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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를 수행자가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고 강조하는 승원 스님은 매년 절살림의 대부분을 불우 이웃을 위한 후원금으로 내고 있다.
‘여기서부터 350m’. 담이 낮은 소박한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부산 서대신동의 산복도로. 한 사람이 지나다닐 좁은 골목에 사찰 진입로를 알리는 안내문이 쓰여 있었다. 차가 아닌 두 다리로 걸어 올라야만 도착한다는 표시였다. 크고 작은 사찰을 막론하고 산문을 넘어서까지 차량 진입이 허용되는 요즘, 걸어서 산사에 오른다는 일이 새삼 운치로 먼저 와 닿는다.
그래서일까. 비좁은 골목을 지나 암자로 향하는 마음이 불편하다기보다는 마냥 상쾌했다. 오밀조밀 모여 있는 많은 가옥들. 이 지역 많은 사람들이 그 동안 얼마나 두 다리에 의지해 생활을 해왔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사하촌의 살림살이를 물심양면 후원하고 있는 스님이 바로 저 안내문이 가리키는 수도암 주지 승원 스님이다.
담과 담 사이를 잇는 골목길과 밭들을 지나자 숲으로 이어진 작은 오솔길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다시 능선을 따라 둘러 오르는 산길로 이어졌다. 15분 쯤 걸었을까. 알싸한 겨울나무의 향기가 머릿속 번뇌를 싹싹 쓸어내고 있다고 알아차릴 즈음, 큰 절벽 아래 소박한 산문이 한 눈에 들어왔다. 잠시 숨을 돌리며 걸어 오른 길과 어느새 깨알 같아진 집들을 바라보고 있을 즈음, 등 뒤에서 승원 스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승가원 등 매년 열 곳에 후원
“저기 내려다보이는 집들 가운데 상당수가 무허가 건물입니다. 허가된 곳이라 해도 가족과 떨어져 사는 독거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죠. 우리 암자가 조금이라도 힘이 돼줘야 할텐데.”
깊은 산중에 자리 잡은 수도암은 법당에 20명만 앉아도 빼곡할 만큼 소박하고 작은 도량이다. 하지만 규모에 비해 그 역할은 결코 작지 않다. 스님이 주지를 맡은 지난 2년 동안 열댓 명 남짓하던 정기법회 동참자가 70명을 훌쩍 넘어섰고 후원회원도 무려 700명을 웃돈다. 절을 찾는 신도 대부분이 지역 주민이라는 게 스님의 설명이다.
이들이 산길을 한참 걸어 올라야 하는 수도암에 모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수도암에 승원 스님이 있기 때문이다. 스님이 수도암에 상주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8년부터다. 절마당까지 차량이 드나드는 시대지만 스님은 오히려 걸어 오른다는 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주변에서 포교 원력을 세웠다는 스님이 산중 깊숙한 절을 찾아 들어갔으니 포교를 아예 접은 것 아니냐는 얘기들도 들여오곤 했다.
“여기는 주변이 기암절벽으로 둘러져 있고 작은 굴도 곳곳에 있어요. 그러다보니 무속인들의 발길이 더 많았던 게 사실입니다. 새벽까지 굿판을 벌이고 쓰레기들을 그대로 펼쳐놓고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했어요. 따라서 도량 주변을 청정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죠. 매일 새벽, 사시, 저녁 예불을 하루도 빠지지 않았고, 아침이면 굿판을 벌였던 공간을 말씀하게 청소했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무속인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암자에 향내음이 스미기 시작한 것 같아요.”
▲차를 타고 쉽게 오를 수 있는 여느 사찰과 달리 수도암은 오로지 산길을 따라 도보로만 찾을 수 있다.
도량이 조금씩 자리를 되찾은 뒤 스님은 수도암 신도로 등록된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불자들에게 매주 월요일마다 ‘법구경’ 게송 하나를 문자메시지로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 스님의 문자를 확인도 않던 불자들이 점점 월요일의 문자를 기다릴 만큼 호응이 높아갔다. 물론 그렇다고 문자로만 끝낸 것은 아니다. 정기법회 때면 항상 그 문자메시지에 실린 게송과 관련해 법문을 함으로써 그들이 자연스럽게 불교 공부로 이어지게끔 유도했다. 이렇게 불자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이면서 스님은 ‘천수경’, ‘예불문’, ‘반야심경’, 108배 등 모든 의식을 한글화했다. 처음에는 한 구절도 제대로 읽지 못하던 노보살님들도 한 해가 지나자 한글의식을 유창하게 따라하기 시작했다.
