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 론
(1) 『순전한 기독교』의 출발
이 책의 원제는 Mere Christianity by C. S. Lewis 이다. C. S. 루이스는 영어권과 비영어권을 통틀어 세계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며, 기독교 변증가일뿐 아니라 시인, 작가, 비평가, 영문학자이다. 이 책의 내용은 본래 방송에서 발표한 것으로 『방송강연』(Broadcast Talks, 1942), 『그리스도인의 행동』(Christian Behaviour, 1943),『인격을 넘어서』(Beyond Personality, 1944) 라는 세권의 책으로 출판된 것을 하나로 엮은 것이다.
1952년 영국 지오프리 블레스에서 처음 출간되었으며, 1955년에는 폰타나 북스에서, 1977년에는 하퍼콜린스 소속 파운트에서 출판되었다. 한국어판 『순전한 기독교』는 파운트에서 발행한 1997년판을 번역한 것으로 장경철, 이종태 가 번역을 맡아 홍성사에서 2001년 초판되어 현재 16쇄 발행되었다.
(2) 이 책을 저술한 이유
루이스가 이 책을 쓴 이유는 기독교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적이거나 교파적인 논쟁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침묵하면서 보다 근원적인 순전한 기독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에로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의 제목을 청교도 목사였던 Richard Baxter가 사용했던 고전어인 Mere Christianity 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특별히 루이스는 교리적인 문제들에 대해 회피하는 이유는 만일 루이스가 특정한 교파의 입장에서 교리적으로 다룰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공동의 의식보다는 분열과, 심지어는 증오심마저 가질 위험들이 나타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루이스는 기독교인들의 영적인 가까움을 이루기 위하고자 모든 교파를 포괄하는 기독교라는 하나의 틀 안에서 이 책을 저술했다고 그의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p14)
(3)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 문제
서론에서 루이스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에 강력하게 집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기준의 모호성을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만난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단어가 단순히 변형되어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신사(gentleman)는 본래 객관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분명한 존재였다. 문장을 수 놓은 외투를 입고, 상당한 재산을 가진 사람으로, 한 사람에 대한 진술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신사’라는 말은 행실을 칭찬하는 말로 변질되어, 그 단어의 원래의 의미를 상실하였다. 루이스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 역시 ‘신사’처럼 고유한 단어의 의미를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들에 대해 매우 우려하였기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백한 용어를 고수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p19)
2. 옳고 그름,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
(1) 인간 본성의 법칙
① 자연법은 존재한다.
다툼의 원인들을 살펴보면 상대방의 행동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다는 식이다. 그리고 상대방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고 기대되는 행동 기준에 호소한다.(p26) 상대방은 비록 기준에 위배되긴 하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애쓴다. 여기에는 ‘규칙’ 혹은 ‘법규’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것을 사람들은 ‘자연법’(Law of Nature)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 본성의 법칙’(law of Human Nature)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이 외에도 여러 법칙들 속에서 살고 있다. 예를 들면, 중력의 법칙이나, 다른 존재들과의 공유의 법칙 등등. 그러나 이러한 법칙은 절대로 거부할 수 없지만 인간의 본성만이 가진 고유한 법칙만큼은 거부할 수 있다.(p28)
② 사람들은 자연법을 지키지 않는다.
‘옳고 그름’의 존재는 누구나 부인하지 못하지만 자연법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즉 누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행동들 실천하는데 실패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곧 실패에 대한 온갖 변명을 둘러댄다.(p31) 그리고 그 변명은 얼마나 많은 자연법을 우리가 깊이 믿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p32)
(2) 몇 가지 반론
① 본능이 아닌가?
본능은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강렬한 바람이나 욕구를 뜻한다. 그러나 루이스는 ‘도덕률’은 본능의 한 형식이 아닐 뿐 아니라, 본능을 뿌리쳐야 한다고 한다.(p36) 사실 인간은 ‘도덕률’을 따르기 보다는 ‘본능’을 따르고 싶어 한다. 루이스는 여기서 인간행동의 위험성이 본능 중 하나를 골라 절대시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마귀로 만드는 본능이라고 지적한다.(p37)
② 사회적 관습이 아닌가?
루이스는 ‘인간 본성의 법칙’을 수학과 같은 부류에 포함시킨다. 왜냐하면 세계의 도덕관들이 관통하는 동일한 법칙이 있으며(p39), ‘바른 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차이는 분명 ‘행동 법칙’이 존재하며, 사람들은 더 나은 행동 법칙을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p41)
③ 도덕과 신념간의 차이
도덕적인 원칙에는 차이가 없다. 사실에 대한 생각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p41)
(3) 이 법칙의 실재성
‘인간 본성의 법칙’은 어떤 인간이든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지만 하지 않는다.(p46)또한 인간은 나쁘다고 하는 행동을 통해 때로 이익을 얻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옳다고 하지 않는다.(p47) 예를 들어 전쟁 중에 상대편에 배신자가 있을 경우, 겉으로는 약간의 보상을 하지만, 속으로는 인간버러지로 여긴다. 이처럼 유용한 행동들이 반드시 바른 행동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즉 ‘인간 본성의 법칙’은 실재한다. 그러나 “왜 바르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한 종류 이상의 실재가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고 루이스는 말한다.
(4) 이 법칙의 배후에 있는 것
① 유물론적 관점
‘물질과 공간은 우연히 생긴 것으로서 늘 존재해 왔지만, 그 존재 이유는 알 수 없다’ 즉 인간도, 생물도, 지구도, 우주도 요행이나 우연에 의해서 발생된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p52)
② 종교적 관점
이 관점은 ‘우주의 배후에는 지각과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더 선호하며 자신과 닮은 존재를 위해 우주를 창조하였다’는 관점이다. (p53)
③ 어떻게 배후의 존재를 알 수 있는가?
