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미룰 처지가 못 되었다. 큰집의 시동생은 일흔 중반이 되었고, 남편도 팔십이 불원이다. 건강들도 좋지 않아 더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을까 봐 조바심이 났었다. 드디어 윤달 중에 날짜가 잡혔다.
2012년 5월 10일. 하루 전날, 큰집 시동생 내외와 우리는 서울역을 출발했다.
그전 같으면 둘째 집 시숙 내외와 사촌 시누이 내외가 떠들썩하게 어울려 시제를 지내러 다니던 대구 길이다. 가을철 나들이 겸 종반간의 우애도 다질 겸 함께한 세월이 30년이다. 그 사이 작은 집 시숙 두 분이 돌아가셨고, 우리 집 시동생들도 미국 시민이 되었다. 윗대는 사 형제 분이신데 다음 대에 이르러 봉제할 자손이 마땅치 않은 형편이다. 남녀 구별 없이 하나씩만 두고 있으니 제사만큼이나 산소일이 큰 숙제로 남아 있었다.
기차는 덜컹거리며 급하게 내달린다. 달리는 속도 위에 몸을 싣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진다. 머잖아 가야 할 그곳이 아닌가. 그때가 아니고서는 절실해지지 않던 문제였다. 어떻게 몸을 버릴 것인가? 사후의 몸을 생각하게 된다.
24년 전 기차를 타고 충남 보령을 오르내리던 일이 떠올랐다. 88올림픽이 있던 그해 봄, 친정아버지는 용미리에 누워 계신 어머니와 할머니의 유해를 이장하는 일에 온 힘을 쏟으셨다. 할머니의 유골함은 땅에 묻고 봉분을 세웠으며, 습골해 온 어머니의 유골은 상자에서 꺼내져 칠성판 위에 조립되었다. 하얀 뼈로 드러난 어머니를 다시 뵐 수 있는 기회였다. 아홉 살짜리 막내를 두고 멎은 심장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우환 덩어리인 살이 모두 내리고, 햇볕에 눈부시게 반사된 백골은 나에게 똑똑히 보아두라는 듯했다. 백골관(白骨觀)을 잠시 생각했다. 어디에 고통과 애욕이 남아 있는가. 그렇게 서두르시던 아버지는 그해 가을 어머니 옆에 마련된 유택(幽宅)으로 들어 가셨다. 얼마나 안도하며 만족해하셨던가. 우리들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선영의 산소를 파묘하여 수목장을 지내기 위해 가는 길이다.
5월 9일 오전 10시 30분. 칠곡 청구공원에 도착하였다. 이른 아침부터 파묘가 시작된 시조부모님의 유해는 오후 5시가 지나서야 산을 내려왔다. 길도 묻혀버린 산의 정상인지라 포크레인도 올라갈 수 없고 사람의 키를 한 길도 넘는다는 땅을 손으로 파야 했기 때문이다.
그 분들의 손에 들린 두 개의 자루는 묵직해보였다. 유골은 공원묘지안치소에 맡기고 산 밑에 잡아놓은 숙소로 돌아왔다. 이상하게 밤새 잠이 오지 않았다. 얼굴도 뵙지 못한 시조모님의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건강이 여의치 않았던 큰댁의 시숙이 죽고 다른 이에게서 아들을 얻었건만 성정이 칼칼하셨던 시조모님은 남편을 양자들이고 싶어했다고 한다. 어쩌면 나는 증손부가 될 뻔했다.
오래전, 지인들을 따라 어느 좌석에 참석했는데 생면부지의 그 무녀에게 혼이 실렸는지 "내가 니 시할미다"라며 존재를 밝힌 뒤 나를 어루만지시며,
"손부야 고생 많았다. 내가 땅 사고 집 사게 도와줄게."
라고 하셨다.
반년 뒤 우연찮게도 보령에 땅을 사게 되었고 조그만 집이라도 장만할 수 있었다. 자루에 검은 매직펜으로 쓰여진 글씨는 '한산 이씨 ◯◯신위'였다. 한산 이씨라면 대성리학자 목은 이색과 내가 흠모해 마지않는 토정 이지함 선생의 후손이 아니신가. 당파와 사화로 얼룩진 불운한 시대를 살면서도 인간의 대의(大義)를 저버리지 않았고 천문, 지리, 복서, 의학에 통달한 선생은 국난을 예언했으며 걸인청을 만들어 백성들을 구휼하고 끝내는 빈손으로 생을 마감한 이 땅의 진정한 휴머니스트이시다. 우연찮게 사게 된 땅이 어떻게 토정 선생의 고향이란 말인가? 보령은 이제 부모님이 누워 계시는, 내게는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마음이 끌린 것이다. 다 이런 음덕 때문이었을까?
토정 선생 묘소에는 진작 참배하고 그분에 관한 글도 여러 지면에 발표한 바 있었다. 시할머님이 바로 그분의 후손이라니…. 벅차오르는 마음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새벽녘 산 밑 공기는 청랭하고 정신은 맑기만 하였다. 감격스런 여명이었다.
