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저 박성수 역 문예출판사(서울: 1996)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정신을 강요하게 된다. 교육, 가정생활, 의료, 복지, 교회, 국가, 산업체, 농수산업, 연예계, 모든 분야에 있어 자본주의적 정신을 요구한다. 이 자본주의 정신이 인류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근대에 들어와서 생긴 현상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다. 즉 자본주의 정신이 없는 시절과 자본주의 정신이 있던 시절로 구분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구분될까?
비록 상업이 근대 이전에서 성행했고, 돈이 존재했어도 자본주의정신은 발생되지 않았다. 그 전의 인간들은 그 본성상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한 것이 아니고 단지 자신이 살아온 대로 살고 그에 필요한 만큼만 벌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틀을 깬 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상업 귀족계급의 대규모 기업가들도 아니라 오히려 밑에서 신분적 상승을 기대하고 기를 쓴 상업적 중간계층들이었다. 소위 벼락부자들이 자본주의적 분위기를 확산시켜 나갔다.
이들의 특징은 ‘금욕주의’이다. 이들에게는 세습받은 재산은 전무(全無)하다. 퇴폐적 과시욕도 없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이 그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이해하기 힘들고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으며 불결하고 경멸할 만한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누구든 막대한 양의 화폐와 재화를 갖고 무덤 속으로 들어갈 생각을 자신의 일생 동안의 노동이 갖는 목적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단지 도착적(倒錯的)인 충동인 ‘금전욕’의 산물로밖에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왜 당신은 무덤 속에 기껏 흙으로 변할 수 밖에 없는 허무한 것을 당신 생의 목표로 잡는가? 참으로 희한한 사람이요”라는 것이 그 당시 사람들의 평이었다. 아무리 봐도 상식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전(前)자본주의적 시대를 산 사람들에게는 자본주의적 영리정신이 참으로 불명예스러운 것이며 거절해야만 하는 불결한 의식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상식에 의하면 부유한 자들은 사망시 상당한 양의 돈이 ‘양심의 대가’라는 명목으로 교회기관으로 흘러 들어갔고, 때에 따라서는 부당하게 취해진 ‘이자’라 하여 이전의 채무자에게 도로 반납되기도 했다. 이것은 내세를 염두에 두고 자기를 위한 내세에 좋은 터를 닦는 일이기도 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디모데전서 6:17-19)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금욕주의가 현세적 금욕주의로 분위기 대체된 배경에는 종교개혁이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루터주의의 신비적 합일 사상은 원죄에 따라 인간은 무가치하다는 깊은 감정과 결합되어 있었다. 이는 신 안에서의 평온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키려는 그 수동적 성격과 순수한 감정적 내면을 특징으로 하는 것으로서, 천주교에서 말하는, 교회 제도에 의한 기능적 실행에 의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을 견제하는 의도를 담게 된다. 즉 개인적인 영성 구원이라도 신이 원하시는 합목적적인 우주의 원리에 부합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칼뱅주의는 이 루터주의에서 터전을 잡았지만 거기서 도출된 양상이 상당히 달랐다. 적극적이었다. 신비주의적 정감보다는 이 현실 일상생활에서의 금욕적인 윤리로서 개인적 구원관을 확정짓고 싶어했다. 객관적으로 변화된 행위들을 나타내어주므로서 구원되었음을 결과적으로 증명하는 길이 더 확실하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숭고해 보이는 신비적 신앙이라도 늘 기만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뱅주의는 실생활에서 신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봉사 방식이 어떤 것을 성경에서 탐구해 내고 정리하게 된다. 무계획적인 은둔과 대가인 척 하는 고행에서 해방되어 합리적인 절제와 금욕을 통해서 신이 자신들의 모든 행위를 긍정하고 인정했음을 성과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즉 이런 논리이다. “만일 신이 너에게 너의 영혼이나 타인의 영혼에 해를 주지 않고 다른 방법보다 많은 이익을 거둘 수 있는 합법적 방법을 지시하는데, 네가 이를 마다하고 보다 적은 이익을 주는 방법을 따른다면, 네 소명(calling)의 목적에 대하여 너의 안일과 게으름으로 인해 역행하게 만들었으며 신의 대리인(집사, 혹은 청지기)이 될 것을 거부한 것이며, 신의 선물을 받아 신이 요구할 때 그 선물을 그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한 셈이 된다. 따라서 당연히 육욕과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신을 위해서라면 부자가 되기 위해 노동해도 괜찮다”이다.