과학은 어느 관점이 옳은지 알아 낼 수 없다. 만일 ‘배후의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들에게 전연 알려지지 않거나, 알려지더라도 과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알려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p54) 이처럼 난감한 상황에서 해결사는 인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의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는 단 한가지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도덕률을 만들어 내지 않았음에도 도덕률 아래 있으며, 아무리 노력해도 잊어버릴 수도 없고,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p55) 그것은 분명 인간 안에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내면의 영향력이나 지배력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게 하는 힘이 있다.(p56) 루이스는 우편배달부가 전해주는 편지의 예를 통해서 ‘나’라는 인간을 열어보았을 때 ‘나’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며 어떤 법칙아래 있는 존재’라는 사실 즉 ‘내가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편지를 보낸 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실들 배후에 존재하는 ‘힘’내지는 ‘지휘자’, 또는 ‘안내자’가 있다는 점은 누구나 다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5) 우리의 불안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누군가에 대해 두 가지 증거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우주이며, 또 하나는 그가 우리의 정신 안에 둔 도덕률이다.(p61) 사실 이 증거야 말로 내부 정보이므로 우주보다 더 좋은 증거이다.
인간은 절대 선(善)의 편을 들고 있으며, 인간의 탐욕과 거짓과 착취를 인정하지 않는 그 절대 선(善)에게 내심 동의하고 있다. 만일 절대 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행동 대부분을 미워하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또한 절대 선이 우주를 다스린다면 우리는 매일 그 선의 원수가 되는 셈이며,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 (p63)
루이스는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 되게 행동했다는 것과 용서가 필요한 사실을 일깨워 줌으로서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용서를 약속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루이스는 지금까지 용서가 필요한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깨닫게 하기 위해 “옳고 그름”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인간 본성의 법칙”인 “도덕률”을 도입하여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이야기 한 것이었다.
3.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1) ‘하나님’과 경쟁하는 개념들
인류는 유신론의 입장에 있는 다수의 존재(대부분의 종교들)와 무신론의 입장에 선 소수의 존재(서구 유럽의 유물론자들)로 나뉠 수 있다. 또 유신론의 입장에 선 사람들도 어떤 종류의 하나님을 믿느냐에 따라 한 번 더 나뉜다.
① 범신론적 관점
범신론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선악의 구분 너머의 존재로 본다. 헤겔과 힌두교도들이 대표적이며 이들은 우주 자체를 하나님과 거의 동일시한다. 우주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우주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일부라고 본다. (p71)
② 기독교적 관점
또 하나의 관점은 기독교적 관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은 분명히 ‘선한’존재 내지는 ‘의로운’존재로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가지고 있으며, 사랑을 사랑하고 미움을 미워하며,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마치 그림을 그리거나 작곡을 하듯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p71) 하나님은 분명 세상과 구별된 존재이며, 세상의 어떤 것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다. (p72)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그것들을 다시 바로잡을 것을 아주 큰 소리로 명하신다.(p73)
(2) 하나님의 침공
우주에는 분명 나쁜 것들과 명백히 무의미한 것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인간처럼 나쁘고 무의미한 것을 분별하는 생물도 존재한다.
① 기독교적 관점
세상은 원래 좋았는데 나빠졌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야 할 원래 모습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 (p78)
② 이원론적 관점
모든 것의 배후에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동등하며 독립적인 힘이 있으며, 우주는 그 두 힘이 끝없이 싸우는 전쟁터이다. 선한 힘과 악한 힘은 각각 자기가 선하고 상대방은 악하다고 생각한다. 두 존재는 아주 독립적인 존재로 영원 전부터 존재한다.(p79)
③ 이원론의 함정
선과 악의 각각의 존재를 각각 인정하는 순간 이 두 힘을 제외한 제3의 존재, 즉 두 힘 중에 하나는 거기에 부합되지만 다른 하나는 부합되지 않는 어떤 법칙 내지는 기준, 또는 규칙을 우주에 끌어 들이는 셈이 된다.(p80) 그리고 그 기준을 만든 “존재”는 그 두 힘보다 더 오래 전부터 있었을 것이고 더 높은 곳에 있을 것이며, 그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일 것이다.
루이스는 악한 힘이 악해지려면 먼저 선한 것을 원하고, 잘못된 방식으로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p82)고 한다. 성도착의 경우 감각적 쾌락을 잘못된 방식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쾌락은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한 선에 속한 것이다. 즉 성도착은 선한 것을 그릇된 방식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악한 힘이 악해지려면 먼저 선한 것을 원하고, 그 다음에 잘못된 방식으로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악을 행할 수 있게 하는 힘은 선에서 온다. 악한 자가 효율적으로 악해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그 자체로서 다 선한 것들이다.(p83) 루이스는 이것이 이원론이 통할 수 없는 이유이로 보고 있다.
④ 기독교와 이원론
루이스는 성경을 보다가 어두운 권세(죽음, 죄, 질병의 배후세력인 마귀)역시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로 본래는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후에 악하게 변한 존재로 생각하면서 이런 점에서 이원론과 구별된다고 본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주가 전쟁 중이라는 견해에 대해 이원론에 동의한다.(p83)그러나 독립적인 두 존재가 아니라 마귀세력의 반란이며, 우주는 현재 반역자들에게 일부 점령당했다고 생각하며 이원론과 분명한 한계를 긋는다.
