에 대한 문제를 끝까지 연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한 체험이 ‘죽음 이후의 삶(사후생)’에 나옵니다. 죽어가는 환자들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게 되자, 박사는 그 날 병원과 시카고 대학을
떠나겠다는 통보서를 제출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마지막
세미나를 마치고 승강기로 걸어갈 때였습니다.
한 여성이 박사를 향해 다가왔습니다. 박사의 모든 생각을 다 읽고
있다는 듯이 그녀는 함박 미소를 띠고 있었습니다.
“박사님, 제가 딱 2분만 시간을 빼앗을게요. 사무실까지 함께 걸어가도
될까요?”
이 2분이 그녀에게는 가장 긴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여성은 1년 전쯤 세상을 떠난 슈와츠 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살짝 몸을 만져봤는데 실제 촉감이 있었습니다. 부인은 말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로 돌아왔어요. 첫째는 저를 위해 해주신 일에 대해
박사님과 스미스 신부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죠. 더 진짜 이유는,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는 일을 아직은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과학자인 그녀는 자신이 죽은 사람을 보았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그래요. 그런데 스미스 신부님한테 쪽지를 하나
써주시면 좋아하지 않으실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박사가 그
쪽지를 신부님에게 건네주지 않을 것을 환히 알면서도 친필 싸인까지
다 하고는 “이젠 됐나요?”하고 말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지 마세요. 아직은요. 지금은 때가 아니에요.
우리가 도와줄게요. 때가 되면 아실 거예요. 약속하실 거죠?”
박사는 “약속하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문 밖으로 나갔고 박사는
재빨리 문을 열어보았지만 복도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늘 나에게 죽음이란 것이 찾아오고 함께 걷게 된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제대로 살게 됩니다. 죽음은 모든 진실을 알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해집니다. 힘들지만 조금이라도 더 나누기 위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접습니다. 그렇게 퀴블러 박사의 좋은 책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퀴블러 로스 박사가 쓴 ‘인생수업’에서 그녀는 죽음을 앞둔 수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후회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돈을 더 많이
벌지 못한 것일까요? 더 열심히 일하지 못한 것일까요? 더 많은 지식을
쌓지 못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하나같이 더 많이 춤추지 못하고 더
노래하지 못하고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더
행복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말하면 그것은 진리입니다. 죽음은 곧 나의
시야를 왜곡시키는 자아의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방해
없이 죽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을 제대로 보게 됩니다.
‘인생수업’에 나오는 한 죽음을 앞둔 아이의 사례입니다.
소년은 아홉 살 인생 중 여섯 해 동안 암과 싸웠습니다. 어느 날 소년은
아버지에게 3년 동안 버려둔 채 차고에 세워져있던 자신의 자전거를
꺼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소원은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이었지만 그때까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마치 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모퉁이에서 아이가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나타났습니다. 끔찍할 정도로 파리하고 창백해서 아무도 그가
자전거를 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밝게
미소 지으며 우리에게 달려왔습니다.
2주 뒤 소년의 1학년짜리 동생은 우리에게 형으로부터 자전거를 선물로
받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형은 1년 뒤 동생의 생일에 자신이 곁에
있지 못할 것임을 알았나봅니다. 삶의 시간도 기력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이 용감한 소년은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동생에게 자전거를 물려줌으로써 자신의 마지막 꿈을 이룬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런데도 부자가 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일’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1코린 15,31)고
말합니다. 오늘 죽는다면 오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주님께 나아갈 것입니다.
잠은 죽음과 매우 흡사합니다. 저녁 잠자리가 항상 내 생의
마지막이라고 여기시면 좋습니다. 그러면 존재의 이유를 명확히 깨닫게
됩니다. 우리 존재의 이유는 ‘행복’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행복하라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행복하려면 내어주어야 합니다. 소유하면 어제 복음의 부자처럼
슬퍼집니다. 초콜릿 맛을 전혀 모르면 초콜릿이 없는 것이 슬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맛을 아는데 조금밖에 없다면 슬픈 것입니다. 그
조금을 나누어 먹을 수 있다면 다시 기뻐질 것입니다. 그렇게 부자가
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매일 밤 맞는 잠을 죽음이라고 생각합시다. 그러면 진리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8월20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복음: 마태 19,23-30: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4절)고 하신다. 여기에서
낙타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동물 중에서 가장 큰
동물이다. 낙타는 바늘구멍에 들어갈 수도 없고, 그 바늘구멍이 낙타의
거대한 몸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예수께서는 재물 자체를 나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재물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비판하신 것이다.
