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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생활규례
신 22:1-12
1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2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 줄지니
3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4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
5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
6 길을 가다가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 새가 그의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보거든 그 어미 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7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되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8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을 다 빼앗길까 하노라
10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11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12 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신 22:1-12 / [동족에 대한 이웃 사랑의 임무] 여러분은 동족의 소나 양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거든 못 본 척하지 말고 반드시 그 주인에게 끌어다 주십시오. 2) 그 주인이 먼 곳에 살거나 누군지 모를 경우에는 그 길 잃은 짐승을 자기 집으로 끌어다가 돌보아주다가 주인이 찾으러 오면 돌려주십시오. 3) 나귀든 외투든 여러분의 동족이 잃은 것은 무엇이든지 보는 대로 주워서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4) 여러분은 동족의 나귀나 소가 무거운 짐을 싣고 가다가 넘어진 것을 볼 때에도 못 본 척하지 말고 반드시 그 동족을 도와 짐승을 일으켜 주십시오. 5) [기타 여러 가지 규정들] 여자도 남자의 옷을 입지 말고 남자도 여자의 옷을 입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하는 자를 더럽게 여기십니다. 6) 여러분이 길을 가다가 나무 위에서나 땅바닥에서 알이나 새끼를 품고 있는 어미새를 만나더라도 그 새끼들을 두고 어미새를 붙잡아가지 마십시오. 7) 그 새끼들은 붙잡아가도 되지만 어미새는 반드시 놓아 주십시오. 그래야 그 새가 멸종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복을 받아 잘되고 오래 살 것입니다. 8) 여러분이 새 집을 짓거든 그 평평한 지붕 가장자리에 난간을 만들어 안전하게 해놓으십시오. 만일 난간이 없어서 누가 지붕에서 떨어져 죽으면 그 집 주인과 그의 온 식구들이 살인죄를 뒤집어쓰게 됩니다. 9) 여러분은 포도원에 다른 씨앗을 섞어서 뿌리지 마십시오. 그렇게 부정 타는 농사를 지으면 포도와 씨뿌린 작물이 모두 부정을 타서 아무나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모조리 성소의 제사장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10) 여러분은 소와 나귀에 나란히 멍에를 메워 쟁기질을 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서로 몸집과 힘이 크게 다르며 소는 정한 짐승이고 나귀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11) 여러분은 털실과 모시를 섞어 짠 옷을 입지 마십시오. 12) 여러분이 네모진 천으로 만들어 걸치는 겉옷의 네 귀퉁이에는 술을 달아 놓고 그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규례가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는 이방인과 구별된 성도들이 살아가야 하는 거룩한 삶을 나타냅니다.
이웃의 재산에 대해(1-4) “네 형제”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성도들은 이웃을 형제처럼 여겨야 합니다. 서로가 같은 조상의 후손이고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언약을 잇는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웃이 가축이든, 물건이든 재산을 잃어버렸다면 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에 동감하고 모른 체하지 말고, 해결하기 위해서 도와야 합니다. 성도들은 정함 없는 재산에 마음을 두지 말고, 그것을 잃어버린 이웃의 애타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웃이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있다면 성도들은 언제든지 도와줄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마음입니다.
차이의 존중과 생존을 위한 배려(5-8) 하나님의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는 그 차이가 존중되어야 하고, 유지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방 종교에서 행하는 여자가 남장을 하거나 남자가 여장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야 합니다. 새끼 새들은 잡되 어미 새는 살려 보내는 것은 자연의 질서 유지와 인간 생존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절제된 포획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새 집을 지을 때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는 안전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방지해야 합니다. 이는 이웃의 안전뿐만 아니라 개인의 안전을 위해서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입니다.
섞지 말아야 할 것들(9-12)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서 뿌리는 것, 소와 나귀를 한 겨리로 쟁기질을 하는 것, 양 털과 베 실을 섞어 짠 것을 입는 것이 금지됩니다. 혼합 방식에 대해 금지 세상의 방식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과 연결됩니다. 성도들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일상적으로 입고 다니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드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과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게 합니다.
적용: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는 지체들이 겪고 있는 난처한 일에 대해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들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시골에서 목회하는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평생 땅 가지고 농사 밖에 지을 줄 모르던 농부가 갑자기 행정도시가 들어서게 되면서 땅 값이 올라 졸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걸음이 일자에서 팔자로 바뀌었습니다. 걸음만 바뀐 것이 아니라 조강지처가 못생겨 보이기 시작하니 동네 다방의 아가씨들에게 대우받고 즐기다가 그만 꽃뱀들을 만나서 죄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이 가난하던 시절에는 마약을 먹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먹고 살만하니까 젊은 사람들 사이에 마약이 만연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가난할 때는 죄 지으려고 해도 돈이 없어서 짓지 못합니다. 그런데 가난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돈이 생겼을 때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 설 교 >
배려가 있는 사회
신 22:1-30 / 양인국 목사
1. 우리는 신명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공동체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이 얼마나 많은지 보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되 혼자 살도록 지으시지 않고 더불어 살도록 지으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믿음의 사람으로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공동체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공동체를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난 주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더불어 사는 복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요청되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신뢰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도 분문을 통하여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에게 요청 되는 것이 무엇인지 듣고자 한다.
2.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따라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이와 같은 부르심에 따라 살 때 그들 가운데 더불어 사는 복된 공동체를 세워지는 것이다. 여기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은 우리의 삶 가운데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배려다. 22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따라야 할 여러 가지 규례들을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규례들은 기록해 주신 그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따라야 할 것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규례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이루고자 하신 목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 가지 주제로 정리할 수 있다. 그것은 배려함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22장을 통하여 주신 규례들에 따라 살 때 그들 가운데는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하여 배려함이 있게 된다는 의미다. 물론 이것은 더불어 사는 복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청되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베려함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22장의 여러 규례들을 보며 배려하며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웃의 우양이 길을 잃었거나 넘어진 것을 보았을 때 또는 이웃이 잃어버린 물건을 보았을 때 “못 본체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22:1-4). 이것은 이웃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주라는 의미다. 이처럼 이웃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웃에게 허락해 주신 권리를 인정해 주고 그것을 보호해 주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행위 자체가 배려인 것이다.
하나님은 여자에게 남자 옷을 입지 말 것과 남자에게 여자 옷을 입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22:5). 이스라엘에서 외적으로 남녀를 구분하는 가장 보편적인 것이 의복이었다. 그러므로 자신과 다른 이성의 옷을 입는 것은 이성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과 다른 이성의 옷을 입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에게 각각 허락해 주신 권리를 서로 인정해 주고 그것을 침해하지 말라는 의미다. 이와 같은 규례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배려란 결국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정체성과 권리를 인정해 주는 것임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새의 보금자리에 어미 새와 알 또는 새끼 새가 함께 있는 것을 보면 그것들 가운데 새끼나 알만 취하고 어미를 놓아 주라고 말씀하셨다(22:6,7). 이것은 자신의 권리 중 일부를 포기함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보존하고 지키려는 것이 배려함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후 식물과 동물 모두를 그들의 양식으로 허락해 주셨다. 그러므로 보금자리에 있는 어미 새와 새끼 새를 함께 취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권리만 주장한다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들 가운데 사라질 것들이 많을 것이다. 만일 동지 안에 있는 어미 새와 새끼 새를 모두를 취한다면 그 둥지 안에 있는 새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배려는 이처럼 권리를 넘어 함께 더불어 살도록 이끌어 주는 은혜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배려함이 있을 때 권리만으로 이룰 수 없는 아름다움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집을 지르려는 사람이 무엇보다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사람들의 안전이라는 것을 말씀하셨다(22:8). 그래서 집을 지으려는 사람은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이와 같은 행위야 말로 배려의 모습들 가운데 또 하나이다. 즉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때에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되지 않도록 고려하는 것 자체가 바로 배려인 것이다.
하나님은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 것과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밭을 갈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22:9-11). 왜냐하면 동식물은 각각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는 특성을 가진 것들을 인위적으로 함께 하도록 한다면 부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실례로서 한 포도원에 두 종류의 포도 종자를 뿌린다면 생육 특성의 차이로 인하여 서로에게 유익을 주기 보다는 해를 줄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와 나귀를 한 겨리로 하여 밭을 간다면 소와 나귀는 물론 밭을 가는 농부의 수고도 더할 것이다. 왜냐하면 소는 느리고 힘이 세지만 반면 나귀는 빠르고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두 짐승을 한 겨리로 하여 밭을 간다면 짐승들이 고통스러워할 것이고 농부의 수고가 더해 질 것이다. 물론 양털과 베실을 섞어 짠 옷은 환경에 따라 옷이 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규례들을 통해 말씀해 주신 배려함이란 각각의 특성을 고려하여 그에게 합당한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처럼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주시며 배려함이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신 후 옷깃에 술을 달라고 말씀해 주심으로 배려에 대하여 주신 교훈들의 결론을 말씀하셨다(22:12). 다음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겉옷에 술을 달도록 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민15:37-39)”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겉옷에 술을 달라는 것은 그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준행하도록 하려 하심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배려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 후 결론적으로 옷에 술을 달라고 하신 것은 진정한 배려는 말씀에 따라서 사는 것임을 말씀해 주시기 위함이다.
