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배에서 말씀과 함께 하는 찬송에 대하여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4권 10장에서 그릇된 예배의 세 가지 유형을 소개하였습니다. (1) 첫째는 사람의 생각을 가르치는 예배인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계명을 가르치는 예배(마 15:9; 사 29:13-14)요,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가르치는 예배(골 2:4-8)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실질적으로 그 시대의 정신과 민족적 전통, 또는 교파적 전통(장로의 유전) 등등의 인간의 생각을 가르치는 왜곡된 예배입니다. (2) 둘째는 바리새인의 예배입니다. 칼빈은 ‘바리새인의 누룩’(마 16:6; 23:3)을 조심하라고 경계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율법의 해석자인 모세의 자리에 앉아 권위를 주장하면서 무리한 실천을 강요하고, 스스로는 본을 보이지 않으면서 단지 지식만 팔고 있는 삯꾼이 인도하는 예배에 대해 바리새인의 예배라고 규정합니다. (3) 셋째는 연극적인 예배입니다. 분위기와 의식은 우아하고 화려하며 음악과 설교는 장엄한 듯이 보이지만, 인도자는 연극배우와 같은 연기에만 치중함에 따라 신의식과 경외심이 결여되어 있고, 순전히 인간의 기분과 평가에만 초점을 맞추는 소위 ‘멋있는 예배’, ‘좋아 보이는 예배’, ‘재밌는 예배’, ‘흥미 있고 관심 가는 예배’입니다. 이러한 예배에 의해서 교인들은 예배를 즐기기만 할 뿐으로, 하나님께 대한 진지한 경외심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정열적이고 감성적인 예배이지만, 연극을 관람하거나 음악회에 참석하거나 감동적인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또는 훌륭한 강의를 듣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특히 현대에 들어와 이런 유의 연극적 예배는 주로 ‘찬양과 경배’라는 이름하에 진행되는데, 사실상 찬송이 거의 인간의 음악적 즐거움을 위한 쇼와 마찬가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배의 핵심은 설교입니다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찬양입니다. 찬양은 찬미, 또는 찬송이라는 용어로도 쓰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서는 예배에서 부르는 노래는 찬양이라는 용어보다는 찬송이라는 용어로 주로 쓰이는가 하면, 성도가 개인으로나 또는 그룹으로나 또는 단체로나 예배 외의 곳에서 부르는 노래는 주로 찬양이라는 용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반면에 찬미라는 말은 아주 드물게 쓰는 실정입니다. 여기에서는 찬양, 찬미라는 용어보다는 찬송이라는 용어로 사용하겠습니다.
예배에서는 설교와 함께 찬송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찬송으로 불리는 노래, 곧 음악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사람은 말을 구사하는 것에만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 목소리로 노래도 부르며, 목소리를 악기처럼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배에서 찬송이 차지하는 자리는 말씀과 함께 기도를 하며, 말씀과 함께 성례를 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과 함께 찬송을 부름에 있습니다. 말씀에 의해서 죄 용서를 구함의 기도에 있으며, 말씀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몸의 참여의 실질에 있으며, 말씀에 의해서 주께 가진 신앙의 고백을 노래로 표현합니다.
그러한 것에서 찬송을 칼빈은 찬송을 기도와 같이 보았습니다. 그에 따라서 칼빈은 말하기를 “공적 기도의 형식 중에는 시편 찬송을 하는 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편을 보면 칼빈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데, 시편은 운율을 가진 노래인 찬송으로서, 시편은 고대 이스라엘에게서는 찬송가였습니다. 150개의 노래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하여 그들의 온갖 삶의 경험들 속에서 여호와이신 하나님께로 돌이켰는지를 잘 보여준다. 시편은 눈물어린 탄식으로부터 기쁨의 외침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구약 신자들의 다양한 감정들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모든 시대의 하나님 백성에게서 시편은 그들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격려하고 도와주는 다양한 양식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베스터만(Westermann)은 시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시편은 처음에 여러 종류의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기도와 노래로 사용되었고 말로써 전달되었다.” 우리가 시편 51편에서 보는 시는 이것이 ‘다윗이 지은 노래’라고 되어 있으며, 시제가 1절에 있기를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시편은 찬송으로 부르는 노래인데, 이 시의 노래를 ‘다윗의 참회 기도’라고 하고 있습니다. 시편은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함에 있는 기도요 찬송이었습니다.