또한 루이스는 기독교는 합법적인 왕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마귀의 점령지역에 상륙하셨는가에 관한 이야기로, 우리 또한 이 거대한 파괴 작전에 참여할 것을 촉구한다고 보고 있다.(p84)
(3) 충격적인 갈림길
① 인간의 자유의지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들이 이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루이스는 악한 일이 가능한 것이 바로 자유의지라고 한다.(p86) 루이스는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행복은 사랑과 즐거움의 절정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며 이웃과 연합하는 데서 생겨나는 행복이다. 이러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인간은 자유로와야 한다.’(p87)
② 인간의 타락
루이스는 인간의 타락 역사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될 수 있다는 교만과, 하나님 외에 무언가 다른 것에서 행복을 찾고자 함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다.(p89) 그러나 인간을 자동차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인간은 진정한 연료인 하나님을 넣어야 달릴 수 있으며, 하나님은 영혼의 연료이시고 영혼의 음식이 되신다고 한다.(p89)
③ 하나님이 하신일
루이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양심, 즉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분별력을 주셨으며, 또한 예수님이라는 ‘좋은 꿈’을 주셨고, 유대인들을 택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셨다고 한다. (p91)
④ 충격적인 일
루이스가 말하는 충격적인 일은 하나님으로 자처하는 한 유대인 남자의 출현이다. 범신론에서는 그것이 가능하지만, 사실 그러한 일은 진짜 하나님이거나 아니면 미치광이에 불과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뒤이어 루이스는 진짜 이상한 것은 심지어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 조차도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에 대한 우스꽝스럽거나 자만심에 가득한 인상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한다.(p93) 여기서 루이스는 독자들의 선택을 촉구한다. 하나님의 아들로 아니면 미치광이로 말이다.
(4) 완전한 참회
① 기독교의 이론
루이스는 이 부분에서 독자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이었고 지금도 하나님이라는 이유를 제시함과 동시에 그분이 왜 세상에 오셨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 히시고 죽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해 주며 새로이 출발하게 해 주었다고 말한다.(p96) 또한 이것은 그 자체가 기독교가 아니며,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효력을 갖느냐에 관한 설명일 뿐이라고 한다.(p97)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깥으로부터 우리 세상으로 뚫고 들어온 역사의 지점이라고 루이스는 힘주어 말한다.
② 예수님의 십자가의 효력
루이스가 말하는 십자가의 효력은 예수님이 자원해서 우리 대신 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면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빚이었기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다고 설명한다.(p100) 이에 대한 반응의 회개에 대해 루이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전속력을 다해 뒤로 도는 동작을 그리스도인들은 회개라고 부릅니다.’라고 표현하면서 회개는 자기만족과 의지를 버리는 것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한다.(p100)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정작 회개는 악한 사람에게 필요한데, 선한사람들이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인간이 회개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우리에게 조금 넣어주심으로 가능하며 사람은 자기보다 분명 더 강한 존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칼빈이 말하는 ‘종교의 씨’와도 어느 정도 상통하는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5) 실제적인 결론
루이스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파되는 방식을 세 가지를 말한다. 그것은 세례와 믿음 그리고 성만찬이다.(p106) 이 부분은 교리적인 논란의 여지가 있기에 루이스는 더 이상 논의를 전개시키지 않으려 한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행동들이 자신에게서가 아닌 그리스도인에게서 나옴을 고백한다는 것이다.(p111)
그러나 이러한 일들의 마지막이 반드시 있다고 루이스는 경고한다. 그것을 하나님의 침공으로 표현한다.(p114) 다만 하나님이 지체하시는 이유는, 어서 빨리 사람들이 그의 편에 가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라고 설명하고 있다.
4. 그리스도인의 행동
(1) 도덕의 세 요소
루이스가 말하는 도덕의 세 가지 사항은 첫째, 도덕은 각 개인들과의 조화를 이루는 일과 관련이 있다. 둘째, 각 개인의 내면의 정돈과 조화. 셋째, 인류의 보편적 목적, 즉 인간이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p123) 그러나 현대의 문제점이 첫째 단계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 간에 정직하며 친절하게 도움을 주며 조화롭게 살아야 하지만, 그것이 각 개인의 용기와 이타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며, 뜬구름 잡는 것이라고 한다.(p125) 루이스가 사실 가장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것은 세 번째 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도덕과 비기독교의 주된 차이기기 때문이다.
(2) ‘기본 덕목’
루이스는 기본 덕목의 개념을 고대의 분류체계를 따라 7가지로 나눈다. 그 중 네 가지는 ‘기본덕목’이며 나머지 세 가지는 ‘신학적 덕목’이다. 여기서 루이스는 역시 신학적 논란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또 그의 의도상 불신자를 위한 책이므로 ‘신학적 덕목’은 제외시키고, ‘기본덕목’만을 다룬다. 그 네 가지 덕목은 분별력, 절제, 정의 꿋꿋함이라고 소개한다.
특히 분별력을 발휘하기 위해 지성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역설하면서, ‘하나님은 게으름뱅이를 좋아하지 않으시지만, 지적인 면에서 게으른 사람은 더더욱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지적인 게으름뱅이를 매우 비난한다.