13-30절은 순결과 간음에 관한 법을 사례 별로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법들은 이스라엘이 서로를 존중하며 건강한 가정을 지키기 위하여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로서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또한 “배려”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왜냐하면 본문은 반(反) 배려적인 행위들이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반 배려적인 행위란 탐욕에 이끌려 스스로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거나 또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는 행동을 말한다. 실례로서 탐욕에 이끌려 순결을 잃는 일과 또한 간음을 행하는 일은 모두 반 배려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런 사람들을 돌로 쳐 죽임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악을 제거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하신 것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반 배려적인 행동을 할 때 공동체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다양한 내용들을 살필 때 배려란 이웃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들이 보다 더 온전함에 이를 있도록 도와주거나 또는 기회를 마련해 줌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해 주신 권리와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배려가 있는 공동체 안에서는 구성원들 모두가 보다 더 온전함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은 배려의 유무가 실제로 공동체와 개인에게 각각 어떤 영향을 주는지 든 몇 가지 예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바울의 예를 통하여 배려함이 한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의 삶을 살필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바울을 바울 되게 한 것들 가운데 요한 한 가지가 바로 배려라는 것이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 복음을 위하여 온전히 헌신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의 그리스도인 됨의 진정성을 믿지 못하여 두려워했고 이로 인하여 바울은 부르심에 대하여 응답할 수 있는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때 바나바는 바울의 진정성을 믿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은사와 부르심을 인정하여 그에게 섬김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것이 바로 안디옥교회의 교사로 천거한 일이다. 이로 인하여 바울은 자신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었고 또한 이방인의 사도로서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여기 바나바가 바울을 위하여 행한 일이야 말로 진정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만일 바나바의 배려함이 없었다면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토록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이와 반대 되는 예도 있다. 지도자들 가운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에 대한 배려가 없었기 때문에 충분한 능력을 나타내지 못한 경우다. 우리는 이와 같은 예들 가운데 하나를 모세에게서 찾을 수 있다. 만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모두가 모세를 신뢰하고 그로 하여금 바른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더라면 출애굽의 역사는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하여 모세는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도 들어갈 수 없었고, 이스라엘 역시 광야에서 넘어져야 했다.
모세의 예야 말로 배려함이 요청되는 곳에서 배려함이 없을 때 모두가 넘어진다는 것을 교훈해 준다.
물론 배려를 통하여 오는 축복은 배려를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배려하는 사람까지도 임한다. 만일 나발이 이와 같은 사실을 알았더라면 더 큰 복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무지하여 배려함을 받을 줄만 알고 배려할 줄을 알지 못했다. 이로 인하여 그는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는 오히려 그를 넘어지게 하는 덧이 되었다. 만일 나발이 다윗에게 도움이 필요했을 때 그에게 도움을 주었더라면 자신의 부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그 역시 큰 영광을 얻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배려가 요청될 때 그 요청에 응답하는 사람과 그의 배려함을 받는 사람 모두는 형통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발은 다윗이 도움을 구했을 때 자신의 목동들을 지켜 준 다윗의 은혜조차 잊고 그를 외면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다윗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결국은 자신의 소유와 생명까지 앓게 되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배려라는 말을 새겨 넣기를 원한다. 그리고 배려야 말로 약속의 땅에서 영원히 잘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길들 중의 하나라는 것을 잊지 않기 원한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가 주의 뜻에 따라 서로 배려하며 살게 해 주옵시고 이로 인하여 우리 모두 주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서 함께 더불어 복된 삶을 사는 공동체를 세우며 살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사상
신 22:5-11 / 강문호 목사
지난 해 이스라엘에서 한 달을 머믈면서 여러 가지 체험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음식중에 싸고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이 있습니다. 팔레팔이라는 음식입니다. 빵을 두 겹으로 만들었습니다. 빈대떡을 두 겹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한 쪽을 잘라 내고 가운데 야채, 과일 그리고 고기를 잘라 넣습니다. 불룩하여집니다. 그 것을 하나 먹으면 한 끼 식사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 양고기를 넣은 것이 제일 비쌉니다. 그래 봐야 3,000원 정도합니다.
한번은 음식점에 앉아서 양고기 팔레팔을 시켰습니다. 마침 우유를 사 가지고 간 것이 있어서 음료수는 시키지 않고 가지고 들어간 우유를 따랐습니다. 유대인 주인이 불같이 달려와서는 막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은 코셔 음식점이라 그렇게 먹지 마십시오"
무슨 뜻인 지 몰랐습니다. 양고기와 양 젖을 같이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근거입니다. 같은 종류를 한꺼번에 먹으면 안 되는 것이 성경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음식점에서 쫓겨 날 뻔 한 체험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생소한 금지사항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가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고 하는 이상스러운 율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사상을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사상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간첩으로 우리 나라에 몰래 들어 왔다가 잡혀서 50년을 감옥 생활하면서도 결코 공산 사상을 버리지 못 한 소위 미전향 죄수들이 작년에 북한으로 도로 돌려 보내졌습니다. 이북에서는 영웅 취급을 받았습니다. 지독한 이들이었습니다. 한번 사상이 들어가면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사상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네 가지 사상을 싫어하시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랑을 싫어하시는 것일까요?
1. 혼합주의
하나님은 혼합주의 사상을 싫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옷이 혼합되는 것을 싫어 하십니다. 여자와 남자 옷이 혼합되는 것도 싫어 하십니다. 두 종자를 같이 뿌리는 것도 싫어 하십니다. 소와 나귀를 같이 혼합하여 사용하는 것도 싫어 하십니다. 소는 소끼리, 나귀는 나귀끼리 겨리하여 농사짓거나 마차를 끌어야 합니다. 그리고 옷을 짤 때 양 털과 베실을 같이 혼합하여 짜는 것도 싫어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한 마디로 하나님은 혼합주의를 싫어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혼합은 마귀의 속성입니다. 마귀는 혼합되고 섞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알곡만 있는 밭에 가라지를 심었습니다. 선만 있는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따먹게 하여 선악이 혼합되게 하였습니다.
만나만 먹어야 하는 광야에서 부추, 마늘, 파 그리고 수박 참외를 같이 섞어 먹게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만 섬기는 데 우상을 혼합하여 섬기게 유혹하였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다른 무엇을 혼합하는 것이 이단입니다. 어거스틴은 한 때 마니교에 깊이 빠진 적이 있습니다. 마니가 만든 종교가 마니교입니다. 마니는 3세기 경에 살았던 메소포타미아 의사이자 화가이자 예언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공자님, 그리고 조로아스터를 섞었습니다. 그래서 마니교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것이 이단입니다. 기독교 진리에는 그 어느 것도 섞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주일은 온전히 드려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주일이 다른 날과 혼합되는 것을 싫어 하십니다. 주일은 온전히 영광받으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주일에는 다른 일을 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는 일에 전력하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일조가 많다고 떼어서 선교 헌금이나 다른 교회를 돕는 데 사용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서원한 것은 그대로 갚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나중에 마귀 생각이 들어가는 혼합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지난 주간 동탄 교회 집회를 인도하고 돌아 왔습니다. 장로님 한 분이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제 직장에서 저를 퇴출시키기로 정하였습니다. 다른 직장에서 나를 영예롭게 끌어가는 영광을 주시옵소서, 스카웃해가는 기쁨을 주옵소서. 그러면 그 스커웃 비용의 반을 하나님께 대지 헌금으로 드리겠나이다"
이렇게 기도한 지 얼마 안 지나서 인도네시아 회사에서 그를 스카웃 한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스카웃 비용은 3억원이었습니다. 그래서 1억 5천만을 대지 헌금으로 드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너무 많이 작정하였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대로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생각에 내 생각이나 마귀 생각이 혼합되기를 원치 않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은 순수한 하나님의 생각을 원하시지 결코 혼합을 원치 않으십니다. 순수하고 깨끗하기를 원하십니다.
2. 대형 지향주의
하나님이 두 번째로 싫어하시는 사상이 있습니다. 대형 지향주의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런 말씀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가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6-7)
복을 받고 장수하게 되는 비결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복중에서 가장 큰 복은 장수하는 복입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장수의 비결을 여러 가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10계명중 5섯번째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하게 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면 장수하게 된다고 잠언에 말했습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잠3;7-8)
이렇게 10계명과 같이 거창한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하는 당연한 일을 하면 장수하지만 그러나 너무나 작은 일도 장수의 비결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지나가다가 새 둥지에서 새 새끼를 꺼낼 때 어미 새는 놓아 주는 것도 장수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작은 것도 무시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축복의 비결이 거창하고 크고 웅대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말씀입니다.
어느 분은 아침에 면도하면서 콧 털 하나가 보기 싫어서 뽑았습니다. 그 속으로 균이 들어가서 직장에서 죽었습니다. 작은 것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세계 제일의 산맥 럭키 산맥을 걸어서 넘은 등산가에게 그 거창한 산맥을 넘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었느냐고 신문기자가 물었습니다. 그 등산가는 대답하였습니다.
"신발 속에 들어 간 작은 모래알이 그렇게 힘들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에게 큰 것을 맡기신다고 하셨습니다. 한 고을을 잘 다스린 자에게 10 고을을 맡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양을 잘 지킨 다윗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맡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큰 것에만 관심을 갖기 쉽습니다.
어느 회사 취직 면접시험은 사장과 대화하는 척하며 면접을 볼 때 그 앞에 휴지를 흘려 놓고 그 휴지를 줍는 사람을 선택하기로 정하여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모두 어떻게 하면 면접을 하면서 인상을 좋게 할가에 관심을 집중시킬 때 한 사람은 그렇게 하면서 나오면서 휴지를 주웠습니다. 그가 뽑혔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이에게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새새끼를 둥지에서 꺼내면서 어미새는 놓아 주는 이에게 엄청난 축복인 장수의 축보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너무 대형주의에 들떠 있을 때 작은 것에도 관심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대형지향주의를 싫어 하십니다.
다이아몬드 구별법이 있습니다. 진짜 다이아몬드와 가짜 다이아몬드 구별법은 간단합니다. 물속에 넣어 보면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진짜 다이아몬드는 물속에 넣어도 빛이 그대로 영롱하게 빛나게 됩니다. 그러나 가짜는 물속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 합니다.