불자들의 예경과 신행이 무르익으면서 자연스럽게 동반된 것은 나눔이다. 그리고 그 회향처는 항상 어렵고 힘든 지역 주민들이었다. 설, 추석 등 명절 때마다, 또 곤경에 처했다는 소식이 전해오는 단체나 개인과 연결될 때마다 항상 수도암이 위치한 부산 서구 서대신3동 동사무소를 찾아 후원금을 전달했다. 여기에 생명나눔실천본부, 승가원 등 스님이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단체 10여곳을 포함하면 한 해 대중에게 회향하는 금액은 500만원이 넘는다. 큰절이야 적은 돈일지 모르지만 작은 암자로서는 1년 살림살이에 육박하는 엄청난 액수다.
“작은 사찰을 운영하면서도 어떻게 여러 곳에 꾸준히 보시를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럴 때면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씀드립니다. 하나가 있으면 하나를 나누면 되고, 열이 있으면 열을 나누면 됩니다. 대승불교 수행자가 지녀야 할 실천덕목인 육바라밀에서도 보시가 제일 처음에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성실하게 나누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힘이 모인다면 더 큰 회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고요.”
승원 스님과 일본불교사연구소와의 인연도 나눔에서 비롯됐다. 지난 1985년 순수 봉사단체인 경주 ‘부처님마을’에서 활동을 시작한 스님은 그 무렵 유독 대화가 통하고 뜻이 맞던 김호성 동국대 교수와 인연을 맺었다. 그렇게 김 교수가 지난 2008년 ‘일본불교사연구소’를 개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님은 일본 강좌 기행에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동참했다. 이 같은 인연이 확대돼 지난해 초에는 스님이 연구소의 부설 기관인 한일문화교류아카데미의 초대 교장도 기꺼이 맡았다. 물론 스님은 연구소에서 공부 중인 장학생에 대한 후원도 아끼지 않았다.
한일 문화교류에 참여하면서 얻은 결실이 또 있다면 근래 다시 발간된 ‘겨울의 유산’이다. 김 교수가 당시 절판된 이 책 제본을 구해 승원 스님에게 건넸고 스님 역시 책을 읽으며 7세 어린 나이에 통영 안정사에서 동진 출가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했다. 스님은 그 감회를 다시 불자들과 나누었고 그 얘기를 접한 한 신도가 책의 재발간 비용을 선뜻 보시하면서 그 책이 다시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욕심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스님이지만 나누는 데는 누구보다 적극적이다. 은사 고산 스님을 모시고 한창 불사에 매진했지만 마무리 짓지 못했다는 자책이 항상 따라다녔던 부산 혜원정사 주지 시절에도 한 가지 잘 한 일을 꼽으라면 연산초등학교와 중학교 졸업식 때마다 장학금을 지급한 일이었다. 그 장학회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사찰과 학교의 대표적인 결연 사례로까지 꼽히고 있다.
“보시, 수행자 갖춰야 할 으뜸 덕목”
워낙 잦은 선행이 알려지다보니 이제 지역 복지단체 관계자들은 시간만 나면 스님을 찾아올 정도다. 그런 탓에 웬만한 일은 주변 불자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불자들에게 보내는 생일 카드만큼은 지금도 스님이 꼼꼼히 챙긴다. 생일 글을 직접 작성하면서 불자들과 소통하고, 결국 불교라는 큰 틀의 가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법구경’ 게송 가운데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취나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난다는 말씀이 있어요. 불교는 어느 날 하루 하침에 와 닿아서 깨달음의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접하고 기도하면서 훈습되는 것이죠.”
승원 스님이 든 수행과 나눔의 향기. 그것은 지역 주민들의 마음에 차곡차곡 스며들어 어느새 법향을 발하는 ‘붓다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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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beopbo.com/news/view.html?section=93&category=97&no=64118
첫댓글 하나 있으면 하나 나누고 열이 있으면 열을 나누면 보시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스님 말씀 감사합니다.
스님께서 일본불교사연구소 회의 참석하시느라 서울 도착하셔서 회의 끝나면 밤차로 바로 내려가시던 뒷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기차 타시는 것도 힘들지만 밤에 도착하시면 수도암 올라 가시기가 무척 힘드실텐데요...(사진으로 수도암 입구를 보니 바위가 많은 산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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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향기로운 승원스님의 모습이 보시정신에서 나오는 것이었군요. 아름다운 인연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_()_
좋은 기사입니다. 이런 소식 알려주시어 감사드리고요. 승원교장스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또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스님, 축하드립니다. 실린 것은 타이완에서 봤는데, 빌린 노트북이라서 읽지를 못했습니다. 그동안처럼 앞으로도 지역사회에서 포교와 보시활동으로, 새로운 스님의 모델, 새로운 사찰의 모델을 만들어 주시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교장 스님을 뵈니까 그리워지네요. 수도암은 저에게 있어 그야말로 쇼크였습니다. 낙산사같은 곳만 보던 저에게 정성들여 하나하나 가꾸어가는 진정한'도량'이라는 느낌을 수도암에서 받았거든요 ^.^ 승원스님 뵙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