이 논리는 단순히 허용이 아니라 명령이기도하다. 그에게 맡겨진 돈을 활용하여 증가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쫓겨났던 종의 비유는 바로 이 점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빈곤해지려는 것은 빈번히 자진해서 병 들려 하는 태도라고 비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능력이 있는 자가 구걸하는 것은 타태이므로 죄일 뿐 아니라 사도의 말씀에 따르더라도 이웃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처럼 확고한 직업의 금욕적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 근대적인 전문직업을 윤리적으로 신성시했듯이, 이윤 기회에 대한 섭리적 해석은 기업가를 신성하게 만들었다. ‘신이 그의 사업을 축복하신다’는 말은 성공적으로 신의 섭리를 수행한 성도에 대한 상용어가 되었다. 잠언 22:29의 말씀은 이런데 뒷바침된다.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이로서 모든 도덕적, 신앙적 훈계는 공리주의적으로 유용함으로 통합 정리된다. 정직은 신용을 낳기 때문에 의로운 것이며, 시간 엄수, 근면, 검소들도 미덕이다. 모든 비생산적인 것은 정죄되고 오직 생산적인 것만의 신의 의로운 뜻이 된다. 신의 축복=행복=효용 모두 같은 맥락으로 쓸 수 있는 단어이다. 모두 신의 뜻 달성을 위한 소명 발휘로서, 쾌락과 사치와 자기를 위한 소비 욕구를 억제한 영광스런 희생과 고행의 결실로서 얻어진 것들이기에 정당한 재물이 하나님께 영광되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이 세상은 노동으로 버티기에는 너무나도 큰 시련들의 연속이다. 하지만 금욕적인 개신교들의 생활태도는 이 시련을 뚫고 일어선 은총의 열매들이다. 이러한 소명을 달성해내는 자가 바로 칼뱅 신학에서 말하는 ‘창세 전부터 구원되기로 작정된 자’의 면면이다. 신의 예정설을 통해 방출된 선택된 자의 활동 욕구는 전적으로 세계의 합리화를 위한 추구에 투입된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결론적 요지는 이렇다. 루터가 은총이란 죄를 회개하고 신의 약속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인 반면에, 이러한 개신교의 의식은 현세적으로 퍼져서 강철같이 노동과 근면으로 다져진 청교도적 상인의 모습으로 재발견으로 정리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자본주의 정신으로 말미암아, 천주교지역나 동양의 제국들이나 이슬람이나 불교가 융성한 지역과 전혀 구별되는 경제사회가 형성되는 데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평: 막스 베버의 이론이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현실을 규명하는데 있어 단순, 과학적이고 유물론적인 안목으로는 미흡함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알려주었다는데 있다. 즉 이미 과학시대에 접어든 시점에서 인간이 지닌 종교적 요인은 점차 자연적으로 사라질 미신의 일부처럼 미미하게 취급한 관행에 허점을 고발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인간의 종교성을 고려하지 아니하면 현실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제대로 탐구할 수 없다. 자본주의에 대한 탐구도 마찬가지이다. 본 책의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제도적이고 합리성을 지닌 종교라는 것도 결국 인간의 근원적인 무의식적 욕망에서 표출이라는 점을 밝혔으면, 오늘날 비개신교인들의 자본주의적 발상을 설명하는데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