참 성도는 어디에 무슨 일을 하든지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누가 무엇이라 하든 상관하지 않고 작은 일에 충성합니다.
3. 편의주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편의주의를 하나님은 싫어하심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빠른 것을 좋아 합니다. 큰 것을 좋아 합니다. 편한 것을 좋아 합니다. 뛰기보다 걷기를 좋아 합니다. 걷기 보다 앉아 있기를 좋아 합니다. 앉아 있기 보다 누워 있기를 사모합니다, 누워 있기보다 자기를 좋아 합니다. 편할수록 좋아 합니다.
본문은 편할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쐐기를 박으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하게 합니다. 여자가 남자 옷을 입는 것은 편하기 때문입니다. 한 둥지에서 새끼와 어미를 같이 잡는 것은 편한 일입니다. 따로 잡으려면 어렵습니다. 두 번 노력하여야 합니다. 한 땅에 두 종자 씨를 뿌리면 거두기가 쉽습니다. 꿩먹고 알먹고 같습니다. 소도 나귀도 있으면 구별할 것없이 같이 사용하면 편리합니다. 편의주의입니다. 되는 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편리한 대로 지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편의주의를 싫어하십니다. 예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안 죽으셔도 되는 분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편의주의는 교회를 망치고 있습니다. 3 D 기피주의는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웃사 이야기가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성막이 실로에 있었습니다. 불레셋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강대국 불레셋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의 두 아들은 법궤를 가지고 나가 앞장 세우고 싸우면 하나님이 승리를 줄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가지고 나가 싸웠습니다. 그러나 법궤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법궤를 의지하였기 때문에 법궤를 가지고 나간 싸움에서 패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불레셋은 법궤를 간직하지 못 하고 도로 보내고 말았습니다. 빼앗아 왔지만 어느 곳에 두어도 재앙만 일어 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궤를 사람이 끌지 않고 암송아지 두 마리를 겨리하여 수레에 실어 이스라엘로 보냈습니다. 아비아달이 농사를 짓다 보니 법궤가 도로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 보관하였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자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날라다가 성전을 짓고 싶어 하였습니다. 3만명을 동원시켜서 법궤를 나를 때 아비아달의 두 손자중 아효가 수레를 끄는 소를 앞에서 몰았습니다. 웃사가 뒤에서 감시하며 따랐습니다. 갑자기 소가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법궤가 떨어지려고 하자 웃사가 법궤를 붙잡았습니다. 웃사는 법궤를 잡자 말자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충성하려고 한 것인 데 왜 죽었을 가요? 편의주의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법궤를 운반할 때는 꼭 어깨에 메고 나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편하게 수레에 실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편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새벽에 영하 10도의 찬 공기를 마시며 새벽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요? 그러나 이렇게 하여야 합니다. 환란과 어려움을 무릎쓰고 라도 전도하여야 합니다. 하기 싫어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편의주의를 싫어 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생긴 것입니다. 자기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이는 아픔으로 맛보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미국 포천이라는 잡지가 279업체 44,848 명에게 어떤 직장이 좋은 직장이냐고 물었습니다. 회사가 어려워도 해고시키지 않고 발버둥치는 회사가 좋은 회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실제로 미국 100대 기업가운데 80개 기업이 아무리 불황이라도 한 명도 해고시키지 않았습니다. 같이 대신 월급을 낮추었습니다. 그런데 한 명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필요하면 불러 쓰다가 필요없으면 해고시키는 것은 편의주의입니다. 하나님은 편의주의를 싫어하십니다.
4. 인본주의
하나님은 인본주의를 정말 싫어하십니다. 인본주의가 무엇입니까? 신본주의에서 벗어난 것이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은 여자는 여자로서, 남자는 남자로서 살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처럼, 남자가 여자처럼 살려는 것이 인본주의입니다.
지난 번 나는 전직 국회위원중에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모임에 가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름만 대면 금방아는 쟁쟁한 분들이 다 늙어서 지팡이를 집고 와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늙으면 저렇구나 하는 측은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젊었을 때 나라를 흔들던 이였습니다. 그 중에 남장을 한 여자 국회위원이 지금도 남장을 그대로 하고 나타났습니다. 넥타이, 신사복 그대로 남자입니다. 왜 이렇게 남장을 하고 다녔느냐고 물었더니 남자들이 하도 깔보아서 남장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늙어서 깔볼 것도, 일할 것도 없이 은퇴하였는 데 왜 지금도 남장을 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버릇이 되어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나는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화장실 갈 때에는 남자 화장실 가십니까? 여자 화장실 가십니까?"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이렇게 입고 여자 화장실에 들어 갔다는 여자들이 기겁을 합니다. 그러나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면 누구도 눈여겨 보지 않고 당연합니다. 그래서 소변기에서 소변을 보는 적은 없지요"
이것은 인본주의입니다.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예 남자가 여자로 성전환 수술한 게이들이 지금 얼마나 많은 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태원에 차를 몰고 가다가 게이 크럽이란 간판을 보았습니다. 남자가 여자로 아예 성전환 수술을 한 이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지난 번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동성 연애자들이 가장 많은 곳입니다. 결혼을 하여 아들 딸을 낳아 대학생까지 잘 기르던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여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성전환 수술을 하겠다고 아내를 설득시켰습니다. 아들을 설득시켰습니다. 그렇게 하여야 자기 인생이 편하겠으니 양해하여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남자이기를 포기하고 호적에 여자로 등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정을 떠나 이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를 떠나 이제는 여성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내와 아들은 그의 행복을 위하여 양해하였지만 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동의서에 싸인을 하지 않아 문제가 되어 있는 가정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하나님은 남자는 남자답게 이마에 땀을 흘리며 열심히 살고, 여자는 가정을 잘 다스리며 자녀를 기르며 여자 답게 살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이것이 신본주의입다.
하나님은 새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새가 영원히 종족을 이어 가기를 원하니다. 그러나 새 집에서 새끼와 어미를 같이 잡아가면 종족이 소멸됩니다. 공룡이 지금 사라져 버렸듯이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것이 신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은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에 뿌려서 같이 농사짓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순수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땅을 갈면 보폭이 달라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끄는 힘이 달라 나란히 갈 수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자와 불신자가 같이 멍에를 메면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고전7;15)
양 털과 베 실을 같이 섞어서 짜게 되면 천이 튼튼하게 보입니다. 양 털로만 옷을 짜면 잘 구겨지고 관리가 힘드니까 약산 베실을 넣어서 짰습니다. 그러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순수한 것입니다. 섞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본주의를 싫어 하십니다.
이같이 본문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네 가지 사상을 지적하여 주고 있습니다.
1. 혼합주의
2. 대형 지향주의
3. 편의주의
4. 인본주의
이 네 가지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사상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어느 교회에 너무나 진실하게 그리고 충성스럽게 사는 자매 한 분이 있었습니다. 말도 없이 자기 할 일에 언제나 충성하는 모습에 모든 교인들은 그를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목사의 눈이나 장로의 안목이나 교인들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할 일만 충성스럽게 하는 여인이었습니다. 한번은 목사님이 그렇게 말없이 충성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자매는 처음으로 입을 열어 사연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예.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 저희 집은 도저히 나를 기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를 광주리에 담아서 근처에서 가정 부잣집 대문 앞에 나를 버렸습니다. 부잣집에서 나를 보지 못 하고 지나 가던 사람 하나가 나를 데려다가 길렀습니다. 그 때 나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술고래였습니다. 알콜중독자였습니다.집안이 술로 기우러 버렸습니다. 내가 14살되던 어느 날 아버지는 나를 창녀굴에 팔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또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더욱 더 심한 알콜 중독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나도 뭇 남자들에게 시달리다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사창가를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생명을 걸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착하고 좋은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오랫만에 맛보는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걸어가는 데 길가에 있는 교회로부터 찬송가 소리가 들렸습니다.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워 정처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이제 내게 오셔서 쉬떠나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예수 에수 내 주여 섭섭하여 울 때에 눈물 씻어 주시고 나를 위로 하소서
예수 예수 내 주여 이제 내게 오셔서 쉬떠나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나는 나도 모르게 교회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들어섰을 때 3절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나도 같이 따라 불렀습니다.