이른 아침 시부모님 묘소 앞에 다다르니 포크레인과 인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삽 들어갑니다. 신위는 놀라지 마소서"라고 고(告)한 뒤 포크레인이 봉분을 슬쩍 건드렸다. 주변의 석물들이 삽시간에 치워지고 흙 밑에선 석관이 나왔다. 인부 가운데 연장자인 두 분이 밑으로 내려가 습골을 해 올렸다. 나는 일련의 과정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일곱 기의 파묘는 한나절밖에 걸리지 않았다. 툭 툭 내 눈 앞에서 무덤들이 사라져갔다. 포크레인이 흙을 찍고 관 뚜껑을 밀어 제칠 때, 나는 보호자 없이 무연고 묘로 처리된 내 동생의 무덤이 떠올랐다. 내가 달려갔을 때, 파묘된 미아리 공동묘지는 무 뽑힌 밭처럼 검붉은 흙으로 뒤집혀 있었다. 그 죄책감과 허망함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으랴. 그 후 나는 홍제동 화장터 앞산에 올라 누렇게 피어나는 연기를 바라보며 동생의 실체를 느껴보려고 애썼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불과 반세기, 절대 성역인 무덤이 이렇게 처리될 줄은 누가 짐작이나 하였겠는가. 만감이 교차했다.
사람은 죽어 대체 어디로 가는가? 화장터 굴뚝에서 뭉실뭉실 피어오르던 연기는 하늘의 구름으로 흡수되고, 뭉친 기는 흩어져 어느 날 비로 쏟아져 땅에 내리고, 땅위의 수증기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 취산(聚散)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화담 서경덕 선생은 생사를 바로 기의 뭉침과 흩어짐으로 풀이한 바 있다.
"형(形이) 모여 물(物)이 되고 형(形)이 무너져 원(原)에 되돌아간다. 원시반본(原始反本), 그것이 역(易)에서 말한 유혼위변(遊魂爲變)일"거라고 송대의 철학가 장횡거는 말했다. 유혼(遊魂)은 사람의 몸을 떠난 것으로 사람이 변화한 것(遊魂爲變)인 바, 이것이 귀(鬼)이다. 귀(鬼)는 귀(歸)요, 신(神)은 신(伸)이다. 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두 측면이 귀와 신이라고 그는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우주와 같으니 마찬가지로 일종의 신(神)의 작용이 있다. 그 체(體)로 말하면 태극음양이요, 그 용(用)을 말하면 귀신 혹은 신(伸)이다. 다시 말해 귀신이란 음양 2기(氣)의 상호 감응(感應)이라고 한다. 심(心)은 기(氣)에 있는 양능(良能)과 같으므로 신(神)은 곧 마음 안에 있다는 것. 그러므로 조상의 기를 불러오게 하는 문제는 결국 자손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귀신의 이치는 바로 이 마음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나는 동서가 날짜를 알려왔을 때, 조상님을 위해 무엇이라도 마음 한 조각을 보태고 싶었다. 명(命)이 아닌데 돌아가신 시어머님과 집안 어른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면서 금강경 한 질을 사경하기로 마음먹었다. 눈의 초점이 흐려져 펜이 자주 멈추었으나 강행하여 출발 전에 마칠 수 있었다.
점심을 끝내면 다음 절차는 화장이다. 새로 단장된 가족묘역 앞에 일열로 놓인 유골함을 향해 삼배하고 마당을 돌면서 광명진언을 외었다. 묘를 쓰지 않았던 시동생과 조카는 부모님 봉분 근처에 한줌 재로 뿌려졌기에 그 언저리에서 흙을 떠다 자리를 잡았다. 구양순체로 집자한 안강노씨일문(安康盧氏一門)이라 쓰여진 석벽이 병풍처럼 둘러 처진 그 아래 시조부모님의 유해를 먼저 모셨다. 유골은 화장처리 되어 평장으로 안치했다. 본관과 이름, 그리고 생몰년월일이 적힌 조그마한 이름표(묘석)를 그 아래 세웠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가족이 오롯이 한자리에 모였다. 멀리서 바라보니 열(列)을 따라 펼쳐진 11개의 이름표는 마치 조선 왕가의 가계도를 방불케 했다. 시아버님 밑에는 시동생이 한줌 흙으로 누웠고 그 줄 왼쪽의 빈터가 남편의 자리쯤인 것 같다. 그 옆자리를 눈으로 짚어본다. 흙에 눕는다고 생각하니 흙의 체온이 느껴진다. 비가 오면 한지에 싸인 유해는 보다 쉽게 흙과 동화되리라. 마음이 홀가분하다. 나는 화장하여 보령 부모님 곁에 뿌려달라고 말해두었지만 아이들의 번거로움을 피해 저들의 의사에 따르리라 마음먹는다. 조경은 아직 덜 되었지만 진달래도 심고 소나무도 심으련다. 가족이 둘러 모인 뜨락에 밤이 되면 달이 뜨고 겨울이면 흰 눈이 곱게 쌓이리라.
남편에게 부탁한 할머님 묘소에서 떠온 한줌 흙을 나는 가방에 챙겨 넣었다. 인부들은 오색토(五色土)라고 자랑스레 말했었다.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산 임자는 시백부로 되어 있으나 정작 돈을 낸 분은 아들의 할아버지시다. 그러나 거기에 눕고 나면 무슨 분별이 있으랴. 선영을 가꾸신 분도 큰아버님이셨지 않은가. 어차피 한줌 흙이다. 나는 그것을 무언으로 아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첫댓글 읽으면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글입니다. 또한 몰랐던 많은 부분을 배우고 느낍니다.
옮겨주신 알밤님께 감사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