절제는 온갖 종류의 쾌락과 관련된 말로 완전히 삼간다는 뜻이 아니라 적절한 정도까지만 한다는 뜻임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루이스가 매우 조심스럽게 지적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자신의 기준으로 보아 자신이 포기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다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으로 기독교 적이 아닌 것이라고 말한다.(p133)
정의는 정직함, 공평한 교환, 성실함, 약속을 지키는 일 등 삶의 모든 부분이 포함되는 공정함이라고 루이스는 보고 있다. (p134)
꿋꿋함은 고통 속에서 버티는 용기뿐 아니라 위험에 맞서는 용기, 배짱이다.(p134)
이러한 덕목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을 루이스는 일정한 상태의 특질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꾸준히 이러한 덕목을 지키며 훈련된 사람은 믿을만한 특질이 형성되어 진다는 것이다.(p135)
(3) 사회도덕
① 이미 존재하였던 사회도덕
루이스는 존슨(Samuel Johnson)박사의 말“사람은 가르쳐야 할 때보다 기억시켜야 할 때가 더 많다”을 빌려서 예수님의 황금률은 새로운 종류의 특별한 도덕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옳은 바를 요약한 것이라는 것이다.(p137)
②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루이스는 또한 예수님의 도덕은 특정 사회에 적용시키기 위한 세부적 정치프로그램이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지 조리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을 읽으라고 하셨지 히브리어 헬라어의 문법을 가르쳐 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에서 세부적 프로그램의 전문가에게서 보다 목회자들로부터 새로운 프로그램을 요구한다는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p139)
③ 유쾌한 사회
루이스가 말하는 유쾌한 사회는 누구나 다 일해야 하지만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선에 쓰는 비용 때문에 가계가 빠듯해질 정도로 하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매우 어렵게 보이지만 사실 우리가 사치에 지출하는 비용을 계산해 본다면 어느정도 가능한 일일 것이다.
(4) 도덕과 정신분석
루이스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예로 들면서 그가 첨가한 철학적 요소들만 제외하면, 정신분석학 그 자체도 기독교와 배치되지 않는다고 본다. 정신분석학의 기술은 어떤 점에서는 기독교 도덕과 중복되고, 그것을 아는 것도 유익이라고 한다.(p147)
도덕적인 선택에는 선택하는 행위와 선택의 원재료인 다양한 감정과 충동이 관련되어 있다고 루이스는 이야기 한다. 그런데 좀더 깊이 나아가 정상적인 감정이 아닌 잠재의식의 잘못된 것을 치료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임무이며, 거기에서 도덕적인 문제가 시작된다고 한다.(p149) 그래서 루이스는 심리적 재료가 나쁜 것은 죄가 아니고 병이며, 이런 사람은 회개할 것이 아니라 치료받아야 한다고 한다.(p150)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으로 서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의 도덕적인 선택을 보고 판단하시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누구든지 자신 있게 도덕적 판단의 옳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지적한다.
루이스는 인간의 도덕적 선택이 천국의 피조물로 바꾸어가는 삶이라고 말한다. 즉 도덕적 선택은 하나님과 흥정하는 행위가 아니며, 선택을 내리는 부분들을 조금씩 전과 다른 모습으로 바꿈으로 다른 피조물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천국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p152)
루이스가 마지막으로 지적하는 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면 평화뿐 아니라 지식도 얻게 된다고 말한다. 잠을 비유해서 설명하는데, 깨어있을 때는 잠자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잠자고 있는 동안에는 모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한사람은 선도 악도 알지만 악한 사람은 둘 다 모르는 것이다.(p153)
(5) 성도덕
루이스는 기독교적인 순결과 사회적 규범인 예의범절과 다르다고 말한다. 사실 순결은 기독교 덕목가운데 가장 인기 없는 덕목으로 말하며 기독교의 규범을 소개한다. ‘결혼해서 배우자에게 전적으로 충실하든지, 아니면 독신으로 완전히 금욕하라’는 것이다. (p156) 그러나 사실 이것은 너무나 지키기 어렵고 우리 본능에 어긋나는 규범이며, 루이스는 본능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현대인들이“성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인류가 성이라는 방법을 통해 번식하고 거기에서 쾌락을 얻는다는 사실은 조금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다’라는 뜻일 경우 이것은 옳은 표현이지만, 성적 본능 상태에서 그것을 주된 관심사로 삼고 침을 흘리며 입맛을 다시느라 신간을 보낸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고 루이스는 지적한다.(p161)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진실하고 끈기있게 이 어려움들을 극복하고자 애쓰느냐 하는 데 있다고 루이스는 말하고 있다.
루이스는 순결을 갈망하기가 힘든 이유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는 뒤틀린 본성과 마귀의 선전들에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성 자체가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지나치게 빠지지만 않는다면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이라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본성이 아닌 비록 엄격할 지라도 기독교적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한다.(p163) 둘째로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적 순결을 지키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진지하게 노력해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이스는 이에 대해 처음에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완수해 내게 되는데 여기에는 적극적인 하나님의 개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한다. 또한 실패할 때는 언제든지 일어나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거듭 시도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덕목자체보다 영혼의 좋은 습관을 훈련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p164) 세 번째로는 심리학의 ‘억압’과의 오해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루이스는 ‘억압’과 ‘억제’를 다른 것으로 보는데 억압된 욕망은 잠재의식 속에 파고들어 알 수 없는 형태로 위장해서 현재의 의식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억압된 성적 욕망이야말로 성적 욕망 그 자체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p165) 그러나 루이스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동물적 자아가 아니다. 정말 위험한 것은 악마적 자아이며 영적 쾌락이라고 말한다. 위선을 저지르며,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악한 것들이야 말로 육체적인 순결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보다 더욱 나쁜 악을 행하는 것이다.(p166)
(6) 그리스도인의 결혼
루이스가 이 주제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 주제에 관한 기독교의 교리가 지극히 인기가 없기 때문이며, 둘째는 이 글을 쓸 당시에 결혼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1956년 조이 데이빗먼 그레셤이라는 미국 여성과 결혼하여 4년간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그의 결혼 이야기가 ‘Shadow Land'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것은 매우 이채롭다.