'다니다가 쉴 때에 쓸쓸한 곳 만나도 홀로 있게 마시고 주여 보호하소서
예수 예수 내 주여 이제 내게 오셔서 쉬떠나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어느 덧 내 몸을 교회 뒷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설교를 들었습니다. 늘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내게 예수님만이 내 죄를 사하여 주실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만이 나의 위로가 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무거운 짐을 덜어 주실 분은 오직 예수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증오와 미움이 이글거리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참으로 복된 소식이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내 마음에 다시 모셨습니다. 평화가 깃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신 후로 내 마음은 늘 기쁘고 안정되고 축복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 말없이 충성하기로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순수한 신본주의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난간을 세우라
신 22:8 / 피영민 목사
신명기를 보면 우리 삶의 세세한 규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십계명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입니다. 신명기 22장 8절은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제 6계명을 구체화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농사도 짓고 자기 집을 짓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자기가 설계한 자기 집을 지어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집 한 채를 건축하더라도 제 멋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계명을 존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집을 지을 때는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서 사람이 떨어져 다치는 일이 없게 하고, 만약 자기 집 지붕에 난간이 없어서 사람이 떨어져서 다치거나 목숨을 잃게 된다면 그 피 흘린 죄는 실수해서 떨어진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난간을 만들지 않은 집주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붕은 한국의 기와지붕이나 초가지붕처럼 곡선이 있는 지붕이 아니라 평평한 지붕입니다. 지붕이 평평하기 때문에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중요한 생활공간이 됩니다. 낮에는 지붕에 올라가서 모임도 갖고, 때로는 아이들이 지붕에 올라가서 운동도 합니다. 또 밤에는 지붕에 올라가서 별을 바라보며 잠을 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삶의 일부인 지붕에 난간이 없다면 아이들이 놀다가 떨어질 수도 있고, 어른들이라도 발을 헛디뎌서 큰 사고를 당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집을 지을 때에는 거실이나 침실, 부엌과 같은 안전한 곳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언제나 위험요소를 안고 있는 지붕에 더 큰 신경을 쓰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붕에 난간이 없다면 마음이 매우 불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압 평야에 모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세심한 규례를 미리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준비성이 많으시며 미리미리 교육하시는 자상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늘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에 인류는 마치 어머니가 없는 존재인 양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아버지 같은 엄격함과 동시에 어머니 같은 자상함과 세심함을 지닌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명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버지 같은 하나님보다는 자상하시고 세심하게 돌보시며 걱정하시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에 살다가 슬픔과 고통을 겪고 방황하게 되면 보통 우리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슬픔과 외로움과 고통이 있으시다면 어머니 품 같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기도하시고 위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규례에 나타난 세 원리
본문의 규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분명한 세 가지 원리가 나타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생명을 신성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고 신성합니다. 지붕에 난간을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는 사람이 지붕에 올라갔다가 난간이 없어서 고귀한 생명을 잃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의 생명이 고귀하지 않다면 굳이 지붕에 난간을 만들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제 6계명을 제정하셔서 사람의 생명을 신성하고 존귀한 것으로 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비인간적인 이기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집을 건축하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내가 내 돈 가지고 내 집 건축하는데 누가 참견할 수 있어? 난간은 만들고 싶으면 만들고, 만들기 싫으면 관두는 것도 내 맘이지. 난간 만들 돈이 있으면 지붕을 더 아름답게 꾸며서 식사도 하고 쉴 수도 있는 공간으로 활용 하는 것이 낫지. 나는 지붕에 올라가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니 상관없어. 또 친구나 이웃을 초청할 일도 없고 혹 저희가 와서 떨어져도 자기 책임이지 내 책임은 아니거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 혼자만 살 생각으로 집을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집을 짓고 어떻게 자기 혼자 살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죽거나 집을 팔면 다른 사람들이 그 집에 살게 될 것이고, 만약에 이웃을 초청하면 이웃과 함께 집을 사용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집은 내가 지을지라도 공공성을 가집니다.
우리들은 비인간적인 이기심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먹어도 나 혼자 먹고, 살아도 나 혼자 살고, 놀아도 나 혼자 논다’는 고립주의적 이기심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이 아닙니다.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사람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만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인간은 다른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책임은 안고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집 지붕에 올라갔다가 난간이 없어서 떨어져 죽으면 피 흘린 죄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생명에 책임을 지고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아폴로 눈병에 걸렸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사람이 눈을 비빈 손으로 아무거나 만져서 다른 사람에게 아폴로 눈병을 퍼뜨린다면 이는 잘못된 행동입니다. 자신에게 남의 생명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건강관리를 하고 병을 옮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내 생명이나 남의 생명이나 모두 신성하고 존귀한 것이며, 인간은 자기 생명만 귀중히 여겨서는 안 되고 무한 책임은 질 수 없지만 남의 생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난간 규례의 원리입니다. 폭탄으로 비행기를 테러해서 그 비행기에 탄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모두 죽여 버리겠다는 테러범들은 하나님의 난간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려는 사람들입니다. 몸에 해로운 첨가물을 음식에 넣어서 판매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난간을 무너뜨리고 6계명을 파괴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약간의 사행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사행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유행하는 게임이 고스톱이라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행심이 지붕 안에 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난간을 넘어서 요즘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바다이야기’까지 가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바다이야기는 국가가 국민의 사행심을 조장해서 결국 난간을 넘어버리고 만 경우입니다. 바다이야기를 통해 많은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어떤 사람은 바다이야기로 도박을 하다가 빚이 일억이 되자 이 일로 부부싸움을 하는 중에 그만 홧김에 아내를 살해하는 비참한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 지붕에 난간을 세우지 않아서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정부는 약간의 행정실수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난간을 만들지 않은 이 사회는 결국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붕을 만들면 반드시 난간을 세우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마음속에 새겨서 그 성품을 이루어가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2. 영혼의 생명을 위한 난간
사람의 생명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헬라어로 비오스(bios)라고 하는 육체의 생명은 70년, 혹은 80년 정도 지속됩니다. 그러나 80년이 넘어가면 누구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반드시 끝날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육체의 생명뿐만 아니라 영혼의 생명도 있습니다. 영혼의 생명은 헬라어로 조에(zoe)라고 합니다. 영혼의 생명은 영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육체의 생명과 영혼의 생명 두 가지 모두를 가지게 됩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육체의 생명은 가지고 있지만 영혼의 생명은 소유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신자와 불신자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주신 이유는 단지 윤리적으로 바르고 착하게 살라는 교훈 이상의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인 영혼의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귀한 육체의 생명을 위해 난간을 세우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생명도 고귀하기 때문에 영혼을 위한 여러 가지 난간도 세워주셨습니다.
첫째로 기독교 교리를 공부할 때에 우리는 갖가지 떨어질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정론’을 생각해봅시다. 예정론이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구원받을 영혼들을 미리 사랑하시고 택하여 예정하셨고, 미리 예정하신 영혼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주시고 구원을 주셨다는 교리입니다. 비이성적인 신비한 교리 같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교리입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정론을 믿되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이 예정되었으니 전도할 필요도 없고 선교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유명한 침례교 선교사인 윌리엄 캐리가 1792년에 영국에서 인도 선교사로 파송될 때에 지방회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캐리는 인도에 잃어버린 영혼들이 있으니 우리가 가서 전도해야 된다고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어떤 나이 드신 목사님이 유명한 말씀을 남겼습니다. 이 목사님은 윌리엄 캐리를 향해 “Young man! Sit down!(젊은이. 앉게)”이라고 소리치고는 “인도에 하나님께서 택한 영혼이 있다면 자네가 가지 않아도 저절로 믿게 될 걸세”라고 덧붙였습니다. 이것이 소위 ‘고등칼빈주의’라는 잘못된 신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른 예정론에서 사람들이 엉뚱하게 떨어지지 않도록 난간을 세워두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말씀하셨고,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정된 사람은 전도라는 미련한 방편을 통해서 구원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예정이 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 성도들은 부지런히 전도하고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난간입니다.
또 ‘성도의 견인(堅忍)’을 생각해봅시다. ‘성도의 견인’이란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잃어버릴 수 없다’는 교리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지미 스웨거트 목사가 설교하는 패밀리 워십 센터의 예배에 자주 참석을 했는데, 이 목사님이 ‘성도의 견인’ 교리를 적나라하게 공격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옳은 것이지 그 목사님의 말이 옳은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얻은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요, 한번 얻은 영생은 영원한 영생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옳은 교리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나는 천국 갈 티켓을 따 놨으니 이제부터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천국은 내 것이다’라는 태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혼의 난간을 잃어버리고 지붕에서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은 마음대로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난간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세워두셨습니다.
또한 ‘이신득의(以信得義) 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호리라도 있는 죄인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의인만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의인이 될 수 있을까요? 의롭게 산다고 해서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행위로 의인이 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죄 값을 갚아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는 덮인바 되고 아무리 죄많은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교리가 바로 이신득의의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선행이나 윤리적인 고결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선행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붕에서 떨어진 사람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집을 세우고 야고보는 난간을 세웠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그 결과로서 의로운 선행을 하며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선행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의 어떤 고귀한 교리를 공부할지라도 추락하지 않도록 난간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공부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난간과 함께 공부해서 떨어지는 일이 없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큰 영적인 체험을 하거나 영적인 능력을 얻은 사람이라도 난간을 세워야 합니다. 영계(靈界)의 거성(巨星)이 난간을 세우지 않아서 떨어지는 경우가 한국에도, 미국에도 허다합니다. 역사상 사도 바울만큼 큰 영적인 체험을 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12장 2절을 통해 자신이 셋째 하늘로 이끌려가서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스스로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낙원에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람이 기도하다가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되면 영혼이 쑥 올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만이 시작돼서 다른 사람들을 우습게보기도 합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얼마나 우쭐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난간을 세워주셨습니다. 바울의 육신에 사단의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고후 12:7). 바울이 교만해지려고 하면 가시가 콕콕 찔러서 자신의 교만을 깨닫고 겸손해지게 만드셨습니다. 이와 같은 난간 때문에 바울의 영혼은 지붕에서 떨어지지 아니하고 굳건히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체험을 했을지라도 난간을 세워서 교만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굳건히 세워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사람이 큰 물질을 얻어서 부유해져도 난간을 세우지 않으면 지붕에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릇도 차면 넘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잔에 물이 조금밖에 없으면 흔들어도 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득하면 조금 마셔야 합니다. 흐를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목회하는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평생 땅 가지고 농사 밖에 지을 줄 모르던 사람이 갑자기 행정도시가 들어서게 되어서 땅 값이 올라 졸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걸음이 일자에서 팔자로 바뀌었습니다. 걸음만 바뀐 것이 아니라 조강지처가 못생겨 보이기 시작하니 동네 다방의 아가씨들에게 대우받고 즐기다가 그만 꽃뱀들을 만나서 망신을 당하고 죄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이가난하던 시절에는 마약을 먹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먹고 살만하니까 젊은 사람들 사이에 마약이 만연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가난할 때는 죄 지으려고 해도 돈이 없어서 짓지 못합니다. 그런데 가난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돈이 생겼을 때 난간이 없다면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으로 부요한 사람에게도 난간을 세워주셨습니다. 신명기 8장 18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부자가 되면 “이 능력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말고 기억 해야겠다”고 다짐하십시오. 디모데전서 6장 17-18절에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셔서 물질이 많아졌다면 선한 사업에 부하시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 힘으로 번 건데 왜 내 돈을 그런 곳에 쓰라고 하느냐”고 따지지 마십시오. 그것은 난간에서 떨어지는 일입니다. 선한 사업을 통해 부유해지고 그리고 그것을 나눠주기를 즐기면 그것이 난간이 되어서 그 물질로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책임의 한계
말씀을 마치기 전에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생명의 책임을 지되 무한 책임을 질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라고 명하신 난간은 기대도 쓰러지지 않을 정도의 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난간을 세우라고 하셨지 지붕에 텐트 치고 침실을 만들어서 이웃이 오면 거기서 아예 먹고 쉬고 놀 수 있는 위락시설을 갖추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생명에 우리가 책임을 지기는 하되 무한 책임으로 확대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너는 내 이웃이고 내 형제며 예수 믿는 사람이니 네가 내 인생 전체를 책임지라”고 강요받을 수는 없습니다.
