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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지금의 강화도가 아니라...
강화도에 대한 역사적 진위논란은 오래전부터 정통학자들간에 문제제기되어 온
부분입니다.
특히 고려(고구려+고려)시대의 강화와 지금의 강화도에 대한 논란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것이 도한 사실입니다.
여기, 그러한 논란을제기하는 다른 논문을 소개합니니다.
글쓴이 : 박아람 님
도대체 강화가 뭔데... 일단 한번 들어가면 잡으러 들어갈 수 없는 곳인가... 갯벌에 푹푹 빠지고, 조수 간만 차가 크고 수상전에 약한 몽고군이라서 그랬다는데... 많이 잡아 1,2년이면 모를까... 39년이나 그렇게 농성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 적어도 1,2년이면... 점령한 대륙에서 특히 송이나 기타 나라에서 수상전에 능한 병사들과 전투선을 소집하여 대규모 공격을 감행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원은 독안에 가둬둔 생쥐 마냥 강화에 가둬 놓고... 항복할 때까지 마냥 기다렸는가요... 혹시나 쳐들어가면 왕족이 모두 자결하지나 않을까 걱정해서 인가요..? 아니면 최대한 예의를 갖췄던 것인가요... ?
강화도 논쟁이확산된 핵심은 일단 고문서나 사서에서 고려의 임금이 피난을 갔으나 대몽항쟁으로 강화 천도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있다면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한반도 중서부 강화도(현재 지명)라는에서 섬에는 당시 5000결을 수확할 수 없었습니다 주변에 하음 진강 해령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지명이 존재하지않습니다 존재했었다는 기록또한없습니다 고려가 송악에서 발원했다고 하여 동경으로 부르고 서경은 평양이라고 하였다는 점 , 위로는 거란과 남으로는 일본이 위치한다는데 세나라가 같은 땅에서 방향을 설명하듯이 했다는 점..(일본이 현재의 일본열도에 있었다면 "바다 건너"라는 표현이 있었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움) 고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하였다고 하면서 장안으로 불렀다고 하는 점.남으로는 패수가 있고, 북으로는 국내성, 한성이 나란히 있었다고 하는 점. 등으로 인하여 강화도설에 대한 의문이 제기 된것입니다
현재 한반도의 강화도에 절터이라도 남아 있습니까?
하지만, 강화도로 추정한 호북성, 그리고 중원 대륙의 팔공산에도 불교 사원과 절터가 다수 존재합니다
부인사(符仁寺)는 예부터 신라 절터였고, 그곳에 사당인 선덕묘(善德廟)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절로 짐작할 뿐입니다
그런데, 선덕 여왕의 무덤이 실제 있는 곳은 바로 호북성이었는데, 그곳도 역시 강화도로 추정된 곳입니다
역으로 선덕여왕의 무덤이 양자강 유역 부근이며, 그 곳에 사로 신라의 주 강역지이라는 점을 보아,
고려는 사로 신라를 취득하였다는 기록을 생각해보면, 호북성이 '강화도'이라는 가능성을 절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강화도의 면적과 거기서 나는 나무 종류를 생각해보면, 적지 않는 모순이 드러나더군요
'팔만대장경' - 경판의 재질은 지금까지 모두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전자현미경으로 조사한 결과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강화도는 기후가 온화하여 남서부에 동백나무·초피나무·비목나무(보얀목)·탕나무 등의 난대림(상록활엽수대(常綠闊葉樹帶))이 자생합니다
그런데, 팔만대장경의 재료는 기구재료로 쓰였던 돌배나무와 같이 낙엽활엽수이며, 낙엽활엽수는 한반도 뿐만 아니라 중원대륙에도 나는 식물입니다
고려 왕계 무덤이 여럿이 세워진 곳은 강화도에 있다고 하였는데, 한반도의 강화도 면적이 비좁은데다, 고려와 연관되는 무덤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복원된 조선식 건물만 덩그라니 있을 뿐입니다
고려사절요 22대 고종 44년 9월 기록
강화전이천결속(江華田二千結屬) 공(共) 속삼천결속(粟三千結屬) 최의가(崔?家) 우이(又以)
하음진강해령지전분급제왕재추(河陰,鎭江,海寧之田分給諸王宰樞) 이하유차(以下有差)
강화의 공공 전답에서 쌀 2000섬, 조 3000섬을 수확했다
또 똑같이 [우이]최의의 가정에서 수확했다
하음, 진강, 해령의 전답에서 [수확물을] 제[후]왕, 재상인 추밀원 그리고 그 이하[사람]에게 차별 있게 나눠줬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우이[又以]라는 글자가 뜻하는 것입니다
우(又)자와 어조사 이(以)자, 그러니까 "또 똑같이란 뜻"을 의미하고, 공공 전답에서 5000섬, 또 똑같이 최의 가정에서 5000섬 합계 1만섬을 수확했다는 말인데, 1만섬을 수확하려면 농지가 얼마나 필요한지 계산해 보십시오
1섬은 20마지기, 1마지기는 200평이므로, 1만섬×20마지기×200평은=4000만평의 농토가 있어야만 1만섬을 수확할 수 있습니다
강화도의 평야 면적이 1500만평이 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시대적으로 간척사업을 한것을 제외 한다면 아마도 1000만평 이라도 될까?하는 의문이 듭니다.