루이스는 기독교의 결혼관이 예수님의 ‘한 몸’의 관점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차원에서 완전히 결합된 것이다. 혼외정사가 나쁜 이유는 모든 차원에서의 연합이 아닌 성적 연합만을 떼어낸 탓이라고 한다.(p168) 이혼에 관해서도 루이스는 배우자에게 더 이상 사랑을 느끼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이혼 할 수 있다는 현대인의 관점을 반대한다.(p169) 특히 결혼 서약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결혼 서약은 현재의 사랑하는 감정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는 것이다. 약속은 사랑의 감정이 사라진 후에도 유효한 것이라고 말한다.(p172) 사랑도 일종의 감정인데, 그것이 모든 삶의 토대는 아니며, 그것이 언제까지 강렬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지적한다.(p173) 루이스는 이어서 두 번째 의미의 사랑이란 표현을 사용하면서 단순한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고, 의지적으로 유지되며 의도적인 습관으로 강해지는 깊은 연합으로서 하나님께 구해서 받는 은혜로써 강해지는 깊은 연합을 말하고 있다.(p174) 이것이야말로 약속을 지키게 해주며, 결혼의 엔진을 계속 가동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7) 용서
루이스는 용서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수월하게 하는 일을 제안한다. 그것은 용서의 쉬운 대상, 예를 들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을 용서하기 시작해서 점점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들로 옮겨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용서를 위해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은 수단으로서가 아닌 목적으로서, 그리고 이웃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인 목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p185) 또한 다른 사람이 실수했을 때는 상대방을 무조건 미워하기보다 상대방이 치유되어 그의 인간다움을 바라는 것이 바른 것이라고 한다.(p186)
루이스는 또한 살인과 죽이는 것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쟁터에서 군인이 하는 일과 그리스도인 판사가 살인자를 구형하는 것은 죽이는 것으로 불가피한 것이며, 일부러 사람을 미워해서 죽이는 행위를 살인이라고 한다. 루이스는 이러한 살인의 배후에 있는 적의나 복수심을 없애야 한다고 한다. (p190) 그것은 사랑할 만한 부분이 없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사랑해야 한다고 루이스는 말한다.
(8) 가장 큰 죄
루이스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악이 겸손과 반대되는 ‘교만’과 ‘자만’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마귀가 교만 때문에 마귀가 되었고, 교만은 악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또한 교만은 경쟁적인 것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고 싶어하는 욕심과도 관련 되어 있다고 루이스는 지적하고 있다.(p194) 그래서 교만은 사람과 사람사이에 적대감을 일으키며,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마저 들게 하는 그 자체가 적대감 이라고 루이스는 강조한다.(p196)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만하게 행동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상상속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루이스는 말하면서 교만의 위험성을 강력하게 경고한다.(p196) 심지어 교만은 영적인 암이라고 한다. (p198) 그러나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을 또한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그것은 먼저 칭찬받고 즐거워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라고 한다. (p198) 두 번째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들이나 아버지나 학교나 부대를 ‘자랑스러워한다’고 할 때 pride 는 애정어린 마음으로 경탄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교만이 아니며,(p201) 세 번째로는 하나님이 교만을 불쾌하게 여겨서 금지하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9) 사랑
루이스는 기독교적인 사랑을 감정이 아닌 의지적인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다.(p205) 감정은 하나의 사실이지만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죄가 되기도 하고 덕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특정한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 없이 대한 다면 그것은 죄이다. 그래서 루이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 하셨듯이 우리도 사랑할 수 있는데 그 방법은 진짜로 사랑하는 것처럼 의지적으로 사랑의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이스는 의지적인 사랑이야말로 두 번째 사랑으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다.
(10) 소망
루이스는 사도들을 비롯한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죽음 앞에서 조차도 당당하게 복음의 깃발을 높이 든 이유는 바로 그들의 마음이 천국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p211) 그래서 진정한 소망은 천국을 지향하는 것으로, 천국을 지향할 때 세상을 덤으로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할 때는 둘 다 잃을 수 있다고 한다.(p212) 그러나 우리가 평소에 천국을 바라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에 대한 훈련부족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루이스는 우리의 삶 가운데 선택의 방식이 대개 세 가지로 나타난다고 한다. 첫째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모든 탓을 환경에 돌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신비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평생을 보낸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뿐이다. 두 번째는 환멸에 빠진 ‘지각 있는 사람’이 택하는 방식으로 이런 사람은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결론을 일찍 내림으로 시간을 절약한다. 대체로 잘난척하며 살지만 영원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애석한 사람이다.(p214) 그러나 세 번째 유형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경험하지 않는 욕구들을 천국과 연계시켜 생각한다. 그리고 천국을 소망하며 하나님과 영원히 연합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광채와 능력과 기쁨을 면류관과 함께 누릴 것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선택을 하는 사람이라고 루이스는 말하고 있다.