부모도 자식에게 무한대로 책임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책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난간만 세우면 되지 그 이상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습니다. 인생은 각각 책임지는 것입니다. 피를 나눈 형제라도 서로에게 인생을 책임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집주인이 난간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난간을 뛰어넘어 자살했다면 이는 집주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사람의 책임은 난간까지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난간 규례를 두어서 이웃뿐만 아니라 집주인도 보호하십니다
결 론
삶의 모든 영역에는 난간이 존재합니다. 넘지 못하도록 막기도 하고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기도 하는 난간입니다. 가정생활에도 난간이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가정의 난간을 세워야 합니다. “주일에는 어떤일이 있어도 예배를 드려라. 십일조 생활은 온 가족이 모두 해야 한다. 하루에 30분 이상은 온 가족이 모두 기도해야 한다. 성경은 언제나 가지고 다니면서 하루에 세장 이상은 읽어야 한다.” 이것이 가정을 유지시키는 난간입니다. 가정에 영적인 난간이 없으면 자녀들의 신앙이 엉망이 되어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교회생활에도 난간을 세워서 교만한 마음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사회생활에도 난간을 세워서 지켜야 할 마지노선을 넘지 말아야 합니다.
세워야 할 난간을 넘어가면 남도 다치고 나에게도 죄가 오게 됩니다. 영어로 죄를 표현할 때는 ‘sin’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지만 ‘trespass’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trespass’는 ‘경계선을 넘어버렸다. 세워놓은 난간을 넘어버렸다’는 의미입니다. 난간을 넘어가는 것은 죄입니다. 여러분의 영혼과 가정생활, 사회생활과 신앙생활의 난간을 다시 한 번 점검하시고 든든하게 세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혼합주의를 경계하라
신명기 22:1-12 / 코너스톤 장로교회
제가 다닌 대학교의 교내식당 게시판에는 이따금씩 돈이 붙어 있곤 했습니다. “000에서 돈 잃어버리신 분 가져가세요.”라는 글 밑에는 천원, 오천원, 심지어 만원도 붙어 있던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며 제가 다니는 대학교 학생들이 참 양심적인 공동체라는 사실에 자부심도 느끼고 크게 감격했습니다. 정직하게 생활하고 이웃끼리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 속에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이고 축복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진리의 하나님이시며, 거짓을 미워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의 성품에 따라 정직한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한 번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해봅시다. 어느 날 창 밖을 보니 우리 집 대문 앞에 웬 소 한 마리가 서 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소의 가치는 엄청납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집 대문 앞에 소가 서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돈 보따리를 놓고 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분명 주인 몰래 도망친 소이거나, 주인이 잃어버린 소입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무도 본 사람도 없고, 이처럼 소가 우리집 대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며 속으로 말하기를, ‘이게 웬 횡재냐? 이것도 다 하나님 뜻이다’하고 소를 내 소유물로 삼으면 될까요? 아니죠.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이웃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또는 내가 소의 주인을 알고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저 소 저기 사는 김집사네 소구만. 지난 달에 김집사가 교회에서 나에게 서운하게 한 게 있으니. 어디 한 번 소 잃고 마음 고생 좀 해보라.’하고 마음먹는다면 그 역시 하나님께서 기쁘게 보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이 아니라 미움에서 우러난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길을 잃은 소나 양을 보거든 다시 그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22장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신 22:1) 네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본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신 22:2)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네가 혹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릴지니” 혹시 지금 당장 주인을 찾아주지 못할만큼 멀리 살거나, 아니면 내가 주인을 모르는 경우라면 소와 양을 잘 돌보아 주다가 주인이 오면 그에게 다시 주라고 하셨습니다. 소나 양 뿐만 아니라 나귀나 옷이나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이 잃어버린 것은 우리가 몰래 갖거나 못 본 척하지 말고 반드시 그 이웃에게 다시 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어떠한 금전적 유익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남의 소와 양 챙겨주느라 수고롭고 번거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이 정직하게 이웃을 돕는 것이 올바른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갈 삶의 양식임을 가르치셨습니다.
5절에는 옷 입는 규례에 대한 말씀입니다. “(신 22:5)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하나님께서는 남자가 여자 옷 입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또한 반대로 여자가 남자의 옷을 입는 것도 금지하셨습니다. 이 당시 이교의 문화에서 여자가 임신하기 위해서 남자의 옷을 입는 종교적 미신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남자가 여자의 옷을 입거나 여자가 남자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성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하게 됩니다. 오늘날 남자가 여자와 같이, 또는 여자가 남자처럼 사는 왜곡된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정상적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성정체성을 왜곡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가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을 통해 남녀가 서로 구별되게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창조 질서를 무시하는 경우, 죄의 영향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주신 성정체성이 망가지고 깨진 인간의 모습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옷을 입는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6-7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과 생명에 대한 자비심과 동정심을 갖도록 교훈하신 규례입니다. “(신 22:6)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신 22:7)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가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규례의 내용은 어미 새와 그가 낳은 새끼나 알을 동시에 잡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명령은 또한 약자에 대한 무자비한 행위를 금지하고 계신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새를 잡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미 새도 잡고, 새끼새도 잡으면 더 좋습니다. 팔면 더 큰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할 때 동정심을 가지고 자비를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복을 누리게 하시고 장수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새 한 마리 더 잡는 것이 얼마나 대수로운 일이라고 하나님께서 성경에까지 기록하셔야 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같이 작고 연약한 생명을 대하는 대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생명을 경시해서는 안되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과 세상을 아끼고 사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생명존중사상이 8절에도 이어집니다. “(신 22:8) 네가 새 집을 건축할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 흐른 죄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팔레스타인 지역의 집 지붕은 평평하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지역 사람들에게 지붕은 취침 장소나 휴식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지붕에 올라갈 수 있었기에 지붕 아래로 떨어질 위험성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을 방지할 수 있도록 난간을 만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명령에도 생명을 존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가 있습니다.
9-12절 말씀은 씨를 뿌릴 때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포도원에 씨를 뿌릴 때, 두 종자를 섞어 뿌려서는 안 됩니다. 밭을 갈 때 소와 나귀를 함께 멍에를 씌워 밭을 갈게 해서도 안 됩니다. 옷을 짤 때도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옷을 입어도 안 됩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보면 잘 이해되지 않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고구마도 호박과 교접해서 만든 호박고구마 먹습니다. 일반 고구마보다 당도도 높고 수분이 많아 부드러워 찾는 이가 많습니다. 고추는 피망과 풋고추를 결합해 만든 ‘오이고추’가 있습니다. 맵지 않고 아삭하고 시원해서 인기가 많습니다. 토마토도 대추방울토마토가 있습니다. 일반토마토보다 육질이 다단하고 덜 물러, 먹는 느낌이 좋아 보관하기 좋습니다. 이런 개량된 품종을 먹는 현대인 입장에서는 이런 말씀 보면 고개가 기우뚱거립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들도 순수 면이 아닙니다. 폴리에스터라 불리는 합성 섬유로 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럼 신명기 말씀에 따라서 이런 옷 입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합성 섬유로 된 옷 입으면 죄를 짓는 것이고 부정해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세상의 것과 섞임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잃어버리는 삶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과 죄와 타협하여 살아가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고 행동의 원칙 역시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위 아니면 아래, 오른쪽 아니면 왼쪽 이렇게 세상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섞여 살아가는 삶을 경계하십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12절에 “(신 22:12) 입는 겉 옷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술(tassel)을 단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임을 알 수 있게 만드는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살 것이며, 그 앞에서 거룩하게 살 것을 다짐하며 기억하기 위한 장치가 바로 옷에 달려 있는 ‘술’의 의미입니다. 옷에 달린 술을 볼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기억하며 살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쌓으려 살아가지만,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과 세상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방식과 방법대로 거룩하고, 정직하고, 순결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복음으로 주의 나라에 거하며 세상의 문화에서 벗어나 하늘의 소망으로 사는 자 되게 하소서
신 22:1-12
주님, 주의 은혜를 힘입어 새로운 하루를 시작합니다.
주어진 하루의 삶을 성실하게 살기를 원하며 주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내 안의 죄와 부정함으로 더러워진 마음과 영혼을 주의 보혈로 정결하게 씻어 주옵소서.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주 안에서 얻는 기쁨으로 채워 주옵소서.
세상의 것으로 배부른 삶이 아닌 주의 은혜로 만족하는 삶으로 이끌어 주옵소서.