그런데 ‘바늘귀’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 도시는 성곽으로
둘러져 있고 성문이 있는데, 성문에는 짐을 실은 낙타라든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큰 정문이 있고 그 옆에는 작고 낮은 좁은 문이
있어서 밤에 큰문을 잠그고 수위 병이 지키면서 이 문으로 사람들을
통과시켰다. 이 작은 문을 흔히 ‘바늘귀 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낙타가 사람도 겨우 지나가는 이 작은 문을 들어가기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하신 말씀이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하신 것이다. 낙타와 바늘귀의 예가 그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놀랐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고 한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즉 하느님께서 해 주셔야만 가능하다고
하신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6절)
“보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27절) 베드로가 그렇게 물은 것은 우리
모두가 사도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물었던 것이다.
여기서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이 어떤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완전히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렇게 큰
사랑으로 완전히 버린 분들이다.
“너희도 열 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28절)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부족하고 죄 있는 사람들이라고
판결하리라는 뜻이다. 그분을 따르는 것은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 배”는 하늘 나라에서 누릴
상급을 의미한다. 현재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것이다. 즉
주님을 위해 육적인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영적인 것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라고 하신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 26)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8월20일 화.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 26)
집착과 소유사이에 점점 좁아져가는 바늘귀가 같은 우리마음입니다.
우리의 욕심은 이와같이 한계도 끝도 없습니다.
영원히 움켜쥘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은 우리의 생명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조차 깨닫지 못하게합니다.
마음과 영혼의 눈마저 멀게 만듭니다.
집착하고 있는 것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자유로 나가야합니다.
하늘 나라는 더 많이 자유로워지는 나라입니다.
내려놓아야 만나게되고 움켜쥔 그것마저 나누어야 비로소
드러나고 넓어져가는 하늘 나라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베르나르도야? 너 여기 무엇 하러 왔느냐?
2019년 다해 8월20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베르나르도야? 너 여기 무엇 하러 왔느냐?
성인!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우리 범인(凡人)들과는 너무
동떨어진 별세계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실 성인의 삶은 우리와 종이
한 장 차이였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많은 결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우리보다 조금 더 인내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보다 조금 더 이웃들을 환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인들의 삶에서 주목할 만한 측면은 그들 역시 오늘 우리가 지니고
살아가는 죄, 한계, 나약함, 상처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어둔 밤’을 지내며 괴로워했습니다. 때로 깊은 하느님 부재
체험으로 인해 힘겨워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 한 가지! 어두운
그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하느님과 대화하고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거룩하게 되는 것’(테살로니카 전서 4장 3절)
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특별한 그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매일의 고통을 잘 견뎌냄을 통해서도
우리는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눈물과 기도로 밤을
지새우지 않아도 매일 맡겨진 직무에 충실함으로서 우리는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매일 비우고 매일 떨치며 매일 새 출발하는
가운데 우리는 조금씩 하느님을 향한 성덕의 계단을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은 12세기를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당시 그의
역할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12세기를 자신의 두 어깨에 짊어졌다.”
라는 말까지 돌 정도였습니다. 베르나르도의 지혜와 경륜은 하늘을
찔렀는데 당대 교황님들을 비롯해 많은 왕들이 그에게 조언과 상담을
청했습니다.
단 한번이라도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라며
우러러 보았습니다. 동시에 베르나르도는 가톨릭 신앙의 옹호자,
수도생활 쇄신의 선구자, 교회 분열을 저지하는 든든한 보루, 탁월한
성서학자, 위대한 명 설교자, 그러면서도 겸손한 수도자로서의 삶을
동시에 살아갔습니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마지막 교부’ 또는 ‘꿀과
같은 혀를 가진 박사’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090년 프랑스 귀족 가문의 촉망받는 자녀로 태어난 베르나르도는
다정다감하고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22살의 나이에
시토회에 입회해서 수도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출중한 인품과 지도력, 그리고 놀라운 언변과 감수성의
소유자였습니다.
입회하기 전 그는 여러 형제들과 친구들을 영적으로 잘 지도하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30명이나 되는 동료들을 하나로 모았고
의기투합한 그들은 당시 개혁파 수도원으로 ‘뜨고 있던’ 시토회에 동반
입회를 하게 됩니다.