1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죄악을 지워 주소서. 2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하소서 3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7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9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8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시편 72편은 ‘솔로몬의 시’라고 되어 있으면서 마지막 절에서는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시 72:20) 라고 되어 있습니다.1) 시편의 본성은 기도로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수많은 기도들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구원의 장엄한 역사가 높여 찬송되고 있으며, 죄의 고백과 용서를 구하며, 탄원하는 기도가 노래를 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칼빈은 시편 주석의 서문에서 “우리는 시편에서 영원한 구원의 지식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이 죄인에 대한 구속과 죄인인 우리와의 화해를 위한 전적인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하나님의 돌보심이 더욱 더 증가되고 확대되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서 칼빈은 제네바에서 첫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제네바교회 조직과 예배에 관한 제안서’를 제출하는 것을 통하여 모든 교회들이 예배에서 ‘시편을 찬송할 것’을 의회에 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찬송의 개혁 정신은 최초의 세계적 개혁교회 총회인 돌트 회의에서 그대로 이어져 1618-19년에 개최된 돌트 총회는 교회질서를 통하여 시편 150편만이 교회 안에서의 유일한 찬송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제69조).
이는 종교개혁 이전에까지 있어온 중세교회가 보여 온 예배 음악에 대한 개혁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의 교회는 예배에서 시편 찬송이 불리지 않고 소위 성가대(聖歌隊)라는 것을 운영하여 회중을 대표하여 합창하는 순서를 가져옴으로써 음악성과 함께 노래를 잘하는 재능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공연되는 모양이 되고 회중은 예배 음악을 들음으로써 음악성을 감상하는 것으로 흘러옴으로써 회중의 찬송은 철저하게 제외되어 왔었기 때문에 회중은 찬송에 침묵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이와 같은 특정인 중심의 찬송에 있는 예배 찬송을 개혁함으로써 특정인으로 구성된 성가대만이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성도들 모두가 자신들의 마음으로 나오는 입으로 하나님을 높여 찬양하게 하였습니다.2) 이러한 역사적 유산 속에서 개혁된 교회는 공적 예배시에 모든 성도들이 함께 찬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개혁된 교회의 예배의 특성의 하나는 찬송을 부르되 주로 시편 찬송을 부름에 있는 것입니다. 개혁된 교회는 시편으로 찬송하는 것을 가장 성경적인 찬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에 따라 시편 찬송가를 자작하여 전체 150편을 다 부르고 있는데, 이러한 전통은 일찍이 제네바교회에서 도입한 예배 찬송에 따릅니다. 이를 제네바 시편 찬송(the Genevan Psalter)이라 부릅니다. 개혁된 교회는 이 시편 찬송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언약의 노래로 확정하여 큰 가치를 부여합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목회하면서 시편 찬송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완전한 시편 찬송이 출판된 것은 그의 생애가 거의 만년에 이른 1562년이었습니다. 성경의 시편은 예배 찬송에 사용하기에 적격인 노래이지만, 무엇보다도 가사가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혁된 교회는 어떤 유명한 신자 시인 또는 작사자가 지은 찬송이라 할지라도 이 시편 찬송에는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고 판단합니다.
그에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 예배와 안식일’의 5항에서 “……마음에 은혜로 시편을 노래하는 것(골 3:16; 엡 5:19; 약 5:13)과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성례를 합당하게 시행하고 값있게 받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통상적인 종교적 예배의 모든 요소들이다(마 28:19; 고전 11:23-29; 행 2:42)……”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예배 시에 ‘시편으로 찬송하라’고 명확하게 규정했습니다.
