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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사명대사 호국 광장, 정유왜란 전란 전후 유정 행적을 살피다
문배샘 추천 0 조회 10 13.06.24 14: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사명대사 호국 광장, 정유왜란 전란 전후 유정 행적을 살피다

 

 

부산 초읍 성지곡 유원지 측백숲림 안에 외곽 성곽 안에 세워진 사명대사 호국광장 속으로 들어가 본다. 2010년 5월26일 부산광역시에서 국민들의 호국심 발현을 위해 조성한 광장이다.

 

모전 벽돌로 조성한 깨끗한 성곽 외관이 발길을 끌어 오린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양 옆에 사천왕 역사상이 수호법신으로 겁

나게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마치 사찰로 들어선 느낌을 받았다. 오른쪽 유정 사명대사 충의비각이 세워져 있다. 비각 뒷면에 새겨진 각자를 읽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조선시대 부산포 첨사가 사명대사가 일본으로 가 교토 후시미 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만나 강화를 맺고 왜란 때 잡혀간 조선포로 3천5백명을 부산포로 데려 온 업적을 기리고 있다.

 

 광장 가운데 화강석기단 위에 당당한 위엄으로 오른손에 석장을 짚고 선 홍제존자 사명대사가 우뚝하게 우릴 내려 보고 있다. 아니 부산포를 내려보고 있다. 그 염력은 대마도를 지나 일본 열도를 장악하고 있었다. 일제시대 이후 왜 침탈을 허용 할 수 없다는 기세로 내려다 보고 있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일본, 중국까지 굴복시킬 국운에 들어 섰다는 조짐들이 세계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위대한 국가, 지혜로운 국민이 대한국민이라고 홍제존자는 말하고 있었다.   

사명대사는 어떤 인물이었나 (위키백과 자료:참조)  

임진왜란 이전

경남 밀양에서 임수성(任守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읜 사명당은 13세에 황여헌(黃汝獻)을 사사(師事)하다가 황악산 직시사에 들어가 신묵화상(信默和尙)에게 선(禪)을 받아 승려가 되었고, 거기에서 불교의 오의(奧義)를 깨달았다.

 

1561년 (명종 16) 선과(禪科)에 급제하고 당시의 학자·대부·시인들이었던 박사암(朴思菴)·허하곡(許荷谷)·임백호(林白湖) 등과 교제하였다. 1575년(선조 8) 선종(禪宗)의 주지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청허(淸虛)대사(서산대사)에게서 성종(成宗)을 강의 받고 크게 각성하였다.

 

금강산 보덕사(報德寺)에서 3년을 지내고, 다시 팔공산·청량산·태백산 등을 유람했으며, 43세 때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菴)에서 하룻밤 소나기에 뜰에 떨어진 꽃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문도들을 해산시킨 다음 오랫동안 참선하였으며, 46세에 오대산 영감란야(靈鑑蘭若)에 있다가 역옥에 죄 없이 걸렸으나 무죄 석방되어 금강산에서 3년 동안 지냈다.

임진왜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의병을 모집하여 순안에 가서 청허의 휘하에 활약하였고 청허가 늙어서 물러난 뒤 승군(僧軍)을 통솔하고 체찰사 유성룡을 따라 명나라 장수들과 협력하여 평양을 회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함께 경상도 의령에 내려가 전공을 많이 세워 당상(堂上)에 올랐다. 1594년에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하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울산 진중으로 세 번 방문하여 일본군의 동정을 살폈다. 왕의 퇴속(退俗) 권유를 거부하고, 영남에 내려가 팔공(八公)·용기(龍起)·금오(金烏) 등의 산성을 쌓고 양식과 무기를 저축한 후 인신(印信)과 전마(戰馬)를 바치고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왜성에 쳐들어갔으며, 이듬해 명나라 장수 유정을 따라 순천왜성에 이르러 공을 세워 가선동지중추부사(架善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임진왜란 이후

1604년(선조 37)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교토 후시미 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가 되어 갔던 사람 3천 5백 명을 데리고 이듬해 돌아와 가의(嘉義)의 직위와 어마(御馬) 등을 하사받았다. 그때는 청허가 입적한 이듬해로 묘향산에 들어가서 스승의 영탑에 애하고 치악산으로 들어갔다.

선조의 부보를 듣고 한양으로 달려와 배곡한 후 광해군의 서변을 지키게 하려 하였으나 병을 얻어 응하지 못하고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사망했다.

 

모전 벽돌 성벽 외관

전란 후 도쿄에 가서 조선포로 3천5백명을 데리고 부산포로 돌아 왔다.

홍제존자 동상(사명대사 동상)

 

광장으로 오르면 양쪽 사천 역사상이 불법을 수호하고 있다

유정 사명대사 충의비각

 

더 이상 일본의 침략은 없을 것이라고 대사는 석장을 짚고 묵언으로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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