(11) 믿음 1
루이스는 믿음이란 말을 두 가지의 의미로 본다. 첫째의 믿음은 단순히 ‘기독교적 교리를 신념’(Belief)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흔히 사람들은 어떤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면, 그것을 재고하게 만드는 상당한 이유가 생기지 않는 한 그 믿음을 견지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정신이 이성의 전적인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해서 이다.(p218) 그러나 루이스는 그것이 틀리다고 한다. 믿음은 이성에 근거하지만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이 상상력과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과 이성이 한편이 되고, 감정과 상상력이 다른 편이 되어 싸움을 벌인다고 표현한다.(p219) 그래서 루이스는 믿음을 ‘한번 받아들인 것은 끝까지 고수하는 기술(art)이다’라고 말한다. 기분은 이성의 생각과 상관없이 변하는 법이다. 그래서 믿음의 습관을 들이기 위해 훈련해야 한다고 한다.(p221)
믿음의 습관을 훈련하는 첫 단계는 사람의 기분은 바뀐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날마다 시간을 내서 교리들을 정신에 새겨 나가며, 매일 기도하며 성경과 경건서적을 읽고 교회에 나가는 것이라고 루이스는 권고하고 있다. (p221)
(12) 믿음 2
루이스는 두 번째 단계의 믿음이 아주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것은 성숙한 믿음으로 첫 번째 단계를 넘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p228) 그것은 하나님께 빚진 자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이며, 거기엔 물론 자신이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포함해서 이다. 이것을 믿음만을 강조하거나 선행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이다. 루이스는 빌립보서 2장의 말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를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지만 우리들 역시 선행에 전념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p233)
5. 인격을 넘어서 또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첫걸음
(1) 만드는 것과 낳는 것
루이스는 신학의 필요성을 지도에 비유하여 말한다.(p240) 지도는 생생한 경험의 덩어리이며, 어떤곳을 가고자 할때는 반드시 지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리가 하나님이 아님을 주의하고 있다.(p241a) 그러면서 루이스는 예수님의 나심을 이야기 한다. 예수님은 창조되신 분이 아니라 나신분이라는 것을 구분지어 설명한다. 즉 창조한다는 것은 만든다는 것이며, 창조자와 창조된 물질과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새가 새 둥지를 만들지만 다르듯 말이다. 그러나 낳다(begetting)는 것은 같은 종류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낳으신 분으로 하나님 이시라는 것이다.(p246) 사람이 사람을 낳아서 사람이 되듯이 말이다.
(2) 삼위이신 하나님
루이스는 삼위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1차원의 세계에서 3차원의 세계의 개념을 빌어서 설명하고 있다. (p252) 1차원의 세계에는 단지 직선만, 2차원의 세계는 적사각형만, 3차원의 세계는 정육면체가 있다. 그러나 1차원 2차원 3차원들은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라 직선이라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고차원에서 저차원을 그리는 것은 쉽지만 저차원에서 고차원을 상상하기는 매우 어렵다. 하나님 역시 인간이 가진 속성들을 가지셨지만 하나님 고유의 속성을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은 세 인격이시면서 동시에 하나인 존재이시다. 이 하나님을 느끼기 원하여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그 사람은 평범한 침실에서조차도 하나님의 삼중적인 생명 전체가 움직이시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p253) 또한 사람이 하나님과 만나는 것에 대해서 친구로 비유한다. 각각은 인격체를 가지고 있기에 한 사람이 거절할 경우 다른 사람이 만나거나 친구로 사귈 수 없다. 하나님역시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시기를 거부할 때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깨끗한 거울에 비치는 밝기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만나신다고 말한다.
(3) 시간과 시간 너머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의문은 ‘하나님은 언제 그 많은 기도를 들으실 수 있는가?’이다. 루이스는 여기서 소설속의 메리의 개념으로 이를 쉽게 설명하고 있다.(p260) 예를 들어 메리는 책을 내려놓는 순간에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문장상으로는 앞의 문장이 있고나서야 다음 문장이 기록되지만 이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의 창조자 이실 뿐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실 수 있는 분이므로 하나님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루이스는 설명하고 있다. 또한 우리의 시간이 직선이라면 하나님은 그 직선이 그려진 종이 전체에 비유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역사가 없는 분으로 묘사한다. 왜냐하면 역사란 실재의 일부는 과거 속으로 사라졌고 일부는 얻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러한 역사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루이스는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간의 초월하는 분으로 우리의 내일까지도 오늘로 보실 수 있다고 한다.(p264)
(4) 좋은 전염
루이스가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상상과 그림으로 설명한다.(p268) 예를 들어 책이 위아래로 포개져 있다면, 그것의 그림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그림과 상상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의 생명이 결합될 때 진짜 인격체, 즉 삼위일체 하나님 중 3위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실제로 나온다고 소개한다.(p271)
루이스는 좋은 전염 즉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전염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며, 그러한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한다. 기독교가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뜻대로 하시도록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게 된다고 한다.(p273)
(5) 고집센 장난감 병정들
루이스는 인간들이 가진 자연적 생명이 영적 생명에게 붙잡히면 이 모든 자기중심과 아집이 끝장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히려 싸울 준비를 한다고 한다.(p275) 예를 들어 장난감 병정에게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서 양철을 살로 바꾸려는 것을 장난감 병정은 자신을 죽이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사람을 피한다.(p275) 하나님께선 우리 힘으로 영적인 생명을 향해 올라가지 않도록 해주셨다. 이미 그 생명은 인류에게 내려오셨다. 그분은 하나님이면서도 인간이신 분으로 우리 자신을 드러내기만 하면, 그가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서 그 일을 행하실 것이다.(p279)
(6) 두 가지 부연 설명
첫 번째 부연설명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아들을 많이 낳으면 되지 왜 굳이 장난감 병정들을 먼저 만든 다음 굳이 그토록 어렵고 고통스런 과정을 거쳐 생명을 주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루이스는 만일 인류가 하나님께 등을 돌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쉬웠을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로 인간이 하나님께 등을 돌릴 수 있었으며,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는 하나님은 자동인형에 불과한 존재를 사랑하기 원하신건 아니라고 말한다.(p281)
두 번째 부연 설명은 인간 개개인이 단순한 목록에 나열된 항목이 아니라 자기만의 역할을 수행하는 한 몸의 기관들이라는 것이다.(p283)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존재이면서 동시에 같은 유기체의 일부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p284)
(7) 가장 합시다
루이스는 <미녀와 야수>의 이야기와 가면쓴 청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어쩔수 없이 야수와 결혼한 미녀는 보통 사람처럼 야수와 키스를 하자 야수는 멋진 청년으로 변했다는 것과 가면을 쓰면 잘생겨 보이는 어떤 남자가 나중에 가면을 벗자 진짜 잘생겨 있었다는 이야기다. 루이스는 여기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가장하고 그렇게 행동하며,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마치 멋진 청년으로 변한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 역시 우리들에게 자신의 모습으로 가장하라고 명령하셨다.(p287) 우리가 ‘그리스도로 가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가장에서는 가장 멀고 현실에는 좀더 가까워질 수 있는 순간이라고 루이스는 일깨워주고 있다.(p287) 여기에서 루이스는 두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우리가 구체적인 죄의 행동들 뿐 아니라 우리의 죄성 자체에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다.(p292)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적인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되어질 수 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치 작은 그리스도를 보듯 하신다는 것이다.(p294) 예수님은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진짜 작은 그리스도로 바꾸어 가신다는 것이다.