과연 한반도의 강화도에 4000만평의 농토가 있는지 반문합니다
강화(江華) - 국고에 2천결, 최의 가문에 3천결을 두었고, 또 똑같이 하음(河陰)ㆍ진강(鎭江)ㆍ해령(海寧)의 토지를 다른 귀족에게 차등있게 두었다는데, 즉 5천결을 두었고 "또 똑같이(又以)"라고 하였으므로 5천결을 더하여 1만결으로 부과됩니다 고려 시대 당시의 토지 제도는 전시과 제도에 있는 것으로 볼수 있는데, 전시과에는 여러 가지 토지 지목이 있습니다
고려 전기 전시과체제에서의 결부법은 전지의 질에 따른 등급에 관계없이 그 결·부의 면적이 동일하였습니다 즉, 전품의 등급은 상경전(常耕田)을 상등 ; 간년휴경(間年休耕)의 것을 중등 ; 간이년휴경(間二年休耕)의 것을 하등으로 구분하였고, 수전(水田)·한전(旱田) 모두 상·중·하 등의 전품에 따라 수조율(收租率)을 차등 있게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결·부의 면적을 동일하게 책정해둔 채 전품의 등급에 따라 수조율을 달리하는 이러한 제도를 ‘동적이세제(同積異稅制)’라고 합니다 고려 전기 1결의 면적을 지금의 기준으로 환산하면 1천 2백 평 정도이며,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1결당 생산량은 최고 18석에서 10석 정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척관법(尺貫法)으로 환산해 7,260평설(坪說), 6,806평설, 그리고 4,184평설 등 다양한 학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
전시과체제가 무너져가는 고려 후기에 와서 결·부의 법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휴한농법 위주의 전통적인 농경 방식이 상경전으로 점차 바뀜에 따른 토지 생산력의 발전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고려 말기에 제정된 과전법은 그러한 변화된 결부법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이었습니다 이 때의 1결 실제 면적을 척관법으로 환산하면 대략 상등전 1결이 1,846평 ; 중등전 1결이 2,897평 ; 하등전 1결은 4,184평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고려 고종 시기는 고려 후기이므로 척관법으로 적용하고, 부과 대상 여부와 상관없이 1결을 최소한 1천8백4십6평으로 정하여 계산해 보자면.. 그렇다면 1만결을 1천8백4십6평으로 곱하여 계산해보면, 18,460,000평으로 나오며, 즉 1천8백4십6만 평입니다 그러나 과전법은 공양왕 시기부터 시작하였기 때문에 고려 고종 당시 부과법은 전시과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전시과에 따라 척관법 기준으로 정하여 1결을 최소한 4,184평으로 하여 계산해보면, 1만결을 곱하여 4천1백8십4만 평이 됩니다 지금 한반도의 강화도에 고려 당시 부과할 때 최소한의 면적인 4천1백8십4만 평이 있을 수 있는지요?
섬 (석, 石) : 신라 때부터 사용된 '섬'은 새끼로 날줄을 삼고 짚으로 엮어 곡식을 담는데 쓰는 물건입니다 여기에 채워진 양곡의 양이 한 섬입니다 원래는 15말이 한 섬이었지만 후대로 가면서 10말들이의 한 '석(石)'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말하는 섬 또는 석은 실제로 미터법 체계의 '무게'단위입니다 도정(搗精)한 쌀 144kg이 한 섬이고, 보리의 경우는 138kg이 한 섬입니다 그럼 고려때는 이 한섬의 기준은 15~17말이 되었을 겁니다. 과거에 이루어졌던 단위로 생산량을 계산함은 당연한 것이고, 한마지기당 생산량도 오늘날과 동일시한 생산량은 그 자체가 오류입니다. 만약 동일 하다면 과거의 농업기술이 오늘날과 대등하여야 할 겁니다. 일정시절에 농업생산성을 보면; "1918-1920년에 논 1단보(300평)의 연평균 수확량은 0.93섬(167리터)이었다. 이 시기의 토지생산성은, 조선시대의 1말을 5.976리터로 잡고 계산하였을 때, 15세기중엽 4등전의 두 배 정도가 된다.