초기 양성 기간을 마친 베르나르도는 장상의 지시에 따라 동료 수도자
12명과 함께 그 유명한 클레르보 계곡으로 내려갑니다. 척박한
황무지였던 클레르보에 작고 소박한 수도원을 건립한 베르나르도는
오랜 기간 동안 철저한 고행과 단식, 집필과 일에 전념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았고, 숨을 쉬었으며, 또 그 결실을 형제들과
나누었습니다. 점차 클레르보는 수도생활 개혁의 원천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메마른 골짜기였던 클레르보는 점차 빛과 생명의 계곡, 기쁨과
구원의 골짜기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르나르도의
성덕에 감화를 받고 클레르보로 몰려왔습니다.
베르나르도는 가톨릭교회 쇄신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병약한 몸을 이끌고 교회의 개혁을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했습니다.
교황청의 폐단과 고위성직자들의 세속화를 신랄하게 경고했습니다.
교회당국으로 부터 공인받은 순회 설교자로서 수많은 지역을 다니며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했습니다.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베르나르도는 스스로에게 그 유명한 질문
한 가지를 던졌습니다. “베르나르도야? 너 여기 무엇 하러 왔느냐?”
그가 남겨준 수도자로서의 모범을 바라보며 같은 수도자로서 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는 교도권으로부터 부탁받은 중요한 임무를 완수하는 즉시
고향집으로 달려가듯이 부지런히 클레르보로 돌아와 평범한
수도자로서의 삶을 계속했습니다. 그가 수도원으로 돌아올 때는 절대
혼자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누군가를 데리고 왔는데 그의 삶에 매료된
나머지 수도생활을 선택한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성모님을 사랑한 성인들’, 생활성서)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부자는 죄인인가?|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8월20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마태19,23-30)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기념일
부자는 죄인인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19,23)는 말씀을 들은 한 부자가 “하느님,
낙타를 아주아주 작게 만들어 주시든지, 바늘귀를 아주아주 크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리하면 저의 재산 반을 당신께 아낌없이
바치겠습니다.” 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답니다. 그렇다면 그가 재산을
바친다고 해서 하느님나라를 차지할 수가 있을까요? 재물이 아니라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각자는 자기가 소유한 것을 포기하되 무엇을 버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버렸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의 인간적인 유익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렸을 때 가치가 있습니다. 상을 백배로
받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라는 것 때문에 버린다면 결코 진정한
열매는 맺을 수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상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그분의 이름 때문에”(루카18,29. 마태19,29) 바쳤을 때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입니다. 얼마 전 고등학교 축구 승부조작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연관된 경기 몰수패및 해당학교의 대회출전 금지,
지도자 영구 자격정지가 선언되었습니다. 상만을 추구해서 근본정신을
잃은 결과입니다.
한 가지 때문에 전체를 얻을 수도 있지만 한 가지 때문에 모두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를 얻을 수 있는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사실 부자가 가진 재물이 나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눈이 가려
보아야 할 참 가치를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재물은 인간을
노예화 하는 유혹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상’만을 생각하면 부정을 해서라도 일등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정신, 의미, 알맹이, 즉 내용을 보면 부정한 생각을 한
순간 이미 경기에서 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부자는 죄인인가요? 사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잘 써야 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그
축복을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일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재물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무쪼록 많이 벌되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일들을 하나하나 늘려가기 바랍니다.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십시오. 버려도 버려도 또 버릴 것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돈이
많다고 우쭐대다가는 쓰러지지만 착하게 살면 나뭇잎처럼 피어난다”
(잠언11,28).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일 지라도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지 않으면 결국은 하느님 나라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모든 것을 얻게 되고, 모든 것을 누리려 한
사람은 그것을 잃게 됩니다. 부디 모든 것을 얻는 기쁨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잠언30,8-9).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세상의 물질에 매여 있다면
사랑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헛소리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아니라 주님의
시선에서 보아야 구원의 길이 보입니다. 내 잣대가 아닌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의
모두는 주님의 것입니다. 저의 모두를 당신의 뜻대로 써주십시오.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삶의 변화를 이루게 해 주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감정대로 행하는 자
오늘은 ‘감정대로 행하는 자’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유다서 1장 18절 말씀에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어릴 때 참으로 내성적이었습니다. 나 스스로 부족한게 많다고
생각하였고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든 나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찾았고 또 은근히 나에게 힘이되어 주는 사람을 기대하는
생활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반면에 자기 기분대로 말을 내뱉고 자기 욕심대로 사람을
때리고 또 나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자들을 보면 오랫동안
그들을 경멸하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들의 행위를
지켜보십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정욕대로 행동하거나 남을 조롱하는
자들, 즉 자신의 감정대로 기분대로 행동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이 기분대로 행하는 자,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하나님은 오늘도 불꽃같은 눈동자로 쳐다보십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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