날마다 연약함을 경험하기에 오직 주의 은혜로 강건한 자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함께 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이웃의 소나 양이 길을 잃은 것을 보면 못 본체 하지 말고 그 소나 양을 주인에게 찾아 줄 것을 명령하신다.
그리고 형제가 멀리 떨어져 있거나 주인을 알지 못하는 경우에는 소나 양을 찾아오기까지 집에 두었다가 찾아오면 돌려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소나 양에 국한되지 않고 나귀나 옷이나 이웃의 모든 소유에 대해 동일하게 행동하라고 말씀하시고 형제의 가축이 길에 넘어지면 그 형제를 도와 일으켜줄 것을 명령하신다.
이는 이웃을 향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대우할 것을 명령하는 것이며 선을 행할 것을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은 죄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계신다.
이어서 여자가 남자의 의복을 입거나 남자가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성의 개념을 파괴시키는 일을 하지 않도록 명령하시고 이를 가증한 일로 규정하신다.
또한 길을 가다가 새의 둥지를 보게 되면 새끼는 취할 수 있으나 어미 새가 다시 알을 낳을 수 있도록 어미 새는 잡지 말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생태계 보존을 위한 가르침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새 집을 건축할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서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명령하시면서 이것이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해서 그 피가 자기에게 돌아가지 않게 할 것을 말씀하신다.
또한 포도원에 두 종자를 함께 뿌려 자라게 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데 이는 애굽의 풍습을 의미하며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고 모든 소산을 빼앗기게 됨을 경고하신다.
그리고 소와 나귀를 함께 사용하여 밭을 갈지 말라는 것은 가나안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는 의미하며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는 것도 애굽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는 명령이다.
또한 입는 겉옷의 4군데에 장식을 달아서 가나안 사람들과 옷을 구별되게 하라는 명령으로 당시 가나안과 애굽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도록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나의 묵상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철저하게 가나안의 문화와 애굽의 문화에서 벗어나도록 명령하심으로써 구별된 삶을 살아가도록 지도하신다.
형제의 소유에 대해 탐내지 않고 오히려 형제를 사랑함으로 그의 소유를 지켜주고 기꺼이 희생하게 하심으로써 일반 사람들의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도록 지도하신다.
또한 일상생활에서도 옷을 입는 것과 파종을 하는 것, 새를 잡는 것까지 세밀하게 지시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구별된 삶을 살도록 명령하신다.
세상의 문화로 언급하시는 애굽과 가나안의 문화는 죄의 노예로 살아가는 문화요 오직 육체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문화임을 보여주며 땅에서 추구하는 문화임을 드러내신다.
이와는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구하는 문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문화이며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언약을 기대하는 문화임을 드러내신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도 땅에서 얻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과 하늘의 본향을 향해 나아간 조상이었음을 선포한다.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11:8~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별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구별되어 살아가는 것을 세상이 보고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며 이를 위해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구별되어 살아가며 세상과 다른 것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드러내는 사명을 가진 자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구별이 구시대적인 발상이며 사람의 자유를 제하는 것으로 여겨 무시하고 구분하지 않으며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자유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세상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시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성령의 은혜를 베푸신다.
세상에서 얻을 것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 구별된 삶의 모습을 보여줄 때 세상은 땅이 아닌 하늘의 하나님을 찾고자 돌이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라는 사실을 가르치신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4장 17절에서 분명하게 선포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이는 하나님이 구별하신 것을 알고도 그것을 구별하지 않고 무시하며 똑같이 여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임을 가르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남녀를 구별하신 것을 무시하는 것도 죄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의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고 동화되어 똑같이 살아가는 것도 죄라는 사실을 드러내신다.
성도의 구별됨은 외형적 모습과 종교적 행위로 구별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며 땅이 아닌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될 것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나타난다.
무엇보다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얻는 삶을 살아가며 하늘의 것을 소개함으로써 다른 자들도 하늘의 소망을 가지도록 도와주는 자님을 보여준다.
땅의 것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얻고자 하던 삶에서 돌이켜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삶으로 만족을 삼고 사는 것이 진정한 성도의 능력이며 삶의 모습임을 고백하게 하신다.
오늘도 하늘의 소망을 주시고 복음을 통해 그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하늘의 소망을 전하는 자로 설 수 있기를 기도한다.
묵상 기도
주님, 성도의 구별됨은 세상의 문화와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나타나며 하늘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삶을 통해 증거 됨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세상과 동화되는 모습을 가지고 살아갈 때가 많으며 주의 나라에서 얻는 것으로 소망을 삼고 사는 모습이 너무나 빈약함을 고백합니다.
어리석고 욕심 많은 자의 죄와 부정함을 주의 보혈로 씻으시고 정결하게 하옵소서.
세상에 미련을 둔 자의 삶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둔 자의 삶을 살게 하시고 날마다 주의 복음으로 주의 나라에 들어가 그 안에서 얻는 기쁨과 소망으로 사는 자 되게 하옵소서.
또한 세상과 다른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며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의 말씀을 따라 주 안에 거함으로써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자 되게 하옵소서.
함께 하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웃사랑의 근본 마음
신명기 22:1-12 / 조약돌묵상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에 지켜야 할 사항으로,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이웃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입니다. 두 번째는 창조질서에 대한 지침으로, 사람은 물론 자연계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번째는 생명 존중에 대한 지침으로 사람은 물론 동식물 전체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고대 농경사회에 있어서 가축은 귀한 재산이며 또한 생계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이에 이웃끼리는 이 동물들을 서로 보호해 주어야 하며 아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의 소나 양이 길을 잃어 헤매는 것을 발견할 경우 주인인 이웃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나귀나 겉옷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사랑하는 대상의 범위도 확대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새 둥지에서 어미가 알이나 새끼를 품고 있는 것을 발견할 시 새끼나 어미를 동시에 취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어미는 놓아주어야 합니다. 이는 어미를 존중해 주는 차원이며 동시에 생명존중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새 집을 지을 때 지붕 주변에 난간을 만들어 일꾼을 보호하는 것은 생명존중에 있어서 말할 것도 없습니다.
포도원에 두 가지 씨를 뿌리면 두 열매가 모두 풍성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두 열매 모두 부실합니다. 소나 나귀를 한 멍에에 매어 밭을 갈 경우 일의 능률이 오르기는 커녕 저조합니다. 보폭과 힘이 다르기 때문이며 결과적으로 갈아 놓는 밭의 면적은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성의 남자 옷 착용, 남성의 여자 옷 착용에 대한 금지입니다. 그것의 근거는 ‘이런 짓 하는 사람을 여호와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신다’입니다. 가나안 제사장들은 간혹 옷을 바꾸어 입고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옷과 성별을 달리함으로써 신의 완전함을 표현하려는 발상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창조의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행동을 악하게 보았기 때문에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을 금지시키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이방종교와 혼합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앙의 순수성 즉, 순결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한 밭에 한 씨앗입니다. 멍에는 한 가축에게 매어져야 합니다. 메리노는 양모로, 뵈웃은 베로 짜여야 합니다. 여호와 신앙과 이방 종교는 혼합되어서는 안 됩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혼합되면 영적인 성결을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공동체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원형대로 유지시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 그리스도인들에게 여과 없이 전해지는 메시지입니다. 성도들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혼합되고 타협되는 것을 증오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순결을 원형 그대로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 이웃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있으면 행동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웃사랑의 근본마음은 배려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며, 상대방이 되어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배려하는 마음은 이웃의 대상범위를 짐승까지도 확장시킵니다. 배려하는 마음은 부부관계에 있어서 기초를 이룹니다. 이웃을 사랑하자는 뜻으로 큰 이벤트를 벌이는 것도 이웃사랑이 될 수 있지만, 배려하는 마음만 있어도 훌륭한 이웃사랑이 됩니다.
주차 선에 맞게 주차하는 것이나 부득이 중앙에 차를 둘 때 핸들을 풀어주는 것 역시 좋은 배려의 마음입니다 통행인을 위하여 사이드 밀러를 접어주는 것은 물론입니다. 도시생활에 있어서 공중도덕을 지키는 것 이웃사랑의 좋은 예입니다. 농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의 휴식을 위하여 일찍 현관 등을 꺼주거나 귀농한 이웃에게 농사 짓는 시범을 보인다면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이웃사랑이 됩니다. 배려하는 마음만 있으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따뜻한 마음입니다.
일상 속의 그리스도인
신 22:1-12
1. 소소한 일상
제럴드 싯처가 쓴 “하나님의 인도”라는 책에는 이런 예화가 나옵니다.
유명한 부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돈을 벌어 다른 사람에게 위세를 부리며 살았다. 당연히 그의 신앙생활이란 별 볼일 없었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행에 옮길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성공하여 명성을 얻은 지 오랜 후 그는 유명한 성자가 살고 있다는 어느 먼 도시로 신앙의 순례를 떠나기로 했다.
부자는 그 사람을 만나 자기가 하나님과 교회에 바칠 수 있는 특별한 봉사 행위가 무엇인지 듣고 싶었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떠나는 날이 되자 기차역은 그를 배웅하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들은 그의 업적에 감탄하여 서 있었다. 그가 개인용 특실을 거부하고 일반 차량에 올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앉기로 하자 사람들은 더욱 놀라움을 금지 못했다. 그는 단 하나 남은 자리에 앉았다. 우연히도 한 시골 노인의 옆 자리였다. 노인도 순례의 길을 가는 듯했다. 부자는 온종일 노인에게 자신의 삶과 업적과 권세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그는 비천한 농부와 쉽게 대호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존경받는 성자를 만나로 순례를 가는 길입니다. 그 분은 내가 교회를 위해 해야 할 특별한 봉사 행위를 말해줄 것입니다.”