여기서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작성한 ‘예배 모범’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공적으로 찬송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회중에서 함께 또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시편을 찬송해야 한다. 시편을 찬송하는 데 있어서 목소리는 곡조에 맞게 엄숙하게 내야 한다. 그러나 제일 조심할 것은 가사를 이해하면서, 마음에 은혜를 품고, 주님께 노래를 올리는 것이어야 한다. 온 회중이 다 함께 불러야 하므로 읽을 수 있는 자는 다 시편 찬송가를 가질 것이요, 다른 사람들도 나이나 다른 조건으로 불능이 되지 않는 한 읽는 법을 비유라고 권면해야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부천개혁교회는 예배 시에 시편 찬송가를 사용하여 불러야 할 것을 이제는 판단을 가지고 결정해 나갈 시점에 있어야 합니다. 현재의 교단에서 사용하는 통일찬송가로는 예배 시에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스비다. 대부분의 많은 곡들이 복음송의 성격으로 불리는 것인 데다가 찬송가를 작사하고 작곡하는 분들에 의해서 예배 시에 부를 찬송곡으로 만든 것이라고 할지라도 성경적이며 신앙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는 찬송곡은 소수의 곡에 불과하고 비성경적이며 비신앙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이 허다한 상황에서 매주일 예배 시에 불릴 성경적이며 신앙적으로 올바르게 부를 찬송을 선택할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편, 개혁교회는 예배 시에 시편 찬송가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찬송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성가대를 배제하고 전체 성도가 아카펠라(a cappella, 무반주 합창) 형식으로 찬송하여 왔습니다. 이는 악기의 연주에 회중의 찬송이 맞춰 따라가며 휩쓸림에 있지 않고 오로지 시편의 말씀에 집중하여 찬송함에 있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따라가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나, 악기 연주를 사용하여 찬송할지라도 시편 찬송을 부름에 있는 목적에 따라 올바른 찬송에 있어야겠습니다. (*)
.....................................
1) 150편으로 되어 있는 시편의 맛소라 본문들은 시 1-41편, 42-72편, 73-89편, 90-106편, 107-150편에 의한 다섯 권의 주요 책들로 구성되었다. 이중 두 번째 권인 42-72편은 주로 다윗이 지은 시와 관련된 것으로, 솔로몬의 두 시(42편, 127편) 중에서 한 시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어 다윗의 시로 돌려지고 있다.
2) 교회에 성가대가 있어야 하거나 또는 없어야 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거나 원칙인 것은 아니다. 찬송에 있는 노래를 부름에 있고, 그것에 의한 음악의 활용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예배에서의 찬송과 관련해서는 성가대 도입을 억제하는 편에 서 왔다. 그에 대한 중요한 이유로 성가대의 폐해인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1) 첫째, 성가대의 찬양으로 회중이 함께 찬송하는 빈도가 줄어지는 위험이 있다. (2) 둘째, 성가대가 교리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수전 이하의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곡이 참신하고 정서적으로 매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예배에 도입하기 쉬운 위험이 있다. (3) 셋째, 세상적으로 유명한 독창가나 성가대를 운영할 경우 예배에서 회중이 일종의 관람자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교회당으로 오기 보다는 단지 수준 높은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서 오기도 한다. (4) 넷째, 성가대의 질을 높이려는 욕심에 이끌려 신앙적으로 합당하지 못한 사람을 채용할 위험이 있다. 실제로 어떤 교회들은 공식적으로 급료를 지불하면서까지 지휘자나 성악가 및 악기 연주자들을 기용하는 실정이다. 이런 모습은 중세의 타락한 교회로 다시 돌아감에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본 글은 주언개혁교회(장수민목사 시무)의 안내서인 '주언개혁교회(Guide Book for the Life of Jooeon Reformed Church)'에 의해서 허락을 받아 작성된 것으로, 글 내용과 전개에 도움을 받으면서 부천개혁교회에 보충, 보완이 필요한 부분을 임의로 더하였음을 밝힙니다.
*본 글의 복사를 금하며, 타까페나 블로그로 글을 옮기는 것 또한 금합니다. 이는 본 글의 원문 글 주인이 본 까페가 아니어서 허락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아멘