일제시대에 논 1단보의 연평균 수확고는 1섬 정도까지 증가하였으며, 1960년대이래 토지생산성이 급증하여 오늘날에는 3섬을 넘고 있다. 조선시대 이후에도 토지생산성은 계속 상승하여 왔던 것이다." 여기서 일제시대의 상황을 보면 한마지기 좀 넘는 300평의 규모에서 약 한섬이 덜되는 생산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비록 4등전의 토지를 근거로 평균치를 내었지만 그 4등전의 2배를 일정시절에 생산한 규모 랍니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한마지기(300평)당 반섬꼴이 되겠군요! 물론 4등전 기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화도의 농지 전체가 4등전 혹은 1~2등전이라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결국 조선시대의 농업생산성은 상상 이하라는 결론이 도출 될수도 있다 봅니다.
강화도의 토지는 전부다 농지가 아닐겁니다. 강화도의 땅면적에서 평지가 차지하는 지중은 그리 많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 평지에 농사만 짓는게 아닐것이고,사람의 집도 있을 것이고,관공서도 있을 것이고, 상가,주점등도 있을 것입니다. 강화도의 산악지형과 이러한 사람들이 사는 곳등을 제외하고 순수한 평지의 농지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무조건 산술적인 접근이 능사가 아닙니다. 조선시대의 1결당 평수는 천차만별 이랍니다. "1등급 1결은 2,986.6평이었고, 6등급은 그보다 면적이 4배가 넓어 11,946,4평이었다." 그러면 강화도의 농지는 전부다가 1등전 이었을까요? 이러한 사실들과 일제시대의 농업생산성과 강화도 평지,평야의 토지용도 상의 시대적인 관점에서 생산량을 말한다면 이해할수 있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벼등이 과거 전통의 토종벼를 재배하는 농가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거의 다가 추정미(일명 아끼바리)를 재배하더군요! 과거의 토종보다 생산량이 많으니까.., 그리고 지금의 강화도 면적은 과거의 강화도의 면적과 그 크기가 다를 겁니다. 간척을 활발히 하여 그 면적이 늘어난 사실을 역사적으로 합치해서의 해석은 무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단순히 면적 만으로 농업 생산량을 논한다면 그럼 강화도의 산악과 길가,그외 모든 땅이란 곳은 모두다가 농지란 말입니까? 제가 알기론 간척한 지역 포함해서 순수한 평야의 면적이 1500~2000만평 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평야 지역이야 말로 농지의 적합한 대상지가 아닐까요?
---------------------- (아랫글은 : 윗 글에 대한 보충해설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 임)
그 불과 몇천도 안되는 몽고군이 어떻게 한반도를 쓸었다는 말인가요? 몽고군은 기병입니다 기병이 최대치의 군사력을 발휘할려면 그건 산지가 70%인 한반도안에서는 불가능하죠 그건 평야지대가 많은 대륙동부에 있던 고려여야만이 말이되는것입니다 그리고 강화도 가보셨나요? 그건 제주도와같인 원양에 있는 섬이 아니라, 겨우 근해에서 몇킬로떨어진 섬입니다 분명위에도 말씀드렸듯이 39년동안 버틸만큼 그렇게 자연적인 방비나 요소가 없는곳입니다 다른 근거에서 찾아볼수있듯이 이유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단지 섬이라서 그만큼 버텼다는 그말한마디로 모든것을 음모론으로 치부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은것같습니다 저또한 강화가 섬이라서 39년동안버텼다는 것또한 들었기에 그에 대한 설명도 드렸습니다
대륙이라서 못버텼다는 말또한 그다지 근거라고 내세울만한것이 되질못합니다 숲이 우거지고 산맥이 험한곳에서는 기마병들이 제대로 활동할수없기때문이죠
저는 오히려 수만의 고려군이 한반도에서 수천기의 몽고군을 상대로 산성을 위시해서싸웠는데도 그렇게 밀렸다는 것이 더 이상한데요 수성은 고구려때부터 내려온 우리군의 전매특허아니던가요... 대륙에 있던 고려가 밀리고 숲이울창한 대륙남부로 숨었을 가능성도있습니다 원사에는 한반도까지 몽고군이 왔다는 기록또한없는것으로 아는데요, 10배도 더차이가 났을겁니다 일단 벼의 품종이 달랐고 병충해에 대해 무방이 였고 비료나 농약이 없었으며 곡식을 거두는 과정에서도 지금처럼 탈곡할수없었을거란 생각이듭니다.