기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바깥에 커다란 인파가 기다리고 있었다. 부자는 자기가 순례에 올랐다는 애기가 그곳까지 퍼진 줄 알고, 다른 승객이 먼저 내리도록 잠자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부자는 그것을 자기가 나타날 때 벌어질 일대 혼란의 전주곡 정도로 생각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련된 옷차림을 다시 확인한 후 양 팔을 들고서 천천히 기차 문으로 걸어갔다. 그 다음 광경은 충격이었다.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군중은 다른 사람을 보려고 아우성치면서 앞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그는 굴욕감을 느꼈다. 당연히 그는 군중이 따르고 있는 대상이 누군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급히 달려가 사람들을 따라잡았다. “저 분이 누구요?” 하고 묻자 그중 한 사람이 흥분하여 헐떡이며 말했다. “성자입니다”부자는 무리를 밀어젖히고 가운데로 파고들어 결국 성자 바로 뒤에 서게 되었다. 성자가 돌아서자 그는 소스라쳐 놀랐다. 기차에서 자기 옆에 앉았던 그 노인, 잘난 척 으스대던 자신의 애기를 다 들어주던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부자는 무릎 꿇고 물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그러자 성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가 가난한 자들을 섬기십시오.”
사실 이 부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굳이 순례의 길을 나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가 먼 도시까지 간 것은 뭔가 특별한 봉사 활동을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렇잖아도 잔뜩 부풀어 있던 자아를 더 부풀게 해줄 그런 일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겸손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귀 기울였다면 그는 자기가 살던 바로 그 곳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의 평범한 삶,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 일상적인 일을 성실하게 순종해 나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섬김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자녀로 신실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거창하게 하고 싶어 하는 큰 일이 아니라 날마다 해야만 하는 작은 일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날마다 성경 묵상의 삶을 게을리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하고 연습하고 날마다 묵상하고, 예배하는 평범한 삶에 들이는 노력과 성실성입니다. 이런 작은 일들을 감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침 레위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마흔 째 해, 마흔째 해 열한째 달 첫째 날에 모세가 선포한 설교입니다. 레위기는 레위기 26:46절에 의하면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모세를 통하여 세우신 규례와 법도와 율법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9:1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이른 것은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입니다. 그러니까 레위기는 출애굽한지 삼 개월이 지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시며 주신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매뉴얼입니다.
레위기의 주제 성구는 11:44-45절입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생활이라는 것이 11장에서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식생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12장에서는 아이를 출산한 여인이 정결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리고 13-14장까지는 악성 피부병이 차라아트가 피부에 수염에, 이마에 옷에 그리고 심지어는 집에 발생한 경우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5장에서는 몸에 유출병이 있는 문제를 다룹니다. 여기까지 읽다보면 참 허탈한 생각이 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활 속에서 건강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한 매뉴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먹고 입고 살아가는 삶에서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룩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이 알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를 판결하실 때 선교사를 몇 명이나 파송했느냐, 교회를 얼마나 개척했느냐고 묻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합니다. 주님이 무슨 업적을 남겼느냐? 노예를 해방했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다만 이웃에게 어떻게 사랑을 베풀고 살았느냐를 물으십니다. 고아와 과부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고 섬긴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선교와 교회 개척과 사회적인 이슈들이 필요치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일의 출발은 결국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기본에 충실한 그리스도인이 사회적인 큰일도 해야 부작용이 없는 법입니다.
신명기는 풍요의 광야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관점에서 쓰인 법전입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사회를 이루고 살아갈 것인가를 다루는 사회 법전인 21-25장까지를 보면 참으로 소소한 것들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것을 요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1장은 죽인 자를 알지 못할 때 공동체적인 책임을 지고 하나님의 기업의 땅을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전쟁에 나간 군인이 아리따운 포로를 보고 아내를 삼는 경우와 두 아내로 인한 가정 파괴, 연이어 파괴된 가정의 패역한 아들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더니 오늘 22장에서는 정말 소소한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요? 레위기와 신명기를 읽으면서 어쩌면 우리는 진정한 거룩의 의미를 놓치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일단 함께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소소한 일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기
1)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12절)
우선 12절에서 시작하는 것이 옳다고 느껴집니다.
12절에서 겉옷 네 귀에 술을 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옷을 입음으로 구별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겉옷에 다는 술은 그 옷을 입은 자가 이스라엘 사람임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할뿐만 아니 라 그 술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생각나게 하여 스스로 이방인과는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민수기 15:37-4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그럽니다.
그러니까 술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술을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도록 하는 표지판 역할, 다시 기억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방종하게 행동하려는 자신을 붙잡아 마음과 눈과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는 역을을 무엇이 합니까? 바로 옷에 달린 술이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장치는 계명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만약 이 말씀을 신약적인 표현으로 바꾼다면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것이 될 것입니다. 즉 거룩한 신분의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신분의식을 가지고 살라는 무거운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런 신분의식이 이웃 사랑과 질서와 배려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2) 형제의 소나 양이(1-4절)
자, 그럼 이렇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첫 번째 삶은 무엇입니까? 이웃의 어려움을 못 본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는 막연한 이웃을 말합니다. 피를 나눈 형제로서의 형제라기보다는 불특정한 이웃을 지칭하는 말인 것입니다. 2절 말씀에 의하면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그럽니다.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도 형제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라는 말의 의미심장한 면입니다. 어디 가서 모르는 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기는 합니다. 아무튼 제사장 나라의 백성은 모두가 형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3절에 의하면 나귀라도, 의복이라도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렇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주인 찾아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복되는 단어는 “못 본 체 하지 말고 반드시”입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스스로 숨지 말고'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곳으로부터 몸을 돌리거나', '주의해서 보려고 하지 않거나 관계를 끊지 말고'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형제의 재산 손실에 대해 무관심한 채 피하거나,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경우에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율법에 규정된 규례를 어기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보다 적극적인 선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계명을 하나로 요약하면 사랑입니다. 둘로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에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이웃 사랑입니까? 오늘 본문에는 이웃이 당한 어려움을 못 본체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더 나아가 이웃이 잃어버린 것을 내 것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생각에 이런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공돈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버스 정류장에 조그만 가방이 놓였습니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찌할까 망설이다 내 쇼핑백에 넣었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며 슬쩍 열어 보니 시퍼런 지폐가 수북했습니다.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누가 지켜보는 것 같아 자꾸 주변을 돌아보았습니다.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어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오자마자 세어 보니 무려 사십칠만 원, 고무도장과 주민 등록증도 있었습니다.
공돈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막 수능을 끝낸 아들과 외식할까, 옷 한 번 사 입을까, 주민등록증만 우체통에 넣을까,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얼마 뒤 남편과 아들이 왔습니다. 입이 간지러워 저녁은 먹는 둥 마는 둥하다가 기어이 “나 오늘 공동 생겼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경찰서에 갖다 주세요.”하고 남편은 “주민 등록증도 있으니 찾아 주면 되겠네.”하는 게 아닙니까. 몇 시간 고민한 나를 맥이 탁 풀렸습니다. 미련이 남아 잠자리에 누워서도 뒤척이자 남편은 “애 시험 발표도 있는데 나쁜 생각하지 마.”하고 쐐기를 박았습니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고무도장에 찍힌 상호로 전화했습니다. 주인은 깔끔한 중년 신사였습니다. 돈은 기대도 안 했는지 가방을 열어보곤 깜짝 놀랐습니다. 마음도 고운데 미인이라는 등 찬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천사입니다.”하며 어찌나 감격해 하는지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돋을 듯 간지러웠습니다. 그는 서울 오면 꼭 연락하라며 명함과 사례금 사만 원을 주었습니다. 공돈은 날아갔지만 가족의 정직함과 기쁨을 누린 날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우리네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소소한 욕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무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이 여성이 겪었던 갈등을 느꼈을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소소한 일들의 연장선상이고 그런 일상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결정을 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바로 이런 상황에 이웃 사랑이라는 것이 갈등할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거룩은 엄청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며 이웃 사랑이 무슨 엄청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의 상황을 못 본 체 외면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도움을 베풀며 사는 것이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우리가 베푸는 작은 친절이 곧 이웃 사랑이며 그리스도인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입니다. 넘어진 사람을 돕고 길 잃은 가축을 돌려보내 주고 내 것으로 취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그가 바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2) 질서(5, 9-11, 12절)
가증하다는 말은 구토가 난다는 의미입니다. 가증하다는 표현은 토에바(hb'[e/)로 혐오스럽고 구토가 나고 하나님이 몹시 싫어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주로 이방인의 풍습이나 우상 숭배와 관련하여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남녀가 옷을 바꿔 입는 행위는 이방인의 풍습에서 나온 것으로 우상 숭배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자가 여자 옷을 입고 여자가 남자 옷을 입는 것에 대해 이렇게 과격한 표현을 쓰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가증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두 측면은 질서의 창조와 채움의 창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사시와 연한과 남자와 여자와 각기 종류대로 지으신 것들입니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이런 의복을 바꾸어 입는 일은 단순히 의복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성의 질서를 깨트리고 나아가 방종과 타락으로 인도하게 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남자의 옷이라는 말은 '케리'(yliK)로 단순히 옷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도구나 장비, 심지어는 무기나 장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장식품이나 보석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여자의 의복' 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씸라(hl;m]ci)로 망토나 외투, 나아가서는 몸에 두르는 온갖 옷들을 모두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특별히 남성과 여성의 의상에 국한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의복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쳐 상대의 외형과 역할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성을 감사히 여기고 그 존엄성을 충분히 인식하며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옷은 단순히 그냥 옷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에서 사용된 남자 의복과 여자 의복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들이 이교도들의 문화를 본받는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옷 입은 것에도 그리스도인다운 것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 10:23절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음식에 관한 문맥에서 말씀했지만 충분히 모든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런 질서의 측면은 포도원에 두 종자를 뿌리지 말고. 양털과 베실을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9, 11절)는 말씀에서 이어집니다. 이 말씀들은 비유라고 보아야 합니다. 즉 이방의 혼합 주의를 경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잘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10절에서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소와 나귀는 팔레스틴에서 농사를 지을 때 아주 요긴한 짐승들입니다. 그러나 두 짐승은 보폭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같이 멍에를 메어 밭을 갈 수 없습니다. 이 말씀 역시 비유입니다. 함께 할 수 없는 것을 함께 하도록 묶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의 배후에는 세상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백성들이 사소한 삶의 영역에서도 거룩을 유지하고 질서를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속화 되는 것은 늘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간략하게 언급된 구절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관련된 질서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옷은 단순히 옷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했어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깨트리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남자는 남자의 옷을 입고 여자는 여자의 옷을 입되 하나님의 백성다운 옷을 입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들을 읽다보면 신앙생활이 무슨 특별한 일이나 거창한 선교를 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레위기에서도 옷을 깨끗하게 입는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신명기는 그리스도인다운 옷을 입으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흐트러트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죽는다고 쓰여 있습니까? 아닙니다. 다만 가증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 배려(6-7, 8절)
하나님께서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철저하게 훈련시킨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용할 양식으로 사는 훈련입니다. 가끔 신문에서 보면 치어들까지 싹쓸이를 해가서 어종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인간의 탐욕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이 땅은 우리 후손들이 살아야 하고, 그 후손의 후손들이 살아야 할 터전입니다. 그런데 나만 살면 된다고 더럽히고 함부로 쓰면 후손들이 그 값을 치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아끼고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후대에 물려주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길을 가다가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 새가 그의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보거든 그 어미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되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싹쓸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착취하고 황폐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미 새가 더 새끼를 낳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복을 누리는 당사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입니다.