(8) 기독교는 쉬울까, 어려울까?
루이스는 양심과 기독교의 차이를 이렇게 말한다. 양심은 따르면 따를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며 결국은 지쳐서 솔직한 이기주의자보다 훨씬 더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p298) 반면 기독교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신다. 사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쉽지만 어떻게 보면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루이스는 이것이 훨씬 쉽다고 한다. ‘자아’를 지키면서 개인의 행복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는 동시에 ‘선량’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아를 예수님께 전부 드리는 것이 너무나 두려운 일이지만 우리가 이중적으로 애쓰는 모습보다는 훨씬 쉽다고 한다.(p300)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주님 안에 끌려들어갈 때 우리는 제자리를 찾을 것이며, 악몽대신 아침이 밝아올 것이라고 루이스는 표현하고 있다.(p304)
(9) 대가를 계산하기
루이스는 어렸을적 치통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자신은 당장 아픈 것만을 면했으면 좋겠는데, 치과에 가면 치통의 원인들을 전부 검사하고 전체적으로 치료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치료해주시기를 간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죄뿐 아니라 죄의 근원들까지 치료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엔 반드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전함을 요구하신다. 물론 그 수준은 어린아이와 장성한자의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끝까지 최선을 우리역시 다해야 하는 것은 온전해지는 것이 우리의 존재하는 목적이기 때문이라고 루이스는 말하고 있다.(p308)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훨씬 너머를 생각하심으로 우리를 자주 놀라게 하신다. 예를 들어 우리가 통나무 정도의 집을 생각하신다면, 하나님은 궁전을 지어가고 계시는 것이다.(p311) 루이스는 온전하라는 명령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며 우리를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라고 말한다.(p312)
(10) 호감 주는 사람이냐, 새 사람이냐
루이스는 회심이후의 행동이 나아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회심을 머리 속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한다.(p314) 실제 행동에 진보가 없다면 아무리 좋은 감정과 새로운 통찰과 더 큰 흥미가 생겼다 해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그리스도인들이 비 그리스도인들보다 훨씬 호감을 줘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이것이 잘못된 이유를 루이스는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하고 있다. 첫째는 세상에 100% 그리스도인과 100% 비그리스도인으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서서히 그리스도인이 되든지 아니면 서서히 비 그리스도인이 되어간다는 것이다.(p315) 둘째로는 실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호감을 주는 사람으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즉 전보다 더 친절한 사람들로 바뀌어 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오셨고 그들을 축복하셨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유형의 사람들에게 주의를 촉구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많이 받은 자들에게 많이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서 만족하지 말라고 한다. 그것은 마치 자신을 타락시키고, 무서운 부패와 마침내는 재앙을 만드는 일이라고 경고한다. (p324)
(11) 새사람
루이스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다음 단계는 완전히 새로운 단계라로 말한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단순한 변화가 아닌 변형(Transformation)이라고 한다.(p328)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로 바뀌는 변화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루이스는 ‘새 단계’가 몇 가지 점에서 이전의 모든 단계들과 구별된다고 이야기 한다. 첫째는 성(性 )적 재생산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p331) 성이 사라지는 시대, 혹은 성이 더 이상 발전의 주된 통로 역할을 하지 않는 시대는 얼마든지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전 단계의 생명 유기체들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일에 선택권이 전혀 없거나 거의 없다는 것이다.(p331) 진보는 그들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이었지, 그들이 주도적으로 일으키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예수님이 새 사람의 ‘최초 사례’이지만 예수님은 그 이상의 존재라고 말한다.(p332) 예수님은 새로운 생명인 조에(Zoe)를 가지고 자진해서 이 창조 세계로 들어오셨고 유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좋은 전염’을 통해서 그 생명을 전달하신다. 그리고 누구나 예수님과 접촉해야 하며 ‘그 안에’있음으로 ‘새로워진다’고 말한다.(p332) 네 번째 단계는 이 단계의 진행 속도가 이전 단계의 속도와 다르다는 것이다. (p332) 기독교는 인류역사상 번개처럼 급속히 퍼졌다. 마귀의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절망가운데서 여전히 살아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장소에 여전해 등장했다. 다섯 번째는 뒤로 물러나 봤자 이 땅위의 삶 몇 년을 잃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p333) 그러나 이 단계에서 물러나면 영원한 상급은 잃는 것이라고 루이스는 말하고 있다.