일제시대만해도 지금과 엄청난 차이가 나는데 수백년전인 고려시대라면 가히 상상이 안가는군요 그렇다고 농사를 지을 인력과 농기구마저도 부족했을시기입니다.
신라의 왕릉이 중국 본토에서 발견된 바가 있습니다 거서간(居西干)인 혁거세 왕릉지와 선덕왕릉지도 중원대륙에서 발견되었으며, 태조 왕건의 묘를 사천성(四川城) 성도(成都)에서 발견 되었습니다
신라왕릉 31곳, 백제왕릉 32곳, 고려왕릉 34곳이 모두 한반도에 있어야 하지만 불행히 이 모든 왕릉은 흔적도 없습니다 한나라의 왕릉입니다 통일신라시대 경주는 세계7대도시엿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런나라의 왕릉에 비석하나 그리고 명문도 새겨져있지않은 유물들뿐입니다 90%이상의 확신은 어떠한 것을 보고 말하는것인지 근거없습니다.
분명 몽고군이 수상전에 약해서 섬인 강화도로 숨었다고는 하나 바다가 얕고 멀지 않기때문에 차라리 제주도 지역으로 도망갔다면 모를까 말이되질않습니다 그리고 성곽이 있으니 충분히 방어할수있다고 한다면 수많은 산으로 얽혀진 한반도 지역의 수많은 산성을 단시간내에 돌파해서 내려온 몽고군이라면 강화 정도의 성곽은 우스운수준입니다.
그곳에서 사찰을 짓고 궁궐을 짓고 성을 짓고 성곽을 올리고 그리고도 여유가 생겨 지나애들이 최고의 전성기때 만든 대장경을 우리는 피난가서 만들면서 39년동안 호의호식했다니 세계의 미스터리 아닌가요?
강화현은 본래 고구려 혈구군, 일설에 의하면 갑비고차다. (江華縣 本高勾麗穴口郡 一云甲比古次.)해(海-큰 강, 호수, 대륙 역시 海라 곧잘 표현한다) 가운데에 있고, 정주에서 서남으로 직접 간다. 통진현의 서쪽이다. (在海中直貞州之西南 通津縣之西.) 신라 경덕제가 해구군(海口郡-곧 海의 입구라는 뜻)이라 바꾸었고,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新羅 景德王改爲海口郡 高麗初更今名). 고종19년(1232년) 몽고의 군사가 도읍을 침범하여 군(郡)을 승격하여 강도(江都)라 하였다. 고종 37년(1250년)에 성을 쌓았다. 가운데 성(강화의 내성?)은 두루 둘레가 2,960여 칸(대략 사방 5.6Km)이다.
(高宗十九年避蒙古兵入都 陞爲郡號江都 三十七年築 中城周回二千九百六十餘*閒) 『高麗史』地理 최우가 2천명의 군사를 보내어 강화(江華)에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 (瑀 發二領軍 始營宮闕于 江華) 가을 7월 을유일 왕이 개경을 출발하여 승천부로 갔고, 병술일(곧 그 다음날)에 강화도의 객관(=여관)에 입어(入御-들어갔다.)하였다. (秋七月..乙酉王發開京,次于昇天府,丙戌入御江華客館)『高麗史節要』卷之十六 高宗安孝大王 (1232)
갑오21년(1234년)여러 도의 장정들을 징발하여 궁궐과 백사(百司)를 짓게 하였다.(甲午二十一年..徵諸道民丁,營宮闕及百司) 2월에..연등하러 고려제왕이 봉은사(奉恩寺)로 갔다. 본래 참정 차척의 집을 봉은사로 삼고, 민가를 헐어 손수레가(輦)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넓히었다. 천도할 때 였지만 풀이 무성하였다. 대체로 구정(毬庭-둥근 뜰)과 궁전과 사찰(寺社)의 이름을 다 송도(=개경)를 본떴고, 팔관(八關)ㆍ연등ㆍ행향(行香)ㆍ도량(道場)은 한결같이 옛 의식에 의거하기로 하였다.(二月..燃燈,王,如奉恩寺,以故參政車倜家,爲奉恩寺,撤民家以廣輦路,時雖遷都草創,然凡毬庭宮殿寺社,號,皆擬松都,八關燃燈行香道場,一依舊式)
『高麗史節要』卷之十六 高宗安孝大王 가을 윤 7월 몽고병이 안변도호부를 침범하여 전후좌우 군의 진주(陳主-군사기지의 우두머리) 지병마사에게 명하여 연강(沿江-강의 연변)을 방어하게 하고 또 령을 내려 광주와 남경의 사람들을 합하여 강화로 들어갔다. 8월 일관이 아뢰어 백관에게 영을 내려 전쟁 승리를 태양(日)에 기원하였다. (秋閏七月,蒙古兵,侵安邊都護府。命前後左右軍,陣主,知兵馬事,沿江防戍,又令廣州,南京,合入江華。八月日官奏令百官,拜日禳兵)。『高麗史節要』高宗安孝大王 乙未二十二年(1235년)