가끔 사진 촬영을 하다보면 기막힌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자신만 촬영한 후 꽃을 무자비하게 꺾어 버리고 짓밟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사진을 담는데 방해가 된다고 수백 년 된 소나무를 잘라 버립니다. 전부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
배려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내가 잘못 살아온 삶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과도하게 욕심을 내지 말고 남겨두어야 합니다.
난간을 만들라는 말씀 또한 배려입니다.
여기서 '난간'은 '보호대', '기둥'을 의미합니다. 팔레스틴의 가옥 형태를 보면 대개 그 지붕이 평평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때문에 난간을 설치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휴식이나, 취침, 기도를 위해 지붕을 왕래할 때 자칫 떨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난간을 만드는 일은 나와 이웃을 위한 배려인 것입니다. 참 하나님은 별 것을 다 하라고 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소한 일상들을 전부 말씀하다가는 성경이 얼마나 두꺼워져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렇게 소소한 것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즉 거룩한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소소한 일상에서 배려와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작은 질서들을 지켜 나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생각이 문제
여러분! 처음 특별한 봉사를 찾았던 어리석은 부자가 혹시 우리의 모습일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교회 봉사도 뭔가 특별하고 사람들 눈에 뜨이는 것을 하고 싶어 하는 치기어린 그리스도인일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특별한 봉사만 하고 주방 봉사나 궂은일은 안하려고 합니다. 물론 사람마다 은사가 있고 쓰임새가 다르기는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특별한 봉사를 하려고 한다면 그게 얼마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까?
선교가 중요한 일입니다. 사회적으로 어두운 일들을 찾아 개혁하는 개혁적인 삶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것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아서입니까? 교회만큼 선교를 많이 하고 교회만큼 봉사를 많이 하는 단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지탄을 받는 것입니까? 생활 속에서 사라져 버린 경건과 윤리, 생활에서의 거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원론의 폐해로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느냐인 것입니다.
일상은 일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일상에서 어떤 옷을 입고 어떻게 마음을 쓰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나누고 베풀고 사느냐가 곧 그가 어떤 그리스도인인가를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음을 쓰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작은 질서를 지키는 일에서 이웃을 위해 배려하고 섬기는 일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선교가 되고 사회봉사가 되어야 합니다. 레위기와 신명기는 그것이 거룩이요 영광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멘.
그 땅에 들어가서 살 때에
신 22:1-7 / 류명렬 목사 (대전남부교회)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신 22:4)
신명기(申命記)는 출애굽을 한 하나님의 백성이 ‘그 땅’에 들어가서 살 때에, 그들의 삶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그 땅은 가나안 족속들과 혼재하여 살아가야 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신명기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체성(identity)을 확고히 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불신앙의 환경 가운데, 이스라엘은 어떻게 믿음의 사람들로서 살아갈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 세상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들어가서 살아야 했던 ‘그 땅’과 같은 곳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동화되어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이 그 땅의 백성들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 수 있는 모습에 대해서 교훈하셨습니다.
긍휼–네 이웃을 사랑하라!
긍휼이란 남을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는 행동을 말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사랑을 품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삶의 고단함은 성도의 삶에서 사랑을 앗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사랑을 잃은 성도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유 1:21)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긍휼이란, 하나님이 자격 없는 우리에게 베푸신 신실하고 변함없는 은혜입니다. 긍휼은 악인이나 무례한 사람도 따듯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도록 하는 은혜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5:7).
본문은 그 구체적인 행동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형제의 소나 양이 길을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체 하지 말고 반드시 끌어다가 형제에게 돌리고, 또 형제의 나귀나 소가 짐을 싣고 가다가 길에서 넘어진 것을 보거든 또한 형제를 도와 그것을 일으키라 말씀하셨습니다(2-4절). 요즘은 바쁘고 자기 자신의 삶을 꾸려가기도 벅찬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와야 할 사람을 향한 우리의 눈은 곱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못 본척하고 외면하고 싶은 마음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말고 “반드시”(1, 4절) 도우라고 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백성들이 먹을 것을 취할 때 둥지에 있거나 땅에 있는 어미새와 새끼, 어미와 그가 품고 있는 알을 같이 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어미는 반드시 놓아주라고 하십니다. 새끼를 두고 도망가지 못하고, 품고 있던 알을 포기하지 못하는 어미새를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의 행동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7절)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매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남을 배려하고 돕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자기의 욕망과 안전을 이루기 위해 달리는 각축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환경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들도 마음이 강퍅하게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긍휼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합니다. 사람의 삶이 풍성하고 행복한 것은 자신을 위해서 아등바등 사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남을 배려하고 돕는 마음과 행동이 사람을 정말 행복하게 만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이를 두고 심리학자들은 ‘헬퍼스 하이(helper’s high)’라는 말을 합니다. 심리학자들이 연구해 본 결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보다, 남을 돕는 사람들이 더욱 행복감을 느끼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긍휼을 말씀하셨습니다(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긍휼히 여기는 것”이 입술로만이 아닙니다. 또한 추상적인 인식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에너지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문제는 치열하게 먹고 사는 영역에 있어서 실천해야 할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레위기의 주제가 ‘거룩’이지만, 레위기 역시 그 거룩함을 결코 추상적인 영역이나 언어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먹을 것, 입을 것, 결혼 규정과 같은 실재적인 삶의 문제로 접근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거룩–세상에 동화가 아닌 하나님을 닮아 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두 번째 삶의 태도와 마음가짐은 거룩함입니다. 즉 거룩하게 살아가려는 의식적인 태도입니다. 5절 말씀에 보면,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유니섹스(Unisex)라 불리는 패션을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당시 그 땅의 가나안 종교 의식에서 이방 여신을 섬기기 위해 제사장들이 여자 옷을 입었던 것과 관련되어 있는데, 그런 가나안 종교 의식에 참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즉 가나안 문화와 가나안 종교에 대한 거부와 저항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땅에 들어가 살게 되면, 그 땅 문화와 섞여 사는 것을 거부하라는 뜻입니다. 거룩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가나안의 음란한 문화에 동화되어 살아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의 교훈과 같이 바울 사도는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고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그 땅의 문화에 물들고 동화되지 않을 수 있는 적극적인 방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옷 술을 만들라는 명령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12절) ‘술’이란 장식을 위해서 옷의 소매 같은 곳에 다는 여러 가닥의 끈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망토처럼 된 옷을 입었기 때문에 네 모퉁이에 옷 술을 달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왜 옷 술을 만들라고 하셨을까요? 이 옷 술은 단순히 장식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는 하나의 장치였습니다.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이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민 15:39) 이스라엘 백성들은 옷 술과 그 사이에 있는 청색 끈을 보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 시대의 거룩한 옷 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세속화되어 있습니까? 믿는 사람들이 거룩하게 살아보겠다는 생각이나 결단이 없다면, 세상에 동화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오늘날도 우리의 삶에 옷 술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우리의 눈과 마음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는 이 시대의 옷 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첫째, 기도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매일의 기도 시간은 우리 영혼이 세상에 떠내려가지 않고 주님께 고정하는 닻과 같은 것입니다. 정해진 기도 시간을 통해 성도는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은혜를 얻게 됩니다. 상한 심령과 깨진 마음은 우리로 낙심하고, 우리를 본성의 사람으로 살도록 부추깁니다. 하지만 기도의 시간은 다시금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거룩한 옷 술의 역할을 합니다.
둘째, 예배의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예배 의식이 많이 약화되어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온라인 예배가 자칫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마음이 없는 ‘더 쉬운 형식’의 예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해진 시간에 마음을 다해 예배의 자리로 나아갈 때에,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진 거룩하신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이라는 이 시대의 거룩한 옷 술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