루이스는 예수님을 소금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계란과 양고기와 배추 등에 소금을 뿌리면 그러한 음식들의 맛이 더 살아나듯(p337) 우리가 우리자신에게서 벗어나 예수님으로 뿌려질수록, 혹은 예수님으로 채워질수록 더욱 우리들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자신의 유전과 환경적인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p338) 그러나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설 때 진정한 인격을 갖기 시작한다고 루이스는 지적하고 있다.(p339)
그래서 루이스는 자신을 포기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또한 자기 생명을 얻어야만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 있으며, 매일의 야망과 이루고 싶은 바람들의 죽음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권고한다. (p340)
6. 이 책을 잃고 난 후의 느낌과 결론
(1) 귀납법적인 논리전개
루이스의 작품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순전한 기독교’에서 역시 그의 귀납법적인 논리 전개가 매우 독특함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도덕적 원리의 내재라는 실재를 근거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조명하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삶이 무엇인가에 관한 것까지 그야말로 차분하게 기독교를 소개하고 있다. 루이스가 하나님을 소개하는 방법은 매우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개념들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을 뛰어난 문체를 통하여 쉬우면서도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2) 도덕적 자아에 대한 재발견과 자기성찰
루이스는 절대도덕률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함도 밝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주입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루이스의 하나님의 관점에 대한 설명에서 나는 다시금 나 자신의 율법적인 노력들이 얼마나 미미했는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루이스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은 얼마나 지켰는가 보다 얼마나 지키려고 몸부림치며 노력하는가를 보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들이 지금 이대로가 아니라 날마다 변해가기 위해 애쓰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 쳐야 한다면 지금까지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언약을 매우 쉽게 남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부끄러움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은혜언약 아래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기로 했다.
(3) 지성적 사고에 대한 감탄
루이스의 작품을 대하면서 그의 지성적 사고의 넘침이 마치 꿀단지에서 꿀들이 넘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그렇게 사고할 수 있으며, 어디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특히 그가 그리는 인간의 내면은 마치 현미경으로 살펴보기로 하듯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의 솔직한 자아이기도 하였다.
루이스는 그의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기독교 변증가로서 20세기 영미문화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것은 그의 깊은 지성과 통찰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지성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경건의 모습들은 현대의 감각주의에 대해 단호하게 맞서면서 자신을 중세의 철학자로 주장하면서까지 고전의 예스러움에 배어있는 신앙의 뿌리들을 지키고 있다.
(4) 죄에 대한 단호함
루이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경건의 뿌리는 죄에 대한 단호함이다. 특히 인간의 내면에 싹트고 있는 죄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는데, 가장 위험한 죄는 교만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루이스는 일생을 자신을 살피는 것에 최선을 다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루이스가 죄에 대해 단호하게 저항하면서, 자신이 죄에서 떠난 삶을 살기위해 그는 얼마나 몸부림 쳤는지 모른다. 심지어 그는 많은 사람이 평범하게 잠자리에 들 시간에 조차도 하루동안 더욱 사랑하지 않았음으로 괴로워 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그의 경건이 그를 계속해서 죄에 대해 단호하게 말들었으며, 그는 경건의 습관이야말로 가장 적극적인 경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5) 더 알고 싶은 욕구
루이스의 작품을 읽은 사람들의 특징은 더욱 루이스에 대해 알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몇일전 총신대학교 2층 종합관에서 2시간에 걸쳐 진행된 ‘C. S 루이스의 7가지 좋은생각’이란 주제로 박성일 교수(현재 미국 웨스트 민스터 교수이며, 한국인 최초로 C. S 루이스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 취득)의 강연을 들으며, 매우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물론 거기에 나온 많은 학생들이 이미 루이스의 많은 작품을 섭렵했고, 특히 학부 학생들의 수준높은 질문은 더욱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아무튼 루이스의 작품은 읽으면 읽을수록 더 읽고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6) 기독교의 하나됨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주안점을 둔 것은 기독교의 교리를 다루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독교를 통해 기독교를 안믿는 사람들에게 알리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루이스의 기독교적 개념이 교리적으로 옳은가를 따진다는 것은 작품을 읽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시간낭비일 뿐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주된 이유중의 하나가 하나의 기독교 보다는 서로의 신학적 배경과 입장차이만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에 루이스의 하나의 기독교적 관점은 그야말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교단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루이스 역시 하나의 기독교를 주장하지만 교단의 필요성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적어도 하나의 공통분모와 하나의 기독교적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7) 7가지의 선과 악이 가져다 준 의미
루이스는 인간의 7가지의 선과 악의 문제를 고대 철학자들의 사상들로부터 빌어 왔다. 하지만 그는 단지 철학적인 문제에서 접근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서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하였다. 그리고 루이스는 인간의 외면적인 악행보다 인간의 내면에 잔존하는 악의 성품들이 매우 위험한 존재들임을 명시하고 있다. 특히 교만이야말로 기독교인들조차 가장 빠지기 쉬운 위험들이며, 열심 있는 행위가 잘못하면 교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그의 주장들은 인간 심리의 깊은 곳까지 내버려 두지 않고 세심하게 배려해 주고자 하는 그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