고종 9년(1222년)성을 쌓았는데 의주(宜州) 화주(和州) 철관(鐵關)의 (성이) 무릇 40년(四旬)을 쌓아 마쳤다. 고종 20년(1233년)엔 강화에 외성을 쌓았고, 고종 37년(1250년) 처음으로 강도(=강화)의 가운데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두루 2960여 칸이고, 크고 작은 문이 무릇 17곳이다. 고종 38년(1251년) 금주에 성을 쌓아 이로써 왜구의 침략을 방비하였다. (高宗九年城 宜州和州鐵關 凡四旬而畢. 二十年築江華外城. 三十七年 始築江都中城 周回二千九百六十餘*閒大小門凡十七. 三十八年城金州以備倭寇)『高麗史』兵二 城堡 ...의주 화주 철관은 강화에 포괄되어 있는 성으로 추정.
현재 포대는 최초로 이조시대때 지어진것을 확인 됨.(강화조약 전)
첫댓글 한반도의 강화도는 력사에서 말하는 강화도가 아님니다. 생각해보십시다. 한반도 강화도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서 썰물때 뻘이 드러납니다. 즉 육지와 연결되는 땅이 생긴다는것이죠, 그럼 마르는데 한시간잡고 글고 말타고 진격하면 께임끝이죠. 그래서 한반도 강화도는 어디를봐도 거짓이라 보는것이죠. 고려사를 알수있는 "고려사절요"는 일제때 통째로 다시쓰여진 고서입니다. 한자로된 원본을 보면 활자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눈에 보입니다. 인쇄술이 발달한 고려시대에 정부에서 고려황조실록을 손글씨체로 기록할 리가 없는것은 너무나 당연한겁니다. 또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참조해보면확실히알수있습니다.
일 때문에 김포 강화를 자주 갑니다.
섬이라고 말하기 힘든 구조죠 그정도 거리면 몇백명이 부교를 놓고도 건널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 거리를 어떻게 30여 년이나 지키고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실록에서 설명하는 강화도는 지금
강화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전에 한참 글이 올라왔었는데 그 설명이 절때로 한반도 강화도는 아니죠.
모든 지명상 고지도로도 가장 강력한 강화도의 후보지는...현 양자강하류 강소성입니다.
강도(江都)...진강(鎭江)등등의 강화도 지명이 다 거기 모였습니다.
그런데 어쩜 그거도 동으로 옮겨진 지명일 수도 있단 가능성도 열어놔야겠단 생각입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반도의 강화도는 역사서에 기록된 '강화'가 절대로 될 수 없는 지형지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카페에서는 지명 하나 하나에 대한 것들은 대략 변경과 강역 위주로 추적을 해 왔는데, 앞으로는 내부의 지명으로도 확대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위 본문 글에 나오는 "안변도호부"에 대한 지리적 위치는 지금 글을 작성중인데, 이곳은 북쪽으로 사새 3천리와 연이어져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이 고증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여러가지 고증으로 보면, 반도에 있는 역사적 지명은 거의 대륙의 본래 지명이 이동되어 정착된 것으로 판단되며, 이것은 진실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북삼성에 살고있는 조선족에게도 청의 발원지는 외몽골로 교육시키고 있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만 교육을.....
참으로 훈련과 교육의 차이가 반복의 정도라 하는데, 우리는 과연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훈련을 받고있는 것인지? 아리송 합니다
저는 식물(작물)에 관하여 관심을 두고 있는지라....
어렵게 벵갈에서 공수한 종자가 있는데, 이름이 라우입니다.
그런데 베트남에서는 미라우라 부릅니다.
지역이야 거기서 거기 겠지만, 누가 주인인지는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